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떠돌이 전도인 김은석 목사
김은석 목사는 일생을 떠돌이
전도인으로 보냈다. 그의 생애를 공부하면서 생각난 구절이 창세기 47장 9절이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짧고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야곱의 고백처럼, 나의 삶이 짧고 험난하긴
하였지만, 선배들이 살아온 풍상의 세월과 헌신과 희생의 세월에 비하면, 심히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김은석 목사는 1902년 황해도
평산군 단구리 출생으로 16살에 결혼하였으나 다섯 살 연상의 부인이 우울증으로 살림집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집안이 몰락하였다. 중국에서 신학을
하고 재혼도 하였지만, 세 살배기 아들과 부인이 모두 죽었다. 다시 떠돌다가 일본에서 전도부인이었던 김완례를 만나 세 번째로 결혼하였다. 그러나
부인이 불임이었기 때문에 자녀를 갖지 못하였다. 그들은 명순과 성철을 각각 입양하여 키웠으나 김은석 목사는 떠돌이 전도인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가족을 돌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모두 곤궁했던 일제시대와 6.25동란과 1950년대를 힘들고 고독하게 보냈다. 이 시대의 가장들은 집을 나가
변변찮은 돈벌이를 하는 경우들이 많았기 때문에 부인들이 자녀들을 돌보고 살림을 꾸려나가야 했다.
김은석은 본래 장로교 목사였다.
일본에서 귀국한 것은 1945년 해방직전이었다. 1948년에 충청북도 부강에 내려가 장로교회를 맡아 목회하던 중에 “성서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펼치는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다. 이후 15년 동안 김은석 목사는 비교파운동과 침수세례와 매주 성만찬을 주장하며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을
펼쳤다. 그의 활기찬 활동으로 충청도, 전라도, 서울, 경기도 지역에 무려 80여개가 넘는 교회들이 세워졌다. 양자인 김성철 목사의 글에
의하면, 김은석 목사는 늘 교회 일로 집을 비우고 지방에서 살다시피 하여 집에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다녀갔다고 한다.
이것은 김은석 목사가 남긴 성서통독 일일메모에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김은석 목사는 만 61세를
일기(一期)로 1963년 1월 소천 하셨다. 충남 연산에서 가까운 부적면 충곡리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시던 중에 밤 10시가 넘어서 찐 고구마와
날고구마를 먹고 복통을 일으켜 앓다가 이틀 만에 돌아가셨다. 3년 전에 받은 위 수술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가족 중에는 아무도 임종을 보지
못하였다. 그때 양아들 김성철은 군에 입영하여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약혼자의 전보를 훈련 중이라는 이유로 군에서 통보해주지
않았다. 몇 주가 지난 뒤에야 편지를 받고 특별휴가를 얻어 충곡리 그리스도의 교회를 찾아갔을 때, 비로소 김은석 목사의 유언과 유품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김은석 목사는 양아들 성철이 자신의 대를 이어 꼭 목사가 되길 바랐다. 그것이 유언이었다. 유품은 낡은 가방하나였는데, 그 초라한
가방 속에는 구리돈과 납돈 몇 푼과 낡은 허름한 성경책 한 권만이 달랑 들어 있었다. 그의 책은 1920-30년대에 출판된 조선어와 한문이
혼합된 선한문(鮮漢文) 관주 성경책으로써 너덜너덜해져서 김은석 목사가 손수 제본을 다시 하였는데, 책의 앞뒤페이지들은 떨어져 나가고 없고,
신약성서를 욥기와 시편 사이에 끼어 넣었으며, 메모를 위해서 간지들을 책들 사이에 끼어 넣고 꿰매어 성경의 일부처럼 만들었으며, 많은 낙서들을
남겨놓았다.
