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1) 속죄하려 시작된 한국사랑이 은혜가 되었다 <2011.10.16 17:32, 국민일보>


지난달 중순 도쿄에서 4시간 거리의 야마나시현 야쓰가다 산중턱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 집을 찾았을 때, 한국 사람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비목’ 피리 연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노무라 목사는 봉선화, 선구자, 애국가 등을 자주 연주한다고 했다.

나는 단 하루도 남한 사람들과 북한 사람들, 특히 북한 어린이들을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다. 아침마다 뉴스에서 일기예보를 할 때마다 한반도 지도와 일기상황도 전해준다. 그때마다 남북한을 생각하며 매일 기도한다.

어쩌면 나는 한국 사람이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한국을 생각하는 것 같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보고 ‘목사님 핏속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뚜렷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렴풋이 드는 한 가지 생각은 일본의 침략에 대한 사죄의 마음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일본의 침략은 국가의 범죄였다. 한국인이나 북한 사람들에게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국가 사죄와 별도로 크리스천으로서, 일본인으로서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한 한국인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늘 남한과 북한 사람, 중국이나 중앙아시아에 있는 고려인들에게 어떻게 사죄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산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나 커다란 문제이기 때문에 절망할 때가 많다. 대신 개인이 할 수 있는 조그만 일이 뭘까 생각한다. 심지어 재난이 닥쳤을 때도 일본인보다 한국인, 조선인(조총련)을 먼저 생각한다. 지난번 일본에 쓰나미가 덮쳤을 때도 백방으로 연락했다. 한국의 백경학(푸르메재단 상임이사)씨, 도쿄에 주재하고 있는 한국 일간지 기자에게도 연락했다. 지진 피해를 입은 남한이나 북한 유학생들을 찾아달라고. 도쿄의 한국 기독교 교단에도 연락해 몇 사람 소개를 받았다. 그래서 센다이에 있는 조선소학교와 미토시에 있는 조선인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도울 수 있었다.

아들 마코토와 딸 메구미가 어렸을 때 난 청계천과 제암리, 파고다공원 등에 데리고 간 적이 있다. 그 후로 이들은 ‘일본의 침략은 잘못됐고 반드시 반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지금은 1년에 여러 차례 휴가를 내고 한국의 푸르메재단의 장애인시설에 가서 봉사를 하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어려운 환경에서 학교를 다니고, 성인으로 성장하고, 청계천 빈민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의지가 강하거나 똑똑해서가 아니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였다. 특히 30대 때 나에게 살아있는 신학교였던 청계천 빈민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이야말로 가장 큰 은혜였다. 난 목사는 한 분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바로 예수님이다. 나는 예수님의 노예일 뿐이다. 하지만 행복한 노예다.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는=1931년 일본 교토 출생. 목사이자 사회운동가. 도쿄수의축산대학, 미국 켄터키성서대학, 남동부기독교대학, LA 바이올라대학, 페퍼다인대학원 등에서 수학했다. 61년 귀국 후 목회를 하다가 68년 한국을 방문, 청계천 빈민의 참상을 보고 충격을 받아 한국 빈민선교에 나섰다. ‘빈민운동의 대부’ 고(故) 제정구 의원을 도와 85년까지 한국을 50여 차례 방문하면서 청계천 판자촌 빈민들을 대상으로 구제 및 선교활동을 펼쳤다. 청계천 관련 사진, 스크랩북, 메모지, 한국지도 등 800여건의 개인 소장 자료를 지난 2006년 서울시에 기증했다. 지금은 일본 야마나시현 야쓰가다산 산골에서 가정교회인 베다니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2) 나를 깨운 어린 날의 슬픈 기억 ‘조선인 차별’ <2011.10.17 21:02, 국민일보>

 
4∼5세 때라고 기억한다. 당시 나는 교토(京都)에 살고 있었다. 하얀 치마저고리에 버선과 고무신을 신은 아주머니들이 많았다. 그들은 주로 머리에 물건을 이고, 양손에는 뭔가를 들었으면서 그렇게 균형을 잘 잡은 채 걸을 수가 없었다. 부모님이나 어른들은 그들을 ‘조센진’이라고 불렀다. 나는 조선 사람들이 하는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어린 시절 그들은 나에게 ‘낯선 사람’으로 기억되었던 것 같다.

당시 교토엔 ‘니시’라는 진(陣)이 있었다. ‘서쪽 진’이란 뜻이다. 일본 전역을 정복한 뒤 조선 정복에 나섰던 도요테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교토에 머물 때 구축한 진지라는 데서 나온 지명이다. 그렇다보니 이곳엔 옛날부터 매춘부와 노동자들이 많았다. 노동자도 하층계급이었지만 그 밑에 있었던 사람들이 바로 조선 사람들이었다.

당시 우리 집은 직물기계를 생산하는 공장을 경영했다. 기계를 만들거나 수리하고, 부품을 판매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조선 사람들이 가끔 돈을 지불하지 않고 부품을 가져간 것이다. 그만큼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부품을 외상으로 빌려갔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선뜻 그 외상을 허락했다.

내가 다니던 소학교 반엔 조선학생이 2명 있었다. 난 1학년 때부터 6학년 졸업할 때까지 늘 그 두 명과 같은 반이었다. 두 명 모두 박씨, 그중 한 명의 이름은 박원장 혹은 박원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둘은 공부도 싸움도 잘했다. 하지만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반의 대표는 되지 못했다. 그 당시는 일본의 대동아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 일본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를 점령했는데 그걸 기념해 학교 이름도 소학교에서 국민학교로 바꿔 불렀다.

