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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4-06-15 16:12
바울과 아볼로
 글쓴이 : 구재천
조회 : 7,035  

 본 논문은 고린도전서 세미나 시간에 발제한 것이니 고린도서신을 새롭게  읽으려는 최근의 커(D. P.  Ker)의 논문과 우상숭배의 위험성 이 두 논문이 설교에 많은 참고가 되길 바랍니다.( 설교에는 별로 도움이 않되겠죠 )

 
 
바울과 아볼로- 동료인가 경쟁자인가?
Paul and Apolos-colleagus or rivals

Donald P. Ker. JSNT77(2000) 75-97

바울이 고린도 회중들에게 아볼로를 언급할 때, 고린도인들이 진정으로 듣기를 원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본문을 수평적인 면에서 읽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 바울과 아볼로는 하나님 앞에서 함께 사역하는 동료들이다. 고린도인들은 .어리석게도 파당심에 굴복 하였고 서도 다른 그룹들 가운데 이 둘에 바울과 아볼로라는 이름을 부쳤다. 일치를 호소함에 있어서, 바울은 고리도전서 끝에, 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했고, 그는 다시 아볼로로 하여금 고린도에 방문해 주기를 원했다고 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친밀감을 가져야 했지만 그러나 다른 가능성도 있다. N.A. Dahl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 12절에서 대략적으로 설명한 고린도인들의 분열을 언급하면서, 간결하게 표현한다. 「나는 바울에게 속한다고 말하는 자들은 그를 자랑으로 여기고, 그가 아볼로나 게바보다 더 능력이 출중하다는 입장을 주장한다. 다른 슬로건은 모두 바울로부터 독립선언을 내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
그와 같은 호소가 그 서신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아직도 생각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같은 선포의 표면에서 바울은 분열을 끝내라는 단순한 호소 이상을 말하고 있다. 그 자신과 교회의 관계가 문제가 되었다. 자신의 이름과 아볼로의 이름이 파당심으로 연관된 자들 가운데 있다는 보도를 소개한 후, 그는 아볼로와 나란히 그의 사역에 대한 문제점을 제시하기 전에 지혜를 재해석하고 그리고 강한 반증을 계속한다. 고린도인들이 지혜를 이해할 때, 이 지혜를 거부함으로서 아볼로 사역을 평가하는데 얼마나 깊이 특징을 이루는가? 바울은 일치에 대한 호소를(고전 4:6) 설명함으로서 아볼로와 자신의 관계의 논의를 요약하지만, 그러나 그는 많은 해석상 불안의 원인이 되는 말을 섰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이 고의로 불가해한(enigmatic)것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의아하게 생각한다. 더욱, 아볼로가 (고전 16:12)의 가능한 방문에 대한 언급은 바울의 개인적인 따스함이 없는 것 같다. 최근의 많은 주석가들은 인정하는 바와 같이 대부분 고린도에서 어려운 문제들로 말미암아 아볼로가 주저했다(hovwes over)는 것이 사실인가? 이 문제는 다시 한번 질문할 가치가 있다.

1. 아볼로

처음부터 좌절할 정도로 우리는 아볼로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한다. 그의 이름은 고린도전서에서 7번(1:12, 3:4, 5:6, 22, 4:6, 16:12), 디도서에 한번(3:13), 사도행전 3번(18:24, 27, 19:1)나온다. 그는 그림자 같은 종교사에 하나의 그림자와 같은 사람이라는 R. Harris의 주장은 몹시 감상적으로 들리기보다는 분명한 증거의 부족으로 부분적으로 발생한 아볼로와 바울의 관계를 평가함에 있어서 직면한 난제이다. 후에 본 글에서 나는 고린도전서 3장과 4장에서 바울이 사용한 언어와 그리고 그의 독자들이 아볼로와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권면한 사실을 검토할 것이다. 또한 16장에서 바울은 그 공동체에 아볼로가 계속적으로 없었다는 사실을 보도한다. 이 점에서 있어서 바울이 자신의 독자들에게 아볼로의 배경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으로 족하다. 이 점은 거의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바울은 명백하게 그가 알고있는 아볼로의 신학적인 입장을 제시하지 않는다. 만일 아볼로가 고린도전서와 후서(아래를 보라)에서 바울이 공격하는 지혜와 어떤 방식으로든지 연루되었다면, 우리는 바울이 비판하는 방식에서 아볼로의 신학에 대해서 무엇인가(어느 정도)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바울이 제시하는 가장 기본적인 대조는 "지혜"와 "십자가의 말씀"(1:18)이다. 그러나 바울의 십자가의 말씀에 대한 전개 자체가 아볼로가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를 거부하는 것을 확증할 수 없지만, 아볼로가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거나 다르게 이해했음을 제안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는 분명하다. 하나는 ,아볼로가 고린도 공동체 가운데서 사람들에게 베드로나 바울보다 우월한 인물로 그를 생각하게 하는 지도자로서 충분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둘째, 바울은 여전히 그와 교제하고(의사소통) 있다는 것이다(16:12). 디도서 3장 13절에서 아볼로의 언급은 우리의 이해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아볼로는 율법교사 세나(zenas)와 나란히 언급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디도는 그들(세나 아볼로)을 보내도록 강요받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부족한 것이 없도록 보살피라는 것이다. 이 호소는 준수해야 할 예의 범절의 요구 이상의 말이다. 사도행전에서의 언급은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아볼로는 한 사람의 유대인이고, 알렉산드리아 태생이며, 웅변가이고, 성서에 정통한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 태생이라는 그의 출신 때문에 시험적으로 몇 사람은 그와 필로(philo)와 연루시키고, 동시에 바울이 비판하는 지혜와 필로의 작품을 연결시키는데, C.E 1세기의 제시된 알렉산드리아 유대 공동체의 형태로 보아, 그 같은 관련성에 대하여 증명하기는 거의 어렵다. 그러나 아볼로가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라는 사실은 바울의 배경과 현저하게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볼로가 "학문이 많다"라는 묘사는 웅변가와 유식한(교육을 받은)자로 다각도로 해석될 수 있다. 실제로 릿핀(D. Lifin)은 1세기 그레꼬-로마 세계의 청중들의 생각에는 교육과 웅변이 밀접하다는 일례를 제시했다.
릿핀(D. Litfin)의 연구는 우리가 1세기 수사학에 대한 청중의 태도를 인식하는데 도움을 준다. 물론 이런 관점에서, 사도행전에 따르면 아볼로는 대단히 성공적일지 모른다. 사도행전 8: 17절에 의하면, 고린도의 그리스도 공동체는 회당과 구별된, 회당 옆에 있었던 디도 유스도의 집으로 하나의 그룹으로 세워졌다. 회당자 그리스보는 온 집안 식구들과 함께, 충성(헌신)이 바뀌어 그리스도인들과 연합했다. 우리는 왜 에베소서의 그리스도 공동체가 아볼로 하여금 고린도에 방문하도록 격려하고 공식적인 추천장을 섰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때, 우리가 추론의 범위에 머물러 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능력이 긴장의 상황을 초래했을 원인이 되었다고 제안한다.
게다가 그를 칭찬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속마음 속에 그려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공중 앞에서 유대인들을 힘있게 논박하는 그의 준비성과 능력으로 어떤 사람들은 속히 영웅으로 높였을지도 모른다. 사도행전 18:24-26절에 따르면, 아볼로가 "예수에 관한 일"을 정확히 가르쳤지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를 데려와 그 도(말씀)에 관하여 더 정확하게 가르쳤다고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가르침의 범위는 더욱 자세히 말해지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우리는 사도행전 19: 2-7절을 볼 때 아볼로와 같은 사람이 요한의 세례 밖에 모르는 자라고 우리의 이해를 확대할 수 있다. 이 경우에 우리들이 상세히 기대하였을 지도 모르는 성령에 그 초점이 맞추어 질 수 있다. 성령의 특별한 관점에서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바울이 비판하는 고린도인들의 입장 뒤에 놓여있는 아볼로의 교훈을 이해하려고 유혹을 받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부족하다. 그가 제시하는바와 같이, 사도행전의 저자는 사도적 그리스도교의 직접적인(인접한) 집단들 외부에서 들어온 자가 교회에 그 이상 어떤 기여(부)를 하기 전에 얼마간의 교정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2 논쟁의 정황: 파당 싸움과 지혜

