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이야기: 해롤드 테일러와 서울성서신학교
A Story of Korean Christian Churches: Missionary Harold Taylor and His Seoul Bible Seminary

조동호(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들어가는 말

해롤드 테일러(Harold Taylor) 선교사는 1955년 한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중국과 일본에서 선교사역을 여러 해째 지속해왔고, 러셀 몰스(Russell Morse)나 커닝햄(William D. Cunningham)과 같은 베테랑 선교사들의 사역을 곁에서 지켜봤던 경력선교사였다. 테일러는 중국이 공산화가 되는 과정과 제2차세계대전후 일본의 복구과정을 지켜봤고, 6.25전쟁 직후인 1955년 11월에 한국에 들어와 1960년 4.19혁명과 1961년 5.16혁명을 거쳐 1972년 유신체제까지 격동기 20여년을 한국에서 보냈다.

테일러는 존 T. 채이스, 존 J. 힐, 폴 잉그람(Paul Ingram), 메리 반힐(Mary Barnhill), 리라 톰슨 힐러(Lila Thompson Hiller)가 했던 기독교회선교부(Korean Christian Mission)의 모든 사역을 인수받았다. 채이스는 1949년 이후로 한국에 돌아오지 못했고, 잉그람은 1955년 1월 8일에, 힐은 7월 5일에 한국을 떠났으며, 1955년에 반힐과 톰슨은 둘 다 간염에 걸렸다. 이 때문에 반힐은 10월에 한국을 떠났고, 톰슨은 히람 힐러(Hiram Hiller) 미군 중사와 1955년 10월에 결혼하였다. 해롤드 테일러가 1955년 11월에 한국에 입국했을 때 서울에 남아 일하고 있었던 선교사는 한 달 전에 결혼한 리라 톰슨 힐러뿐이었다. 힐러는 이듬해인 1956년 3월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 때문에 테일러가 한국에서 떠맡은 일들은 그가 중국과 일본에서 하던 사역들보다 훨씬 책임이 컸고, 또 자신의 뜻과 역량을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는 커다란 기회였다. 게다가 1949년 이후 채이스 선교사가 <그리스도인 표준>(Christian Standard)지와 함께 모금운동을 펼쳐 모아놓은 거액의 ‘한국에 예배당을’ 기금까지 인수받음으로써 마음껏 날 수 있는 날개까지 얻은 셈이었다.

그렇다고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상황이 테일러 선교사에게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걸음마 단계에 있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에게 선교사들의 도움은 아기들에게 필요한 엄마들의 도움처럼 절실한 것이었지만, 선교사들 간에 생겼던 분열로 인해서, 일부 내국인 사역자들의 저변에는 선교사들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가 일정 부분 깔려 있었다. 게다가 테일러 선교사가 모든 일에 주도권을 쥐고 토착적 문화와 정황을 고려하지 아니한 채 후원방식에서 미국식 정책으로 몰아가려는 태도에 반발하는 목회자들이 있었다. 이런 정서가 서울지역에서는 성낙소 목사를 중심으로, 충청이남지역에서는 김은석과 이신 목사들을 중심으로 표출되었고, 심지어는 테일러 자신이 주선해서 미국에 보낸 내국인 사역자들에게서조차 표출되었다. 테일러 선교사는 일부 내국인 사역자들의 이런 태도를 분열주의 또는 교파주의로 보았고, 일치를 위해서 적극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스스로 판단한 어려움들을 극복하기도 했다. 한편 테일러 선교사가 분열파로 여겼던 내국인 사역자들도 현실적으로 선교사들과의 관계를 긴밀히 유지시켜 나감으로써 심각한 분열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변증법적인 발전이 돋보였다. 선교부에 인접한 수도권에서보다는 오히려 토착적이고 자생적인 김은석, 이신, 최요한 목사들이 주도한 충청이남지역에서 교회와 목회자 숫자가 더 빠르게 늘어났다.

테일러는 1950년대 후반기에 충청이남지역의 교회들을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순회하면서 관계를 쌓아갔으나, 1960년대에는 미국에서 돌아와 대전에다 '한국 크리스천 미션'(Christian Mission to South Korea)과 한국성서신학교를 세운 존 J. 힐이 옛정과 내국인들의 사정을 이해할 줄 아는 인간적인 면과 거리상의 이유들로 인해서 이들 지역의 사역자들과 더 긴밀히 연대함으로써, 선교사 일인체제에서 누렸던 리더십을 힐 선교사와 나눠 가져야 했다. 또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최윤권 목사, 최순국 목사, 안재관 목사 등에 의해서 선교회들이 늘어나고, 용산에 대한기독교신학교가 세워짐으로써 리더십은 더욱 다변화되었다.

1960년대 전반기에 테일러와 힐은 신학교를 세우고 키우는 일에 전력을 쏟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관심을 외부로 돌릴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충분치 않았다. 따라서 두 사람 사이에는 긴장감이나 경쟁심이 크게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들이 대부분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생긴다는 점에서도, 서울 선교부와 대전 선교부 사이에 어느 정도 경쟁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겠지만, 그런 경쟁심조차도 오히려 한국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에 변증법적인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반면에 서울성서신학교와 대한기독교신학교는 같은 수도권에 있었던 데다가 테일러 선교사로서는 대한기독신학교가 서울성서신학교에서 일해 줄 것으로 믿었던 내국인 사역자들, 곧 자신의 주선으로 미국에 들어가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내국인 사역자들에 의해서 세워진 신학교였으므로 마음이 불편하였을 것이다. 이런 불화에도 불구하고 테일러는 수도권에 ‘최초’와 ‘전통’이란 수식어가 주어진 기독교회선교부와 서울성서신학교를 갖고 있었고, 배도은(Gorden Patten) 선교사 때인 1982년 3월 학기부터 서울성서신학교와 대한기독교신학교가 서울성서신학교 캠퍼스에서 대한기독교신학교란 이름으로 통합됨으로써 한국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의 리더십을 취하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해롤드 테일러 선교사가 1955년 11월부터 1974년 은퇴할 때까지 한국에서 쏟은 헌신과 남긴 업적들은 후대인들에게 기리 기억되고 존경받을만한 족적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토착적 문화와 정황을 고려하지 아니한 채 후원방식에서 미국식 정책으로 몰아가려한 점과 그로 인해서 내국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 점은 그의 업적을 가리는 그림자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필자에게 주어진 자료들이 1962년 3월까지 뿐이어서 그 이후 12년간의 이야기를 펼칠 수 없는 것이 많이 안타깝다. 앞으로 더 많은 자료들이 발견이 돼서 못다 채운 한국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조각그림들이 채워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1. 존 T. 채이스 선교사와 존 J. 힐 선교사의 분열

1) 신학교

1950년대 전반기에 있었던 채이스(John T. Chase) 선교사와 힐(John J. Hill) 선교사의 분열은 협의회와 총회로 나뉜 분열의 전조적 사건이었다.

힐은 채이스의 발굴에 의해서 선교사가 되었을 뿐 아니라, 채이스의 기독교회선교부(Korean Christian Mission)에 소속된 선교사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직접후원방식의 선교정책에 적극적이었던 채이스의 신념 때문에 힐의 신분은 채이스에게 예속된 것이 아니라, 독립된 것이었다.

태평양전쟁의 발발조짐으로 선교사들이 1940년 11월 16일 인천항을 통해서 철수한 이후 1949년 2월 18일 힐이 재입국하기까지 대략 8년간은 선교사들이 장기 체류할 수 없었던 공백기였다. 그 기간에 채이스가 몇 차례 입국하여 단기선교를 펼치긴 하였으나 신학교는 폐쇄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신학교를 다시 연 것은 존 J. 힐 선교사였다. 입국직후 힐은 채이스의 한국성서훈련원(Korean Bible Training Institute)을 다시 열었으나 후에 그 이름을 서울성서신학교(Seoul Bible Seminary)로 변경하였다. 이 신학교는 1949년 3월 15일 연지동에 마련된 힐의 임대저택에서 시작되었으나 학생이 많아져 필운동교회로 옮겨졌으며, 6.25전쟁 직후에 다시 잠시 중단되었다.

신학교는 채이스가 송월동 선교부에 1937년에 한국성서훈련원(Korean Training Institute)이란 이름으로 처음 설립되었으며, 1940년 3월 25일에 첫 졸업생들인 김요한, 최상현, 성낙소, 김문화, 박판조를 배출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이미 타 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목회자들이었고, 박판조만 학생전도사였다. 이듬해에 이 신학교는 일제에 의해서 폐교되었다.

해방직후 성낙소 목사는 자신의 신학교를 열어볼 뜻을 품었으나 그 뜻을 펼치는데 실패하였고, 이 신학교가 다시 문을 연 것은 힐 요한 선교사로서 1949년 3월이었다. 이때 힐은 ‘훈련원’(institute)대신에 ‘신학교’(seminary)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로 인해서 서울성서신학교가 힐에 의해서 1949년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졌고, 따라서 1955년 3월 3일의 졸업식을 제1회로, 1960년 4월 1일 졸업식을 제4회로 본 것은 옳은 판단이 아니었다고 본다. 송월동 선교부 재산을 되찾지 못해서 6.25전쟁 이전에는 잠시 연지동과 필운동에서 신학교가 개교되었으나 힐이 1949년에 다시 연 신학교는 이름만 ‘institute’에서 ‘seminary’로 바꿨을 뿐 채이스 선교사가 세운 송월동 선교부 신학교의 연장이었고, 또 송월동 선교부가 팔릴 때까지 신학교가 그곳에 있었으며, 힐 선교사는 채이스 선교사가 하던 일을 맡아 지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울성서신학교의 시작은 1949년이 아니라, 1937년이라야 옳다. 서울기독대학교의 연역은 이 점을 반영하여 개교연도를 1937년으로 잡고 있다. 참고로 1955년까지 힐을 도와 신학교에서 교수와 교감을 지낸 성낙소 목사는 자서전, <기독의 교회와 성낙소와의 관계>와 <신약교회 목회학>에서 이 신학교의 이름을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라고 불렀다.

서울성서신학교는 송월동 선교부의 재산(토지 396평과 그 위에 세워진 선교부 건물과 신학교 건물)을 1959년 6월 3일까지 모두 팔고, 7,087평의 역촌동 땅위에 새 캠퍼스를 마련하여 1963년에 개교할 때까지 잠시 중단되었으며, 그 공백기에 목회자가 양성된 곳은 힐 선교사가 1959년 12월에 대전에서 시작한 한국성서신학교였다.