전국의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는 전쟁 승리의 선물로 고무공을 나눠줬다. 그렇지만 두 명의 박군은 고무공을 받지 못했다. 나는 어린 나이에도 아주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두 박군이 불쌍하기도 했고, 정부나 학교의 처사에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전쟁이 점점 심해지면서 먹는 문제도 심각해졌다. 무엇보다 입을 것이 없는 게 큰 문제였다. 정부는 교복 대신 학생용 옷을 만드는 천을 무료로 나눠줬다. 그 천은 무거웠고 아주 차가웠다. 일본 어린이들은 예외 없이 그 천을 받았다. 하지만 두 박군에게는 천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 장면 역시 나에게 큰 충격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조선 친구들은 함께하지 못했다. 중학교는 교토 부립(시립)이어서 조선 학생은 입학이 금지됐기 때문이다. 일본이 전쟁에 진 뒤 국내 사정이 어려워지자 내 일본 친구 한 명이 도쿄 신주쿠로 가서 신문을 팔았다. 그때 마침 ‘6·25 한국전쟁 발발’이라는 호외판이 나왔다. 나는 아주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당시는 일본 사람들도 먹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을 만큼 어려운 상황이었다. 조선 사람들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 호외판을 보며 나는 문득 ‘두 박군은 어떻게 됐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소학교 졸업 이후 지금까지 두 사람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어쩌면 지금 내가 조선 사람들, 특히 북한의 어린이들과 할머니들을 매일 생각하는 것은 내 한구석에 그런 슬픈 추억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3) 아버지의 유언 “난 주님 품으로… 너희도 믿음을”<2011.10.18 17:51, 국민일보>


내가 자란 교토(京都) 니시진은 직물 생산으로 유명했다. 지금도 최고급 기모노를 만들어내는 곳이다. 우리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직물 기계를 만들었다. 그 니시진 안엔 교회가 있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거기 있는 교회를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보게 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노무라 지이치(野村治一)였다. 아버지도 유년시절부터 그 교회를 다녔다. 아버지는 나중에 도시샤(同志社)대학에서 행정법학 교수가 됐다. 당시 일본 교계에서는 빈민·노동운동을 펼치던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는 고베뿐만 아니라 오사카, 교토에서도 사회복음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한국의 서남동 박사와 같은 역할을 했던 셈이다. 아버지 역시 가가와 목사의 사회복음운동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일본의 군국주의, 국가권력을 늘 비판했다. 당시 획일적인 사회 분위기로 봐서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아웃사이더’였다.

어머니 노무라 가츠코(野村勝子)와 아버지는 한 교회에서 같이 주일학교를 다녔다. 그만큼 두 사람은 친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는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다. 집안 배경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아버지 집안은 부르주아였지만 어머니 쪽은 아주 가난했다. 우여곡절을 거쳐 두 사람은 결혼했다. 할아버지는 어머니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냉대의 강도는 셌다. 나 역시 어머니의 아들이라고 해서 바보 취급을 당했을 정도니까. 그것은 또한 우리 집안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봉건주의 시대 일본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랬다.

아버지는 1936년 여름, 내가 다섯 살 때 돌아가셨다. 폐결핵 때문이었다. 당시엔 폐결핵은 곧 죽는 병이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면서 이런 말을 남기셨다. ‘나는 지금까지 좋은 인생을 살았다. 돌아보면 감사한 일뿐이다. 나는 하나님의 품으로 간다. 너희들도 하나님 믿는 신앙으로 굳건히 인생을 살아야 한다.’

아버지는 아주 훌륭한 분이었지만 내 기억 속엔 아버지에 대한 부분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단지 기억나는 일은 만두 심부름을 갔다 와서 꾸지람을 들었던 것밖에 없다. 아버지의 친구들은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유명한 분들이 많았다. 그중 다바타 시노부 같은 헌법학자는 평화헌법을 지켜가자는 운동에 앞장섰을 정도로 명망있는 학자였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기독교 사회정의에 대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 영향 때문에 어릴 적부터 당시 조선 사람들에 대한 일본의 차별, 멸시를 피부로 느끼게 됐던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는 노무라 패밀리에서 완전 제거되셨다. 나와 여동생도 어머니를 따라 빈민가 동네로 이사를 가야 했다. 그곳이 바로 교토의 니시진이었다. 거기서 일본인도 그랬지만 조선인들의 혹독한 생활을 직접 목격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신학 교육의 첫걸음이었다. 만약 그러한 기독교의 영향, 니시진에서의 경험이 없었다면 나는 무신론적인 사회운동가가 되었거나 역사의식이 전무한 이론가가 되었을 게 뻔하다. 여동생은 나중에 양녀가 되어 도쿄로 옮겼다. 그 후로 지금까지 도쿄에서 살고 있다. 여동생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 여동생은 나보다 소신이 더 뚜렷하다. 지금도 한국의 푸르메재단과 함께 일본이 가져간 한국의 유적을 되돌리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4) 日 소비자운동 기수 어머니… 노벨상 후보 올라<2011.10.19 17:50, 국민일보>


어머니 노무라 가츠코는 아주 비범했다. 나를 외가에 맡겨놓은 채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 신학부에 입학했다. 그때가 1936년이었다. 당시만 해도 여자가 대학에 들어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4년제 대학은 더 그랬다. 어머니로서는 대학을 가기 위해 나를 포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한국 유학생이던 서남동 박사와 함께 공부했다. 서 박사는 얼핏 보면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민중신학 책을 쓰기도 하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일본에 와서 우리 가족을 방문하기도 했다. 서 박사는 한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많은 책과 서류, 정보를 일본에서 접했다. 서 박사와는 이후 한국과 일본에서 여러 차례 만나 교제했다.

