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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9-11 23:14
기독교의 존재 이유
 글쓴이 : 조동호
조회 : 636  
   http://kccs.info/reason_existence_christianity.pdf [166]

기독교의 존재 이유

원종호 목사(부산 성지 그리스도의 교회, KC대학교 총장 및 교수)

, 여는 말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기독교의 존재 근거라고 하는 데에 이의가 있을 기독교인은 없을 것이라면 그 십자가의 대속을 통한 인간의 구원이 기독교의 존재이유라는 사실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속죄 사역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이름 이외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412)는 말씀대로 아담으로부터 이 세계의 종말까지 모든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도 성경의 대 원칙이다. 그래서 "아담은 오실자의 모형"(514)이라고 성경은 확증하기도 하는 것이다. 즉 아담이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 이라면, 하나님의 인간 창조 자체가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사역을 이루시려는 것이 그 목적 이었다는 사실도 결코 부인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를 시작하신 분이시고 인간들이 느끼던지 느끼지 못하던지 또는 믿든지 말든지 간에 그 역사를 진행하여 가시는 분이시며 종말에 가서는 그 역사를 마무리 하실 분이 시니까 인간의 역사는 구속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이해 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인간들이 빚어가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자기의 목적대로 섭리하여 가신다고 믿어야 한다. 그 하나님의 목적과 무관한 것들은 아무리 크게 평가 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헛된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계의 역사는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을 구원 하시려는 구원 역사라고 하여야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십자가의 은총을 통한 구원은 아담 때로부터 라고 하니까 실제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그 때로 부터 있을 것이고 십자가 이 후로만 말하더라도 이미 2천여년도 지나왔는데 지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기독교의 존재이유를 다시 묻는 것은 필자 자신도 서글퍼진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를 제기하여야 하는 것은 인간의 역사 세계 안에는 곧 기독교라는 범주 안에는 몇 가지 다른 구원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되풀이 되는 말이지만 기독교의 존재 이유가 인간의 구원이라면 구원론이 두 가지 이상일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 안에 차이가 있는 구원론이 여러 가지가 있다면 그 중의 하나가 옳은 것일 수도 있고 그 전부가 틀린 것일 수도 있다. 부분적으로는 성경적으로 옳은 것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독자들은 이미 짐작 하였으리라고 생각한다. 믿고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1616)는 말씀이 절대 구원의 조건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이러한 글을 쓴다. 물론 필자의 입장이 성경적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러할 경우에는 이글을 읽는 사람은 누구시든지 거기에 대하여 올바른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여주면 수용 할 것이다. 어떻든 기독교 존재 이유가 구원 이외에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일진대 구원론이 틀렸다면 그것은 기독교라고 할 수 없지 않겠는가?

, 인간은 어찌하여 구원이 절대 필요한 존재가 되었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찌하여 인간은 의인은 하나도 없는 죄인이(310절 이하) 되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할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원죄를 부인하는 펠라기우스의 부류에 해당되는 사람이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원초적인 자유의지가 모든 인간에게 살아있다면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죄를 전혀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이 한 사람 이라도 있어야 이치적으로 맞다. 즉 아담에게 주셨던 자유의지가 그 후손들에게도 전혀 손상이 없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모든 인간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될 수는 없어야 하고 만약 참된 자유의지를 주셨는데도 인간 자기들이 범죄를 하여 모든 인간은 의인은 하나도 없는 죄인이 되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 자체가 불완전한 것이라고 해야 하며 따라서 그러한 불완전한 자유를 주신 하나님도 불완전하다는 논리를 피할 길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는 요인이 있었다고 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는 바이지만 만약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의지가 있다면 설혹 어떤 경우 죄를 범하였다가도 그 죄를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참 자유의지이지 자기의죄를 회복 할수 없다면 역시 거기에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원인이 있었다고 해야 한다는 말이다.