바울과 아볼로의 관계를 논의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만 하는 사항은 1:12절에 기록된 분파의 이름이 나열되는 순서와 이 명단과 3장에서 바울이 아볼로와의 관계를 설명할 때, 그 사이에 끼여있는 지혜에 관한 논의가 바로 그것이다. 바울은 분명히 고린도인들의 회중의 분열을 걱정하는 반면에, 즉시"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습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기도 했습니까? 또한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1:13)라는 반어적인 자기 자신에 대한 수사학적 질문으로 대처한다. 여기서 그는 단순한 하나의 공평한 중재자는 아니다. 그가 관심을 갖는 한 고린도인들의 분열의 해결은 신앙에 있어 그들의 아버지로서 자신의 방법을 따르라는 것이다. 「바울이 파당들을 비판하지만, 그는 대체로 바울 파에 마음이 내킨다. 바울은 개종자들이 바울에게 충성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그의 희망은 절대적으로 신실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쉽게 자신의 감정을 뛰어난 신실한 마음으로 다른 지도자에게 관대하게 대하려는 준비는 확실히 없었다.」
특히 바울은 그가 선포한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그들이 신봉하는(espousing) 지혜에 반하는 사실을 그들이 인식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자신의 논의를 발전시킬 때 지혜의 단어를 여러 다른 의미(긍정적 의미와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C.K. Barrett, 49-54).
고울더(M. D. Gould)는 J.E.C 쉬미트가 1779년에 바울과 아볼로의 개종한 한 파 그리고 자신들을 베드로에게 속해서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로 정의하는 다른 한파가 있었다는 제안을 상기시킨다. 고울더의 주장은 주로 그가 인식한 사도적 권위에 대한 경쟁적 주장에 근거한다. 그런데 그가 생각한 사도적 권위는 바울과 아볼로 사이에 있는 관계에 적용할 수 없다. 모든 논의에 있어서 아볼로가 포함(관연)된 것은 단지 "목회적인 이유"에서 그렇게 된 것이고, 그래서 고린도인들은 우호적인 실례로부터 연합의 원리를 배울 수 있으며, 실제 문제에 그것을 적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고울더는 바울이 말씀과 지혜를 관련시킨 것을 주목하고, 유대 공동체 가운데서 이 용어(지혜)가 특별히 토라(Torah)와 연결되었다고 주장함으로서 자신의 주장을 발전시킨다. 그래서 지혜의 말씀은 유대 그리스도인의 할라카적 규정(halakhic rulings)이며 이것은 1-4장 그리고 서신 전체에서 우리에게 이해를 제공한다. 고울더의 주장에는 몇 가지 난점이 있다. 그는 더욱 자연히 압도적으로 다수의 이방 회중들에게 일어난 지혜에 대한 이해를 설명하지 못했다. 9장에서 게바의 이름이 거명됨에도 불구하고, 바울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변호는 게바와 대조해서 제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투커(Tuckett)가 지적하는 바같이, 고울더의 주장으로 드러난 바울은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서 그리고 고린더후서의 바울과는 현저하게 다른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이 불가능하지 않지만, 그 주장은 무익하게 복잡한 것이다. 우리가 고울더의 주장이 갈라디아서에서는 더욱 반성적(숙고적)이고 그리고 증거들을 입증하기보다는 오히려 유대 그리스도교와 이방 그리스도교 사이의 근본적인 긴장의 이해라는 F.C. 바우어(Baur)에 더욱 의존하는 것이다. 우리는 영지주의 용어로 모든 논의를 이해하는 지혜 문제에 대한 다른 연구방법을 주목한다. 바울 언어 가운데 몇몇은 특히 2: 6절에서 후기 영지주의적 표현과 유사하게 느낄지도 모른다는 상당한 시대착오정신이 영지주의 사상의 내용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고 제시함으로서 관련된다. 특히 자신을 소개하는데 바울은 자신의 독자성을 설명한다고 생각할 때 바울이 단지 고린도인들의 제언(교섭 approach)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제안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만일 우리는 바울이 비판하는 지혜의 열쇠로서 유대 할라카적 규정과 영지주의를 거부한다면, 수사학의 영역으로 방향을 돌려야 한다.
릿핀(Lifin)은 그레꼬-로마 세계의 1세기 보통 수준의 시민의 일반적인 수사 전승은 그 시민이 라는 용어를 생각하고 사용했던 가장 일반적인 상황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그러나 릿핀은 역시 이 용어가 의미한 바를 이해했다고 너무 빨리 추측하지 말아야 함을 상기시킨다. 수사학의 역사를 추적하면, 우리의 태도가 그쪽을 향하게 되고 그는 수사학 안에는 두 가지 표준이 있다는 결론과 함께 CE 1세기 도달한다는 것이다. 수사학은 기능적이며(functional), 또한 설득적 목표를 갖고있다. 이 사실이 수사학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고려해야만 한다. 부분적으로 그것은 연설자의 명성을 높이는 목적과 함께 장식적(decorarive)이다. 이 같은 표준은 이차적인 것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그러나 1세기까지 수사학의 가장 중요한 목적을 강조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더라도 유리 진열장 연설의 형태인 장식은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처럼 보인다(seems to be wining). 그 당시 철학자들과 바울의 관계와 그리고 그 자신의 수사학적 능력은 중요한 최근의 논쟁의 주제이다. 그러나 이 목적을 위하여 강조해야 할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들이 들었던 지혜의 가치를 결정함에 있어서 청중의 능력이며, 그리고 결과물로서 웅변가의 운명이다. 장식(decorative)이 유력한 역할을 할 때 연설자는 전달해야 할 메시지의 가치에 덜 관심을 갖게되고, 더욱 청중들의 의한 개인적인 평가를 인정하는데 관심을 갖는다. 릿핀을 인용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 처음부터 그리스-로마 청중들은 심판자로 자신들의 역할을 이해하고 즐긴다. 참으로 이 같은 사실은 고대에서 웅변이 번창했다고 우리가 말할 때 있을 수 있다. 그들에게 그 같은 기쁨을 가져온 연설의 마지막 결정자가 청중의 역할이다.」
고린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공공의 광장처럼 정확하게 동일한 규칙이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 는 없지만, 이런 역할이 하나의 문화적 기대가 되었을 경우에 중재자(arbiter)로서 역할을 단념시킬 수는 없었다.
바울의 공인된 지위는 이 같은 규정에 의해 게임을 하지 않았고, 그들은 정반대로 십자가에 달린 주님의 주장(요구)에 정반대로 반대하였다(고전 4:3-4). 여기서 L.L Welborn이 고대 세계에서 분파와 경제적 불평들 사이에서 관련성에 대한 논평에 주목하는 것이 유익하다. 그는 분열 현상을 정치적인 권력 투쟁의 반영이라고 제안한다. 이 장의 전체를 통해서 바울의 목적은 분열에 대해 신학적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정치적인 것에서 벗어나 고린도인들의 관심을 딴 데로 돌려 야했다. 이 같은 조언은 도움을 주고, 또한 공동체 내의 사회-경제적인 분열은 서신에서 계속 대어감에 따라, 앞부분에서는 명백하지만, 분열과 긴밀하게 관련된 바울, 아볼로와 게바가 고린도 공동체에 신학적으로 어떤 영향(input)을 주었는지 고려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신학이 그 갈등과 연관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고린도전서 2: 6-16절에서 바울은 그가 비판했던 전혀 다른 견지에서 지혜를 제시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주로 그가 반대했던 지혜를 고려하는 는 것이기 때문에 그 문제를 남겨 놓았을 것이다. 바울이 반대해 왔던 지혜와 아볼로 사이에 어떤 연결(점)을 성립시킬 수 있다.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아볼로의 배경(사도행전에서 제시된 대로)과 고린도에서 지혜의 가르침의 도입 사이에 분명한 연결점을 추적하려는 시도는 전적으로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아볼로의 원래의 가르침과 의도를 결정 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고린도인들이 그들에게 반응한 표준(범위)에 대한 설득력 있는 견해(position)를 갖는다. 아볼로는 출중한 능력을 가졌고, 고린도인들이 수사학의 진가를 인식하고 있다면, 아볼로와 고린도인들 사이에 깊은 관련성이 전개되었다고 보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또한 경제적인 문제도 함축하고 있다. 재정은 고린도인들과 바울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였고, 바울 자신의 관행에 반대하여, 그들의 후원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만일 사실 그렇다면, 이것은 3: 8절의 삯(wages)의 언급과 과 4장과 9장에서 바울이 사용한 사역의 언어와 실례들에 대한 배경의 부분을 형성한다. 증거는 부족하지만, 우리는 아볼로와 바울이 고린도인들로부터 다른 측면에서 존경을 받았다는 제안을 충분히 구별할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의 독자성보다 다른 어떤 접근도 위험한 것으로 본다. 다른 사람들의 사역에 대한 그의 언급은 이런 조명아래 검토해야만 한다.