어머니는 신학부에 다니는 동안 미국 선교사의 집에 머물면서 타이프 치는 일을 했다. 그래서인지 내가 초등학교 때는 경찰이 내게 와서 어머니에 대해 많이 묻기도 했다. 책 속에 혹시 무전기가 숨겨져 있지 않은지 뒤지기도 했다. 나중에 내가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받았던 감시와 수색을 당하는 것과 같았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이었으니까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일체 권력과 타협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대학 졸업 후 도쿄로 갔다. 그때만 해도 도쿄에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동 제한 때문이다. 어머니가 도쿄에 간 것은 가가와 도요히코의 노동자운동, 소비자 조합운동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대부분 일본인들이 군수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자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었다.

일본이 전쟁에서 진 뒤엔 맥아더 장군이 일본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맥아더는 친미(親美) 일본인들을 리더로 세우려고 했다. 그리고 일본의 각계각층 지도자들을 미국으로 초청해 교육을 시켰다. 미국이 민주주의와 경제 강국이라는 걸 은연중에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맥아더는 일본 여성 10여명을 뽑아 미국으로 보냈는데 그중에 어머니도 포함됐다. 어머니는 미국에서 몇 개월 뒤 돌아왔지만 결코 소신을 바꾼 적이 없다. 미국에 대해 얘기할 때 좋다는 것은 좋다고 하고 나쁜 것도 나쁘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 후 중국과 러시아의 여성단체들로부터도 초청을 받았다.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서도 호불호를 분명히 했다. 결국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어느 나라도 어머니를 이용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만큼 어머니는 독립심이 강한 여성이었다.

어머니는 미국 소비자운동 지도자인 랄프 네이더를 아시아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네이더는 제너럴 모터스(GM)를 비롯한 미국 자동차 회사들에 대해서도 ‘안전성이 떨어지는 자동차를 생산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책을 썼다. 어머니는 그만큼 노동자, 소비자, 여성 등을 위한 실제적인 운동을 벌였다. 어머니는 그 후 한국의 소비자운동단체로부터 초청을 받았고, 1993년엔 가나안농군학교로부터 일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5년엔 노벨상 후보로도 올랐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크리스천 사회정의운동을 배웠다면 어머니로부터는 그것을 어떻게 실천하는가를 배운 셈이다. 어머니는 사회운동은 입술이나 머리만이 아니라 손과 발로 하는 것임을 내게 가르쳐주셨다. 어머니는 지난해 9월, 99세의 나이로 하나님 품에 안기셨다. 어머니의 유언대로 유해를 태평양 바다에 뿌렸다. 지난번 지진과 쓰나미 때문에 아마 그 유해들이 골고루 섞였으리라 생각한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5) 내 생애 최고의 만남… 전라도 친구 ‘김오남’ <2011.10.20 20:48, 국민일보>
 


어머니가 대학을 다니는 동안 나는 외가에 맡겨진 채 외로운 나날을 보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친절하고 아주 좋은 분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소풍을 갈 때도 ‘도시락 싸주세요’라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전쟁통이라 집안 사정이 빤했기 때문이다. 교토에서 도쿄 쪽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무작정 기다린 날도 많았다. 교토의 경승지 아라시야마에는 가쓰라카와라는 유명한 강이 있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너는 나무상자를 타고 떠내려왔다. 너의 진짜 집은 저 강 상류에 있다”고도 했다. 실제로 나는 강가에 가서 “내가 태어난 집이 어디일까” 하고 찾아본 적도 있다.

나는 늘 혼자였기 때문에 동물을 매주 좋아했다. 집을 잃은 개나 고양이, 심지어 뱀이나 바퀴벌레까지 키울 정도였다. 동물은 배반하지 않았다. 애정을 주면 반드시 그 애정은 다시 돌아왔다. 내가 도쿄의 수의축산대학(일본대학 축산과 전신)에 진학했던 이유도 그만큼 동물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거기서 ‘김오남’이라는 한국 친구를 만났다. 그는 전남 출신으로 유학을 왔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돌아가지 못하고 나와 같이 살았다. 그는 전형적인 전라도 사람이었다. 수수하고 정이 많았다.

