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교회의 선구자 성낙소 목사

지은이 성낙소 목사
옮김이 조동호 목사


성낙소 목사의 저술 가운데는 {자서전}말고도 단기 4286년 6월 10일 인쇄되어 동년 7월 3일 발행된 {신약교회 목회학}이 있다. 편집자는 이 귀한 책을 충남 금산군 추부면 소재 벧엘 그리스도의 교회를 담임하였던 지철휘 목사로부터 기증을 받아 공부할 행운을 얻었다. 본서는 본래 지철휘 목사의 장인 정귀남, 전남 무안군 현경면 평산 그리스도의 교회의 집사가 소유하였던 것이라고 하는데, 책 뒷장 겉표지에는 “평산 그리스도의 교회 1958년 2월 10일 구입 지철휘”라고 적혀 있다. 참고로 지철휘 목사는 평산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회한바가 있다.

{신약교회 목회학}은 서언부터 목차까지가 8쪽, 내용이 282쪽이며, 책의 크기는 가로 세로가 각각 12.5, 17센티미터이다. 서언과 제18장의 판독 및 책 전체의 타이핑 작업은 편집자가 수고하였고, 제2장부터 17장까지의 판독과 노트에 옮기는 작업은 성낙소 목사의 수제자인 김종기 목사가 수고하였다. 김종기 목사는 내용의 일부분을, 아주 작은 부분이긴 하지만, 쉬운 우리글로 풀어쓴 경향이 있어서 편집자가 이를 다시 원본과 축자대조(逐字對照)하여 원본대로 옮겨 적었다. 따라서 현대인들에게는 본서의 판독이 다소 어렵게 느껴질 것이나 그나마 다행스럽게 여길 것은 내용의 모든 명사(名詞)가 한자로 쓰인 것을 한글로 적었고, 정확한 뜻의 파악을 위해서 부분적으로 한자를 병기(倂記)하였다는 점이다. 이 작업을 시도한 김종기 목사나 편집자의 경우는 어려운 한자 판독을 위해서 수없이 옥편을 펼쳐야 했고, 흐려진 글씨 판독을 위해서 확대경을 사용해야 했으므로 수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했다. 더욱이 본서는 활자(活字) 인쇄본이 아니라, 손으로 직접 쓴 필사(筆寫) 인쇄본이다. 따라서 끝까지 판독하지 못한 글자, 특히 한자들도 있음을 밝혀둔다.

본서의 가장 큰 특징은 제목을 '신약교회 목회학'이라고 한 점이다. 책의 제목에서도 그렇고, 내용에서도 성낙소 목사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격이 ‘신약성경교회’란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의 자서전이나 본서를 통해서 볼 때, 성낙소 목사는 당대에 그리스도의 교회운동의 성격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 신학지식에 있어서도 상당한 수준에 있었음을 여러 가지 정황으로 파악할 수가 있다.

{신약교회 목회학}에 나타난 성낙소 목사의 신약교회에 관한 인식은 다음과 같다.

1. 지상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란 인식이 분명하였다.

본서 ‘제18장 그리스도의 교회와 교파교회’를 보면, 다음과 같은 주장을 읽을 수 있다.

첫째, 교회의 이름은 ‘그리스도의 교회’이어야 한다.
둘째, 교파교회의 명칭은 주님의 뜻이 아니다.
셋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넷째,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다.
다섯째,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 몸의 지체이다.
여섯째, 교파적 신앙과 주의를 경계하여야 한다.
일곱째, 모든 교파는 신약교회인 그리스도의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여덟째, 교파분열은 비성경적이다.
아홉째, “신앙하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침례를 수(受)하고, 신자가되면 주일성찬으로 예배하는 신약 중 그리스도의 교회”가 유일(唯一) 교회이다.

2. 신약성경에 기초한 교회, 즉 신약성경교회에 관한 인식이 분명하였다.

책의 제목을 “신약교회 목회학”이라고 정한 것이나 서언(緖言)에서 “신약교회인 그리스도의 교회”란 표현을 쓴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첫째, 교회는 하나요, 그리스도의 몸이며, “사도들이 신봉(信奉)하던 그 신경(信經)과 그 교리(敎理)와 그 신학(神學)을 성경그대로 고수(固守)”(제3장, 2절)하는 신약성경교회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둘째, 교회는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실천, 즉 사도전통을 모본(模本)하여야 한다는 성경해석학적 인식이 분명하였다. 특히 성서 중 신약시대의 신앙교리를 강조해야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교회가 주님의 성훈(聖訓)과 사도들의 교훈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제3장, 3절, 3조).