, 그것을 원죄라고 하여온다

원죄란 아담의 제일 먼저 지은 죄 곧 선악과를 따먹은 죄를 말한다. 그런데 그 죄가 그의 후손들인 모든 인류에게 전수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원죄를 전적으로 인정하는 어거스틴을 승계한다는 칼빈주의자들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217) 고 하신 말씀대로 죽었기 때문에 복음을 들을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게 되었으므로 그 죽은자들 가운데서 구원시킬 자들을 선택한다는 것이기에 그 선택에서 빠진 사람들은 다 멸망에 떨어지게 된다는 소위 선택과 유기 교리가 되어오는 것이다. 그런데 아예 원죄 자체를 부인하는 자들은 이미 앞에서 약간 언급 하였듯이 펠라기우스 적이기에 수용 불가능이다. 그리고 소위 알미니우스의 영향을 승계한다고 할 수 있는 웨슬레안들은 원죄를 인정하면서도 "선행은총"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원죄 자체는 무효화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들은 믿을 수 있는 의지의 자유가있어서 선택이아니라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여기에 또 다른 한 가지 입장이 있는데 그것은 원죄 자체를 부인하려니까 거기에도 어려움이 있고 그렇다고 믿으라는 말씀이 성경에 있다는 사실을 종합하여 전적 무능과 믿을 수 있는 의지의 자유를 절충 하는 입장이 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반 펠라기우스주의 라고 한다.

, 그렇다면 원죄란 과연 무엇인가?

이제 우리는 실로 원죄가 어떠한 것인가를 물어야 할 단계에 왔다. 아담이 따 먹지말라는 선악과를 실제로 따먹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따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217)고 하셨으니 아담에게는 죽음이 왔다고 하여야 한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셨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학사적으로 보면 이 죽음을 모두가 육체의 죽음으로 보아왔다. 근래에 와서 칼빈주의자들 가운데에 그것을 영의 죽음으로 말하는 자들이 있지만 그것은 칼빈주의의 선택과 유기 신학을 완전히 깨뜨리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자가당착적 모순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죄가 육체의 죽음을 초래 하였다는 입장은 받아 들일 수 없다는 것을 필자는 순성경적 복음 신학이라는 책에서 구체적으로 말하였다. 그 한가지만을 여기서도 말 한다면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인하여 아담의 육체가 죽게 된 것이라면 아담은 그 육체가 죽을 때 까지는 죄인이 아니라는 논리가 성립됨으로 수용 불가능이다. 그러므로 영이 죽었다고 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하여서도 역시 필자는 그 책에서 보다 상세히 설명 하였지만 여기서도 간단하게 한마디를 하겠다. 즉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아담의 육체는 그 날에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날에 죽은 것은 ""이라고 해야 한다.

a, 그렇다면 영의 죽음이란 어떠한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육체는 죽으면 없어진다. 그것처럼 영의 죽음도 영이 없어지지는 것이라면 인간은 시체가 되고 만다. 또한 영의 죽음이 영의 기능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라면 역시 사람은 시체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영의 죽음이란 영 자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 기능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다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지옥에 가더라도 영은 사라지지 않고 있으나 하나님과 영원히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기에 그것을 영원한 죽음 이라고 한다는 사실로 볼 때에도 하나님과의 단절이 영의 죽음이라는 것이 확증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21)는 말씀이나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525)는 말씀이나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31)라는 말씀들은 모두가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 이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b, 그렇다면 이와 같은 영의 죽음은 아담에게 국한 되는가? 아니면 그 후손들에게도 전수 되는가? 를 물어야 한다.

이미 앞에서 지적 하였듯이 그 후손들에게는 전혀 영향이 없다면 모든 인간들이 자기 스스로는 회복이 불가능한 죄인이 되는 데에 대한 해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담의 후손들에게 전수 된다고 해야 한다. 논리 적으로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경적으로 근거가 있는가? 를 물어야한다. 그것은 아담이 130세 때에 "자기의 형상대로 셋이라는 아들을 낳았다"(53)는 말씀이 확증한다. 왜냐하면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피조된 존재인데 그 아담의 후손은 아담의 형상대로 출생된다고 하니까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죽은 아담의 영이 그 후손들에게 전수 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영으로만 이해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이 지으심을 받았다는 핵심적 의미는 인간에게는 영이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모든 동물들에게는 없는 영을 인간에게만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더욱이나 영이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피조 되었다는 것은 영이 있는 존재라는 의미 일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c, 그렇다면 영의 죽음은 전적 무능이라는 의미와는 어떻게 되는가?