2) 채이스 선교사와 힐 선교사의 분열의 원인

채이스와 힐의 분열은 힐의 부인 에스더 비반즈(Esther Beavans)의 외도 때문이었다. 1949년 이후로 채이스는 미국에서 목회를 하면서도 한국교회들의 예배당건축에 필요한 기금과 구호물자를 모아 보내는 일에 관여하면서 여전히 한국선교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채이스 가족의 본래 계획은 ‘한국에 예배당을’ 기금 5만 달러가 모금되는 1949년 9월에 온 가족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금이 늦어지고, 설상가상으로 이듬해 터진 북한의 남침으로 인해서 입국이 지속적으로 미뤄지고 있었다.

한편 힐 선교사는 1949년 3월에 시작한 신학교에 학생이 많아지자 신학교를 성낙소 목사의 필운동교회로 옮겨 본격적으로 목회자 양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또 다시 불행하게도 이듬해인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갑작스런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으로 피난해야 했다. 김경중의 석사논문 42쪽에 따르면, 존 J. 힐 가족은 26일 새벽 3시경에 인천항을 출발하여 일본 후쿠오카(Fukuoka)의 군병원으로 피신하였다고 한다("Mr. and Mrs. John J. Hill Are Safe in Army Hospital in Japan," Christian Standard, 15 July, 1950, p. 43). 또 <도쿄 그리스도인>(Tokyo Christian) 1950년 7-8월호에 실린 해롤드 심즈(Harold Sims) 선교사의 증언에 따르면, 힐 가족은 전쟁소식을 듣고 옷가지만 겨우 챙겨서 만산의 부인과 함께 급히 일본으로 피난을 했어야했고,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부인 에스더가 린다(Linda)를 출산하였으며, 힐 가족의 안위와 출산한지 6일밖에 되지 아니한 갓난아기를 걱정한 해롤드 심즈가 힐 가족을 잠시 자신의 집에 머물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때마침 심즈 가족은 일어공부와 휴식을 위해서 산속 별장으로 가서 잠시 지낼 계획이었기 때문에 힐의 가족은 그들의 집에서 갓난아기를 돌보며 편안히 쉴 수가 있었다. 또 그들이 산장에서 내려오면, 힐 가족이 산장으로 옮겨 좀 더 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채이스는 ‘한국에 예배당을’ 기금을 쪼개서 존 J. 힐과 폴 잉그람(Paul and Joan Ingram) 선교사 가족들이 한국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에서 체류할 수 있는 주택들을 마련해 주었다. 나중에 이 주택들은 처분되어 기금으로 환원되었다. 잉그람은 가족과 함께 힐의 한국선교를 돕기 위해서 1952년에 일본 도쿄에 도착하였으며, 힐의 가족과 함께 잉그람의 가족도 1953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에 체류하였다. 그러나 힐과 잉그람은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가족을 일본에 남겨둔 채 한국에 들어가 사역하였다. 잉그람 가족에게 한국입국이 허락된 것은 1954년이었다.

한편 힐은 일본에 머무는 동안 한국어 공부에 주력하였다. 9월 28일 서울수복 후 11월에 한국에 돌아와 5주간 머무는 동안 서울 장충동의 임대건물에서 신학교를 열었으나 중공군의 전쟁개입으로 전쟁이 악화되어 그해 12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포기를 모르던 힐은 이듬해인 1951년 7월 3일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 송월동 선교부에서 8월 4일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그리스도의 교회 보육원’(Christian Mission Orphanage)을 열었다. 이 보육원은 나중에 리라 톰슨(Lila Thomson)의 주도아래 부평으로 옮겨갔다. 힐은 이후 선교부에 제휴된 여러 보육원들(인천, 대전, 대구)의 설립과 유지에 도움을 주었으며, 신학교를 오픈하였다. 1952년경에는 10여 년 전에 일본에 몰수당했던 선교부 재산도 환수 받았고, 전쟁 중 폭격으로 파손된 곳들의 수리도 이뤄졌다. <도쿄 그리스도인>(Tokyo Christian) 1952년 7-8월호에 따르면, 힐의 부인 에스더 비반즈는 자녀들과 함께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힐이 안식년을 마치고 1954년에 돌아왔을 때에는 추가로 매입한 선교부에 붙은 땅에 폴 잉그람이 미군의 도움으로 3층짜리 신학교 건물을 세웠고, 메리 반힐(Mary Barnhill)과 리라 톰슨(Lila Thompson)이 다섯 개의 보육원들을 돌보는 일에 관여하였다.

에스더 비반즈(Esther Beavans)는 힐이 태평양 전쟁기간에 육군 군목(중위)으로 1944년 10월 5일부터 1946년 5월 14일까지 재직한 19개월간 아무런 스캔들 없이 잘 지낸 것으로 여겨진다. 또 6.25전쟁 중에 일본으로 피난 가서 있을 때, 힐이 한국에 나가 있는 동안에도, 물론 육아에 정신이 없었겠지만, 아무런 탈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그녀에게 무슨 변화가 생겼는지, 성낙소 목사는 <자서전> ‘제21장 두 선교사 귀국과 신학교 휴교와 유무악기파 합동 건’에서 힐이 안식년을 가졌던 1953년 5월 이전에 이미 에스더가 운전수 왕씨와 비행을 저질렀다고 적었고, 노봉욱 장로의 <힐 요한 선교사의 한국 선교> 24쪽에 의하면, 1954년에 신학생 2명과 부적절한 혼외관계에 빠졌고, 그 중 한 명은 결혼한 두 아이를 가진 아빠였으며, 1955년에 4명의 자녀를 가진 한국인 남자 친구와 살기 위해 가출했다고 전하였다. 이 내용들로 볼 때, 에스더와 관계했던 한국인은 최소 2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에스더는 힐이 1955년 7월에 세 자녀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언제까지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울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힐의 맏딸 버지니아 힐(Virginia Hill)은 오자크기독대학(Ozark Christian College)에서 기독교교육학을 전공한 후에 한국 크리스천 미션(Christian Mission to South Korea)에 소속된 선교사로서 1966년 8월 29일 입국하여 1969년 5월 30일 귀국하기까지 3년간 대전에서 사역하였다. 이로 보건데 힐과 자녀들 사이에는 힐의 재혼이후에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낙소의 <자서전>에 따르면, 에스더의 비행을 채이스에게 보고한 사람은 폴 잉그람이었다. 그는 힐이 1953년 5월경에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간 공백기에 힐을 대신하였다. 성낙소는 그가 연소하고 경험이 없는 자여서 채이스에게 에스더와 왕씨와의 관계를 고발하였고, 이 일로 인해서 힐이 귀국 후 잉그람과 다퉜으며, 이를 참을 수 없었던 당시 교감이었던 성낙소 목사는 1954년 6월 25일에 신학교를 휴교 조치하는 동시에 채이스에게 서신을 써 보내 내한토록 하였다. 채이스는 1954년 9월 하순에 내한하여 성낙소, 힐, 잉그람 등과 함께 회의를 열고 힐과 잉그람을 모두 귀국하도록 조치하였다고 한다. 폴 잉그람은 1955년 1월 8일에 귀국하였고, 힐은 귀국하지 않고 버티다가 결국은 1955년에 일본에서 사역하고 있던 후임자 해롤드 테일러(Harold and Ada Taylor) 선교사 부부에게 새로 지은 신학교 건물을 포함한 송월동 선교부 재산과 부평보육원까지 모두 물려주고, 1955년 7월 5일에 쫓기다시피 한국을 떠나야 했다.

이 일로 인해서 채이스 선교사는 힐 선교사와 갈라섰다. 채이스와 힐 사이의 분열 관련 기사들이 1953-54년에 미국에서 기사화되곤 하였다. 그 무렵에 해롤드 테일러 가족은 안식년으로 미국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관련 기사들을 모두 읽고 있었다. 테일러는 1953-55년 사이에 채이스와 힐 사이에 양립할 수 없는 입장차가 있음을 알고 자신이 한국에 오기 전에 두 사람 모두 기독교회선교부(Korean Christian Mission)에서 은퇴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테일러가 한국에 왔을 때, 내국인 사역자들이 테일러에게 채이스 편인지, 아니면 힐 편인지를 묻곤 했다고 한다. 이신 목사는 힐 선교사에게 테일러 선교사가 한국의 문화와 관습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적어 보냈다고 한다. 존 J. 힐 선교사는 이신 목사의 편지를 비롯해서 한국인들이 자신을 선교사로 와주기를 원하고 있다는 점을 신시내티에서 발행되는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월간지 <환원전령>(Restoration Herald) 1956년 5월호에서 밝혔다. 그 기사는 힐 선교사가 자신의 입장을 변호한 글이었다. 그러나 테일러 선교사는 진짜 문제가 내국인 지도자들이 믿고 실천하는 것들이 무슨 기독교인지를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던 데 있었다고 하였다. 내국인 사역자들이 선임 선교사들, 곧 채이스와 힐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테일러 자신이 어느 한 쪽 편에 서서 일하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내국인 사역자들은 테일러를 진심으로 환영하지 않았다. 1956년 2월 7일까지는 테일러의 한국에서의 사역이 매우 불투명하였으나 그 이후 내국인 사역자들 가운데 아무도 채이스나 힐에게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편지를 보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상황을 장악하였고 적절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 실례로 서울 종로구 관수동교회의 임 목사는 신학교 이사장으로서 힐에게 편지를 썼던 분이지만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고 확신하였다.