그를 만난 것은 내 생애 최고의 행운이었다. 당시 도쿄엔 메이지대학과 같은 이름의 메이지학원대학이 있었다. 유명한 미션스쿨이었다.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었는데 김씨와 나는 거기서 두 달 정도 아르바이트를 했다. 큰 벽을 페인트칠하고 청소하는 일이었다. 김씨는 조선 사람이라는 이유로 아파트를 임대받지 못하는 등 숱한 차별을 받았다. 나는 그와 함께 지내면서 그 같은 차별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내 생활도 갈수록 팍팍해졌다. 물질뿐만이 아니라 내면도 공허하고 메말라갔다.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마침 일본인 친구가 전기공업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친구한테 찾아갔다가 청산가리를 훔쳐와서 단번에 마셔버렸다. 공업용 청산가리였기에 금방 죽지는 않았다. 정신을 잃고 있는데 미국 지프차를 개량한 경찰차가 왔다. 병원으로 이송당한 뒤 다 토해냈다. 그때는 죽지 않은 게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사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고, 죽는 것마저도 힘든 상황에서 김씨가 곁에 있는 게 그나마 큰 힘이 되었다. 김씨는 6·25가 끝난 뒤 한국으로 돌아갔다. 제주대 교수를 하다가 전남대로 옮긴 뒤 몇번 만나다가 연락이 끊겼다. 전남대 수의학과에 전화했지만 통화를 할 수 없었다. 지난해 5월 광주 5·18 기념관에서 행사가 열렸는데 ‘혹시 김오남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으로 급하게 비행기 티켓을 끊어 광주를 찾아갔다. 행사장엔 김씨가 없었다. 전남대에 가서 김씨의 사진을 보여주며 근황을 물어봤지만 이미 은퇴를 했다고 했다. 다시 길을 물어 찾아갔더니 어떤 목사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슬프고 허탈했다.

언젠가 김씨가 내게 부탁한 게 있다. 자신이 일본에 있을 때 본 건데, 나무에 백합화가 피는 신기한 식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언제 한국에 올 때 그 씨를 꼭 가져와달라고 했다. 일본에서 겨우 씨를 입수해 봉투에 넣어 제주도로 가져간 적이 있다. 하지만 통관에 걸리고 말았다. ‘한국에 줄 선물’이라고 간곡하게 부탁해 겨우 통관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김오남은 그 씨를 분명 어디에 심었을 것이다. 전남대에는 없었다. 지금 한국의 어딘가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6) 美유학 교훈 ‘사람을 섬김으로써 주를 사랑하라 <2011.10.23 19:22, 국민일보>


집안도 어려웠지만 수의과대학에서도 별로 희망을 발견하지 못했다. 교수는 군의(軍醫)로 갓 제대한 이였다. 모든 게 군대식이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라 실험용 동물이 거의 없었다. 동네를 찾아다니며 개를 훔쳐오는 게 일이었다. 마취약이 없어서 개를 두들겨 패서 살아 있는 채로 해부를 했다. 학교 다닐 마음이 들 리가 없었다. 그때 마침 한 선교사가 내게 “미국 가서 성경공부하고 오지 않을래?”라고 물었다. 당시는 일본 사람이 외국 유학 가는 게 불가능했다. 겨우 비즈니스맨 정도만 정부 허락을 받아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선교사의 추천과 후원으로 미국행 길이 열렸다.

고베에서 미국행 화물선에 올랐다. 배는 너무나 지저분했다. 어쨌든 40일간 그 배를 타고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한 뒤 다시 기나긴 버스 여정을 거쳐 켄터키성서대학(남동부 기독대학의 전신)에 도착했다. 유학생활은 내 생각과는 딴판이었다. 돈도 없었고 말도 안 통했다. 주말이면 친구들은 다 놀러나갔지만 나는 혼자 기숙사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주말에는 식사도 나오지 않았다. 나갈 수 있는 차도 없었다. 혼자서 기숙사에 남아 할 수 있는 일은 공부밖에 없었다. 너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나중엔 영어사전이 다 닳을 정도였다.

어느 날 나를 켄터키성서대학에 추천해 준 선교사가 학교로 찾아왔다. 그 선교사는 “치과대학에 가면 선교의 길이 얼마든지 열린다”며 치과대학 입학을 종용했다. 내가 말을 듣지 않자 그 선교사는 후원을 끊어버렸다. 심지어 자기가 대준 뱃삯까지 다 내놓으라고 했다. 돈이 없었기에 일본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더 이상 돈을 대줄 사람이 없으니 학교를 다니는 것도 불가능했다. 정말 최악의 상황을 맞은 것이다.

그때 프랑코 마리노라는 교수가 내 기숙사방에 들어왔다. 주말인데도 나가지 않고 혼자 있는 모습이 이상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내 기숙사 방을 찾아온 백인은 그 교수가 유일했다. 그는 내게 이런저런 것을 물어봤다. 예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차근차근 설명해줬다. 얼마 후 마리노 교수는 눈물을 흘리면서 내 손을 잡고 기도를 해줬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내가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걸 경험했다. 마치 큰 망치로 얻어맞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내게도 분명한 믿음이 생겼다.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내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학비 문제는 마침 그 교수의 소개로 일본에서 선교사로 사역하던 자녀를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그는 내 스폰서가 돼 비자연장 문제까지 해결해줬다. 또 다른 장로 한 명은 자기의 이름을 밝히지 말라면서 매달 나에게 용돈을 조금씩 넣어주었다. 학교 등록금도 그런 손길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 후로 난 더욱 열심히 공부했고, 나중엔 과 수석도 했다.