2. 성서낙서를 통해서 본 김은석 목사
김은석 목사의 성경책은 그의
손에서 떠난 지 46년 9개월여 만에 연구소로 오게 되었다. 그의 성경책은 온통 낙서투성이다. 가죽커버를 열면, 첫 페이지에 ‘大慰之聖句 詩
九四 18-19’라고 큰 글씨로 적혀 있다. 가장 크게 위로를 받는 성경말씀이 시편 94편 18-19절이란 뜻이다.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생각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시편 150편 끝 여백에 남긴 메모에서 시편의 말씀에서 받은 은혜를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1954년 7월 25일 주일에 본 시편
94편 9-150편까지 봉독하며 은혜받음 할렐루야 성도의 노래 이 시편을 이와갓치 부족한 자 깃붐으로 봉독함은 진실노 주님의
은혜로다.">
김은석 목사는 요한계시록을 자주
읽었다. 천년왕국에 관련된 성구를 적어놓은 것을 보면, 그가 전천년설을 믿었던 것 같다. 전천년설은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에 천년왕국이 문자적으로
이뤄진다는 설로써 삶이 피곤하고 곤궁했던 시절에는 대부분 이 전천년설이 유행하였다.
헌금(왕하 12:14-15,
22:7)과 헌물(출 36:3-7)과 헌납물(대상 29:8-14)에 대한 성구도 적어두었다. 특히 헌금은 계수하지 않는다고 적어 놓았다. 이들
성구들을 통해서 볼 때, 김은석 목사는 사례금에 대해서 정산하지 않았으며, 헌금과 헌물은 풍족하고 넘치게 하되, 자발적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드려야 할 것을 가르쳤을 것으로 보인다.
구약성서목록이 적힌 곳에
종(縱)으로 “1917년에 중국에서 느진비 성신이 임하야 참 예수교회 났타났씀.”이라고 써놓고 있는데, 1917년은 김은석 목사가 첫 부인을
맞이했던 때이다. 이 기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하게 알아보기 위해서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1917년 중국에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목표아래 산동성 출신의 장로교회 집사들이었던 장빈(안식일준수 주장), 은파(침수세례 주장), 장 바나바(방언은사 주장) 세 사람이 창설한
‘참예수교회’(진야소교회)를 두고 말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김은석 목사가 참예수교회를 언제부터 알았는지, 참예수교회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또 얼마만큼의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참예수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와는 달리, 제칠 안식일(토요일) 준수와
방언 말함을 성령세례 받은 것으로 각별히 강조한다는 점을 뺀 나머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환원운동과 침례와 매주 성만찬에 있어서는 상당부분
비슷하다는 점이다(자료: http://tjc.or.kr/basic). 특히 김은석 목사가
성령의 은사에 관한 정통보수주의 견해와는 달리 성령체험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던 점에서 늦은 비 성령의 역사를 주장하는 참예수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참고로 김은석 목사는 1961년 5월 28일 새벽에 꿈 중에서 신명기 4장 8, 31절의 말씀을 들었다고 적고
있다.
김은석 목사가 제칠 안식일 준수를
주장했거나 그날을 지켜 예배를 드렸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그의 기록들은 그가 주일을 철저하게 지켰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은석 목사는 교황의 호칭인 ‘하나님의 아들의 대리자’(Vicarius Filii Dei)를 666으로 믿었던 것 같고, 천주교가 “십게명을
곳친 사실. 요리강령 28 폐이지에 참고, 안식일을 일료일노 변한 것. 364년 7월에 나오데게아 총회에서 선언함, 천주교 대요리 문답 제2편
81-83폐이지 참고, 개신교에서도 1554년 일료일을 안식일노 변함. 넷재 게명이 인침 밧는 것시다.”고 적은 것을 보면, 잠시나마
참예수교회의 안식일준수 주장에 공감했던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밖에도 ‘혼인에 관계한 일,’ ‘1955년에 전도한 사람들,’ ‘교회
명칭을 명시함,’ ‘성경연구회 참가자 명단,’ ‘별세자 명단,’ 수많은 교회 주소를 각 도별로 적어놓고 있다.
3. 김은석 목사의 성서통독
김은석 목사는 주일을 제외한 매일
아침에 성서를 읽었다. 매주 여러 교회들과 성도들의 집에서 읽었고, 여행 중에 버스와 기차 안에서 읽었으며, 조반 중에 대중식당에서도 읽었고,
역전에서도 읽었으며, 병석에서도 그날 분량을 반드시 읽었다. 그는 “일 년 동안 매일 3장씩이면 1095장 봉독. 구약 939장, 신약
260장, 신구약 합계 1199장. 성경보감 311 페이지 참고”라고 적고 있는데, 그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아침마다 성서를 읽었다.