3. 3 장안 안에서의 논의

고린도전서에서 아볼로에 대한 7번의 언급 가운데 4번은 3장에 나타난다. 우리가 바울 자신의 말을 통하여 (고린도)공동체가 들으려고 했던 것을 우리가 경청하기 전에 고려해야 할 세 가지 요소가 있다.
A 바울은 자신을 실망시키고 근심스럽게 보아야 할 이유가 있던 공동체에 이 구절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3장에서 바울은 고린도인들이 성숙하기를 기대했지만, 그들이 실패했던 게 분명하다(3:1-4). 그래서 그가 아볼로에 대해 언급할지라도 치밀하고 신중해야 만 했다. 변하기 쉬운 상황에 대놓고 비판하는 것은 기대에 어긋난 결과(backfire)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볼로는 몇몇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바울은 역시 그들을 대립시키기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
B. 바울은 긍극적으로 고린도 교회가 자신의 권위 아래 복종하고 나아가 그들이 바울의 지더력 아래 연합할 것을 주장한 반면에(고전 4:14-15), 이 단계에서 다른 기독교 지도자들을 공격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주장을 강조할 수만은 없었다. 왜냐하면, 이것이 도리어 바울의 잠재적인 라이벌 경쟁자와 고린도인들이 편드는 기회를 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오직 연합전선 만이 고린도인들의 변덕스런 근성을 고칠 수 있었다.
C. 바울은 자신과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 아볼로에 대해서 언급할 때 조심스러워해야만 했다. 우리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사도행전의 기사에서 아볼로의 교사였음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이 부부는 아볼로가 고린도에서 사역할 수 있도록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만일 바울이 명백하게 비판적이었다면, 그가 이 중요한 동료들 그리고 그들의 가정에 모인 교회(고전 16:19)와의 관계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바울이 언어를 선택함에 있어서 영향을 미친 이 세가지 문제 중 모두 또는 얼마의 정도를 결정하기가 어렵다. 바로 이 특징으로 보아 그들은 바울에 대해 분명히 자세히 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어떤 타당성을 갖는다면, 그의 경우에 그들의 영향력이 바울로 하여금 더욱 중재 방식을 제시하게 하였을 것이다. "육신" 이란 말과 그리고 잘 알려진 유아 음식(3:2)의 이미지 사용한 후 그가 직면한 불화의 태도를 권고하기 위하여, 바울은 자기 자신과 아볼로를 비교한다. 5절에서(그렇다면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입니까?)그의 수사학적 질문의 쌍은 중요한 서두의 첫 수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울을 제쳐놓고 아볼로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확신 때문이다. 이 양자는 바울이 이제 규정하고자 하는 역할과 관계를 갖는다. 바울은 첫째로, "여러분을 믿게 한 종으로 역할을 정의한다". 어떻게 이 말을 읽을 수 있는가?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고린도인들이 그들의 분당에 이의를 제기하는 지도력의 생각을 뒤집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아마도 신중하게 자신의 신분을 낮춘 것으로 본다. 다른 하나는, 종은 하나님 안에 있는 메시지의 근원과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바울과 아볼로의 역할에 대해서 의미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 같은 방식으로 들을 때, 바울의 말은 고린도인들을 비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에 대한 하나의 주장이다. 그런데 바울과 아볼로가 공동의 역할을 공유한다고 할지라도, 그들 사이에 당면한 차이점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께서 각자에게 맡겨주신 대로의 하나의 조직구조 아래서 사역했기 때문이다. 주께서 바울에게 부여한 특별한 사역에 대한 자신의 평가는 4: 15절에 나타난다.
바울 자신만이 고린도 교회의 아버지이??. 아볼로는 더 적은 역할인 보호자/후견인이며, 많은 사역자 중에 단지 하나일 뿐이다. 이 일치의 결과와 분명한 구별은 다음의 이미지에서 되풀이하여 말한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다(3:6). 아마도 이것은 보통의 이미지이며, 심는 자와 물주는 자는 그 시간 사이에 성립될 수 있는 단지 시간 순서가 앞선 것(priority)을 나타낸다. 이 시간 순서의 앞섬은 그의 청중들이 이해해야만 하는 시간상의 앞섬이다. 심거나 물주는 일이 모두 필요한 일이지만, 심는 자들이 물을 주는 자들보다는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인 법칙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바울이 이 메타포로부터 발전시킨 첫째 결론은 모든 인간의 성취에 대한 하나님의 사역이 이미 선행한다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사람의 숭배를 발전시킨 고린도 교회내의 이런 경향은 그러므로 잘못된 것이다. 모든 공동체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하나님은 자라게 하신다. 심는 자와 물주는 자는 공동의 목적을 갖고있지만(3:8), 다시 한번, 이 일치가 가장 중요한 말은 아니다(not the last word). 이 직접적인 구별은 "그들이 각각 자기의 값을 받을 것이다(3:8)"의 말씀에서 표현된다. 아볼로가 고린도인들로부터 재정적인 후원을 받았다는 가능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할지라도, 바울은 여기서 아볼로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제기하지 안는다. 바울의 암시는 하나님은 적당한 삯을 지불하시며 아볼로가 어떻게 살아가는 가를 추측함으로서 자신의 논리와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수고(노력)에 간략하게 언급할 것이다. 그런데 그 같은 사실은 고린도인들의 기대에 반대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는 것이다(4:9-13).
아볼로에 대한 바울의 침묵은 날카롭게 대조적이다. 정원의 이미지와 하나님의 구심성- 창조적인 성장과 노고와 정착 이야기-은 우리에게 다음의 이미지를 가져다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이다(3:9). 바울이 자신의 동료들을 언급할 때 분명하게 즐겨 쓰는 이 말을 논함에 있어서 "하나님과 함께 한 동역자들" 혹은 "하나님께 속한 동역자"를 의미하는 구절로 이해해야 만 하는 중심을 차지한다. 후자의 읽기의 동의하며, 그것은 다음과 같이 논의된다. (1) 이 구절의 맥락은 바울과 아볼로의 연합이다(C.K Barrett 1 Cor, 86). (2) 이 맥락에서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가 하나님의 종이지 하나님의 파트너가 아니라는데 강조점을 두고 있다. (3) 이 속격의 단호한 입장은 소유물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 구절이 주장하는 내용은 그들이 하나님 수하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제시하는데 그 강조점이 있다. 만일 현재 그들이 그와 함께 사역했다고 확신했다면 (경쟁자를) 깎아 내렸을 것이다.
이 논쟁의 어느것도 바울의 주요 관심사가 하나님을 강조하는데 있지 고린도 교회에 있지 않다고 할 때에 설득되지 않는다. 고린도에서 일한 사람들을 평가하는 것에 대하여 책임이 있지 않다. 그래서 이 구절의 맥락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일치가 아니라, 하나님이 책임을 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위에서 주목하는 바와 같이, 봉사를 하는데 보조(도움)로서 파트너쉽을 의미하는 것 같다. 전자의 의미는 그럴듯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선교에 대한 바울의 폭넓은 이해를 반영한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신실성(authenticty)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를 자연스럽게 고린도인들 자신의 역할의 메타포와 연결시킨다:"너희는 하나님의 밭이며, 하나님의 건물입니다(3:9)." 하나님의 밭과 하나님의 건물의 이미지는 두드러지게 수동적(passive)이다. 고린도인들이 자신의 공동체의 지도자 사이를 구별할 수 있다고 추측할지도 모르는 반면에 이 논의를 위하여, 바울은 그들의 지도자들과 현저하게 다르게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대상(objects)일 따름이라는 것을 넌지시 비춘다. 고린도 공동체에 대한 이 두 은유는 어떤 다른 의미를 전달하는가? 밭은 바울이 소개하는 6절에서 정원의 일례의 단순한 연장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밭은 특별한 언급 없이 넓게 이해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이스라엘을 내포하는, 포도원이라는 가능성을 놓칠 정도로 어리석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건물"(집)은 더 분명하다. 우리는 분열된 그룹에 대해서 일치를 강조하는 문학의 논제(topos)로서 건축 메타포의 중요성을 강조한 M. M Mitchell의 방법을 주목한다. 이런 조명 아래에서 이해될 때, 기초로서(3:10-1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강조와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성전(3:16)으로서 고린도인들을 언급하는 것은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성전은 평화와 연합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3:17절에서 바울의 경고는 모든 고린도의 파당주의자들이 자신의 공동체를 위협하고 분열시키는 행위를 중지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미첼은 다른 건축자들과 자기 자신의 사역과 관련하여 바울이 이 메타포의 발전에 대해 논의하는데 실패하였다.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이 발전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자신을 숙련된 건축자로 묘사하고, 이 임무는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정황에서 계획되었다는 것이다(3:10). 우리는 이 말씀을 바울의 사도적 부름에 대한 언급과 그의 사도적인 권위로 이해해야만 한다.
 바울이 건축자라는 말로 사용하는 것을 볼 때 분명히 이 견해를 반영하다. 분명하게 동역자들이 포함된 정황에서 건축 메타포의 뉘앙스를 주는 분명한 연속성을 가진다고 해도, 바울은 자신을 위탁된(in charage) 존재로 본다. 지혜로운 이란 말은 아마도 "능숙한"이란 말로 이해되어야 하지만, 우리는 지혜에 대한 그의 모든 논의의 맥락 가운데서 바울이 이 형용사를 사용한 아이러니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러나 바울 혼자만이 사역자는 아니다: 그 밖에 누군가가 그 위에 세웠다(3:10). 이 익명의 사람은 누구인가? 세 가지 가능성이 있는 같다. (1) 아볼로 (2) 몇몇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역자들. (3) 고린도인 자신들. 이 셋 번째 선택은 개연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울이 발전시킨 메타포를 아마도 혼동시키기 때문이다. 고린도인들은 거의 건물이나 건축자가 될 수 없다. 다른 두 선택 가운데서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 이 구절에서 바로 이름을 밝히지 않기 때문에, 무명의 세 번째 파당에 찬성하여 주장할지 모른다. 우리가 위의 논의에 빛에서 볼지라도 나는 이 점에 대하여 게바에 연관시키는 것은 개연성이 없다고 제안한다. 정원의 이미지와 4장의 모든 주장이 특히 바울과 아볼로에 관련시키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여기에 도입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을 것이다. 이 동사가 현재이기 때문에 아볼로에 대해서 어떤 직접적인 관련시키는 것에 반대하여 주장하는 것처럼 보일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더 이상 그는 더 이상 고린도에 체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생생한 현재 시제를 씀으로서(vivid present)수사학적 설득력을 가지며, 아볼로가 다시 방문해 달라는(16:12) 고린도인들의 관심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언급이 아볼로 자신이기보다는 익명의 교사라면, 아볼로 자신의 지지자들부터 그와 같은 교사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만일 아볼로 자신이 이 언급의 대상이라면, 우리가 여기서 제시한 익명의 사람들은 아마도 고린도인들의 애정(affection)가운데 자신의 경쟁자로부터 자기 자신을 떼어놓으려는 바울의 관심의 강력한 증거들이다. 우리는 건물(집)을 만드는 방법에 사용된 바울의 재료들의 목록에 주목해야만 한다: 금, 은 보석, 나무, 풀, 짚(3:12). 이 6개의 재료들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 바울이 말하고자 한 주된 주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부분 뜻밖의 특별한 재료들에 대한 소개는 바울 사상에 그 이상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분명하게 그것들은 가치의 하향적 순서로, 진부한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즉 짚까지도 기록된다. 만일 3장을 기초로 하여 고린도인들이 바울과 아볼로 사이에 날카로운 대조를 끌어들이려는 의도였다면, 또한 이 재료들 가운데서 대조점을 찾으려는 기대를 해도 좋을 것이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 우리는 불의 시험에 살아남을 수 있는 것(금, 은, 보석)과 그렇지 않은 것(나무, 풀, 짚)들 사이를 구별할 수 있다. 둘째 선택은 예루살렘 성전의 구조에 더욱 관련된 것으로 금, 은, 보석이라는 견해이다. 16절에서, 바울은 고린도인들을 하나님의 성전으로서(3:16) 그들의 위치를 상기시킬 것이기 때문에 이 후자의 선택은 우리의 마음을 끌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이 건축 재료들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성전의 암시를 제시했다면, 그의 독자들에게 분명하게 다가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두 가지 방법 중 어느 쪽이든, 우리는 바울이 흑백 논리로 다른 건축자(그가 이점에서 거리를 두는 자들)의 사역을 평가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점에 있어서 바울은 아볼로의 사역 혹은 다른 건축자들과 자신의 사역의 비교에서 벗어난다. 그보다도 바울은 고린도인들의 역활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직접적으로 독자들에게 말하기 위해서 화제를 바꾼다. 본 장 22절에서 그의 이름이 다시 한번 언급될 것이다. 이 때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고린도인들의 관계에 대해서 놀라운 반전(reversal)을 제시한 목록의 본보기로서, 아볼로는 바울과 게바와 나란히 언급된다. 하나님은 지혜와 어리석음에 대한 인식을 뒤집는 하나님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자랑하려는 그들의 풍조를 무익하게 만드신다. 이 모든 기대에 반하여 그들은 그들의 지도자에게 속하지 않고 도리어 그들의 지도자(바울, 아볼로, 게바)들이 고린도인들에게 속한다. 그리고 모두는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속한다. 이 송영으로 바울은 인간의 대리자에서 그리스도에게로 고린도인들의 헌신(충성)을 제의(안)하려고 한다. 4장 처음에서 그리스도의 조명에 비추어서 볼 때 분명한 것은 동료들 혹?? 경쟁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라도, 그 자신의 사도적 사역은 입증될 것이라는 것이다.