내가 켄터키성서대학에서 배운 것은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이것을 평생 실천할 수 있을까’를 늘 생각했다. 이것이 내게는 굉장한 도전과 자극을 주었다. 지금까지 나는 하나님께 쓰임 받을까를 생각하기보다는 내 인생을 비관하며 죽기만을 바랐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맡기셨던 것처럼 아픔이 있더라도 다른 사람을 위해 나를 주는 것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7) 동경하던 나라 한국서 1968년 드디어 초청장이…<2011.10.24 20:54, 국민일보> 


나는 1957년 미국 바이올라대학에 다닐 때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안수를 받으면서 복음의 황무지와 같은 일본이나 선교지 뉴기니에 가서 복음을 전할까 생각도 했다. 남미 에콰도르에 기독교방송국이 있었는데 거기서 방송국 담당자가 되어 달라는 말도 있었지만 거절했다. 당시 안수를 해주던 목사는 내게 ‘사람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고 얘기했다. 그것은 내가 켄터키성서대학에서 배운 것과 꼭 같았다. 내가 지금까지 특정 교단에 소속돼 있지 않은 것도 조직이나 돈으로부터 독립해 마음껏 사람들을 섬기고 싶은 생각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독립 복음전도자’인 내 신분이 그렇게 자유롭고 행복할 수가 없다.

나는 페퍼다인대학을 거쳐 1961년 일본으로 귀국했다. 일본에서 목회를 하면서도 늘 한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조선인들을 보고 경험했던 일, 김오남씨와의 만남 등을 떠올리며 어떻게 해서라도 한국에 한번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기회가 오지 않았다.

1968년 여름, 마침 내가 아는 한국인 중 한 사람이었던 김세복씨로부터 초청장이 왔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테네시주의 한 교회에 요청해서 김씨를 미국 교회의 목회훈련생 자격으로 초청해 영주권을 얻게 한 적이 있다. 당시는 한국인의 외국 유학도 일본만큼이나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를 초청했을 당시 김씨는 당시 서울 그리스도대 동문회장을 맡고 있었다. 김씨는 나에게 ‘일본 교회 목회자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해 달라’고 공식 초청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안 가고 나 혼자만 가게 되었다.

김씨의 안내로 수양회도 참석하고, 또 청계천 빈민선교 현장도 탐방하게 되었다.
그때 지금은 고인이 된 제정구씨도 만났고, 김진홍(두레교회) 목사와도 교제하게 되었다. 청계천은 서울 도심 개발로 밀려난 사람들이 한꺼번에 집단 거주하고 있었다. 썩은 냄새가 나는 청계천변에서 판잣집이나 땅굴을 파고 사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끔찍하다’는 느낌과 함께 일종의 소명의식 같은 것을 느꼈다. 나는 그때 이후로 1980년대 중반까지 50여 차례나 일본과 서울을 오가며 청계천 빈민사역을 돕고 해외에 알리는 사역을 했다.

한번은 청계천에서 자살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경찰도 교회도 자살한 사람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경기도 남양주 활빈교회 몇 사람들과 함께 대나무에 끈을 매서 겨우 시체를 끌어냈다. 시체는 며칠을 물속에 있었는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상태였다. 눈이 튀어나와 있고, 배가 부풀어 올라 있었다. 사람들은 시체를 씻을 물도, 장사를 지낼 돈도 없다고 했다. 당시 물 20ℓ는 3주간의 임금과 맞먹었다. 어쩔 수 없이 내 돈으로 물을 사서 몸을 씻겼다.

그런데 장사를 지내려고 화장터에 갔더니 사망진단서가 없다고 안 된다는 것이었다. 병원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화장터로 달려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누군가가 ‘여권에다가 일본돈 1만엔을 넣어서 의사에게 건네주면 사망진단서를 특급편으로 보내준다’고 귀띔해줬다. 얘기대로 했더니 사망진단서는 바로 그 다음 날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돈과 사망진단서, 여권을 넣어서 경찰에 갖다 줬더니 곧바로 사망확인서를 떼어줬다. 다시 시체를 리어카에 태워서 화장터로 가서 화장을 했지만 이번엔 묘가 없었다. 청계천 다리 위에서 그 뼛가루를 뿌리며 나는 부르짖었다.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8) 청계천은 내 신앙의 최고 스승이자 신학교 <2011.10.25 17:51, 국민일보> 

1974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의 긴급조치 1호가 발동됐다. 입국도 힘들었고, 한국에서의 활동도 쉽지 않았다. 그해 9월 나는 김진홍 목사의 안내로 겨우 청계천 빈민가를 심방할 수 있었다. 한 집을 찾았는데 실내가 캄캄해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방은 창문이 없어 사방이 꽉 막혀 있었다. 방에서는 ‘우우우’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캄캄한 방에 조금 앉아 있으니 차츰 실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좁은 방에 한 소녀가 대각선으로 누워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엄마는 같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안돼 서 있어야 했다. 엄마는 무당집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김 목사는 갑자기 여자 아이의 치마를 확 들췄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안 보려 했지만 결국 그 끔찍한 장면은 기어이 내 눈에 들어오고야 말았다. 소녀의 옆구리 밑과 무릎 부근에는 하얀 뼈가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파리 떼가 까맣게 소녀의 하얀 뼈를 덮고 있었다. ‘우우우’는 다름 아닌 파리 떼가 소녀를 공격하는 소리였다. 파리 떼가 소녀의 다리에 알을 낳았고, 구더기가 생기고 그 구더기가 살을 파먹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난 이거야말로 생지옥이라고 생각했다. 김 목사는 자신의 손으로 구더기를 하나하나 다 잡아냈다. 자꾸만 살 속으로 파고드는 구더기를 끄집어내기 위해 손에 침을 바르기도 했다. 나도 그 광경을 눈뜨고 볼 수만은 없었다. 손에 침을 바르고 김 목사가 하는 대로 구더기를 한 마리 한 마리 끄집어냈다. 잡으려고 할수록 자꾸만 살 속으로 파고드는 구더기를 잡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소녀에게 영어로 “하우 아 유?”라고 물었지만 소녀는 묵묵부답이었다. 대신 소녀의 허연 눈동자가 옆으로 쏠린 채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죽어가는 가련한 소녀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속으로 또 다시 울부짖었다.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난 거듭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결국 두 달 뒤 죽고 말았다. 그 소녀의 죽음, 눈동자는 나에게 숱한 질문을 던졌다. 평생 누구를 위해 살 것인가. 어떤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인생인가. 예수님은 그 소녀의 눈을 통해 나를 보셨던 것이다. 그 소녀를 통해 내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 소녀의 눈동자를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 소녀의 눈동자를 생각하면 지금도 내 모습이 한없이 작아진다.