김은석 목사는 매 장마다 언제 어디서 어디를 읽었는지를 메모해 놓았다. 여기서는 창세기 한 곳만을 살펴보려고 한다.
김은석 목사는 창세기를 다 읽고
나서 빈 공간에 “‘하나님’이란 말씀이 총 209회 있다”고 적었다. 그는 창세기에 실린 ‘하님’이란 단어에 일일이 체크를 해놓고 그
사용빈도수를 체크했던 것이다. 그는 또 “1954년 1월 17일 주일에 평택(?) 역전에서 금년 1월 1일부터 봉독한 창세기를 다 봉독하였다.
봉독한 장소는 역전광장이었다.”고 적고 있다. 또 그 옆에는 “출애굽서을 봉독하기 시작함.”이라고 적었다.
김은석 목사의 창세기 통독을
자세히 살펴보면, 1955년, 56년, 57년에 각각 읽고 있는데, 55년에는 1월과 11-12월까지 읽고 있고, 56년과 57년에는 각각
1월에 읽고 있다. 55년에는 매일 아침 한 장씩을, 56년에는 힘닿는 대로 많이, 57년에는 하루 세장씩을 읽고 있다. 1955년 1월의
경우를 보면, 논산 충곡리 교회에서, 부여 합송리 교회에서, 광주 광산동 80번지 집회소 등지에서 주일을 뺀 매일 2장씩을 읽고 있다.
1955년 11월의 경우를 보면, 1955년 11월 2일(수) 시작하여 하루 한 장씩 읽은 후 12월 28일(수)에 끝을 내고 있다. 11월 첫
주에는 전남 함평군 함평읍 석성리, 손불면 궁산리, 다시 석성리의 교회들을 돌면서 한 장씩 읽었고, 둘째 주에는 광주 김재순 목사 댁, 대전
자택, 충북 부강교회, 문암리 교회, 충주읍 제일 감리교회에서 각각 한 장씩 읽었으며, 셋째 주 주일에는 충주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없어서,
감리교회와 성결교회에서 주일을 보내면서 창세기 11장과 12장을 각각 읽었고, 충주시 성남동과 호암리 도장골 성도의 집에서, 대중식당에서 조식
중에, 충주시 앙성면 능곡리와 도장골 성도의 집에서 각각 한 장씩 읽었다. 넷째 주에는 충주 충인동과 소태면 복탄리의 성도의 집과 대전
자택에서, 청주시 영운동 성도의 집과 충주로 가는 길에서 각각 한 장씩 읽고 있고, 다섯 째 주에는 충주시 동령면 조동리 교회 강단 뒤에서 읽고
있다.
김은석 목사가 남긴 성서낙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떠돌이 전도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그를 존경하였다. 1955년 12월
16일(금) 아침은 전남 함평읍 함평면 석성리 신생동 교회당에서 창세기 40장을 읽었는데, 그 옆에 이렇게 적고 있다. “금일 아침은 크게
추웠음(今朝는 大寒이 되엿슴). 금일 나는 대전을 향거(向去)할 것이다. 간다고만 하면 섭섭해 하니 답답함.” 그는 또 충북 청원군 오창면
가좌교회를 자주 들렀는데, 1955년 12월 27일 아침에 이 가좌교회에서 창세기 49장을 봉독한 후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이곳은 전도희
자매님이 계심. 핍박이 심한 개척이다.” 환난당하는 교회를 돌보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처자가 있는 집에는 오다가다 혹은
병들어 오갈 곳이 없을 때만 잠시 들렀다. 김은석 목사는 수원에 계신 모친을 기회 있을 때마다 찾아뵈었고, 자신의 부인의 이름에는 항상 ‘씨’를
붙여 존대하였다.
4. 1955년 1월 창세기 통독
- 1월 1일부터 읽기를 시작하여, 1955년 1월 13일(목)에 충곡교회 주택에서 창세기 34-35장을 봉독. 박근영 형제
혼사로 인하여 금일 부여에 갈 예정.
- 1955년 1월 13일에 부여 합송리 교회 김광우 전도사 댁에서 창세기 36장 봉독. 김순식 자매 혼사로 방문차중.