2. 선교사들과 내국인 사역자들 사이의 이견

1) 수도권의 동파(East)와 서파(West)

테일러 선교사는 종종 분열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가 한국에서 활동한 20여 년간 실제로 분열은 없었다. 그가 말한 분열이란 대개가 불화, 이견 혹은 견해차라고 말해도 좋을만한 것이었다. 필자의 은사인 신시내티성서대학원(Cincinnati Bible Seminary of the Cincinnati Christian University)의 역사학자 제임스 노스(James North)는 수업 중에 미국의 비교파주의 신약성서기독교를 미국식 민주주의 교회라고 말한바 있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이식하고자 했던 신약성서기독교가 바로 이 미국식 민주주의 교회였던 것이다. 반면에 일부 내국인 사역자들이 생각한 비교파주의 신약성서기독교는 한국식 그리스도의 교회였던 것이다. 한국적 토양과 기후에 잘 맞는 토착적 그리스도의 교회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테일러 선교사는 일부 내국인 사역자들의 이런 시도를 교파주의 또는 분열주의로 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목회자들은 교파교회들의 제도를 많이 차용하고 있었고 지금도 그 점에 있어서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테일러 선교사가 계획했던 비교파주의 플랜은 한국문화와 종교상황 속에서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오늘날의 협의회도 총회도 테일러 선교사가 원했던 조직은 아니며, 개 교회들의 조직과 직책도 마찬가지로 선교사가 원했던 미국식 신약성서기독교는 아니기 때문이다. 단언건대 단 한 번도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미국식 신약성서기독교였던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남아 헌신 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과는 다른 한국적 상황을 조금씩 이해하고 수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교 초기에 테일러 선교사가 가졌던 내국인 사역자들에 대한 오해는 점차 누그러졌으리라고 본다. 게다가 내국인 지도자들도 선교사들이 강조한 비교파주의 신약성서기독교에 대해서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고, 신약성서교회에 대한 사명감도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성낙소 목사가 1952년에 출판한 목회학 책의 제목이 <신약교회 목회학>인 것과 1961년 8월 17일 부강교회에서 개최된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힐 선교사 참석)의 주제가 ‘신약교회에로의 환원’인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테일러는 자신이 발행한 선교지 <한국에 그리스도를> 1960년 2월과 5월호에서 수도권 목회자들을 성낙소 목사를 따르는 동파(East)와 자신을 따르는 서파(West)로 분류한바가 있다. 성낙소 목사는 근본적으로 채이스의 사람이었다. 채이스의 사람들 가운데 해방 후에도 사역을 지속한 사람들은 최상현 목사, 성낙소 목사, 백낙중 목사 세 사람이었으나, 6.25전쟁 중에 최상현 목사는 납북당하고, 백낙중 목사는 피살당하여 끝까지 남은 사람은 60살이 갓 넘은 성낙소 목사뿐이었다. 한학자요, 한의사(무면허)였던 성낙소 목사는, 비록 체구는 왜소했지만, 성격이 곧고 날카로워 선교사들에게 쓴 소리를 하는 목회자였다.

테일러는 이런 저런 이유로 성낙소 목사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예를 들어서 필운동교회는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장로를 세우지 않고 있다고 하였다. 또 테일러는 부교역자였던 조충연과 한 명밖에 없던 방(Pang) 집사까지 필운동 교회를 떠난 것은 성낙소 목사가 테일러의 비교파주의 플랜, 곧 신약성서기독교를 뿌리내리게 하려는 플랜에 반대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고하였다. 테일러 선교사는 1959년 3월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필운동교회를 떠나 홍재동에서 개척교회를 하고 있던 조충연과 또 필운동교회를 떠난 방 집사를 서울성서신학교 건축현장에 투입시켰다.

 

 

 

 

 

2) 충청이남권의 반선교사 정서

또 충청이남지역에 기반을 둔 김은석 목사와 이신 목사 등은 성령운동을 하는 목회자들인데다가 선교사들(채이스, 힐, 테일러)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아니한, 스스로도 자생적이고 토착적인 그리스도의 교회 목회자들임을 자긍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채이스를 만나 교류한 적이 없고, 1947-48년 사이에 미 공군 군목 할 마틴, 1949년 이후 힐 요한 그리고 1956년 이후부터는 해롤드 테일러와 집회 때 또는 도움을 청하려고 갔을 때 얼굴을 보는 정도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교사들의 지시를 받는데 익숙하지 않았고,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배타적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신화신학성경연구회에서 가르치는 것과 서울성서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 사이에 교리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도 불편해하였다. 1950년대 초에는 이런 불편을 참지 못하여 정찬성 목사, 김상호 목사(오산리 금식기도원 주임목사로 섬김), 최요한 목사(몇 년 후 돌아와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움), 김교인 장로(부강교회 창립멤버, 함평 석성리 신생교회를 순복음교회로 바꿈) 등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떠나 순복음으로 넘어갔다.

테일러 선교사는 채이스와 힐 사이에서 빚어진 분열을 일치와 평화로 바꿔보려고 노력했고, 많은 성과가 있었다. 또 테일러는 목포 유달교회(최요한 목사가 진성구 장로의 집 2층에 개척한 순복음교회)에서 열리는 신화신학성경연구회에 몇 차례 참석하여 설교도 하고 강의도 하였다. 테일러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협화음은 지속되었다. <한국에 그리스도를> 1957년 2월호에서 테일러는 말하기를, 1956년 8월에 목회자 대회(수련회)가 소집되었는데, 교단을 장악하려는 한 그룹이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고, 선교사들을 배척했다고 하였다. 목회자 대회 후에 테일러가 들은 이야기는, “만약 테일러가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원한다면, 기금과 물자를 우리에게 넘겨 우리가 그것들을 배분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또 신학교 운영도 우리에게 맡겨야한다”는 것이었다. 1955년 12월에 누군가가 테일러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당신의 가르침을 원치 않는다. 우리는 단지 당신의 돈을 원할 뿐이다.”고 했다고도 한다. 테일러는 이 요청을 거절하였고, 이후 그는 그들의 조직, 곧 총회장, 부총회장, 총무, 회계, 목사안수위원회, 목사심의위원회 등이 적힌 계획서를 보았다고 한다. 이에 테일러는 전국의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 같은 조직은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이 편지의 결과로 소수의 교회들만이 그 조직에 가입하였고, 나중에 10여개의 교회들이 다시 탈퇴하였다고 적었다.

테일러는 이 새로운 조직, 곧 협의회가 성서학교를 시작하였고, 서울에서 남쪽으로 80여마일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하였다. 예배당 건축을 위해서 한 목사에게 맡겼던 돈의 얼마를 차지하는데도 성공하였다고 적었다. 그들은 또 힐 요한 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그들과 함께 일하기를 기대하고 있고, 그 같은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테일러 선교사가 지목하여 말한 곳은 부강의 신화신학성경연구회였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테일러 선교사는 <한국에 그리스도를> 1957년 6월호에서 이제 협의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협의회의 리더와도 이전의 친교를 회복하였다고 적었다. 더 이상 총회장 따위는 한국에 존재하지 않으며 비교파주의 플랜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테일러가 생각하고 판단한 것처럼 이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한국에 그리스도를> 1958년 2월호에 따르면, 1957년 8월에 테일러 선교사는 한국에 온지 두 달도 채 되지 아니한 래쉬 선교사와 통역 문(대연)과 함께 전남지역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일주일간 열리는 신화신학성경연구회에 참석하였다. 이신과 김은석 목사가 가르쳤는데, 12명의 목회자들과 2명의 여전도사들(Bible women)이 수업에 참석하고 있었다(김은석, 이신, 김재순, 임남규, 이안식, 도주일, 김규상, 박병우, 안영숙, 임혜숙, 등). 테일러와 래쉬의 시간에는 이신 목사와 문(대연) 형제가 통역하였다. 수업이 모두 끝난 후 테일러는 이신과 함께 작은 배를 타고 제주도로 향했는데, 밤새도록 12시간을 향해한 끝에 제주도에 닿았다. 기독교회선교부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제주교회(천막) 방문을 마치고 목포로 돌아오는 배를 탔는데, 파도가 높아 고생이 많았다고 적었다. 그런데 이 같은 정황이 김은석 목사의 성경통독메모에서 방증되고 있다. 다만 다른 점은 선교사가 주도하는 이 연합집회에 대해서 불쾌하게 생각하는 내국인 사역자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김은석 목사는 1957년 8월 30일(금)자 메모에서 “고린도후서 1-2장을 목포 유달교회당에서 봉독함. 이번 집회는 진행해 가기가 극난인 것인데 지금 전쟁 중입니다. 이유는 선교사 주최라 함이다.”고 하였고, 31일(토)자 메모에서는 “아침은 또한 목포성경연구소에서 7:5-8장까지 봉독함.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한 것은 선교사들에(의) 행사가 불이(의)함으로 동참 아니 하려는 마음을 가지는데 몇 분은 같이 하자하고, 어떤 분은 곧 그만 두자 함이라. 그런고로 내 마음은 복잡함을 금할 수 없으며, 알고 보며(면) 부족함은 누구에도 있습니다. 저녁때에 목포 진(성구) 장로님 방에서 고린도후서 9-12장까지 봉독함. 김재순, 임남규, 이신, 김은석 4인이 결의 부강서 9월 17일부터 성경공부 시작하기로 함”이라고 적었으며, 9월 1일자 메모에서는 “이 주일 아침은 목포교회당에서 예레미야애가 1-2:7까지 봉독함. 금번 목포에 도착하여 있음은 8월 27일부터 9월 4일까지 전남 전도자 수양회 중에 강사로 옴이다.”고 하였다. 또 9월 2일(월)자 메모에서는 “아침에 목(포) 교회당에서 고린도후서 13장을 봉독함. 금번 목포 모임은 태일라 선교(사)가 주최로 전남 교역자수양회. 목포 어떤 냉면집에 가서 선교자(사) 내슈와 문대연 통역 형 같이 함. 냉면은 일기(一器) 2백환이다.”고 하였고, 9월 3일(화)자 메모에서는 “아침은 갈라디아서 3:1-4:11까지를 목포교회당에서 봉독함. 오후에 4:12-6장까지를 목포교회 진(성구) 장로 방에서 봉독함. 선교자 태일러 씨에게서 돈 6천환을 여비로 받았다. 태일러씨는 000(이신)와 같이 제주도에 가심과 금번 교역자집회는 금일로 마쳤다.”고 적었고, 9월 4일(수)자에서는 “아침은 목포교회당에서 에베소서 1:1-2:12까지 봉독함. 선교사 내슈, 문대연씨도 서울에 가시고, 이안식, 도주일, 김규상, 박병우, 안영숙, 임혜숙, 다 작별하고”라고 적었다.

3) 반선교사 정서의 원인

테일러 선교사와 내국인 사역자들 사이의 이견 또는 내국인들의 반선교사 정서의 원인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테일러 선교사는 모든 일에 주도권을 쥐고 토착적 문화와 정황을 고려하지 아니한 채 후원방식에서 미국식 정책으로 몰아가려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는 이전의 선교사들, 곧 채이스와 힐이 취했던 방식, 곧 도움이 필요한 목회자들과 교회들에게 매월 후원금을 주던 방식을 폐지하고, 꼭 필요한 경우에만 기한을 정해서 일시적으로 혹은 단회적으로 후원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 점은 테일러 선교사가 초기에 취한 ‘한국에 예배당을’ 기금을 사용한 방식에서도 잘 드러났다. 그는 전국의 교회들에 설문지를 보내 각 교회의 상황파악에 나섰고, 각각의 교회가 예배당을 짓거나 수리하고자 할 때에는 자조자립을 원칙으로 하되 교회가 부담할 수 없는 부분만 보충해 주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로써 테일러는 보다 많은 교회들을 짓거나 보수하는 일에 기금을 사용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방법이 내국인 사역자들의 마음을 얻는 데는 실패하였다.