4. 4장 요약

4장 맨 처음에서 바울은 책임과 심판에 대한 주제로 되돌아간다. 첫째, 어떤 책임의 기본 원칙이 표명되어야만 했다. 그리스도의 종이며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인으로서(1절), 그리스도교의 지도자라고 생각한다면 사용되어야 하는 단 하나의 심판의 기준은 그 신실성(개역:충성, NRSV:trustworthy) 이어야만 한다(2절). 또한 종(청지기)에게 책임 있는 자들에 의해 오직 평가될 수 있는 그런 특성으로 생각해야 한다. 바울은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3절)"라고 말할 때 수세적 입장을 취하면서 분명하게 보여준 방식으로 이 이미지의 논리를 발전시키다. 어떤 고린도인들의 평가에 대비하여, 바울은 그를 심판하실 자는 주님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 장차 올 심판에 대한 언급과 그리고 그것이 가져올 상(칭찬)의 언급은 3:13-15절의 주제를 반향하고, 더욱 우리를 위하여 명백히 한다. 바울의 주요한 관심사는 자기 자신의 입장이다. 16절에서 바울은 자신과 나란히 아볼로를 소개한다.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나와 아볼로 자신과 적용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이 "기록된 말씀의 범위를 벗어나지 말라"는 격언의 뜻을 여러분이 우리에게 배워서, 어느 한편을 편들어 다른 편을 얕보면서 뽐내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 부분의 중요한 요약이다. 표면적 의미로 볼 때 마지막 절은 분명한 것 같다. 고린도인들이 파당으로 마치려고 했다. 그러나 어느 한편과 다른 한편에 대한 언급으로 고린도인들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가 가능한 반면에(너희 가운데 누구도 한 사람을 편들어 다른 사람을 반대하여 우쭐대서는 안 된다. RSV), 원래 바울과 아볼로를 교차(대)시켰다고(alternates) 설명하는 것이 더 낮다. 4장에서 바울은 마침내 일만 명의 선생들과 대조하여 아버지로서의 유일 무일한 자신의 역할을 주장하고, 자신의 입장을 계속적으로 변호한다. 우리는 그가 고린도인들과 비교된다는 면에서 균형을 바로잡으려고 불리한 처지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4:6절에서 두 가지 난점이 있다. 첫째 "메테스케마티사"(내가 적용시켰다)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 말의 일반적 의미는 어떤 것의 형태를 바꾸다 이다. D. R. Hall은 문자적으로 이것을 본 절에 적용시켜야만 한다고 제안한다. 그는 광범위하게 인용하는데 희랍 교부들은 이런 방법으로 이 말을 이해했다고 주목하고 또한 유사하게 중세와 칼빈시대에 까지 이해되어 왔다는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인 관행에 의해 해석한다면, 바울은 어떤 것 혹은 누군가 다른 사람에 대한 언명에서 자신과 아볼로에 대한 진술 가운데서 자신의 주장을 변형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 어떤 것 혹은 누군가 다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Hall은 그들은 고린도 교회에서 사역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교사들이라고 제안한다. Hall은 이 해석이 어려운 말에 대한 바른 해석을 제시하는 이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말은 이 맥락에서 맞지 않는다. 이전과 그 다음의 절을 보면 바울의 관심은 분명히 익명의 교사들에 대한 것 이 아니었다.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해 염려하지 않았고, 그의 개인적인 관계는 단순히 실례(illustrative)보다는 더 심층적인 수준에 있었다. M. D.Hook가 주목하는 바 같이, 바울에 관한 말과 3장에서 아볼로에 대한 것은 사실상 누군가 그밖에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제안은 "메테스케마티사"를 해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Hooker가 제시한 방향을 따르는 것이다. 즉 "나는(바울) 이 수사적 표현(figures of speech)을 나 자신과 아볼로에게 적용했다. "수사적 표현"이 3장에서 정원과 건물로부터 실례와 그리고 4: 1-5절에서 종의 성격(servanhood)으로 부터의 본보기들이다. 이 등급이 이 사례들에(누군가 그밖에 대조적으로 지혜로운 건축자(3:10)로 바울의 예)연루되었을 경우에, 고린도인들은 이 진의를 이해해야만 했다. 4:6절의 두 번째 난제는 "기록된 것을 넘어가지 말라" 라는 구절에 관련된다. 그것을 동일하게 바울이 말하는 그 맥락 가운데서 해석하기는 어렵다. 이 본문은 본문 속에 슬며시 들어온 난외주를 가리킨다고 제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 같은 주장에 대한 본문의 증거는 없다. 그래서 주석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시된 본문의 재구성에 대해서 조심성 있게 그 구절을 다루어야한다. 만일 우리가 있는 그대로 본문을 읽으려면, 그것이 의미하는 내용를 물어야 한다. 아마도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바울이 이해한 잠언적 관용구인 것 같다. 그러나 "하 케그라타"(쓰여진 것)를 성서의 특유한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나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경우는 1:18절로부터 모든 주장의 기초를 이룬 준거의 틀로서 인용한 성서이다. W. Wuellner가 제시한 바 같이, 1:18에서 3:22절까지 학가다적 설교의 실례로 이 말들을 볼 때 도움을 준다. 1:18과 3: 19-20의 인용구들이 모두 그리고 보충적으로 서로를 둘러싸고 있다(encase). 이 본문들은(사 29, 욥5, 시93) 현자 위에 심판이 일?爭? 반전에 대해 모두 언급하고 있다. 편지를 쓰는 바울의 목적은 고린도인들이 완전하게 그리고 신중하게 이 역전을 시도해야 만하고 그들의 모든 방법을 다시 평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자신의 위치는 이 성서 말들 가운데서 십자가 중심성을 강조하면서 미드라쉬(midrash)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고린도인들은 아볼로의 교훈을 비판했을 지 모른다. 요약해서, 나는 고린도전서 4: 6절이 고린도인들이 하나님이 거꾸로 지혜와 어리석음에 대한 상대적인 판단를 뒤엎으시는 성서로부터 이해한 바울의 호소라는 사실을 제안한다. 그들은 바울이 자신과 아볼로에 대하여 사용한 이미지에 대해서 주의 깊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과 바울의 개인적인 숭배를 발전시킬 수가 없었고, 더욱 특히 아볼로 또한 높게 평가할 수 없었다. 이 구절은 수수께끼로 남는다. 아볼로에 대한 더욱 공공연하게 비판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복음의 일치를 확고히 할 수 없었고, 바울자신의 위치도 높이지도 못하였다. 이 같은 맥락에서 이 편지가 거의 끝날 때까지 아볼로에 대한 바울의 전적인 침묵은 충분하게 설득적이다.

5. 16장 12절의 마지막 언급

고린도전서 그리고 고린도 회중들 전체에서 아볼로에 대한 바울의 마지막 말은 짧지만, 바울과 그의 동역자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가장 기본적인 관점에서 볼 때, 16:12절은 이 둘 사이가 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들은 아직도 아주 가깝고, 서로 말을 건 낸 정도의 사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다른 방식으로 관련성을 읽을 수 있다. 어떤 이는 이 관계를 이 둘 사이에 계속되는 우호적인 관계와 적어도 오해를 피한 정도로 생각한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덜 확신한다. "에 관하여"라는 도입에서, 바울이 고린도인들이 표명한 -아마도 아볼로가 다시 자신들을 방문해 달라는 요구-관계의 많은 항목 가운데서 하나에 응답을 보인 것처럼 보인다. 바울이 편지의 마지막에 급히 그것을 취급하고 이 요구에 자신의 응답을 연기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아볼로의 방문은 고린도인들의 일정에 중요한 것이었다. 대조적으로 서신 전체에서 자기 자신의 신학적 입장의 윤곽을 그리고 답변 이전에 고린도를 방문할 계획을 세운다. 바울이 아볼로에 관하여 사용한 언어는 역시 중요하다. 아볼로는 형제로 언급된다. 바울이 그리스도교 공동체 가운데서 그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아무 문제는 없다. 그러나 디모데, 스데바나, 브드나도에 대한 바울의 칭찬의 말과 현저하게 다르게, 아볼로에 대한 지적은 다소 무겁다. 그러므로 바울이 형제들과 함께 아볼로에게 여러 차례 방문해 달라는 보도는 무엇인가? 우리는 "형제들과 함께"라는 동사의 1인칭 단수 주격과 관련하여, 해석할 수 있음을 주목한다. 그리고 바울의 요청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의미를 우리에게 준다. 이 같은 사실이 바울의 의도라면, 아볼로의 마음내키지 않음은 오히려 고립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1절에 디모데와 형제들이 그리고 간다고 언급되고 있고, 바울이 아볼로로 하여금 고린도에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해서가 아니라 그가 분명히 바울 선교의 다른 일원으로서 동일시되기를 원했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아볼로가 다시 방문해 줄 것을 권했지만 바로 그 사실은 그를 단순히 보내는 것보다 오히려 바울은 아볼로가 자기의 권위 휘하에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했음을 암시한다. 자신의 선교에 다른 이를 합류시키려는 바울의 강요에 대해서 아볼로가 거부한 것은 그가 지나치게 행동을 같이 하려는 것에 대해 신중해야 했음을 가리킨다. 문자적으로 "지금은 갈 마음(뜻)이 없다"이다. 이 구절에서 또한 모순이 있다. 누가 마음이 없다는 것인가? 상이한 구문과 로마서 2:18 평행절을 읽으면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언급한다는 것을 암시했을 것이다. 만일 바울 대답의 요점이 그것이라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바울의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바울이나 아볼로가 고린도인들의 요구에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 해석은 그가 하나님께 상반되었던(contrary to God)그 문제에 아볼로를 되풀이하여 강요하고 있었음을 인정하는 입장에서 바울이 떠났기 때문에 만족스럽지 못한 해석이다. 더욱이 그것은 바울 혹은 아볼로가 이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던 방법에 대해서 고린도인들은 더욱 당연히 강조했던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아볼로의의지와 관련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 왜 아볼로는 거절 할 수밖에 없었는가? 만일 이 절을 바울과 아볼로가 서로 밀접하게 동등한 가운데서 사역했다는 증거로 본다면, 이 민감한 때에 아볼로가 재방문을 꺼리는 것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을 악화시키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해야 한다. 만일 아볼로가 고린도인들에게 파당심에 불을 부치기를 원하지 않았다면, 그가 손을 떼기보다는 분명한 바울의 위임 혹은 바울 자신을 동반했다면 좀더 현명했던지 아니던지 간에 그 경이에 관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 구절에 대한 주석가들은 중재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아볼로의 거부에 대한 어떤 해석을 제안하려고 하지만, 바울은 어떤 것도 제시하지 않는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이 관계되는 한 자신을 좋은 조명 속에 둔다. 왜냐하면, 아볼로가 와야한다는 그들의 요구에 동의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아볼로 자신은 그 요구의 거절에 대한 책임이 있다. 바울은 이 사실이 적어도 자신의 고린도인들의 수신자들의 일부에게 실망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더 이상의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 이상의 설명을 부족으로 오해와 비판의 소지는 바울이 아니라 아볼로에게 남아있다. "적절한 때가 오면 갈 것입니다" 의 마지막 문장은 막연하고 우유부단한 느낌을 갖게 한다. 전체적인 결과는 아볼로가 그림자 속으로 던져 진 것이다.