셋째, 교회의 조직과 치리는 인위적인 교리를 배척하고, 신약교회 교리는 성서중교리(聖書中敎理)로 할 것을 강조하였다(제3장, 3절, 3조).

넷째, 그리스도는 교회는 ‘성경이 명한대로’ 혹은 ‘하나님이 명한 대로’ 따라야 한다는 신념(信念)이 철두철미(徹頭徹尾) 하였다.

    聖書를 減하지도 말고, 異點을 加하지도 말고, 新約書中에 있는 그리스도의 敎會로 還元하야 一敎會가 되도록 祈禱하며, 役事할지니다(제18장, 3절).

    우리가 聖經中에 있는 聖禮를 行할 時에는 聖經中에 記한 法을 依할지니, 何敎派立法이나 何人의 意見이나 方便을 推尋하지 말고 聖書에 根據하야 如何히 할지니라(제12장, 2절, 3조, 2).

3. 그리스도인 침례(Christian Baptism)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첫째, ‘제12장 목회자와 성례급예식(聖禮及禮式), 제2절 침례(浸禮)’에서 약식세례는 서기 753년에 시작된 것으로써 “일종(一種) 허명(虛名)의 의식화하여진 것”이므로 “차(此)는 성경위반이다.”고 하였다.

둘째, 침례는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깨달아 주님을 믿고 과거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신앙을 고백한 후에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誰던지 福音을 聽하고, 覺而信主하고, 過去 不信 不義 不法 不行과 其他諸般 罪惡을 眞心으로 悔改하고, 信仰告白하고, 浸禮를 受할 수 있고(제12장, 2절, 1조).

셋째, 침례는 죄로 물든 육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고, 물속에 장사하였다가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함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말씀의 젖을 먹고 성장하여 성결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罪의 몸는 十字架에 釘死하고, 水中에 葬事하였다가 主任의 復活에 合하야 水과 聖神을 重生(新生)하야 上帝의 子女로 道의 乳으로 長成聖潔하나니(제12장, 2절, 1조).

넷째, 침례는 주님께서 친히 받으시고, 합당하게 여기셨으며, 십자가에서 고난의 침례를 받으신 후에 승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주신 대(大) 사명(使命)이며, 친히 아끼시고, 세우시고, 명령하셨으므로, 인간이 감(敢)히 변개(變改)치 못할 성례(聖禮)임을 피력 하였다.

    浸禮를 主께서 當身이 親愛하시고 立하시고 命令하였으니 人間으로서는 敢히 變치 못할 것이오, 變치 못할지니라(제12장, 2절, 2조).

다섯째, “침례는 기독교의 구원방법에 있어서 중대한 성례(聖禮) 중(中) 일(一)이” 된다고 하였다. 한 생명(生命)이 세상에 태어나기까지에는 수정, 배아, 태아, 출산, 성장의 과정을 차례로 거치게 된다. 수정만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고, 배아단계나 태아단계만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수정부터 출산까지 모든 과정이 필수적이다. 또 출산만 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죄(赦罪)의 구원도 믿음만으로 혹은 회개만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고, 신앙고백하고, 침례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야 한다. 성낙소 목사는 이런 뜻으로 “침례는 기독교의 구원방법에 있어서 중대한 성례(聖禮) 중(中) 일(一)이” 된다고 하였다.

    救援이 곧 赦罪이다. 信仰하고 浸禮를 受하는 人은 救援을 得할 것이오 하였으니, 信仰만하면 다 되는 것이 안이오, 浸禮를 受하여야 한다. 又는 “悔改하야 예수 그리스도의 名으로 浸禮를 受하고 罪赦함을 得하라. 然하면, 恩惠의 聖神을 受하리니” 하였으니, 悔改만 하면 다 된 것이 안이오, 浸禮를 受하여야 한다. 然則 信仰하고, 悔改하고, 信仰告白하고, 浸禮를 受하여야, 救援을 곧 赦罪를 得할 뿐만 안이라, 恩惠로 聖神을 受한다고 主任과 使徒 배드로가 有力하게 말삼하시였다(제12장, 2절, 2조).