둘째, 서울성서신학교와 신화신학성경연구회 사이의 이견은 이미 테일러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오기 이전인 1950년대 초 존 J. 힐 선교사 때부터 있어왔다. 이견의 핵심은 성령론이었고, 교단조직의 필요성을 느낀 목회자들도 있었다. 1953년 4월 8일 하나님의 성회 창립총회가 광주에서 있었는데, 이때 이미 김상호 목사와 정찬성 목사, 최요한 목사가 순복음 교단으로 넘어갔고(자신의 유달교회를 신화신학성경연구회 집회소로 쓰게 할 정도로 김은석 목사, 이신 목사 등과 교제를 끊지 않았던 최요한 목사는 결국 몇 년 후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함으로써 다시 돌아옴), 테일러 선교사가 한국에 입국한 초기에 김교인 장로도 마을 주민이 모두 그리스도의 교회 교인들이었던 전남 함평군 함평면 석성리 신생교회를 가지고 순복음 교단으로 넘어갔다. 그는 이 순복음교회에 땅까지 기증하였다.

충청이남 지역에 세워진 대부분의 교회들은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세워진 교회들이 아니라 성령의 카리스마를 강조하는 김은석, 이신, 최요한의 영향 하에 세워진 교회들이었다. 선교사의 영향력이 약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선교사의 돈이었지, 가르침은 아니었다는 말이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테일러가 분열주의자로 주목한 목회자들은 바로 이들 충청이남지역 목회자들이었다. 그들은 조직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고, 신화신학성경연구회를 통해서 목회자들을 육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서울성서신학교를 운영하면 그리스도의 교회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충청이남 지역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주도하고 있었다.

3. 해롤드 테일러(Harold Taylor) 선교사

1) 한국입국 전의 사역

해롤드 테일러(Harold Taylor)는 1904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토마스와 마리아 세이어(Thomas S. and Maria Etta Hoffa Sayer)의 딸인 에이더(Ada Maryellen Sayer)와 1924년경에 결혼하였다. 에이더는 1906년 1월 18일에 태어났다. 테일러는 에이더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 러렌드(Leland)와 글렌(Glenn)을 두었고, 한국에서 페니 류(Penny Lou)를 입양하였다.

<도쿄 그리스도인>(Tokyo Christian)과 마크 맥스(Mark Maxey)의 ‘일본 선교 100년(1883-1983)’[Christians in Japan 100 Years (1883-1983)]에 따르면, 테일러 선교사는 한국에 오기 전, 1945-1946년경에 티베트(Tibet)족의 선교로 유명한 러셀 몰스(Russell Morse)를 도와 중국에서 ‘윈난성 중국인기독선교부’(Yunnan Chinese Christian Mission)를 이끌었고, 1949년부터 한국에 들어온 1955년까지 일본 도쿄 세타가야구 가미우마(Kamiuma)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이끌었다. <도쿄 그리스도인>(Tokyo Christian) 1949년 9-10월호에 따르면, 중국에서 공산주의가 세력을 크게 확장하자 미국 영사가 선교사들에게 중국을 떠나라고 충고하였고, 이에 테일러는 가족을 미국에 보내놓고 자신은 중국에 남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무렵 요츠야선교부의 해롤드 심즈(Harold Sims)가 테일러에게 일본으로 올 것을 제안하였고, 이에 테일러는 상황이 좋아져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요츠야선교부에서 협력하기로 하였다. 테일러는 1949년 10월 18-20일에 도쿄에서 개최된 일본 그리스도인 대회에 강사로 참석하였고, 이후 한국으로 사역지를 옮기기 전까지 요츠야선교부에서 협력자로서 사역하였다.

<도쿄 그리스도인> 1956년 겨울호에 따르면, 테일러 부부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 이름을 따서 가미우마 그리스도의 교회를 시작하였다. 교인이 20여명쯤 되었을 때인 1953년에 테일러 가족은 안식년을 맞이하여 미국에 돌아갔고, 그 사이에 커닝햄 사후에 요츠야선교부가 설립한 동경성서신학교에 다니는 젊은 신학생이 교회를 맡았으나 교회가 퇴보하였으며, 새로 부임한 젊은 신학생 나카무라(M. Nakamura)가 맡은 다음부터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테일러 선교사 가족이 1954년에 도쿄로 돌아와 부흥회를 개최하면서 교회는 더욱 부흥되었다. 이듬해인 1955년 봄에 나카무라는 신학교 졸업을 앞두고 그 교회에 출석하던 자매 야에코 가마다(Yaeko Kamada) 와 결혼하였고, 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혼슈지방으로 목회를 떠났다. 나카무라가 떠난 후 테일러가 그 교회를 다시 맡아 1955년 11월 기독교회선교부(Korean Christian Mission)를 맡아 한국에 입국할 때까지 섬겼다. 테일러가 한국으로 떠난 후 그 교회는 요츠야선교부와 합의하에 일본양식으로 건축된 선교사 주택을 예배당으로 매입하였다. 매입비의 절반은 교회가 다른 절반은 테일러 선교사가 부담하였다.

2) 한국입국 후의 사역

해롤드 테일러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한 것은 1955년 11월이었다. 그가 한국에서 행한 사역들은 다음과 같이 12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테일러는 추락된 기독교회선교부의 지도력 복원과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테일러는 존 T. 채이스, 존 J. 힐, 폴 잉그람(Paul Ingram), 메리 반힐(Mary Barnhill), 리라 톰슨 힐러(Lila Thompson Hiller)가 했던 기독교회선교부(Korean Christian Mission)의 모든 사역을 인수받고, 추락된 기독교회선교부의 지도력 복원과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존 T. 채이스가 모금한 ‘한국에 예배당을’ 기금은 테일러가 기독교회선교부의 지도력을 복원시키고 분열을 치유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2) 전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을 순회하였고, 교회들의 상태를 면밀히 파악하였다.

<1956년 1월 24-28일>

테일러 선교사가 한국에서 발행한 선교지, <한국에 그리스도를> 1956년 6월호에 따르면, 테일러는 1월 중에 이신 목사와 함께 5일간 전라남도 지역의 교회들을 순방하였다. 전남에 19개(56년 연감에는 17개)의 교회들이 있었으나 5곳을 방문하였다고 적었다. 기차로 12시간 걸려 도착한 함평에서는 그리스도의 교회 목회자였던 고등학교 교장을 만났고, 이분이 마련해준 오래된 군용 트럭을 타고 날이 어둡고 길이 미끄러워 위험천만한 시골길을 달려 함평군 함평면 석성리 신생마을 교회에 도착하였다. 함평에서 7마일(1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상점도 의사도 없는 40호 정도의 시골마을이었다. 신생이란 이름은 “새 삶”이란 뜻으로써 마을사람 전체가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테일러와 이신이 방문한 날은 100일 저녁집회가 끝나는 마지막 날이었다. 김은석 목사가 남긴 성경메모에 따르면, 김은석은 1월 22일 신생마을에 도착하였고, 1월 25일(수) 아침에 침례식이 있었다. 이 언급으로 보아 테일러와 이신이 신생마을에 도착한 날은 24일 화요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요일 아침에 국내 목회자들은 테일러에게 침례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아니한 채 5명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김은석은 테일러의 방문에 대해서 아예 침묵하였다. 테일러 선교사는 이날 수요일 오후에 영광교회를 방문하였고, 다음날 26일(목)에 115명의 아이들이 수용되어 있었던 보육원을 방문하였다. 테일러는 이곳에 의류구호품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목요일 밤에 목포에 도착하였다. 테일러는 그곳에 아직 그리스도의 교회가 없지만, 한 장로를 만났다고 하였는데, 테일러가 방문한 곳은 최요한 목사가 시무하는 유달교회(순복음)였을 것이고, 그가 만난 장로는 목포시 죽교동 399번지의 진성구 장로였을 것이다. 유달교회는 진성구 장로의 집 2층에 있었고, 이 유달교회에 ‘그리스도의 교회 성경연구소’가 있었다. 테일러는 진 장로를 통해서 목포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들어서게 되기를 기대하였다. 테일러는 다음날 27일(금)일에 대전에 도착하여 대전보육원(판암동에 있었던 애생원)과 교회를 방문하여 설교하였다. 그리고 28일 새벽 4시 30분 기차로 서울로 귀경하였다. 그리고 일주일의 상당부분을 감기로 침대에 누워 지냈다.

<1956년 3월 31일-4월 4일>

테일러 선교사는 3월 31일(토) 최순국(통역)과 함께 대구교회를 방문하여 새로 건축한 예배당의 입당예배에 참석하였다. 일주일간 지속된 부흥회 마지막 날이었던 이날 7명의 새 신자가 침례를 받았다. 대구교회는 구 건물을 팔아 건축기금을 마련하였고, 부족한 돈은 ‘한국에 예배당을’ 기금에서 지원받았다. 4월 1일(부활주일) 오후에 버스로 김천터미널까지 가서 또 한 시간을 걸어서 김천교회에 도착하여 저녁 설교를 하였다. 이날 밤에 4명의 결신자가 생겨 다음날 월요일에 저수지에서 침례식을 가진 후, 기차로 신탄진에서 내려 김동렬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를 방문하였다. 화요일에는 김은석 목사가 시무하는 부강교회를 방문하였다. 그때 부강교회에서는 신화신학성경연구회가 열리고 있었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강의하고 저녁에 두 번 더 강의하였다. 이날 테일러는 총 5시간을 강의(설교)하였다. 그리고 새벽 2시 기차를 타고 귀경하였다. 김은석 목사는 이날부터 한 주간동안 부강교회에 머물렀으나 테일러 선교사의 방문에 관해서 성경통독메모에 적지 않았다.

<1957년 초>

테일러 선교사는 1957년 초 신학교가 겨울방학에 들어가는 기간을 이용하여 제2차 남부순회전도여행을 계획하였다. 광주와 목포, 제주(2개 교회가 있었음), 부산, 대전으로 이어지는 전도여행이었다.