- 1955년 1월 15일(토)에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 교회 교역자 김광우 씨 집에서 39, 40장 봉독. 묵시록 9장 봉독.
작야(昨夜, 어젯밤) 11시 박근영, 김순식 약혼식 함.
- 1955년 1월 17일(월) 아침에 광주시 광산동 80번지 집회소에서 창세기 41, 42장 봉독. 묵시록 8장 봉독함.
- 1955년 1월 18일(화) 아침은 광주시 광산동 80번지 모임 중에서 창세기 43, 44장과 묵시록 7장
봉독.
- 1955년 1월 19일(수)은 식전은 김호민 형제를 방문 갔었음으로 오후 30(?)에 45장 46장과 묵시록 6장까지 봉독.
- 1955년 1월 20일(목)은 광주시 호남동 한공빌딩 상신양복점 신영두 형제 댁에 갔었다. 본 창세기 47, 48장과 묵시록
5장까지 봉독.
- 1955년 1월 21일(금)은 이른 아침에 목고환 형제와 이현필 형제 댁에를 가서 다녀왔다. 오전 10시 후에 창세기
49-50장까지를 봉독. 묵시록 4장을 봉독함. 1955년 12월 27일 아침은 충북 청원군 오창면 가좌교회에서 창세기 49장을 봉독함. 이곳은
전도희 자매님이 계심. 그 옆에 따로 “핍박이 심한 개척이다.”고 기록함.
5. 1955년 11-12월 창세기 통독
- 1955년 11월 2일(수) 아침 전남 함평군 함평면(읍) 석성리 신생부락교회당에서 창세기 1장을
봉독
- 1955년 11월 3일(목) 아침 전남 함평군 손불면 궁산리 신흥부락교회당에서 창세기 2장을 봉독
- 1955년 11월 4일(금) 아침 전남 함평군 함평면 석성리 신생동교회당에서 창세기 3장 봉독
- 1955년 11월 7일(월) 아침 광주 김재순 형제 댁에서 창세기 4장 봉독
- 1955년 11월 8일(화) 아침 대전 자택에서 창세기 5-6장을 봉독. 윤옥동(尹玉同) 누님도 함께 계시었다.
- 1955년 11월 9일(수) 아침 대전 자택에서 창세기 7장을 봉독.
- 1955년 11월 10일(목) 아침 부강교회에서 창세기 8-9장 봉독.
- 1955년 11월 11일(금) 아침 충북 청원군 강서면 문암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창세기 10장을
봉독.
- 1955년 11월 12일(토) 아침 충주읍 제일 감이(리)회당에서 창세기 11장을 봉독.
- 1955년 11월 13일(일) 아침 충주읍에 한적한 곳을 원하야 먼저 제일감리회당에 가서 기도드리고, 11장을 봉독하고,
다시 성결회당에서 기도하다가 창세기 12장을 봉독함. 충주에는 그리스도의 교회당이 없음으로.
- 1955년 11월 14일(월) 아침 충주읍 성남동 모 성도의 자택에서 창세기 13장 봉독.
- 1955년 11월 15일(화) 아침 도장골 이종원씨 댁의 방에서 창세기 14-15장 봉독.
- 1955년 11월 16일(수) 아침 충주 호암리 도장골 이종원씨 댁에서 창세기 16장 봉독.
- 1955년 11월 17일(목) 아침 한령석 결혼일로 소태면 가는 중에 충주읍 대중식당에서 조식중 창세기 17장 봉독 안희옥도
결혼함. 소태면에서 한령석 배윤순씨 결혼.
- 1955년 11월 18일(금) 아침 충주군 앙성면 능곡리 김경수씨 댁에서 창세기 18장 봉독.
- 1955년 11월 19일(토) 아침 도장골 이종원씨 댁에서 창세기 19장 봉독.
- 1955년 11월 21일(월) 아침 충주 충인동 포목상 김일제 족속 댁에서 창세기 20장 봉독.
- 1955년 11월 22일(화) 미명 충북 충주군 소태면 복탄리 배문순 댁에서 창세기 21장 봉독.
- 1955년 11월 24일(목) 아침 대전 자택에서 본 창세기 22장을 봉독함. 김은영 함평 감.