결론

본인은 고린도전서에서 아볼로에 대한 언급을 통해서 바울은 신중히 그들의 비판을 고찰하기 위해서 자신보다 더욱 높게 아볼로를 존경하는 고린도인들을 설득시켜야 만 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시도하였다. 바울은 명백하게 공공연하게 비판하지는 않는다. 공공연한 비판은 이미 분열된 교회를 더욱 악화시켰을 것이다. 오히려 바울은 고린도인들이 아볼로와 자신을 나란히(협력적인) 생각하도록 권한다. 그 다음에 그 비교 중에 아볼로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는 한편 그들의 평가에 자신을 높이려고(enhance) 위해 의도된 언어와 심상을 사용한 것이다. 특히 16:12절에서 아볼로의 마지막 결말은 위상이 손상되었다. 16장 12절을 바울의 입장에 대한 좁은 마음의 시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일치가 중요한 초점인 편지에서 말이다. 우리가 그에게 중대한 권리침해(injusrice)을 했다면 또한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 바울은 미묘한 상황에 직면했다. 바울이 세운 공동체 안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바울은 그것에 대해서 특히 사도적 책임감을 느꼈다. 그 책임에 명확한 대답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의 편지에는, 아볼로를 지지했던 사람들 즉 공동체의 꽤 상당한 사람에 의해서 거부되는 위험을 무릅쓰게 되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아볼로 자신은 얼마간의 타협(sellement)하기 위해 바울 선교에서 일했던 일꾼들과 나란히 방문하지는 못했다. 이 상황에서 만일 영웅의 위치에서 아볼로가 자신의 지지자들에 의해 지위가 떨어졌다면, 바울은 일치가 달성될 수 있다고 비판해야만 했던 것 같다. 우리들은 시간과 문화에서 멀리 떨어져있어서 논쟁이 좀더 미묘하고 세부적인 것일 때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다른 비판을 가할 때 신중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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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 숭배의 위험성

 

고전 8: 7-13

 

Gregory W. Dawes


오랫동안 고린도전서 8장과 10장은 해석자들에게 어려운 문제로 제기되어 왔다. 중요한 난점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제물)(8:1) 문제에 대한 일관된 가르침을 찾는데 있었다. 고린도전서 8:7-13절을 보면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은 단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 때문에 도덕적으로 피해야만 하는 중립적 행위였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입장은 10:23-11: 1절에서 반복되는 것 같다. 그러나 10장 역시 우상숭배에 대한 강렬한 비난(경고)을 포함한다. 그리고 10:14-22절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은 사실상 단순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암시하다.

1. 문제의 상황

몇몇 사람들은 이 장에서 받아들여진 위치가 일관성이 없다는 제안의 극단적 입장을 취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서신의 통일성을 문제삼는다. 그러나 이것은 자포자기이다. 고린도전서에서 논증이 단지 일관성이 없다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혼합된 작품이라고 추측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이론으로는 난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두 동일한 저자가 기록했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서신을 분리시킴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사도의 생각에 의미 있게 일관성이 없다고 추측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래서, 다른 주석가들은 있는 그대로 그 장을 해석하려고 시도해왔다. 고린도전서 8장과 10장을 일치된 윤리적 권면의 한 부분으로 해석하려는 저자들의 작품을 개관함에 있어서, 우리는 이 장들에 대한 두 해석을 구분할 수 있다. 첫째 해석에 따르면 단지 하나의 문제는 이 장들에 언급되어 있다. 즉 C. K. Barret 말 즉 "타당하던지 아니던지 간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역사에서 이방 제의를 통과하고 우상에게 희생물로 바쳤던 음식을 먹었다" 이다. 단지 하나의 문제를 다루는 이 장을 고려함에 있어서 어려움은 8: 1-13, 10: 23-11:1(그와 같은 고기를 먹는 경우에 본래 받아들여진 경우로 생각된다) 그리고 10: 14-22(그 같은 음식과 관계된 모든 경우에는 정죄를 받은 것 같다)절에 말한 내용 사이에 분명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는(inconsistency) 어려움이다.


가장 최근에 피(Fee)가 주장하고 그리고 단호하게 변호되는 두 번째 해석에 따르면,
우리는 8-10장에서 두 가지 완전히 다른 문제들이 언급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을 필요가 있다. 첫째, 이방 성전 안에서 희생 제의 식탁에 참여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8:7-13 그리고 10: 14-22에서 논의되었다. 둘째, 이 전에 우상에게 바쳐졌던 시장에서 산 고기를 먹는 문제이다(이것은 10: 23-11:1에서 논의되었다). 바울이 희생 제의 잔치(우리가 볼것 처럼, 두 그룹에)에 참여한 것을 비판할 때, 그는 원칙적으로 희생(제의)에 관여되었던 시장에서 산 고기를 먹는 것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 행위조차도 다른 사람의 양심을 위하여 걱정하여 책임이 필요가 있다고 경고한다. 이 입장의 피(Fee)의 제시는 피스크( B. Fisk)에 의해서 비판을 받는다. 피스크는 대안적 해석을 제시한다. 피스크는 피(Fee)가 일반적으로 "우상에게 바친 음식"에서 우상 신당 안에 있는 먹은 음식까지, 우상에게 바친 음식)이란 용어의 의미론적(semaniric)범위를 좁히는 방식에 의의를 제기한다. 그는 정당하게 " eidolotuta" 단어의 의미와 특정한 맥락에서 그 대상물 사이에서 구별할 필요가 있었던 음식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용어가 단순히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의미한다는 것과 그리고 각각 사건의 맥락을 찾음으로서 이 고기가 발견되는 곳을 드러낼 것과 고기를 먹은 그 상황이 어떠한가를 주목한다. 이 같은 견해는 Fee의 입장을 훼손시키지 않는다.


이 두 문제에 대한 Fee의 구별은 8장에서 단어 사용의 배경은 그 언급이 신당에서 그 같은 음식을 먹었다는 것을 암시한 사실을 단지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피스크는 앞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10장에서 선포된 우상 숭배하는 행위와 8장에서 바울의 관용을 설명할 수 없다고 제안함으로서, Fee의 견해에 또 다른 반대를 제기한다. Fee 자신은 이 긴장이 해석하는데 어려움의 원인이 된다고 주시한다. 우리는 이 난제로 되돌아 갈 것이다. 피스크의 8장과 10장의 대안적 해석은 "악의 없는 농담과 사회적 관행"으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우상 수배까지를 열거하면서, 이방 신당 축제의 참여가 여러 목적에 소용될 수 있다는 주장에 있는 것이다. 그는 제안하기를, 바울이 걱정하는 바는 고기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앞서 읽는 바와 같이)심지어 고기를 먹는 장소도 아니라,(피의 해석처럼)오히려 식탁의 성격(character)이라는 것이다. 그가(Fisk) 말하는 바와 같이 신당 축제는 종교적인 의식에 초점에 있었고, 참여자는 의식적으로 이방 신들을 인식할 할 때에, 하나님을 자극하는 위험 없이는(without risk of provoking God to "jealous) 그리스도인들은 참여 할 수 없었다(10: 22). 이 두 장 사이에서 명백한 갈등은 "고전 8:10절은 허용될 수 있는 신당의 참여를 묘사하고, 반면에 10: 19-22절은 분명히 출입금지(off limits)로 묘사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러나 어떤 것을 선택하여 읽든지, 모든 주석가들은 8장에서 "양심이 약한 자들"에 의해서 직면한 문제의 성격에 동의하는 것 같다. 8: 1-13절이 특히 신당에서 먹는 것을 반대하는 것을 가리키거나 일반적으로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반대하는 것으로 생각하던지 간에 소위 양심이 약한 자는 양심적인(scrupulous) 그리스도인이라고 추측된다. 말하자면, 그와 같은 사람들은 지나치게 활동하는 양심을 가진 자이다. 그들이 이 같은 방법으로 먹게 될 때에 좋은 믿음 안에서 행위를 가져올 수 없다. 그 같은 식사가 새로운 신앙에 의해서 방해받는 것이라고 믿음도 만일 그들이 그렇게 행한다면 양심에 반하는 행위이다. 적어도 이 구절에서 이 교훈을 말하는 사람들은 그와 같은 행위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양심에 반대되는 행위로 이르게 하고 그러므로 그들은 멸망 받는다는 이유로 삼가 하라고 요구받았다. 예를 들면 J. 머피 오커너는 단정된 문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이방인 형제의 결혼식에 축하하라고 초대를 받았을 경우에, 약한 자 가운데 한 사람이 직면한 딜레마를 인식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는 새로운 신앙으로 그 일을 용납할 수 없다는 근거에서 거절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강한 자가 그와 같은 잔치에 참여하기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그런 식탁에 참여할 수 없다는 확신이 아무리 깊게 뿌리 박혔을 지라도 그는 자기 가족에게 이해시키거나 마음에 들게 할 방법은 없었다. 거절함으로서 그가 사랑하는 가족에게 불필요한 모욕으로 단지 보였다. 그가 가족의 이치에 맞는 바램을 용인했다고 할지라도, 그는 자기의 양심을 거슬렀을 것이며, 그리고 강하 자들이 그 같은 축제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윌리스(W.L Willis)는 동일한 방식으로 말한다: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약한 자들의 양심의 상처는 자기 자신의 행위가 잘못되었다고 평가하며 되돌아 볼 때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는 단순히 먹으라는 강요를 거부할 수 없었다. 물론, 먹을 때 양심의 가책이(pangs)동반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는 단지 먹으라는 강요(명시적이든지 암시적이든지)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어느 쪽이든 양심이 약한 것은 현재의 의미에 상반된다: 어떤 이들은 꺼려하지 않았다. 차라리 사람들은 너무 세밀했다.