그 기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니까 말이다. 그렇더라도 전적 무능이다.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간의 영 스스로는 회복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근본적 이유는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으리라고 하신 죽음을 죽은 것이니까 죽은 자는 자기 스스로는 그 죽음을 다시 살릴 수는 없는 것이 이치이기 때문이며 또한 만약 하나님께서 죽으리라고 하셨기에 죽었던 그 죽음을 인간이 스스로 다시 살릴 수 있다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말이 되고 말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타락은 전적 무능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복음을 들을 수도 없고 따라서 믿을 수도 없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들을 수 있고 따라서 믿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의미를 증거하는 말씀은 인간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311)고 하기 때문이다. 혹시 그것은 범죄 하여 타락하기 전부터 그러한 본성이 있다는 의미라고 이해할지 모르지만 범죄하기 이전의 인간 본래 상태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는 표현 자체가 맞지 않는다. 즉 타락하기 이전의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반대를 사모하는 마음도 있다고 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선과 악 ! 그 어느 쪽에도 더 기우려 지는 일이란 있을 수 없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죽은 영이지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조차 없어졌다면 그것은 영 자체의 기능도 완전히 사라졌다는 의미가 됨으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영의 기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의미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와 같은 사실을 증거하는 다른 또 하나의 사실은 인간이 살아 왔던 곳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떤 형태이든지 간에 종교가 존재 하여 왔다는 것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성 속에는 있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영의 기능은 살아있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곧 복음에 반응할 수 있다는 확증인 것이다. 그러므로 전적 타락을 인정 하면서도 본인의 믿음으로 구원은 이루어진다는 이 두 가지 사실을 공히 인정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복음을 들을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기 때문에 선택과 유기를 구원의 진리로 말하는 칼빈주의는 전적으로 비성경적 구원론이다. 동시에 원죄는 선행 은총으로 인하여 말소되었다는 알미니안들 곧 웨슬레 주의자들도 깨어지고 만다. 왜냐하면 선행은총이란 성경에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가 선악과를 따 먹은 죄가 영의 죽음이라는 것을 확실히 몰랐기 때문이다. 즉 칼빈주의자들은 영의죽음을 육체의 죽음 같이 이해한 것이 잘못이고 전적 타락과 본인이 믿어야한다는 것을 절충한 반 펠라기우스의 입장도 비성경적임이 분명하여 진다. 왜냐하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신 죽음이 무슨 죽음이던지 간에 50% 밖에는 안 죽는 죽음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영의 죽음은 그렇다면 언제 그 영이 다시 살아나는가?

거듭 날 때이다. 거듭 난다는 의미가 다시 난다(born again)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즉 다시난다는 것은 한번 죽었던 것을 전제로 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 거듭남을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35)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믿고 세례를 받을 때에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임을 확증한다. 까닭은 세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합하여 옛사람이 죽고 새 생명으로(63,4) 거듭 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의 죽음이 인간의 타락이라면 그 죽었던 영이 다시 나는 이것이 구원인 것이 너무도 확실하다.

, 닫는 말

그러므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1615-16)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절대 구원의 조건이다. 이 조건과 다른 구원론은 다 비성경적 구원론이기 때문에 기독교라고 할 수 없지 않겠는가를 제기한다. 필자는 전 세계의 기독교를 향하여 이 구원 진리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에게 공개 토론을 제의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환원 운동을 한다는 모든 교회들에게 그것도 우선 한국에 잇는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들에게 세례가 절대 구원의 조건이라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분들에게 역시 공개 토론을 제의한다. 기독교의 존재 이유가 구원인데 그 구원론이 틀렸다면 기독교자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필자가 틀렸다면 당연히 수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