- 1955년 11월 25일(금) 아침 대전 자택에서 본 창세기 23장을 봉독함. 애생원에서 소금 한 가마니
가져옴
- 1955년 11월 26일(토)은 청주시 연(영)운동 그리스도의 교회 이원화 자매님 댁에서 24장 1-27절까지 봉독. 창세기
28-67절까지는 충주행차 중에서 봉독.
- 1955년 11월 29일(화) 아침 충주군 동양면(충주시 동령면 조동리) 조동교회당 강단 뒤에서 창세기 26장 봉독함.
- 1955년 11월 30일(수) 아침에 조동교회당 강단 뒤에서 창세기 27장을 봉독함. 신숙길(申淑吉) 형제 같이 있었다.
- 1955년 12월 1일(목) 아침에 조동교회당 강단 뒤에서 창세기 28장을 봉독함.
- 1955년 12월 2일(금) 아침에 조동교회당 강단 뒤에서 창세기 29장과 30장 1절까지 봉독함.
- 1955년 12월 3일(토) 아침에 조동교회당 강단 뒤에서 30장을 봉독함. 금일은 충주읍으로 감. 4일 주일은 시편 봉독
5일과 6일 여행 중 신약 봉독함.
- 1955년 12월 7일(수) 아침 신생교회 강단 뒤에서 창세기 31장을 봉독.
- 1955년 12월 8일(목) 아침은 신생동 교회 강단 뒤에서 창세기 32장을 봉독.
- 1955년 12월 9일(금) 아침은 신생교회당에서 창세기 33장을 봉독.
- 1955년 12월 10일(토) 아침에도 신생동 교회당에서 창세기 34-35장을 봉독함. 김재순 형제 같이
있었다.
- 1955년 12월 12일(월) 아침은 전남 함평군(읍) 함평면 석성리 신생동 교회당에서 창세기 36장을
봉독함.
- 1955년 12월 13일(화) 아침은 창세기 37장을 봉독함
- 1955년 12월 14일 아침 광주 광산동 80번지에 그리스도의 교회당에서 창세기 38장을 봉독함. 김재순, 임남규 형제
동행.
- 1955년 12월 15일(목) 아침은 신생 예배당에서 창세기 39장을 봉독함. 이 때 요셉의 모함과 수난을 깊이
생각함.
- 1955년 12월 16일(금) 아침은 전남 함평군(읍) 함평면 석성리 신생동 교회당에서 창세기 40장을 봉독함. 금일 아침은
크게 추웠음(今朝는 大寒이 되엿슴). 금일 나는 대전을 향거(向去)할 것이다. 간다고만 하면 섭섭해 하니 답답함.
- 1955년 12월 17일(토) 아침에 대전 자택에서 본 창세기 41장 봉독함.
- 1955년 12월 19일(월) 아침 부강교회당에서 창세기 42장을 봉독함.
- 1955년 12월 20일(화) 아침은 (경부선 서령이?) 교회당에서 박전도 형제계신 데서 43장
봉독함.
- 1955년 12월 21일(수) 아침은 서울 성서신학교 숙사에서 고광석 형제와 같이 유(有)하며 나는 본 창세기 44장을
봉독함.
- 1955년 12월 22일(목) 금일은 경기도 부천군 오정면 도당리(부천시 원미구 도당동) 원교선 형제를 방문차로 왕래 중
버스 중에서 창세기 45장을 봉독함. 원형제는 상봉 담화함.
- 1955년 12월 23일(금) 아침은 서울시 서대문구 창천동 54번지 70호 성결교회내 이은희 자매 방문차로 가서 창세기
46장 봉독. 혜춘(惠春), 혜복(惠福)은 딸.
- 1955년 12월 24일(토) 아침에 마포구 아현동 교회 이학재 집사와 그 부인 김완씨 댁에서 창세기 47장
봉독.
- 1955년 12월 26일(월) 아침은 경의선 신촌역에서 차타고 수원 어머님께 가는 중 창세기 48장 봉독함. 수원경유
가좌교회에 감.
- 1955년 12월 27일 아침은 충북 청원군 오창면 가좌교회에서 창세기 49장을 봉독함. 이곳은 전도희 자매님이 계심. 그
옆에 따로 “핍박이 심한 개척이다.”고 기록함.