월리스가 주목하는 대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약한 자가 그의 양심이 약하기 때문에 행동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한 양심에도 불구하고 실행했다. 바렛트도 약한 자들이 경험했다고 주장된 문제에 대해서 약간 동의하면서 동일한 견해를 따른다.
「고린도에서 일생동안 희생 제물을 먹으면서 항상 그 희생 제물은 우상- 실제로 존재하며 따라서 영적 의미와 힘을 지닌-에게 바친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도 우상 배후에 영적 존재들이 실재한다는 것을 계속 믿었으며 따라서 그 음식이 종교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여전히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리낌(scrupulosity)이 순전히 잘못된 생각에 근거한 경우에도 그 거리낌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먹는 일은 그들의 양심에 위배되는 것이고 그들이 그런 음식을 먹는다면 그들의 양심은 더러워진다(defiled). 그러나 이 모든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다. 바울은 이런 생각을 변호지 않을 것이다. 」

모든 주석가들이 공동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고린도전서 8장의 약한 자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로마서 14-15장의 약한 자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학자들로 하여금 하나를 다른 것과 비슷한 것으로 만들게 된 이 구절을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만일 고린도에서 약한 자들에게 직면한 위험이 자기 자신에 반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상숭배(simpliciter) 때문이었다면, 고린도전서 8장과 10장이 훨씬 더 많은 뜻이 통한다는 것이 나의 제안이다. 우리는 로마서 14-15장을 간단히 살펴봄으로서 시작할 것이다.

Ⅱ. 로마서 14-15장 그리고 고린도전서 8장

로마서 14-15장 그리고 고린도전서 8, 10장 사이에 약간의 접촉점이(특히 단어적인 면에서)있다는 것은 인상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두 교회를 분열시켰던 문제는 매우 다르다는 것이다. 로마의 공동체는 믿음이 약한 자와 강한 자로 로마서 14-15장에 묘사된 대로 적어도 두 그룹으로 나누어 진 것 같다. 그들을 분열시킨 문제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언급된 모든 관례가 유대 음식 규정(dietary laws)과 모두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음식에 대한 구약의 규정을 준수하는 문제가 공동체를 분열시킨 것처럼 보인다.우리가 "믿음에 약한 자"에 대한 관심이 또한 원인이 있다는 가능성을 비록 고려한다고 할지라도, 이 논쟁은 어떤 음식에 대한 용인에 대한 것이 분명하다. 사도의 답변에 대해 자세히 다루는 것은 이 논문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지만, 우리의 목적을 위하여 믿음이 약한 자로서 이 장들(14-15)에서 약한 자의 문제를 기술하고 있는 것이지 고린도전서 8장에 있는 것처럼 약한 양심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로마서 14-15장의 양심이라는 단어는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더욱이, 로마서 14-15장에서 언급된 두 그룹들은 믿음이 약한 자(in faith)그리고 강한 자들이다. 다시 이 말은 고린도전서 8장과 대조되는데, 거기에서 "약한 양심"에 반대하는 자들은(우리가 볼 것이지만) 지식을 가진 자들이다. 이 두 구절이 종종 비슷하게 되었다(동화되었다)(로마서 14-15장의 빛에서 고린도전서 8장을 읽을 수 있다)는 조짐(sign)은 고린도전서 8장을 논의하는데 많은 주석가들이 로마서 14-15장의 용어를 채택하고, 강한 자와 약한 자에 대해서 말한다는 사실에 있다. 예를 들면, 제롬 머피 오커너는 약한 양심에 반대된 그룹에 말하고, 편의상 그들을 "강한 자"로 불렀다. 왜냐하면 그러게 함으로써 가장 자연스럽게 대조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대조일지라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 자신이 사용한 언어는 아니다. 고린도전서 8장의 논의에서 "강한"과 "약한" 이란 용어는 고린도에서 언급된 상황과 로마서에서 언급된 것을 동일하게 봄으로써 독자에게 그 이상의 자극제 역할을 한다. 문제는 현대의 독자들이 "양심의 문제"로서 로마서에서 언급된 문제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로 모든 것을 더욱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로마서에서의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바울의 반응은 고린도 상황과는 그의 반응이 현저하게 다르다는 것을 또한 주시해야만 한다. 로마서 14-15장에서 바울은 원칙적으로 강한 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입장을 찬성한다(cf, 14:20. 모든 것은 깨끗하다). 크랜필드는 "약한 자들에게 초래되는 것과(영향을 미쳤다)는 별문제로 하고 강한 자들의 관습을 바울은 해(harm)로 보았다고 하는 것은 (로마서의)이 부분에서 어떠한 암시도 없다."
사도(바울)는 원칙적으로 이 주장을 다음과 같이 한정한다. ⓐ 다른 사람에게 거슬려서 판결을 내리는 것(passing judgment)에 경고(14:1-13a) ⓑ 강한 자들의 행위가 약한 자들로 하여금 의심의 상태에서 행동하게 하고 그 때문에 죄를 짖게 만든다는 경고(14:13b-23). 이 말은 고린도전서 10:14-22절과 대조된다. 바울은 지식을 가진 자들과 동의하여 자신을 인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우상 음식을 나누는 것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는 행위는 그 자체가 위험스러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귀신들과 교제를 감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8장의 양심이 약한 자들은 누구인가? 첫째, 이 그룹의 더 정확한 묘사다. 본문이 언급하는 사람들은(지식을 가진 자들, 8:10: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은 다른 그룹이(그의 멤버들은 지식이 부족했다. 7절)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이 사람들 가운데서, 그들의 양심이 "약하거나"(7절과 12절), 그들 자신이 "약하다고(9-11절)라고 말한다.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7절에서 이미 이들은 분명히 밝힌다: 이 절에서 바울은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 지식을 갖지 못한다" 라고 말함으로써 이방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4-6)라는 원칙에 따라서 자기의 주장을 한정시킨다. 그러므로 윌리스(Willis)의 말처럼, 그 본문 자체는 우리에게 말한다: 고린도 교회에서 "약한"의 실제적 정의는 지식을 가진 자들이 아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않는 지식은 이전 절에서 언급되었다. 그들은 귀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지식을 가진자 들의 확신을 공유할 수 없었다. 그것을 언뜻 보면, 이 말은 놀랍게 생각될 지도 모른다. 호슬리(Horsley)의 말에 의하면, "초기 그리스도교의 선교의 정황에 있어서 ...다른 신은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중심이었을 것이라는 고백,...진정한 믿음으로의 회심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J.머피 오커너가 주목한 것처럼, "오직 한 분이시며 진리이신 하나님과 우상 숭배 사이에서의 대립은 바울 자신의 설교에 있어서 핵심적 요소였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하게 사도들이 몇몇의 사람들의 결핍에 요구했던 지식이었다. 그러므로 "약한 자"들은 단지 오직 하나뿐인 하나님이란 지적인 확신이 감정적으로 아직 충분하게 이해하지(동화되지) 못했던 이방인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들은 자기 신들을 이 신들이(전에는 참으로 실제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사실상 아무 것도 아니라고 믿게 할 마음이 나질 않았다. 그런데 그 위험은 무엇인가? 그 위험은 두 곳에서 윤곽이 드러난다. 7절이 첫 번째이고 그 다음은 9-10절이다. 7절에서 우리는 이 사람들이 너무나 우상에게 익숙해 있어서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인 줄 알고" 그 음식을 먹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표현은 흥미진진하다: 그것은 단지 그들이 우상의 음식을 먹은 것이 아니라, 우상의 음식인 줄로 알고 먹었다는 것이다. 피스크가 주목하는 것같이, 이 사실은 그들이 먹는 마음의 태도(attitude)를 가리킨다: 그들은 우상에게 바쳤던 것을, 또는 그것들을 기념하여(for them) 먹어왔던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 지식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남아있다. 약한 자들이 이 음식을 그것의 종교적인 중요성을 알고 먹었다는 것이 왜 문제인가? 이것이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그 직접적인 대답은 그들의 양심이 더럽게 된다는 것(defiled)이지만, 이 구절의 의미는 그렇게 분명치 않다. "지식을 가진 자"들은 원칙적으로 우상 음식에 관하여 그들의 자유가 약한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지키라는 경고를 받았을 경우에, 이 위험성은 더욱 정확하게 9-10절에서 묘사되고 있다. 다시 로마서 14장(13절과 20절)과 문자적으로 평행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이 우리를 오해하도록 인정해서는 안 된다. 문자적 평행으로 언급된 문제들이 동일하다?? 것을 의미하지 않는??. 어떤 사람의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을 일으키는 하나 이상의 방법이 있다. 만일 약한 자 가운데 한 사람이 지식을 가진 자 가운데서 한 사람이 우상의 신당에 앉아서 먹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약한 사람일지라도, 그의 양심은 우상 제물을 먹을 용기가 생기게 될 것이다(10). 지식을 가진 자의 행위가 이런 식으로 약한 양심을 가진 자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12절), 결과적으로 그 사람은 멸망당하게 될 것이다(11절).약한 자들이 결과적으로 이르게 된 위험은 그 우상숭배라는 것 나의 제안이다. 사도(바울)의 관심은 신당 식사에 (8:10)참여하는 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확신이 이 지식이 없는 자들을 마찬가지로 같은 행동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위험은 이방신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그런 지식이 부족한 자들은 정확하게 우상 제물(이방신들에게 바쳐졌던 음식으로)로서 이 음식을 먹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그룹들 모두는 이 식사에 참여했더라도 그 음식(고기)은 각자에게 다른 의미가 있다. 지식을 가진 자들에게 있어서 신당 식사는 단순히 사회적 행사(일) 일 수도 있지만, 약한 자들에게 그 식탁을 역시 하나의 종교적 의식으로 생각했다. 사도 바울의 관심은 약한 자가 자신들의 깊게 지속된 확신들에 상반 대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가 종교적 행위로서 그와 같은 희생제의 식탁에 참여하도록 인도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제안이다. 그런 행위는 순전한 우상 숭배로서 단지 설명될 수 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해결책에 이르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이 본문을 로마서 14-15장과 유사하게 봄으로써 문제를 혼동시킨다.
예를 들면 H. 콘첼만은 약한 자의 안목에서 보면, 신들(god)은 아직도 능력자이고 그들이 순종함으로써 신들을 숭배한다는 사실은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주장은 여기서 나의 제안과 일치한다: 순전한(pure and simple) 우상 숭배는 약한 자를 이끌어들이는 죄이지만, 콘첼만은 각주에서 로마서 14-15장의 입장에서 문제점을 표현하려고 약한 자는" 믿음에 근거해서 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죄를 지은 것이다(14:23)라고 말한다. 로마서의 관점에서는 (죄를 지었다)표현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로마서 14장에 언급된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고든 Fee는 여기서 " 그것은 그들을 멸망시킨 음식이 아니라, 신당에서 먹을 때 본래 우상 숭배였다 라는 점을 특별히 언급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단지 음식 이였고, 그들에게는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이었다" 라고 말할 때 제시한 해결책에 좀더 근접하게 이르렀다. 그는 고려할 사실로 우상 숭배의 속박에 깊이 빠진 이전의 우상 숭배자라고 덧붙여 말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Fee는 이 문제와 로마서 14-15장에서 "믿음이 약한 자들이 직면했던 것 사이에서 분명한 구별을 하지 못했다. 우리는 피스크가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고기)을 오염시킨 힘은 단지 일반의 식탁의 신앙 체계에 의해서 결정된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만, 오염(더럽힘)이 "나쁜 양심(a bad conscience)"으로 나온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 할 수 있다. 오히려 이 신(神)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이해 없이 먹는 것은 우상 숭배에 빠진다는 사실에 이르게 된다. 지식이 있는 자들은 그들에 대해서 어려움이 없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바울은 후에 그들(지식을 가진 자들)조차도 위험(10: 14-22)이 있다고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8장에서 그의 관심은 그들의 행위가 10장에서 그렇게 강력하게 비판할려고 했던 그들의 우상 숭배의 죄 가운데로 그들의 확신을 같이하지 못했던 자들을 이끌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Ⅲ. 사도의 수사적 전략