여섯째, 그리스도인 침례를 “중생(重生)의 침례,” “죄 사함과 성신을 수(受)하는(행 2:38)” 침례로 인식하였다. 또 침례를 받음으로 구원을 받고(막 16:16), 죄사(罪赦)함을 받고(행 2:38), 죄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고(롬 6:3-7), 부활하고(고전 15:29), 중생하고(롬 6:5, 골 2:12, 딋 3:5, 행 2:38), 그리스도로 옷 입고(갈 3:27),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심왕(尋往)하고(벧전 3:21), 성령을 선물로 받는(행 2:38) 유익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의 敎는 主 여호와 하나님 創造主의 말삼이신 그리스도께서 十字架에 犧牲하시고 復活하사 우리 人類를 贖罪救靈의 光明이 照하야 誰던지 그리스도를 믿고 悔改浸禮를 받으면 聖神이 卽時 內住한 重生者가 主의 名으로 祈禱하면 信仰이 점점 長成하야 聖潔의 生活을 할 것이오, 聖神의 結果가 있어야 한다. 異蹟은 赦罪重生의 大하고 聖經에만 있는 異蹟, 요나의 異蹟과 같이 水中에서 重生의 異蹟이다.(제6장, 2절, 8조, 1)

일곱째, 침례의 집행자에 대해서는 반드시 목사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평신도일지라도 신앙생활이 무흠하면 집행할 수 있음을 성서적인 전거(典據)를 들어 설명하였다.

    浸禮 執行者는 浸禮를 受한 者로서 信仰이 聖書中에서 無欠하고, 聖神이 充滿者면 執行할 수 있음. 牧師라도 信仰生活에 聖書的 欠陷이 有한 者는 執禮資格을 喪失하였음으로 執行할 수 없을 것이다. 牧師나 長老나 執事나 平信徒나 聖書的 信仰生活이 無欠한 者가 執行함이 可하고, 牧師만 專行的으로 執行權을 聖書中에 주지 안이하였다(제12장, 2절, 3조, 1).

여덟째, 어떠한 경우에도 약식으로 세례를 베풀어서는 안 되며, 유아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음으로 침례를 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幼兒는 天國에 入할 資格이 有함은 예수님이 證明하셨다(太 18:3). 又난 病中에 主의 福音을 覺悟하고 確實한 信仰과 悔改와 告白이 分明하면, 浸禮를 施할 수 있으나, 危篤中 不完全 意識으로 信主한다는 것으로 로마 天主敎式으로 하면 안 된다. 浸禮가 안이고 略式洗禮는 용容納할 聖書中에 條件이 없는 까닭이다. 囚獄罪人의게 傳道하야 確實한 信仰 悔改가 分明하면, 何人 男女를 莫論하고 獄官의 承認을 請하야 執行할 수 있나니라(제12장, 2절, 3조, 2).

4. 주의 만찬 중심의 주일예배를 강조하였다.

첫째, 일요일을 성찬예배일로 인식하였다(제12장, 3절, 1조). 구약교회의 5대 제법(祭法) 곧 번제(燔祭), 평제(平祭), 소제(素祭), 죄제(罪祭), 건제(愆祭)가 신약교회에서는 찬송, 기도, 헌금, 성찬, 성경설교로 바꿨으며, 안식일 대신 7일중 수일(首日) 즉 주님이 부활하신 주일로 바꿨으며, “주님이 일차(一次) 자기를 희생의 제사를 헌(獻)하사 죄를 속(贖)하시고(히 9:26하)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념하는 주님의 성찬예배로 5대 제전(祭典)을 대신하였다.”고 하였다. 또 “구약예전은 신약의 영자(影子,그림자)니, 할례는 신(身)의 사(事)요, 침례는 신심(身心)의 사(事)이며, 제례는 의식(儀式)이오, 성찬예배는 영(靈)의 사(事)이다.”고 하였다(제12장, 1절).

둘째, 초대교회에서의 주일예배는 떡을 떼기 위한 모임이었다는 점을 인식하였다.

    (3)主의 晩餐 - 主日 禮拜는 初代敎會 創立日로부터 始作한바 主님의 死中復活을 記念하는 無酵餠과 葡萄汁盞으로 主님의 살과 피를 代身하야 祝辭하고 浸禮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參與하야 主님의 十字架 犧牲祭를 記念하는 聖禮이니 初代敎會에서 安息日을 바리고 主日禮拜가 主의 晩餐으로 創立하였다. “七日中 首日에 我等이 餠을 擘하려하야 집集하였더니”(行 20:7). 日曜集會는 餠을 擘하기 위하야 모였음이라. “恒常 使徒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交際하며 餠을 떼여 먹으며 祈禱하기를 務하더라”(行 2:42). 此는 곧 五旬節에 聖神降臨日, 그리스도인 浸禮 始作日, 그리스도의 敎會創立日, 主日禮拜에 聖餐式한 것이다. 그런고로 모든 集會中에 主日禮拜가 此聖禮로 由하야 聖禮中 首位되는 聖會로 嚴守하는 것이다(제6장, 2절, 6조, 1).

셋째, 주의 만찬은 우리 주님이 마지막 유언으로 명령하신 것임을 인식하였다.