<1957년 3월 19-26일>

테일러 선교사의 선교지 <한국에 그리스도를> 1957년 6월호에 의하면, 테일러는 최순국과 함께 경상도와 강원도지역 교회들의 방문길에 나섰다. 그들은 3월 19일(화) 밤에 부산행 기차를 탔다. 이튿날 테일러와 최순국은 부산에서 방송국 설립을 추진하고 있던 빌즈(Verlen Alex & Betty Bills) 선교사 가족을 만나 몇 시간 함께 시간을 보낸 후에 울산으로 향했다. 울산교회는 기독교회선교부로부터 ‘한국에 예배당을’ 기금에서 1956년에 1,400달러를 후원받아 장로교회로부터 헌 예배당을 매입하였던 곳이다. 테일러는 그 교회에서 수요일 저녁집회 때 설교를 했는데 120여명이 출석하였다. 이후 테일러와 최순국의 교회순방은 영양, 삼척, 강릉, 주문진, 38선 이북 고성으로 이어졌고, 26일 화요일 밤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들이 울산에서 기차, 트럭, 버스를 타고 위험한 도로들을 달려 도착한 곳은 산 속에 자리 잡은 1,000여 호의 마을로 이뤄진 영양이었다. 영양에 외국인이 온 것은 처음이어서 아이들이 예배 중에 외국어를 듣고서는 신기해하면서 웃었다. 작은 흙집 예배당에 사람들이 꽉 들어찼다. 그 밤에 테일러와 최순국은 오(현팔)목사가 운영하는 한약방에서 묵었다.

테일러와 최순국은 토요일(23일)에 네 개의 다른 노선의 버스들을 갈아타고 동해안의 가파른 도로들을 달렸다. 목적지까지 3시간을 남겨놓은 지점에서 밤이라서 버스가 끊겠다. 주일날 아침 5시에 다시 출발하여 삼척교회에 일찍 도착하였다. 아침 9시에 삼척교회의 이 아무개 할머니가 해주는 아침식사를 먹었다. 삼척교회는 서울성서신학교에 다니는 박병호 형제가 집에 와 있는 동안에만 섬기고 있는 곳이었다. 최순국은 이곳에서 한 차례 말씀을 전파했는데, 고향에 온 듯이 편안한 모습이었다고 적었다.

그들은 주일날 정오쯤에 교회를 나와서 버스를 타고 강릉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주문진으로 향하였다. 저녁에 주문진교회에 집회가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주문진에는 김 아무개 형제의 집이 있었고, 그곳에서 교회가 모였다. 그 주일저녁에 12명이 결신하였고, 이튿날 3월 25일(월)에 바닷가로 나가 12명이 침례를 받았다. 거대한 바위가 매서운 바닷바람을 막아줬지만 추위에 떨어야 했다. 그러나 구세주 주님을 찬양하는 찬양소리만큼은 드높았다고 적었다. 월요일 저녁에도 자정까지 집회를 열었다. 주문진교회는 서울성서신학교에서 일 년간 공부한 여전도자에 의해서 세워졌는데, 그날 오전에 침례를 받은 여신도들도 이 여전도사의 결실이었다.

3월 26일 화요일 아침 6시에 그들은 열 번째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38선 넘어 고성에 갔다가 산을 넘어 서울로 오는 길에서 버스에 세 개의 타이어가 펑크가 났고 다른 문제들까지 겹쳐 서울도착시간이 많이 지연되어 밤 9시에야 도착하였다. 주문진교회를 떠나던 아침에 점심에 먹으라고 찐 계란 12개를 싸줬는데, 최순국 형제는 먹지를 않았고, 테일러에게는 너무 많은 양이었으며, 이 여행에서 50대 초반의 테일러는 적어도 20대 초반의 최순국보다 자신이 더 잘 어려움을 견딘 것 같다고 소회하였다.

<1957년 4월 29일>

1957년 4월 29일에 서울과 인근 지역의 목회자, 장로 및 집사들의 연합집회를 열었고, 40명이 참석하였다. 테일러는 집회의 주제와 프로그램을 계획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참여토록 하였으며, 집회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다음 집회는 새로 지은 인천교회에서 모이기로 계획을 세웠다고 적었다.

<1957년 6월 3-10일>

테일러는 6월 3일에 충청도, 5일과 7일에는 전남, 9일에는 제주도에서 연합집회를 열 계획을 세웠다. 테일러는 이들 집회들을 통해서 전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절반 이상과 만나게 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리고 7월말까지는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들과 만남이 이뤄지기를 기대한다고 적었다. 이 목적을 위해서 테일러는 가능하다면 전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을 순회할 계획이었다.

<1958년 5월 18-25일>

테일러 선교사의 선교지 <한국에 그리스도를> 1958년 8월호에 따르면, 테일러는 한길사 직원 방 아무개(통역) 씨와 동행하여 1958년 5월 18일 주일에 부강교회를 방문하였고, 송(조순) 형제가 운영하는 판암동 애생원을 방문하였다. 5월 19일에 광주로 내려갔고, 20일(화)에 전남 해남군 화산면 방축리교회(최용호 목사의 박정자 사모의 출석교회)를 방문하여 100여명이 참석한 수요일 저녁집회에 설교하였다. 22일(목)에 강진, 23일(금)에 진성구 장로의 모교회이자 6.25전쟁 때 순교자들이 많이 나온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24일(토)에 전남 무안군 하의면 하태리 하의도교회(임해숙 전도사)를 방문한 후, 25일(주일) 오후에 상경하였다.

<1959년 6월 8-10일>

테일러 선교사는 1959년 6월 8-10일 전라도지방을 순회하여 박지(치)환 형제가 새로 개척한 곳에서 설교하였는데 이날 읍장을 비롯해서 21명이 결신하였다.

<1962년 2월 7-8일, 2월 16-23일, 3월>

테일러 선교사의 선교지 <한국에 그리스도를> 1962년 3월호에 따르면, 2월 7-8일 홍성으로 선교여행을 하였다. 안양교회 장주열 목사와 안재관 목사가 동행하였다. 홍성에 장 아무개 목사가 시무하는 1년이 채 안된 교회가 있었다. 테일러는 2월 16-23일 순회 때 목포교회를 가는 길에 홍성에 들러 3명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주일(18일)에는 목포교회에서 설교하였고, 월요일에는 임 아무개 통역과 함께 전주로 가서 말씀을 선포하였으며, 목요일(22일)에 군산을 거쳐 23일 상경하였다. 또 3월 중에는 전주를 다시 방문할 것과 목포에서 열리는 일주일 성경공부에 참석하여 최윤권 목사와 함께 강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모임은 22개 교회들에서 2명씩 참석하는 모임이라고 소개하였다.

(3) ‘한국에 예배당을’ 기금을 적절히 배분하였다.

존 T. 채이스 선교사는 1949년 초부터 주간 <그리스도인 표준>(Christian Standard)과 함께 ‘한국에 예배당을’(Chapels for Korea)이란 캠페인을 펼쳤다. 채이스는 1949년 2월 중순부터 9월 1일까지 주간지 <그리스도인 표준>(Christian Standard)과 함께 ‘한국에 예배당을’(Chapels for Korea)이란 캠페인을 펼쳐 50,000달러 기금이 모이면 가족과 함께 한국에 재입국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기금마련이 늦어진데다가 이듬해엔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입국을 포기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1953-54년 사이에 존 힐의 부인 에스더 비반즈가 일으킨 스캔들 문제를 폴 잉그람이 채이스에게 보고함으로써 삼자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서 세 사람 모두 1955년에 동반 사퇴하였다.

채이스 선교사는 기금마련이 늦어지고 자신이 재입국할 수 없게 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멀리까지 보실 수 있는 그분의 섭리 때문에 우리는 한국전쟁이 시작되기 이전에 이들 예배당을 짓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예배당들을 지었더라면 전란 중에 모두 파괴되었을 것이다.”

해롤드 테일러가 한국에 왔을 때, 채이스는 선교부와 연관된 모든 것들을 테일러에게 인계하였고, 쓰고 남은 ‘한국에 예배당을’ 기금은 테일러 가족을 후원하는 오클라호마 마이애미 제일 그리스도인의 교회에 넘겼다. 1955년 11월에 입국한 테일러는 이듬해 2월에 전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에 설문지를 보내 교회 상황들을 면밀히 파악한 후에 후원계획을 세웠고, 마이애미 교회는 테일러에게 이 기금을 보냈다.

테일러의 후원계획은 개교회가 할 수 없는 부분만큼만 지원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그는 그의 선임 선교사들이 목회자들에게 정기적으로 주던 후원금을 끊고 긴급 상황에서만 후원을 하였다. 테일러의 이 후원정책은 채이스가 ‘한국에 예배당을’ 기금을 조성할 때 세웠던 계획, 곧 꽤 훌륭한 예배당을 10여 채 이상 세우겠다는 계획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게다가 그의 정책은 많은 내국인 사역자들에게 그를 배척하는 원인이 되었다. 반면에 테일러의 이 정책으로 인해서, 채이스가 원했던 것만큼 훌륭한 건물은 아니었지만, 11개의 새 예배당이 건축되었고, 1개의 구 건물이 장로교회로부터 매입되어 그리스도의 교회로 사용되었으며, 34개의 교회들이 신축 또는 수리 보조금을 받았다. 테일러는 이 사실을 1959년 10월호에 실은 ‘기독교회선교부의 역사’(History of the Korean Christian Mission)에서 밝혔다.

테일러 선교사의 선교지 <한국에 그리스도를> 1956년 6월호에 따르면, 테일러 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처음 6개월 동안 보고 느낀 소감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시골에 있었고, 가난하고 작은 교회들이었다. 그러나 교인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것에 열심을 내는 훌륭한 성도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담임목사의 생활을 책임질 만큼 넉넉하지 못했고, 일부 교회들은 일주일 내내 체류하는 목회자를 두지 못하였다. 테일러는 이 무렵 전국에 교회가 75개 있었지만, 그 가운데 5개 정도만 도시에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시골이나 도시들의 공유지를 점유한 판자촌 또는 피난민촌에 있었다고 전하였다. 2년 후인 1958년 2월호에서 테일러는 ‘한국에 예배당을’ 기금을 후원받은 교회들이 대부분 텐트나 초라한 건물들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초가지붕이거나 마루도 없는 교회들이었다고 전하였다.

<한국에 그리스도를> 1956년 6월호에 따르면, 테일러는 ‘한국에 예배당을’ 기금을 적절히 효율적으로 배분하기 위해서 전국의 그리스도의 교회들에게 설문지를 보내 교회의 형편을 조사하였다. 조사가 진행되는 중에도 후원이 시급한 세 개의 교회들에게는 건축 또는 매입자금을 지원하였다. 오클라호마 주 마이애미 교회로부터 받은 10,000달러 가운데서 은행 수수료로 10달러, 대구교회 예배당 건축에 460달러, 울산교회 예배당 매입에 1,400달러, 용신교회예배당에 101달러 72센트를 지불하고 8,028달러 28센트의 잔액이 남았음을 보고하였다.