사람들은 보통 날강도나 깡패, 매춘부를 싫어한다. 하지만 난 그런 사람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들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랑의 대상들이다. 그 소녀가 나를 다른 각도로 사람들을 볼 수 있게 했다. 나는 힘없고 간절했던 그 소녀의 눈망울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 신촌이나 서울역의 매춘부들을 감싸 안을 수 있었다. 그 소녀는 나의 스승이었다.

지난 30∼40년 동안 나는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면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뜻을 계속 생각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건지 조금씩 알게 됐다. 누운 채 나를 바라보던 소녀의 눈을 통해,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돈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매춘부들의 눈을 통해, 깡패들의 얼굴을 통해서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보내신 성경 교사들이었다. 나에게 최고의 신학교는 청계천이었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12) 손님 7만5000명에 음식 대접한 아내 요리코 <2011.10.31 17:54, 국민일보>


나에겐 고난도 있었지만 감사한 일이 훨씬 많았다. 좋은 부모님으로부터 좋은 신앙과 사회적 실천을 전수받은 것, 한국 친구를 통해 한국을 알고 사랑하게 된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아내 요리코를 만난 것이다. 요리코가 없었다면 청계천 빈민운동이나 지금의 사역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내는 어느 누구보다도 내 사역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다. 아내는 다른 사람의 나쁜 점은 결코 말하지 않았다. 어떠한 문제 앞에서도 흔들리는 법 없이 항상 긍정적이었다. 아내가 가진 내면의 힘은 나보다 훨씬 강했다.

요리코는 지금까지 1973년과 75년, 2006년, 2010년 모두 네 번 한국을 방문했다. 그녀는 어떤 상대든지 따뜻하게 맞았다. 비판하거나 편견이 일체 없었다. 그러면서도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것에 대해서는 분개해했다. 내 인생이 이렇게 풍요로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아내 요리코 때문이다. 그녀의 포용력 때문에 나 역시 다양한 한국 사람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포용력을 갖게 됐다. 지금 나는 빚도 없고 저금한 것도 없지만 매일매일 감사하고 행복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소개해주신 아내 때문이다. 아내의 지원과 기도가 있었기에 자유롭게 한국을 드나들 수 있었고, 피곤한 몸과 마음이 쉴 수 있었다.

요리코는 1933년 4월 16일 태어났다.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초등학교 때 교회에서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하고 난 뒤 점령군 대장이었던 맥아더의 요청으로 2000명의 미국 선교사들이 일본에 왔다. 나는 그때 학생으로서 그 선교사를 도와 집집마다 교회를 홍보하는 전단지를 돌렸다. 그때 요리코의 가정을 방문하게 됐다. 요리코도 교회에 나왔고,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서로를 알게 됐다. 요리코는 어릴 적부터 인내심이 많고 조용하고 순종적인 여자였다. 나의 미국 유학 기간인 11년을 한결같이 기다려준 그런 여자였다.

그녀는 요리에 재주가 많았다. 어렴풋이 계산해보니 지금까지 우리 집에 온 손님 7만5000명에게 그녀가 손수 음식을 만들어 대접했다. 내가 비올라대학에 있을 때 도쿄의 요리학교에 다닐 것을 권유했고, 아내는 곧이곧대로 내 말을 따랐다. 그 뒤로 그녀는 어느 누가 우리 집을 방문하더라도, 또 아무리 돈이 없더라도 우리 형편에 맞게 손님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법을 터득했다. 그녀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침착하고 긍정적이었다. 내가 일본과 한국에서 사역할 때도 결코 원망의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비록 우리가 가난할지라도 그녀는 전심으로 내가 하는 일을 도왔다. 그러면서도 아내는 그런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게 뭐가 이상한가’라는 반응이다. 남편이 바늘이고 아내는 재봉실이니까 남편이 하는 일을 따르는 게 뭐가 대수냐는 것이다. 내가 하는 것보다 오히려 한 발 더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자 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졌을 때 도쿄의 많은 초등학생들이 지방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일종의 피난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나도 그때 지금 살고 있는 야마나시현으로 강제 이주 조치됐다. 야마나시현은 쌀 생산이 적은 고장이었다. 당연히 굶는 날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어느 농가의 젊은 부부가 자기 집 그늘에서 주먹밥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나와 요리코의 마음속엔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싹텄던 것 같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13) “예수의 방식을 좇자” 50여년 가정교회 고집 <2011.11.01 17:49, 국민일보>


1961년 미국에서 귀국했을 때 나는 너무나 미국화돼 있는 일본교회에 크게 실망했다. 나중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보았던 한국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는 한국교회나 일본교회의 모델을 따르기보다 예수님의 방식을 따르기로 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가정교회 형태로 목회하고 있다.