만일 지식이 있는 자들의 행위가 우상숭배의 죄 가운데로 "양심이 약한 자"들을 이끌고 있다면, 고린도전서 8장과 10: 14-22절의 어조 사이에서 차이점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피스크(Fisk)의 입장을 따르면 고린도전서 8: 10절은 신당에 참석이 허용된 것을 나타내는 반면에, 10: 19-22절은 분명하게 출입금지를 나타내는 데 이 음조(tone)의 차이점은 사도(바울)의 수사적 전략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제안이다. 주목해야 할 첫째 사실은10: 14-22절은 8장의 논증(주장)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10:19(그러니 내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입니까? 우상에게 바친 제물은 무엇이고, 우상은 무엇입니까?)절의 수사학적 질문으로 8:4(우리가 알기로는 세상에 우상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신이 없다)의 주장을 발견한다. 새로 고려해야할 사항이 10장 20절에서 나타난다: 우상에게 바친 것은 사실상 귀신에게 바친 것이다. 다른 말로하면, 10: 14-22절에서 사도는 8장에서 논쟁이 되었던 것을 집중시킨다(거기에서 그는 이방신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라는 지식을 가진 자들과 의견을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귀신들과 교제의 위험성을 고려하지 못했던 다른 사실을 소개함으로써 더욱 그 주장을 관철시킨다. 그래서 8장의 음조가 자기 자신의 근거 위에, "지식을 가진 자들에게 바울은 대답한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제안이다.
바울은 그들이 소유하라고 요구했던 정확한 지식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후 이 지식을 근거로 해서 다른 사람을 죄 속으로 이끌어 드리는 행동(8: 7-13)을 지적함으로써 이 수용을 제한(한정)한다. 여기서 그의 근본적인 원칙은 이 장을 시작하는 절에서 윤곽을 잡는다: 정확한 지식을 가진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우리는 또한 사랑을 실행에 옮겨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10:14-22절에서, 바울은 다른 근거 위에서 그들의 행위에 문제를 제기한다: 신당에서 먹음으로써, 그들은 감히 귀신들과 교제하는 것이다.
고전 8장과 그리고 10장과 로마서 14-15에서 언급된 것을 대조한 그린필드처럼, "그러나 고린도전서 10장 20-22절에서 "고린도인들의 phnimoi(지혜로움)이 드러나는 위험성 대해 반하는 경고, 즉 그의 실체는 약한 형제들의 실제에서 완전히 독자적이었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서 이 두 장에서 당대의 유대교 문헌에서 발견되는 이방 종교에 대하여 두 가지 다른 입장을 반영한다는 R. 호슬리의 제안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다. 첫째, 이방신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그리고 그들의 예배는 어리석음으로 비웃음을 받았다" 그리고 지혜문학 그리고 필로 뿐 만 아니라 "헬라적 유대 문학(헬라시대의 유대 문학)"에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경향(의향)은 바울이 8장에서 기록한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10장 14-22절에서 바울이 이방 숭배를 비판하는 것은 묵시문학에 의해 제시된 두 번째 전승에 근거한다. 두 번째 전승 가운데서 비록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요, 생명이 없는 인간의 작품이라고 동의한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숭배는 귀신의 예배 혹은 영향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어째든 고린도전서 8장과 10장 그리고 로마서 14-15장 사이에서 대조는 이 점에 있어서 특히 분명하다. 로마서 14-15장에서, 바울은 원칙적으로 "강한 자"에 가담한다. 고린도전서 8장과 10장에서 그는 원칙에 있어서도, 지식을 가진 자들에 편들지 않는다. 그는 "양심이 약한 자"들은 불필요하게 양심의 가책(scruples)을 갖는다고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식이 부족한 그들은 죄에 이르게 되지만, 그것이 당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별문제로 하고, 10장에서 바울은 이방신당에서 먹는 것은 아주 단순하게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명백히 한다.

Ⅳ. 약한 사람의 양심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약한 사람이 "지식이 있는 자들의 행위에 의해서 잘못 인도될 경우에 약자의 양심에 발생하는 일을 묘사하는데 사도는 여러 다른 용어들을 사용한다. 7절에서, 양심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음으로써 "더러워진" 을 알 수 있다. 10절에서, 누군가 지식을 가진 자가 우상의 신당에서 먹는 것을 볼 때, 그의 양심이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을 정도까지 "담력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12절에서, 우리는 "지식이 있는 자들"이 신당에서 먹음으로서 그 때문에 그들의 형제들에게 죄를 짖고 있다는 것과 그들의 양심에 "상처를 입힌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들이 약한 자들을 이끄는 죄가 그 우상숭배라는 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지를 알기 위해서, 양심이란 말 자체 뿐 만 아니라, 이 표현들을 검토해야만 한다. 우리는 "suneideisis" 양심이란 말로 시작할 수 있다. 신약에서 이 말의 사용에 대해 당대의 문학에서 많은 것들이 쓰여졌다. 우리의 목적을 위하여 Paul Gooch 논문이 "양심"의 말을 사용하는 세 가지로 분류함으로써 유용한 출발점이다. Gooch 는 이 말을 사용하는 첫째 방식은 그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로서 간주하는 것이다"라고 제안한다: 즉 어떤 사람들의 평가하에 자기에 대한 의식적인 지식 즉 자각(인식)을 가리킨다. 그는 희랍어"suneidesis"란 말과 라틴어 constentia 둘 다 가장 이른 때에 사용했던 가운데 하나라는 마우러(Maurer)의 결론을 주목함으로서 이 단어의 최소의 의미로서 이것(자각)을 말한다. C.S. Lewis에 의존해서 Gooch는 양심에 대한 두 가지 그 이상의 의미를 구별한다: 내적 증거(우리를 거슬려 증거하는 양심, 우리의 과거 행위에 근거해서 부족한 것을 찾아서 판단을 내리는 것)와 내적 입법자(도덕적 신념과 원리의 저장소) 그리고 법칙의 규정(위법을 기소하고 판결을 내림)등이다. Gooch는 옳지 못한 감정의 인식의 의미에서 고린도전서 10: 23-11:1에서"양심"을 읽을 수 읽는 반면에 고린도전서 8장에서 그 단어는 "자기 인식이라는 최소한도 의미를 지닐 수 있다. Gooch는 지식을 가진 자들의 행위의 결과로서 "약한 자"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일반적 해석에 근거해서 고린도전서 "suneidesis" 의 이 의미에 도달했다. 그에 의하면 문제는 그들의 양심에 가책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먹는데 있다고 추측한다. 즉 죄책감의 결과, 즉 그들이 이전의 관습(행)들이 그들이 그들 자신들이 경험한 대로 고기와 관련된 우상에 의해 더럽혀진 것과 같이 그들에게 늘 여전히 따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러워졌다"(7), "상처를 입히다"(12), 혹은 "세우다"(10)라는 도덕적 입법자의 의미에서 양심에 대해서 말할 수 없으므로, 이 말(word)의 다른 의미를 선택해야 만 한다. 그는 이 두 장 모두에서 바울이 사용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suneidesis에 단 하나의 의미를 공식화할 수 없었던 그의 해석의 결과를 주시함으로서 최소한의 의미를 선택했다. 그러나 내가 제시했던 "약한 자들"에게 직면한 위험에 대해 해석하는 대에 고린도전서 8장 그리고 10장에서"suneidesis" 말에 대한 하나의 의미라고 우리로 하여금 단정하도록 인정하는 이점이 있다. 왜냐하면 만일 약한 자들이 직면한 위험은 양심의 가책(scruples)에도 불구하고 (로마서 14-15 장처럼) 먹음의 그것이 아니라 차라리 신당 식탁에 참여가 용인될 수 있다는 그 믿음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양자의 입장 가운데서 하나는 도덕적 중재자(arbiter)의 발전된 의미에서 suneidesis 있다. Gooch는 이미 8장에서 양심의 의미를 논의한 후에 그와 같은 해석을 거부함으로써 이 사실이 10장에서 양심의 가능한 의미임을 이미 보여주었다.
고린도전서 8장에서 suneidesis" 의미의 문제는 이제 재검토 될 수 있다. 7절에서 처음으로 그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거기서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인줄 알고 지식이 없는 자가 이 음식을 먹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양심이 더러워졌다. 사도는 그밖에 어디에서도 없는 "더럽히다" 란 동사를 사용하지만, 그 상징적인 사용은 계시록 14: 4절에서 예증된다. 거기서 "더럽히다"는 "죄를 짖다"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8:7절 즉 " 그들의 양심이 더러워졌다" 일반적인 해석이 그들 스스로 옳다고 믿는 다는 사실에 반대되는 행위 가운데 이르는 동등한 것으로 생각되는 사실을 보아왔다. 이 같은 근거에서, 양심은 단지 "자기 자신의 인식(도덕적으로)으로 이해 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더러워진 양심을 가진 것은 단지 잘못되어 있는 즉 불안을 느끼는 상황 속으로 이르게 된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로마서 14-15장에서 이 문제들을 가르키는 바울은 "믿음으로 쫓아 하지 않는"롬 14:23)라는 구절을 사용한다. 내가 제시하는 해석은 "그들의 양심이 더렵혀졌다"는 자신들의 도덕적 심판 가운데로 그릇된 길로 이끌려진 것을 제시한 다. 이 같은 의미에서 양심은 다른 사람의 행위에 대한 내적 심판이다: 즉 그것은 미혹으로 이끌려진 상태이다. 10절에서, 우리는 "지식이 있는 자들이" 우상 신당의 식탁에 기대어 앉았을 때 담력을 얻었다(문자적으로 세우다)라고 읽는다. 일반적 해석에 의하면, 자신의 마음속에 그가 잘못된 것이라고 믿을지라도 이 해석에 의하면, 그 사람은 "먹을 담력을 갖게 된다"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해석을 따른다면, "약한 양심"이 세워진다"(담력을 얻다)는 무슨 의미인가? 많은 주석가들이 언급하는 바 같이 ,10절의 "덕을 세우다"는 반어적인(ironic) 것은 당연하다.
지식을 가지고 있는 그들이 신당에서 먹음으로써 제공하는 그 교화(함양)는 전혀 진정한 교화는 아니다. 바울은 10절에서 약한 자가 그러한 희생제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지식을 가진 자들의 행위로 인해서 용기를 받았다고 말했을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약한 자의 양심이 세워진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오히려 반어적 의미인가?
Gooch는 "자아 인식의 양심"의 최소한의 의미를 유지하면서 억지로 "그가 없을 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교화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라고 의역했다. 도덕적 중재자로서 10절에 있는 양심을 이해하는 것이 더 나은 의미를 갖는가? 바울은 그 같은 희생제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이 받아들여지도록 믿는 지식을 가진 자들의 행위에 약한 자가 용기를 받았다 라고 10절에서 말했다.
지식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그것은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 할 수 있었다(비록 바울이 10:14-22절에서 이 주장에 문제시 할 것이 지만) 여기서 바울이 제기하는 문제는 " 약한 자들의 본보기를 따름으로서"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으로(7절)"이 음식을 먹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이 식탁에 참여하는 것은 우상숭배인 것이다.
12절에서 우리는 지식을 가진 자들이 다른 사람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8장의 일반적인 해석의 근거로 볼 때, 이 양심이 어떻게 상처를 생기게 하는가? 그것은 단지 약한 자가 의심을 가지고(상태에서) 먹음으로써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Fee는 제안하기를 이 문맥에서 "상처를 입히다" 의 의미는 그와 같은 사람이 받은 상처에 대해 책임을 지는 데 있다는 것이다. "상하게 하다(상처를 입히다)"는 고통을 주다 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여기서 제시된 해석의 빛에서, 그들의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단지 다른 사람의 도덕적 의식(감정)에 상처를 입히는 것으로 일관성 있게 더욱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만일 바울의 진정한 관심이 우상숭배라면, 그들의 양심은 이방신들의 숭배의 참여가 받아들일 수 있다는 그릇된 신앙으로 이끌게됨으로써 상처를 입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7절의 "약한 양심"이라는 바로 그 말이 Gooch나 Fee가 이해하는 바와 같이 만일 양심이 자기 인식의 최소한의 의미에서 이해된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 맥락에서 사람의 자기 의식이 "약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약한 양심은 우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적절한 지식의 부족이란 것을 7절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 약한 양심은 이 사람들이 적절한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것과 관련하여 가장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다. 바울이 이 사람들이 당연한 지식(계몽)이 부족하다고 지식을 가진 자들에 동의했지만, 그는 그들 때문에 우상 숭배 행위 가운데로 이끌려졌다는 것이 정확하게 그 이유라고 지적하였다. 우리는 suneisesis"라는 말이 고린도전서 8장과 10장 모두 동일한 의미 가운데서 이해될 수 있다. 즉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내부 판단으로 말이다. 결론에 이름에 있어서 나는 C.A Pierce의 영향력 있는 연구 결과에 의견을 달리한다. 피어스는 "신약성서에서 양심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고통스러운 반응이며, 도덕적으로 책임이 있는 것과 같이 그의 창조된 한계를 위반한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연구를 요약한다. 다른 곳에서 그는 인간이 과거 혹은 현재, 과거자신에서 시작된 자신의 죄를 가진 고통스러운 의식으로 양심을 정의한다. 특히 피어스는 그 말(양심)은 과거의 행위 그리고 스스로 주체에 의해서 범해진 행동과 항상 관련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것은 보통 나쁜 것으로 간주되었다. 피어스는 바울이 양심이란 말을 사용함에 있어서 다른 경우나 여기서나 그 사용에 따라서, 그리고 또한 미래 행위을 언급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 결론은 "suneidesis(양심)" 의 언어 해석에 대한 결정적인(fatal)것으로 생각할 지 모르지만, 최근의 학자들은 피어스의 협소한 정의에 문제를 제기하고 suneidesis"의 의미를 접근하는데 다소 유연한 여지를 남기고 있다. 예를 들면, Robert Jewet는 그 말은 상황이 요구하는 데로 그의 제안하는 바가 바뀐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바울이 사실 체계적인 인간학으로 해결하려는 관심을 거의 가졌다고는 볼 수 없고 지적한다. 양심이 자기 자신의 행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외부의 사건으로 이성적인 분별력의 대리자일 때에 계기(원인)가 있었다 라는 피어스의 주장에 의견을 달리하다. 마가렛 트랠(M. Thrall)은 Jewett의 결론을 예상하면서 양심이 결코 미래의 행동에 관련되지 않았다는 피어스의 주장에 의견을 달리한다. 그녀는 이 방법으로 바울이 헬라 세계에 가지고 있었던 피어스가 문헌으로 증명한 일반적 의미를 넘어서서 받아들인 것을 인정하면서, 미래의 행위에 지침을 제공하고 그리고 또한 다른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는 것으로서 양심에 대한 생각이 있음직한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녀는 제안하기를, 사도가 아마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양심이 유대인들 가운데서 율법에서 행해진 대로 동일한 기능이 거슬리게 이방 세계 가운데서 실행한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율법은 이전에 지침을 주었다. 그것은 단지 후에 정죄하는 것은 아니었다.