테일러가 발행한 선교지 <한국에 그리스도를>(For Christ in Korea) 1957년 6월호에 따르면, 테일러는 1956년 2월에 전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에게 설문지를 보내서 교회들의 역사, 재적인원, 출석과 건물 현황에 대해서 조사하였다. 그 무렵 전국에 침례 교인이 1,379명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10명 미만인 교회가 9개, 20명 미만인 교회가 22개, 50명 이상인 교회가 4개였다. 출석교인들은 이보다 10배 정도 많았다. 이들 가운데 몇몇 교회들만이 적절한 크기의 건물을 갖고 있었고,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일정부분 도움을 필요로 하였다. 테일러는 기금이 헛되게 쓰이지만 않는다면 가능한 많은 교회들에게 도움을 줄 생각이었다. 또 그 계획에 대해서도 교회들에게 알렸다.

<한국에 그리스도를> 1957년 6월호가 발행될 시점까지 테일러가 도움을 준 교회는 39개였다. 아직 돕지 못한 교회들까지 다 후원하려면 5,000달러가 더 필요하다고 보고하였다. 이 시점까지 테일러가 받은 기금은 총 28,857달러 83센트였다. 이 가운데 존 T. 채이스로부터 넘겨받은 돈은 18,424달러 88센트였다. 그리고 39개의 교회들을 건축하거나 수리 또는 보수하는데 들어간 비용은 26,776달러 51센트였고, 송금료 22달 41센트, 환전료 10달러 11센트, 기타(순회 및 국내 송금료) 119달러 12센트였으며, 잔액은 1,929달러 79센트였다.

테일러 선교사의 선교지 <한국에 그리스도를> 1958년 2월호에서 테일러는 ‘한국에 예배당을’ 기금을 후원받은 교회들이 대부분 텐트나 초라한 건물들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초가지붕이거나 마루도 없는 교회들이었다고 전하면서 여전히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교회들을 돕기 위해서는 최소한 10,000달러가 더 필요하다고 보고하였다. 덧붙여서 테일러는 1만 달러를 더 모금해서 쓰게 되면 총 5만 달러를 쓰게 되는 것이지만 (그간 쓰인 기금이 4만 달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5만 달러는 미국에서 예배당 하나 짓는 비용에 불과하고, 한국의 교파교단들의 큰 교회 예배당 두 개 정도를 짓는 비용에 불과하다고 적었다.

테일러의 선교지 <한국에 그리스도를> 1959년 10월호에 실은 ‘기독교회선교부의 역사’(History of the Korean Christian Mission)를 근거로 볼 때, ‘한국에 예배당을’ 기금으로 11개의 새 예배당이 건축되었고, 1개의 구 건물이 장로교회로부터 매입되어 그리스도의 교회로 사용되었으며, 34개의 교회들이 신축 또는 수리 보조금을 받았다.

(4) 선교지 <한국에 그리스도를>(For Christ in Korea) 일 년에 1-3차례 발행하였다.

필자가 쓴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이야기의 상당부분은 선교사들이 발행한 선교지들 덕분이었다. 이 선교지를 받아본 미국인 성도들이 이것들을 귀하게 여기고 보관하여 디지털화하지 않았다면, 한국 그리스도의 이야기 상당 부분이 밝혀질 수 없었을 것이다.

(5) 1957년에는 월간 <한길>(One Way)을 창간하였다.

테일러는 내국인들의 이견을 좁히고, 자신이 주도하는 비교파교회 플랜 곧 신약성서기독교를 전국에 소개하고, 목회자들의 설교준비와 목회사역을 돕기 위해서 월간 <한길>을 발행하였다. 월간 <한길>은 1957년 3월에 창간되었으며, 4월에 1,500부가 메일로 발송되었다. 테일러는 <한길>이 목회자들에게 신약성서의 계획과 교리들을 이해하고 가르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한길>은 처음에는 신문형식으로 발생되다가 13호부터는 잡지형식으로 바꿨다. 매호마다 묵상(QT), 교리, 선별된 기사들이 담겼고, 12-16쪽으로 구성되었으며, 연말에는 합본을 만들어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그리스도의 교회들 뿐 아니라, 많은 교파교회들, 학교들, 군목들에게도 발송되었다.

 

  

(6) 신학교 캠퍼스 이전 프로젝트(New Seminary Project)를 실행에 옮겼다.

테일러 선교사가 한국에 왔을 때, 전국에 그리스도의 교회는 75개였고, 서울성서신학교 학생들은 40여명이었으며, 일본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이 서울에까지 와서 가르쳐야했기 때문에 교과과정은 과목당 6주씩 집중교육을 받는 형식으로 운영되었다.

테일러는 1955년 11월 한국에 입국하여 기독교회선교부를 인수받고, 1958년에 지은 신학교 3층 건물을 포함해서 서울 서대문구 송월동 32-6번지의 선교부 재산을 모두 팔았고, 그 때문에 북서울 역촌동(현재 신사동)에 캠퍼스부지를 매입하여 교사와 기숙사를 짓기까지 몇 년 동안 신학교 운영이 중단되는 사태를 빚었다. 그러나 테일러는 처음부터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문교부인가의 필요성을 깨닫고 있었고, 또 인가를 득하기 위해서는 자격요건을 충족시키는 넓은 캠퍼스와 시설확충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이 일을 추진하였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서울기독대학교는 테일러 선교사의 선견지명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테일러의 선교지 <한국에 그리스도를> 1956년 6월호에 따르면, 1956년에 신청한 인가신청이 부지가 8분의 1밖에 되지 않아 거부되었다. 이때부터 테일러는 신학생들이 늘어나 장소가 협소다면서 송월동 부지와 건물을 팔고 더 싸고 넓은 부지를 물색하여 선교부와 신학교를 이전시켜야할 필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제대로 된 시설을 갖춰야 정부로부터 대학인가를 받을 수 있고, 인가를 받아야 좋은 학생들을 받을 수 있으며, 재학생들이 병역문제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혜택들을 정부로부터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테일러는 <한국에 그리스도를> 1958년 8월호에서 자신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두 개의 확연이 드러난 문제들이 있었다는 점을 설명하였다. 첫 번째 문제는 70여개의 어린 교회들이 있었고, 그것들 대부분이 2-3명의 신실한 목회자들의 열정에 의해서 세워진 것들로서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목회자들이 돌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양떼를 제대로 돌볼 훈련된 목회자들이 필요하였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대개의 교회들이 시골이나 피난민 지역들에 있었기 때문에 인구가 많은 도시들에 교회들을 세워야할 필요가 분명히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서울을 제외한 다른 10개의 대도시들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단지 6개뿐이었는데, 그 가운데 2개만이 제대로 운영되고 있었고, 오직 한 개의 교회만이 한명의 장로를 두었다고 하였다. 시골에 있는 교회들조차도 단지 몇 개만이 상태가 좋은 교회였고, 그들 가운데 5월 22일에 방문했던 전남 해남군 화산면 방축리교회는 80여명의 성도에 2명의 장로가 있었으나 애석하게도 장로들이 목회자를 내보냄으로써 그 목회자가 인근지역의 타교단으로 갔다고 하였다. 테일러는 작은 교회들을 아우를 수 있는 맏형교회들이 대도시에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신학교, 정부로부터 인가가 난 신학교가 필요하다고 확신하였다.

테일러는 <한국에 그리스도를> 1958년 8월호에서 월드비전의 래츠(Raetz)가 ‘그리스도인 미군센터’로 쓰기 위해서 송월동 선교부를 매입하겠다고 하여 계약서까지 쓰고, 7월 한 달 동안 부지를 선정하기 위해서 돌아다녔다고 하였다. 그런데 1959년 5월호에서는 1958년에 선교부 부지와 건물을 매입하려던 사람에게 할부금 형식으로 계약하였으나 매입하려던 계획이 실패로 끝남으로써 1,500달러의 수입이 생겼으나 거의 일 년에 가까운 시간을 낭비했다고 하였다. 테일러는 또다시 부동산소개소에 부지와 건물을 팔려고 내놓았고, 그세 시세가 올라 4만 달러 정도는 되어보였다. 그 돈이면 송월동 선교부의 부지보다 20배 정도와 초기 건물을 건축할 수 있는 비용이 된다고 하였다.

이 무렵 송월동 선교부신학교의 학생수용능력이 25명이었으나 새 캠퍼스의 수용능력은 250명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그리고 테일러는 교수충원과 관련해서 최윤권이 산호세 신학대학 졸업을 1년 남겨놓았고, 최순국이 링컨성서대학으로 유학을 떠날 채비를 마쳤으며, 김진문이 1960년부터 교수진에 합류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이 시점에 신학교는 휴교상태였다.

<한국에 그리스도를> 1959년 10월호와 1960년 2월호 따르면, 선교부 건물과 토지는 1959년 6월 3일에 팔렸다. 60일 이내에 집을 비워주기로 했기 때문에 이사할 곳을 찾아야했다. 테일러는 집을 비워 줘야할 날짜를 이틀 남기고 방 8개짜리 집을 일 년간 전세로 얻었다. 2층 건물로 송월동 32-6번지에서 가까운 141번지에 있었다. 그곳에 선교부, 한길 사무실, 2층에 집회소(Gospel Hall)와 전도센터를 두었다. 나머지 짐은 특히 신학교의 책걸상은 이전 송월동 신학교 건물의 지하실에 12월 1일까지 임시로 둘 수 있도록 새 주인에게 허락을 받았다. 테일러 가족은 그곳에서 가까운 곳에 작은 집을 전세 내어 이사하였다.

테일러 선교사는 누구보다도 훌륭한 신학교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고 또 그렇게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새로운 캠퍼스부지가 1959년 후반기에 구입되었다. 테일러는 서울 변두리 역촌동에 6천여 평의 토지를 매입하였다. 그곳에 27평정도 되는 절연제인 알루미늄 콘센트 막사를 지어 그곳으로 신학교 책걸상을 옮겼다. 이 막사는 학교가 이전하면 임시로 여기숙사나 식당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한국에 그리스도를> 1961년 10월호에 따라면 테일러 가족은 안식년을 마치고 6월에 한국에 돌아왔다. 그리고 테일러는 동년 8월 28일에 12개 교회들의 대표들과 함께 기공식을 갖고, 2층 교사와 남녀기숙사 및 식당을 건축하였으며, 그동안 중단되었던 서울성서신학교는 새 캠퍼스에서 1963년 3월에 개강하였다. 교수들은 테일러 선교사, 최윤권 목사, 1962년에 입국한 고든 패튼(Gorden Patten) 선교사, 박두진 시인 등이었다.