내가 해발 1050m의 야마나시현 산골로 오게 된 이유는 이렇다. 난 50차례 이상 한국을 방문하면서 한국인의 요청에 한번도 ‘No’라고 한 적이 없다. 한국 사람들의 눈물, 그들의 신음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청계천 빈민운동을 하면서 여러 차례 사기도 당했지만 차마 ‘No’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결국 내 재산을 다 탕진하고 말았다. 1980년대 중반, 난 도쿄에 살고 있던 어머니를 찾아갔다. 나는 ‘빚이 있는데 어머니 집을 팔아 빚을 정리하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는 선뜻 허락하셨다. 막상 어머니 집을 팔아 빚을 청산하고 나니 내가 살 집이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도쿄의 집값은 너무나 비쌌다. 앞길이 막막해 한숨만 나왔다. 한 선배 목사가 ‘야마나시현에 땅을 팔려는 사람이 있다’고 소개했다. 도쿄와 비교해보니 너무나 저렴했다. 집회할 수 있는 장소와 게스트룸, 지하엔 세례용 풀장도 만들었다. 건축 중에 돈이 모자라 아내가 할아버지로부터 돈을 빌려 충당했다. 나는 ‘비록 산골이긴 하지만 요즘 삶에 지친 사람들이 많은 만큼 집을 짓고 나면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다’고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교인은 매주 10명 미만,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여기서 25년 가정교회를 해오는 동안 3000여명이 다녀갔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나누고 교제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도쿄의 가정교회에서 목회할 때 300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세례를 준 적이 있다. 비록 조그만 집이었지만 지하엔 세례 장(場)을 갖추고 있었다. 1960년대 당시 수많은 젊은이들이 직업을 찾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들 중 상당수가 YMCA 야간 영어학원에 등록했다. 나는 그들을 우리 가정교회에 초청했고, 아내 요리코는 그들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그들이 모여들면서 우리 집은 마치 벌집 모양의 젊은이 쉼터로 바뀌었다.

1985년, 이곳으로 이전한 뒤에도 우린 가정교회를 계속 유지해오고 있다. 이 동네엔 외딴 산악지역이기에 크리스천이 많지 않다. 겨울엔 한두 명 오는 게 전부이지만 그래도 여름엔 10∼15명 정도 참석하는 ‘대규모’ 예배가 된다. 우리 부부는 가정교회에 오는 그 어떤 사람도 배척하지 않는다.

주일예배는 이렇게 드린다. 처음 30분간은 찬양을 부른다. 나는 매주 한두 곡의 새 찬송가를 그 배경과 함께 소개한다.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천국에 가기 전에 적어도 500곡 이상의 찬송을 가르치는 게 목표다. 30분간은 성경공부를 한다. 성경공부는 질문하고 답변하는 토론식으로 진행된다. 얼마나 흥미진진한 모임인지 모른다. 우리는 또 매주 성만찬 교제를 나눈다.

예배가 끝나면 요리코가 맛난 음식을 내온다. 함께 음식을 나누며 우리는 크리스천의 사랑과 희망을 주제로 삶을 나눈다. 나는 매주 성경공부를 위해 6∼8쪽 소식지를 만든다. 이 소식지는 일본 내 친구들한테도 보낸다. 발송작업을 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난 이 소식지를 보낼 때마다 마치 성경을 보내는 것처럼 행복해진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14) ‘별종’ 목사, 절대 가까이 해선 안될 이를 품다 <2011.11.02 18:00, 국민일보>

내가 목회하고 있는 이 산골 마을은 700년 전에 형성된 곳이다. 외지 사람에 대해 무척 배타적인 마을이었다. 사람들이 몰려와 ‘교회가 들어오면 안 된다’고 반대했다. 공회당 같은 곳에서 마을 어른들로부터 ‘기독교는 절대 들어올 수 없다’는 경고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매일 어린이들을 차에 태워 학교 등교를 시키고 사탕도 나눠 줬다. 매주 노인들을 초청해 서양음식을 만들어 대접했다. 동네에서 버려진 개를 데려다 키우거나, 먹이가 없어 산에서 내려오는 너구리, 사슴, 여우에게도 먹을 것을 줬다. 사람들은 차츰 나를 ‘별종’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기요토시 사카모토라는 사람이 있었다. 마을 외딴 곳에서 혼자 살고 있는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피부병을 앓고 있는 데다가 영양실조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거기다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며 배회했다. 마을 사람들은 ‘절대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단단히 주의를 줬다. 하지만 난 직관적으로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란 걸 알았다. 기요토시는 성경의 삭개오처럼 키가 작았다. 아버지, 어머니를 모두 초등학교 때 사별했다. 어릴 적부터 홀로 돼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마을에서도 왕따를 당했던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니다가 중퇴한 뒤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