- 1955년 12월 28일(수) 아침은 가좌교회 주기현씨댁 전도희 자매님 유하시는 방에서 본 창세기 50장을 봉독함. 이학재
형제 같이 있었다.
6. 1956년 1월 창세기 통독
- 1956년 1월 1일(일) 아침 모처(판독이 어려움)에서 창세기 3:1-4:23절 상반절까지
봉독>
- 1956년 1월 2일(월) 대전 자택에서 아침 예배시 창세기 4:23-7:12을 봉독함.
- 1956년 1월 3일(화) 아침 창세기 10-17장까지 대전 자택에서 봉독.
- 1956년 1월 4일(수) 아침 대전 자택에서 병석에서 창세기 17:9-22:11까지 봉독. 김완례씨와 성철이 같이
있음.
- 1956년 1월 5일(목) 아침은 대전 자택에서 창세기 22장 12절로 26장 25절까지 명순(양녀)과 완례(부인)씨와
돌려봄.
- 1956년 1월 6일(금)은 창세기 26장 26절부터 30장까지를 대전 자택에서 병석에서 봉독.
- 1956년 1월 7일(토) 아침은 창세기 31장 1절로 부터 35장 말 29절까지 대전 자택에서 봉독. 오응수, 오난순,
명순(양녀), 완례씨 같이 있었음.
- 1956년 1월 9일(월) 아침은 10시 전후에 창세기 36장 1절에서 41장 16절까지 대전 주택에서 봉독함. 함성철이
같이 있었다.
- 1956년 1월 11일(수) 아침은 대전 주택에서 창세기 45장 19절로 50장 말절까지 봉독함. 본 창세기를 1월 1일
아침부터 금일 11일까지 봉독함. 두 주일(일요일) 빠지고 9일간 6페이지씩 봉독함.
7. 1957년 1월 창세기 통독
- <1957년 1월 3일(목) 부강예배당 골방에서 창세기 7-9장을 봉독함.
- 1957년 1월 11일(금)에 부강에서 수원 가는 중 차안에서 창세기 28장 30장까지 봉독함. 수원 가는 일은 12일(토)
어머니 생에 감.
- 1957년 1월 14일(월) 아침에 부강 교회당 골방에서 창세기 25-27장까지 봉독함.
- 1957년 1월 16일(수) 아침 부강교회당 골방에서 창세기 41-43장까지 봉독.
- 1957년 1월 17일(목) 아침에 부강교회 골방에서 창세기 43-45장 봉독.
- 1957년 1월 18일(금) 아침 부강교회 골방에서 창세기 46-48장까지 봉독함.
- 1957년 1월 19일(토) 아침은 부강교회 골방에서 창세기 49장 출애굽기 1장까지 봉독함.
8. 기타
- 작일(昨日, 어제) 21일은
시편 96편 11절이하 101장까지 봉독함. 금일 청주를 향거(向去)함. 윤정열, 이시봉 두 자매도 이번 상봉 부강서.
- 1957년 10월 30일(수)에 원교선 형제가 와서 저녁집회에 창세기 22:1-14까지 봉독.
- 김은석 목사는 창세기의 기록을
주전 1451년 혹은 1500년경으로 보았고, 창세기 1장에 옆에 “세계론에 1차 세계는 창(創)1장부터인바 초차(初次) 아담부터이요, 2차
세계는 요1장과 2차 아담 예수님으로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경륜이니라.”고 적고 있고, 하나님의 7일 창조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 “1) 광(光), 3-5절, 선의(善義), 요1장 9, 3장 19절; 2) 천(天), 6-8절, 낙원, 눅 17:21; 3)
수륙(水陸), 9-13절, 식물(食物), 요 15장 19절, 요 3장 10절, 묵 17:15; 4) 일월성(日月星), 14-19절, 발명, 눅
1장 78절, 요 11장 9절, 벳후 1장 19절; 5) 수어(水魚), 20-23절, 부식(付食), 행복생활에 경치(景致) 조(造)하심, 새
11장 6-9절; 6) 동물(動物), 24-31절, 인(人)까지 26-31절, 하등동물, 시 49장 20절, 고젼 15장 32절; 7) 안식,
2장 1-3절, 영원복락표, 상등동물, 고젼 15장 42-44절, 52-5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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