(7) 그리스도의 교회들 보육원을 직접운영(부평) 또는 후원(인천 숭의동, 대전 판암동)하였고, 구호물자를 보급하였다.

부평보육원은 힐 요한 선교사와 리라 톰슨 힐러(Lila Thompson Hiller)가 송월동 선교부에서 시작한 보육원으로써 리라 톰슨이 부지매입과 건축을 책임지고 부평으로 옮긴 것이어서 기독교회선교부가 모든 살림을 책임졌다. 또 기독교회선교부는 대전 애생원을 직접 관리하였고, 인천 보육원과 함께 학비, 책값, 기성회비 등을 후원하였다. 하지만, 재원부족으로 전적인 책임을 질 수가 없어서 월드비전의 도움을 받도록 주선하였다.

테일러는 이들 보육원생들에게 매주 1회 예배와 연 2회 성경학교를 개최하여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로 인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거나 만 18세가 되어 퇴원하는 원생들 중에 목회자가 되기를 소망하는 자들이 있었다. 실제로 서울성서신학교에는 보육원 출신의 신학생들이 여러 명 있었다.

<한국에 그리스도를> 1959년 5월호에 따르면, 1958년 10월에 부평보육원의 원생들이 원장에 반대하여 데모를 일으켰고, 그 수습책으로 설하운 목사가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설목사는 이 보육원을 도내 최고 보육시설 가운데 한 곳이라는 평가를 받아냈다.

설하운 목사는, <한국에 그리스도를> 1957년 2월호 따르면, 1956년 12월 27일 김경옥 자매와 김동수 목사의 주례로 결혼하였다. 신학생 때 설하운은 선교부신학교 관리과장으로 섬겼고, 구호의류를 보육원들과 목회자들에게 보내는 업무를 관장하였다. 1957년 3월에 선교부신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도원동교회를 시무하다가 부평보육원 원장 밑 부평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로 취임하였다.

부평보육원에서 발생한 문제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가 1958년 12월 대전 판암동 애생원에서 발생하였다. 이 문제는 일간지에 기사화가 되고, 법적문제로까지 번졌다. 테일러 선교사는 해결책으로 전에 부평보육원에서 총무로 일하다가 일이 힘들어서 사임하고, 서울에서 전에 했던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던 박정훈 형제를 불러 원장으로 앉혔다. 테일러가 1960년 1월 11일에 애생원을 찾았을 때, 애생원은 월드비전의 도움으로 건물에 대한 담보권이 풀렸고, 새로운 이사진, 새로운 원장과 새 이름을 갖게 되어 마치 새로운 장소 같았다고 전하였다.

<한국에 그리스도를> 1957년 6월호에 따르면, 테일러는 보육원들에 보낼 헌옷들을 1956년 여름부터 일 년에 두 차례 10월과 4월에 보내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맞춰 미국의 형제들이 구호물자를 보내주기를 요청하였다. 10월에는 보내줘야 보육원들이 겨울채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테일러는 이 옷들을 수선할 재봉틀도 보내 줄 것을 미국 교회들에 요청하였다. 보육원 아동들의 숫자만큼이나 수선이 많다보니까 재봉틀의 수명이 짧았던 것이다.

 

 

 

  

(8) 세 개의 중학교들의 설립을 돕고 순회하였으며 후원하였다.

테일러가 발행한 선교지 <한국에 그리스도를>(For Christ in Korea) 1956년 6월호, 1957년 6월호, 1959년 5월호에 따르면, 테일러는 세 개의 중학교를 돕고 있었다. 테일러 선교사는 이들 학교들이 발전하여 고등학교를 설치하게 되면 장기적이고 안정적으로 목회자 지망생들을 모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두 곳은 필요할 도움을 줬고, 한 곳은 매월 75달러씩 지원하였다. 이 액수는 교사들 봉급의 절반이 조금 못되는 액수였다. 매월 지원했던 학교는 영광농축기술학교로써 38선 근처 포천에 있었다. 테일러 선교사가 설립자였고, 박혁 목사가 교장이었다. 그곳에 박혁 목사가 시무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도 있었다. 이 학교는 학생 17명으로 시작되어 62명으로 늘었고, 대부분 남학생들이었다. 농업을 강조하는 중학교로써 매일 성경공부를 가르쳤다. 이 학교 캠퍼스 안에 고등공민학교가 별도로 하나 더 있었다.

신갈에는 이기구 목사가 운영하는 중학교가 있었다. 금광을 운영하는 동서의 도움으로 교사를 건축하였지만, 5천 달러 정도의 빚 때문에 거의 팔릴 뻔하였다. 졸업생들 가운데 서울성서신학교에 입학하기를 원하는 이들이 있었으나 테일러는 입학을 거부하면서 고등학교 설치를 주문하였다. 1957년 봄에 시작된 고등학교에 10명의 신입생들이 입학하였고, 그 가운데 7명이 신학교 지망생들이었다. 이 무렵 전교생이 95명이었다.

서울 근교에 김 아무개 형제가 운영하는 학교가 있었다. 300여명의 학생들이 대부분 북에서 넘어온 가족들의 자녀들이었다. 난로도 없는 세 개의 천막교실에서 수업이 이뤄졌다.

 

  

(9) 그리스도의 교회 재단법인을 설립하여 재산을 보호하고, 신약성서교회 조직에 힘썼다.

테일러는 <한국에 그리스도를> 1960년 2월호에서 창립 22돌을 맞이한 돈암동 교회가 1959년에 겪었던 시련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한국의 다른 그리스도의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돈암동교회도 역시 구성원들의 견해와 행동에 의해서 또는 상충하는 교리들에 의해서 혼란에 빠져들었다. 7월에 돈암동교회의 대표자들이 선교사를 찾아왔다. 그들의 설교자가 교회를 침례교회로 끌고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절반가량의 교인들이 예배를 보이콧하고 있었다. 그들은 선교사가 와서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랐다. 테일러 선교사는 양진영이 모인 자리에서 입장을 전했고, 수요일에 침례교 목사는 사임하였다. 그 이후 테일러는 돈암동교회에서 말씀을 선포하는 전도자로 혹은 치리목사로 사역하였다. 27명이 침례를 받았고, 출석인원 25명이 50명으로 배가되었다. 9월에는 성경공부 반을 조직하여 기본 교리를 가르쳤다. 또 제대로 된 신약성서교회를 조직하기 위해서 최초로 부수정관이 포함된 정관(조직플랜)을 만들었다. 테일러는 돈암동교회를 모델로 삼아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신약성서교회로 조직될 수 있기를 바랐다.

 

  

(10) 선교사 가족들을 모집하여 한국교회 발전에 기여토록 하였다.

테일러는 리처드 래쉬(Richard and Melba Lash) 가족과 고든 패튼(Gorden and Sharon Patten, 배도은) 가족을 선교사로 영입하여 한국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토록 하였다.

래쉬 가족은 1957년 5월 27일 배로 미국을 출발하여 6월 24일 부산에 도착하였으며, 27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래쉬 가족은 1년 정도 기독교회선교부에 머물며 한국말을 익히는 동안 서울성서신학교에서 강의도 하고, 한국교회 상황도 살폈다. 그러고 나서 1958년 5월 10일 강릉으로 이사하였다. 신학교에서는 9일 12시 30분에 송별파티를 열어 환송하였다. 이후 래쉬는 부산으로 옮겨 장성만 목사와 더불어 경남정보대학을 일구는데 힘썼으며, 서울성서신학교와 대전의 한국성서신학교 모두에 필요에 따라 협력하였다. 래쉬 가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필자가 쓴 <충청이남지역(협의회, 총회)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이야기>나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인터넷 사이트(http://kccs.info)를 참고해 주기 바란다.

고든 패튼은 1954년에 미군으로 한국에서 근무하면서 한국의 물적 영적 궁핍을 깨닫고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미국으로 돌아가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1960년에 과정을 마쳤고, 1962년 5월 25일 부인과 두 딸과 함께 미군이 아닌 선교사로서 한국 땅을 다시 밟았다. 한국에 도착한지 2개월 후에 셋째 딸이 태어났다.

해롤드 테일러 선교사의 선교지 <한국에 그리스도를>(For Christ in Korea) 1962년 3월호와 김찬영 박사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초기역사> 151-153쪽에 따르면, 고든 패튼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였다. 아직 젊은 나이에 국가의 부름을 받고 오리건 주 코티지 그로브(Cottage Grove, Oregon)의 집을 떠나 군에 입대하였다. 그가 근무를 희망한 나라들 가운데 극동이 가장 마지막 희망지였고, 한국이 희망 근무지 목록의 가장 마지막 나라였다. 그러나 군이 그를 보낸 곳은 바로 한국이었다. 그때가 1954년 6.25전쟁직후라 한국이 정치 경제적으로 매우 어렵고, 전쟁고아도 많았던 때였다. 패튼은 준비가 되는대로 한국에 다시 오겠다는 포부를 갖고 미국에 돌아가 제대하자마자 캘리포니아 주 산호세성서대학에 입학하였다. 패튼은 산호세성서대학에서 오리건 주 유진(Eugene Oregon)의 대학가(College Street) 그리스도의 교회 출신인 샤론 콜버(Sharon Collver)를 만나 결혼하였다.

 

 

  

(11) 장래가 촉망한 내국인 젊은이들을 지도자들로 키우기 위해서 미국에 유학을 주선하였다.

테일러는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미래를 생각하며, 서울성서신학교를 역촌동으로 이전하여 발전시키는 동시에 내국인 교수진과 교회지도자 확보를 위해서 인재발굴에도 힘썼다. 테일러는 최순국, 최윤권, 김진문, 안재관 등을 발굴하여 미국유학을 주선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선교지 <한국에 그리스도를>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장래가 촉망한 내국인 젊은이들을 사진과 함께 기사화하여 미국 성도들에게 소개하고 유학생활에 편의를 제공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비록 테일러 선교사가 한국문화와 내국인들의 정서를 잘 헤아리지 못하여 트러블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신학교와 인재를 키우고자했던 그의 간절한 기도와 노력은 높이 평가받을만하였다.

 

(12) 여성들의 친교모임을 조직하여 월1회씩 모임을 갖도록 장려하였다.