나는 기요토시에게 다가갔다. 의사에게 데려가 그의 피부병을 진단하기도 했다. 우리 집에 데리고 와서 식사도 함께했다. 아내와 나는 피부병이 옮아 심한 고생도 해야 했다. 그렇게 7년간 교제를 해오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술을 끊었다. 몇 년 후엔 담배도 끊었다. 그리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갖다 버리는 냉장고나 TV, 세탁기 등을 가져와서 부품을 떼어다 팔았다. 기요토시와 함께 내 차에 부품을 싣고 팔러 다녔다.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 나중엔 TV, 냉장고 등이 마당에 산더미를 이룰 정도였다. 이 사람도 처음엔 나를 ‘별종’이라고 여겼다. 호칭이 ‘사장님’ ‘선생님’으로 차츰 바뀌더니 나중엔 ‘어이’ 하는 사이가 됐다. 둘도 없는 친구가 된 것이다. 친구는 내 권유로 저금도 하고, 사람을 고용하기도 했다. 교회를 보는 마을 사람들의 인식도 차츰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지난 4월 중순, 아침 6시에 일어나 개를 데리고 골목 입구에 신문을 가지러 갔을 때다. 기요토시가 판잣집 옆에 엎드려 있는 게 아닌가. ‘어이’ 하고 부르며 달려가 어깨를 흔들었지만 기척이 없었다. 죽어 있었던 것이다. 지난 26년간 나와 가장 친밀했던 최고의 친구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언젠가 우리 집에 놀러온 기요토시가 자신의 몸을 나에게 보여준 적이 있다. 피부병으로 온몸이 벌겋게 돼 있었다. 가뭄의 논바닥처럼 온몸이 쩍쩍 갈라져 있었다. 끔찍했다. 나는 청계천 빈민가에서도 그런 몸을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기요토시가 항상 지옥 같은 곳에서 혼자 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예수님이 늘 기요토시 옆에 계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기요토시가 틀림없이 지금쯤 예수님 품에서 편안하게 쉬고 있으리라 믿는다. 거기서 알코올이 아닌 포도주를 마시며 자신이 겪은 고생을 위로받고 있으리라.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건 가난하거나 고통 받는 사람들, 사회의 다수로부터 거부당한 사람들 편에 서 계셨다. 내가 평생 섬겨온 예수님은 그런 분이시다. 나는 평생 그런 예수님을 섬기는 특권을 누려왔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15·끝) 한국교회 향한 두가지 기도 ‘日 사죄’ ‘초심으로…’ <2011.11.03 17:26, 국민일보>

내가 살고 있는 야마나시현 고후시(市)의 하늘은 일본과 한국을 왕복하는 비행기 항로다. 나는 매일 서울행 비행기를 바라보며 남북한을 그리워한다. 북한을 생각하는 이유는 북한 내 어린이들이 굶주림이라는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북한을 방문할 기회를 한번도 갖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더 젊었다면 독일의 크리스천 친구들에게 찾아가 당장 북한의 어린이들을 도우라고 하고 싶다. 그들은 1970∼80년대 20년간 남한의 어린이 2000명에게 매일 따뜻하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후원했던 신실한 친구들이다.

한국교회를 향한 나의 간절한 바람과 기도제목은 두 가지다. 우선 과거 일본 정부의 범죄를 용서해 달라고 겸손히 요청하고 싶다. 용서 없이는 화해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이 범한 국가적 범죄,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잔학한 행위였다. 일본의 역대 정부는 자신이 저지른 국가 범죄에 대해 한번도 진지한 자세로 사죄한 적이 없다. 그것은 오히려 한국인의 분노를 촉발했다. 나와 아내가, 그리고 자식들이 지난 수십년간 한국인을 위해 봉사했고, 또 봉사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남한 사람들, 북한 사람들이 일본을 용서해주기 바라는 염원에서다. 화해는 사죄와 용서가 정당하게 만날 때만 가능하다. 아직도 일본 정부의 성의 있는 사죄가 없다는 것이 슬플 뿐이다.

또 하나의 바람은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사랑받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내가 찾았던 1960∼70년대 청계천은 비록 교회 건물도 없고, 조직도 없지만 성령이 살아서 역사했다. 목사는 평신도와 구분 없이 그들 속에서 함께 생활하고 함께 어려움을 이겨 나갔다. 사람들은 가난이나 핍박을 겁내지 않았다. 서로 간에 정과 사랑이 흘러넘쳤다. 그곳은 나에게 살아 있는 신학교였다. 하지만 수십년이 지난 지금, 한국교회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가능한 큰 교회당을 지으려고 한다. 가운을 입은 목사가 큰 설교단에서 목에 힘을 준 채 설교하는 이미지가 오버랩되는 게 현실이다. 유교의 잘못된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교회의 게토화를 초래할 뿐이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건물을 짓는 데 믿음과 기도, 재정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종교적인 자기만족일 뿐이다. 오히려 그 믿음과 재정을 이용해 파키스탄이나 아프리카처럼 전쟁과 질병 속에 눈물 흘리고 있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게 아닐까. 하지만 지금 이대로의 한국교회 모습대로 가지 않으려는 상식 있는 크리스천들이 한국 내에 많다는 것을 보며 나는 한국교회에 대한 무한한 희망을 갖고 있다.

한국은 지리적으로 동북아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일본을 비롯한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여러 차례 침략을 받았지만 반대로 보면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구조다. 이것을 위해서라도 한국 기독교는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에 더 집중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한국교회에 바라시는 것이다. 그것이 한국교회가 오늘날 동북아의 중심에 자리 잡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나는 죽어서 한국에 뼈를 묻고 싶다. 지금까지 내 삶이 한국에 기반을 둬왔고, 한국은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소명의 땅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어디라도 좋다. 한국 땅에 묻힐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나 같은 시골의 무명 노인을 한국의 국민일보에서 자세하게 소개해준 데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이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