Ⅴ 결론

이 논문에서 나의 목적은 고린도전서 8:7-13절에서 "약한 양심을 가진 자들"이 직면한 문제에 대한 널리 퍼진 가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모두는 아니지만 이 구절들에 대한 대부분의 저작자들은 "약한 사람이" 이끌려지는 죄는 자기 자신에 반하는 행위라고 추측하다. 나는 이 해석은 이 문절을 로마서 14-15장에 동화시킴으로서 나온 것이라고 논증하였고 이 맥락에서 보면 별 의미를 주지 못한다. 나의 제안은 10장에서 강력하게 비판을 받았던 우상 숭배의 죄로서 약한 자들이 이끌림을 당하는 죄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나은 이해라는 것이다. 특히 지식을 가진 자들의 행위가 약한 자들이 이방 신당 의제의 식탁에 참여하도록 잘못된 판단 가운데로 이끄는 것이다. 왜냐하면 약한 자들은 이방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확실한 신념(확신)이 부족하였고 이 행위는 그들에게 있어서 우상숭배의 행위였기 때문이다. 이 구절들과 10장 사이에서 그 음조의 차이는 바울의 수사학적 전략의 말로 설명될 수 있다. 8:7-13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입장의 근거에서 지식을 가진 자들에게 ?윱鄂煞?, 반면에 10: 14-22에서는 그는 그들의 행위에 반대하는 새롭게 고려해야 할 점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나그네 05-09-12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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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으로 보는 사람이 어렵게 글을 적으셧군요....
성경은 근본이 신본주의 사상임니다
내가 보기엔...(인본주의 사상을 강조 하는 일이 없으면 좋겟음니다)
잇는 그대로 보시는게 좋을것 같음니다
고린도전서 전체 내용이 무얼 말씀 하는것인가...
그 주제와 함께 말함으로 장과 구절 내용이 전개 되어야 할 것임니다
고린도전서 내용을 이야기 하는데 로마서 내용을 왜 꺼집어 내는지....ㅎ
성경을 얘기 하는데 자신의 생각은 삽입할 필요가 없는것임니다
자신의 사상이나 철학은  근본이 인간의 생각이기 때문에 신본주의와 반대이기 때문인 것임니다
고린도전서의 전체적 내용은
성령께서 교회를 견고히 세우시는 복음진리 교훈에 관한 내용인것임니다
잇는 그대로 보시길 바람니다
로마서의 전체내용은
성령께서 세우신 교회를 양육하시려고 먹이시는 복음진리 내용임니다
각기 전하는 내용이 다 다른것임니다
성경전체가 말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구재천 06-08-22 14:18
답변  
  성서학에서인본, 신본주의라는 말은 왕 초보자들이 하는 말이죠. 성서는 결코 하늘에서 떨어진 책이 아니죠, 성서는 교리책이 아니죠.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무전제 성서 읽기의 이런 주장은  근본주의 학교인 워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도 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마르지 않는 샘입니다. 교리적 성서 읽기는 가장 나쁜 성서 해석입니다. 언제나 새로운 읽기가 가능합니다.신약성서는 그레고로마는 거대한 정황에서 사람이 쓴 책입니다. 자신의 사상이나 철학은 이미 신약본뭉에 배태되어있죠. 그런 맥락에서 윤철원의(서울 신대교수, WWW.grnt.org) 사도행전 다시를 권합니다. 
     
구재천 11-06-02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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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ityToday가 선정한 20세기의 책으로 Carl F. H. Henry God, Revelation, and Authority (six volumes)가 있어요. 칼 헨리. [신, 계시, 권위]. 생명의 말씀사에서 번역된 책이 몇권있습니다.  이 책이 성서 귄위문제를 다룬 복음주의적  입장의책입니다. 칼 헨리교수가 서울신학대학교 왔을때 그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저도 성서가 신적궈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인을 믿습니다. 카나다 멕메스터의
마이어(Ben F. Meyer) 의 Critical Realism and the New Testament (Princeton Theological Monograph Series) Pickwick Pubns (January 1, 1989)  도 한번 읽어볼만 한 책이죠.
비평적 분석과 건전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학문하는 자세가 아닐까요. 감사합니다. 살롬
구재천 06-08-22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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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약성서의 형성과 비평에 관해서는 아래의 책이 요긴합니다.

훌러 신학교 복음주의 교수였던 조지 래드 (G. Ladd)의 교수의 신약과 비평을 일독하변 좋겠는데요.. 신약과 비평 외 ,조지 엘든 래드 | 원광연 | 크리스챤다이제스트 | 1997년 3월.

성경 왜곡의 역사 누가, 왜 성경을 왜곡했는가.
바트 D. 에르만 | 민경식 | 청림출판 | 2006년 .

영국 더럼 사제인라티트( N, T. Wright.), The Last Word: Beyond the Bible Wars to a New Understanding of the Authority of Scripture .HarperSanFrancisco (November 22, 2005) 166쪽. 본서도 아주 중요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