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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6-12-29 20:53
금산ㄱ자 교회에 얽힌 이야기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4,322  


▶금산ㄱ자 교회에 얽힌 이야기◀
미륵불교의 본산이자 증산교의 발생지인 모악산 기슭 김제 금산(팟정이) 마을에서 1905년 10월 11일 집주인 조덕삼과 머슴(마부) 이자익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 이곳에 이 두 사람이 합심하여 1908년에 세운 27평짜리 금산ㄱ자 예배당이 전북 문화재 자료 136호로 지정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소학교도 변변히 다니지 못한 머슴 이자익과 주인 조덕삼이 한날한시에 세례 받고, 같이 성만찬에 참여하고, 같이 교회창립멤버가 되고, 같이 교회를 세워갔던 것이다.
그리고 1907년에는 두 사람이 함께 교회의 영수(집사급 지도자)로 임명되었고, 교회를 건축하고 난 다음 해인 1909년에 장로를 선출하는 투표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때 교인들과 마을사람들은 당연히 조덕삼 영수가 먼저 장로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는 너무 뜻밖이었다. 마을의 지주였던 조덕삼 영수를 제치고 그의 마부 이자익 영수가 장로로 추천된 것이다. 반상의 신분을 철저히 따지던 시대에 이것은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날 것은 뻔했다. 이에 조덕삼 영수는 그 자리에서 발언권을 얻고 교인들에게 인사를 하였다.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나는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금산교회 교인들은 조덕삼 영수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실제로 조덕삼 영수는 약속대로 이자익 장로를 잘 섬겼다. 당시는 교역자들이 부족한 때라서 이자익 장로가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는 일이 많았다. 그때에도 조덕삼 영수는 앞자리에 앉아 겸손하게 예배하며 이자익 장로의 설교에 집중하였다. 집에 돌아와서는 주인과 종의 관계로, 교회에 가서는 반대로 장로와 영수의 관계로 서로를 향한 자신들의 직분에 충성하였다. 교인들 뿐 아니라, 마을사람들은 조덕삼 장로의 이런 모습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조덕삼은 자신보다 아홉 살이나 어리고, 자기 집의 종인 이자익이 초대 장로로 선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금산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해 내려왔을 때에도 그를 당회장 목사로 정중히 모셨다. 조덕삼 장로는 주일대사와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세형 장로의 할아버지이다.
이후 마부 이자익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게 되고, 조선야소교장로회 총회장을 세 번 역임했을 뿐 아니라, 장로교(통합) 노회장을 수차례 지냈으며, 20여개 교회를 설립하였다. 말년에는 대전시 오정동에 교회와 신학교를 세우고, 대전노회를 신설하여 대전신학교 초대교장, 대전노회 초대 노회장, 오정교회 초대당회장을 역임하였다.
이자익 목사는 큰 교회의 청빙을 거절하고 작고 연약한 시골교회를 지켰던 농촌목회자였으며, 입각(入閣)을 권유하는 친구 목사 함태영 부통령의 제의를 거절하고, 목회자로 종신할 것을 선언했던 투철한 소명의식을 가진 목사였으며, 신사참배에 가담하지 않고 창씨개명에도 불참했던 지도자였으며, 정치흥정에 흔들림 없이 교회헌법과 회의규칙에 정통한 깨끗한 교회정치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