    使徒들이 主의 遺言의 命令을 受하였음으로 敎會를 始作하면서 主日인 日曜日集會는 主의 晩餐禮拜로 實行順從한 것을 聖書中에서 明白히 發見하였음으로 우리 그리스도의 敎會에서는 그대로 聖書的으로 主의 命令을 遵行하야 安息日이 안이고 곧 禧日에 神靈과 眞理인 十字架의 記念으로 聖餐의 禮拜를 奉行할지니라(제12장, 3절, 5조).

넷째, 주의 만찬의 집례는 목사, 장로, 집사가 집행할 것이나, 만일 교직자가 없으면 그리스도인들이 집행하여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新約時代 敎會創立日인 日曜日에 主님의 遺言이며 命令을 受한 使徒들이 遵守하야 執行하였고(行 2:42), 바울 使徒도 主께 受한 命令을(고전 11:23) 各敎會에서 執行하도록 하였으니, 牧師, 長老, 執事가 執行할 것이오, 萬一 敎職者가 없으면, 그리스도인들이 主日에 執行하면 된다. 主日은 浸禮 받은 信者가 禮拜한다. 緣故로 初代敎會에서는 安息日 翌日은 七日中 首日에 餠을 擘하는 禮拜集會(行 20:7)하였음으로, 安息日이 廢하고 主日禮拜가 始作된 것이니, 家庭에서도 信者들이 主日禮拜에 餠을 誠意로 擘하야 食하고 上帝를 讚頌하였다. 今日에도 우리 그리스도의 敎會에서 主日은 聖餐禮拜인 故로 牧師가 없는 敎會에서는 平信徒들만 모여서 信徒中의 一人이 集禮한다. 大東亞戰爭時와 6.25事變 當時에 各家庭에서 或防空壕에서 山野江邊에서 主日을 當하면 家族的으로 個人的으로 聖餐禮拜를 主日마다 奉行하였다. 牧師가 없으면 家族 個人이 禮拜하지 못할 法이 聖書中에 無한 同時에 信者가 集禮할 것이니라(제12장, 3절, 5조, 1).

다섯째, 주의 만찬에 참여할 자격에 대해서 논하였다.

    主日은 男女聖徒가 여호와 上帝께 神靈과 眞理로서 聖晩餐禮拜를 奉行하는 것이 聖旨의 禮典이다. 그러나 聖書中에 注意의 警戒가 嚴然하다(고전 11:30-32). 또 그렇타고 해서 主日 聖餐禮拜를 廢할 수 없는 것일 것이다. 然則 聖書대로 資格者는 堂堂히 參與할 것이니라. 1)浸禮를 受한 者로서 信仰生涯中에 있는 者. 2)良心으로 回顧 곧 自醒하고 悔改한 後에야 食하고 飮할 것이오. 3)主의 몸과 피를 分辨하야 十字架의 釘死와 復活을 記念할 者이니라. 以上 三種의 以外에 處地에서는 絶對로 參與치 못할지니라(제12장, 3절, 5조, 2).

제대로 된 신학서적 한 권 없던 60여 년 전, 그것도 6.25사변 중, 성낙소 목사의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한 신념이 이러했을진대 석박사 학위를 가진 목사가 넘쳐나는 오늘에는 그 수준이 어떠해야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 성낙소 목사 정도의 인식을 가진 목회자를 쉽게 찾을 수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깊이 사랑하고 배우고 싶어 하는 한 신학도의 탄식을 들어보자.

    .... 학교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님들을 만나면, 그렇게 깊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해하고 있지 않은 것 같고 (제겐 큰 교만이자 정죄 받아 마땅할 부분이지만), 그리스도의 교회 소속 학생들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지 않은 것을 보면서 그들과의 교제가 망설여지기까지 합니다. (그냥 어린 후배의 푸념으로 이해해 주시길^^) ....

60여 년 전 척박한 한국 땅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고 일궜던 선배 목사들의 열정과 신념은 대단하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은 모두 장로교, 감리교, 순복음교회 등 타 교단에서 환원한 분들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없어서였지만, 왜 오늘날에서조차 우리 가운데서 환원 2-3세들을 찾아보기가 어려운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앓고 있는 가장 큰 고질병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교회를 너무 모른다는 점이고,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해서 아무런 공부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우리의 현실에 비춰볼 때, 동석기, 강명석, 성낙소, 김은석, 이신과 같은 초기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인물들의 역량(力量)이 얼마나 컸는가를 알 수 있고, 오늘의 우리가 그들에 대해 자부심과 존경심을 갖기에 충분하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본서를 읽는 이들에게 신약교회의 선구자였던 성낙소 목사의 깊은 영성과 복음에의 뜨거운 열정이 그대로 전수되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마지않는다.

2010년 2월 25일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소광(素光) 조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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