1961년 10월호에 따르면, 서울지역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7개 있었다. 상호 독립적이었고, 교제도 별로 없었다고 전하였다. 이유가 두 가지였는데, 한 가지는 교통비 문제였고, 또 다른 한 가지는 모여야 할 진짜 목적 또는 동기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한국 교회들의 성도는 여성들이 다수였다. 테일러는 여성들의 친교 모임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월1회 모임을 갖도록 장려하고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61년 9월 29일에 필운동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제1회 여성모임을 가졌다. 특별강사는 서울여자대학의 (초대)학장 고(황경) 박사였다. 고 박사는 여성으로서 세계 여행가이자 제네바 유엔회담의 한국대표였다. 첫 모임에 60여명이 참석하였고, 매월 1회씩 모이기로 결정하였다.

이 무렵에 그리스도인대회 및 교역자 수련회 등이 활기를 띄었다. 최윤권 목사는 <내가 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역사>(2003) 68쪽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교역자회도 생기를 찾기 시작하였고 그리스도인대회도 시작되었다. 제2회 그리스도인대회 및 교역자회는 신탄진에서 있었고, 제3회 및 제4회는 서울 임마누엘수도원에서 있었다. 제3회 때는 최윤권 목사가 대회장을 하였고, 제4회 때는 최순국 목사가 하였다. 이때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 가운데 환원운동의 진로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있었던 때도 없다. 이때에 수고한 동역자들 중에는 4.19때 국회의원을 지낸 정인소 박사도 있다.

 

(3) 은퇴 후 생활

해롤드 테일러 선교사 부부는 1955년 이후 19년간 서울에 머물면서 활동을 하였고, 모든 선교부 일을 후임자인 배도은(Gorden Patten) 선교사에게 넘기고 만 70세 때인 1974년에 은퇴하였다. 그러나 부부 모두 은퇴 후의 여생이 길지 못하였다. 테일러는 1976년 5월 15일 교회 제직소풍 중에 심장마디로 쓰러진 후 오후 8시 13분에 만72세로 별세하였고, 에이더(Ada Maryellen Sayer)는 캘리포니아 주 샌타클래라 카운티(Santa Clara County)의 산호세에서 1980년 10월에 만74세로 영면하였다.

4. 해롤드 테일러 선교사의 내국인 사역자들

여기에 소개되는 테일러 선교사의 내국인 사역자들은 테일러가 <한국에 그리스도를>에서 언급한 인물들에 국한되었다. 서울성서신학교 초기 졸업생들 가운데는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발전에 기여한 훌륭한 사역자들이 많지만, 자료의 부재로 인해서 부득이 이 글에서는 테일러 선교사가 남긴 자료와 필자가 이미 작성해 놓은 자료에 국한하였다.

1) 최순국 목사(1933.02.08-2002.09.16)

테일러 선교사는 최순국 형제를 자신의 오른팔로 소개하였다. 테일러는 <한국에 그리스도를> 1957년 2월호에서 통역 최순국을 자신과 밀접하게 일하는 사역자라고 하였고, 최순국이 요츠야선교부 동경성서신학교의 학생이었다고 전하였다. 테일러 가족이 일본을 떠나 한국으로 오기 전에 최순국이 찾아와 기독교회선교부(Korean Christian Mission)의 상황과 역사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고 했다. 상황은 복잡했지만, 최순국에게는 분명했다. 테일러 가족이 한국에 와서 상황분석을 할 수 없게 되자, 최순국의 도움을 바라고 기도했는데, 1955년 12월 31일에 최순국이 집으로 찾아왔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이곳에 보내셨는지를 말하였다.

최순국은 장로교 교인이었고, 한국에서 군복무 중이던 어윈 브라운(Irwin Brown)에 의해서 좀 더 완벽하게 주님의 길을 인도받았다고 하였다. 여기서 테일러는 데일(Dale)를 어윈(Irwin)으로 잘못 기재하였다. 최순국은 6.25전쟁 중에 미군부대에 편입되어 미 공군사병이었던 데일 브라운(Dale Brown)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 최순국이 1959년에 미국에 유학할 수 있었던 데는 데일의 도움이 컸다. 이후 데일은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Disciples of Christ)에서 목회하였다.

테일러는 최순국이 내국인 사역자들과 자신 사이에서 완충작용을 하였고, 그로 인해서 스트레스도 있었다고 하였다. 테일러는 성경의 사건들을 비유로 들어가며 최순국의 등장을 하나님의 큰 섭리와 은총으로 이해하였다. 최순국이 서울에 온 것은 마리아의 집에 베드로가 온 것과 같고, 최순국이 그의 부모가 살고 있는 일본에 일 년 전에 여행한 것은 유라굴라의 광풍에서 죽었다가 살아난 바울의 로마행 여행에 비교될 수 있다고도 하였다.

테일러 선교사가 발행한 선교지 <한국에 그리스도를>(For Christ in Korea) 1957년 2월호 내용에 비춰볼 때, 최순국은 송월동 기독교회선교부에 분열이 있었던 어느 시점에 부모님이 계신 일본으로 건너가 요츠야선교부의 동경성서신학교에 다니던 중에 테일러 선교사 가족이 송월동 기독교회선교부를 맡아 1955년 11월에 한국에 선교사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테일러를 찾아가 선교부 상황을 설명해 주었고, 본인도 1955년 12월 31일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테일러에게 신실한 협력자가 절실히 필요했던 시점에 맞춰 최순국이 찾아왔고, 테일러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으며 선교사를 도운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테일러는 <한국에 그리스도를> 1957년 6월호에서 최순국이 4월 20일에 군사훈련을 받기 위해서 한국군에 입대하였다고 전하면서 자신들이 1955년 11월에 입국해서 직면했던 난관들을 놀랍도록 지혜롭게 처리해준 23살의 젊은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채이스 선교사가 20대 후반의 박판조에게 보인 애정이 훌륭한 미래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도자감이란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테일러 선교사가 20대 초반의 최순국에게 보인 애정은 그가 입증한 지혜와 헌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최순국은 이미 서울성서신학교의 학생신분으로서 힐 선교사의 통역을 맡아 일을 했던 경력자였고, 기독교회선교부가 분열에 휩싸였을 때 그 싸움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인물이었으며, 젊지만 지혜가 많고 테일러에게 헌신적이어서 분열에 휩싸였던 기독교회선교부에 평온을 되찾게 하고, 내국인 목회자들이 자신의 리더십아래서 연합할 수 있도록 도운 공신이었기 때문이다. 테일러는 최순국이 1955년 12월 31일에 일본에 돌아와 자신을 찾아온 일을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섭리하신 일이라고 굳게 믿었다.

미국 텍사스 주 포트워스 시에 소재한 브라이트신학대학원(Brite Divinity School)의 이상훈 교수의 “우리의 대선배 최순국 목사”(Soongook Choi: Our taesonbae), “최순국 목사의 생애”(A Brief History of Soongook Choi), "북미주태평양아시아인제자들의 약사“(A Brief History of the North American Pacific/Asian Disciples, 1891-2010)에 의하면, 최순국 목사는 1933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유교신자였고, 모친은 불교신자였다. 그러나 그는 중학교 1학년 담임교사의 영향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담임교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손톱이 모두 뽑히는 고문을 당하였지만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 사실에 최순국은 깊은 감명을 받았고, 기독교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부모의 종교들은 정의와 평화를 갈망하는 그에게 그 어떤 단서도 제공하지 못하였지만, 기독교는 그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

최순국은 독립심과 의지가 강하고, 종종 별난 사람으로 여겨질 만큼 인정이 많았다. 이런 성품 때문에 6.25전쟁 중에는 공산군을 물리치기 위해서 재일본 한인 34명으로 구성된 의용군(학도병)에 자원입대하여 전투에 참여하였고, 생존자 3명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최순국은 한국에서 힐 요한(John Hill) 선교사가 운영한 한국기독성서신학교(Korea Christian Bible Seminary)를 다녔다. 그의 결혼식 주례도 김은석 목사가 맡았다. 이 때문에 김은석 목사의 성경통독메모(1953-58)에 최순국의 이름이 몇 곳에 적혀있다. 그는 1953년 8월 4일 힐요한 선교사의 통역으로 창현 함태영 목사가 세운 충남 논산면 신교리교회와 복음중학교를 방문하였고, 테일러의 <한국에 그리스도를> 1957년 6월호에 의하면, 최순국은 군 입대를 꼭 한 달 앞둔 시점에서 테일러와 함께 1957년 3월 19일 밤기차로 부산에 내려가 이튿날 방송국 설립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던 빌즈 가족을 만나 환담을 나눴고, 울산을 거쳐 영양, 삼척, 강릉, 주문진, 38선 이북 고성까지 돌아 26일 화요일 밤에 서울로 돌아온 교회순방 일정을 소화하였다. 1958년 3월 30일 주일에는 리처드 래쉬(Richard Lash) 선교사의 통역으로 김은석 목사가 시무하는 충남 부강교회를 방문하였다. 버트 엘리스와 조 세걸키의 1959년 7월 부산방송선교서신에 의하면, 최순국은 해롤드 태일러(Harold Taylor)의 통역관이었다. 이런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최순국은 6.25전쟁 직후 그리스도의 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순국은 미국에 유학하여 1961년에 링컨기독대학에서 문학사(A.B), 1962년에 신약신학을 전공하여 문학석사학위(MA)를 받고, 동년에 목사안수도 받았다. 이어 1965년에 밴더빌트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석사(D.D)를 받고 1966년 8월 1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항을 떠나서 동년 9월 1일경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귀국하여 1969년까지 필운동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시무하면서 대한기독교신학교(현 서울기독대학교)의 설립협의회 회장과 교수 및 제2대 교장을 역임하였다.

최순국은 1964년 8월 26일 조직된 대한기독교신학교 설립협의회(Korea Christian College Planning Association)의 회장직을 맡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다. 대한기독교신학교는 최윤권 목사의 리더십으로 최순국, 안재관과 같은 링컨기독대학 출신 또는 재학생이 중심이 되어 1965년 3월에 설립되었다. 상임위원에는 안재관, 최윤권(실무 학장), 장성만, 조충연, 최순국, 최요한, 이종만, 임명진, 강병천, 김현숙, 김진문(설립협의회 서기 겸 교무처장), 김규상, 김태수, 구광서(설립협의회 총무), 오현팔, 심영진, 성수경, 양해문이었고, 미국인 고문에 단 드웰트(Don DeWelt), W. L. 제섭(Jessup), 빌 전킨즈(Bill Junkins), 존 피얼스(John R. Pierce), 아이러 리드(Ira B. Read)였다. 대학설립과 동시에 <환원>지도 발간되었다.

최순국은 한국복음선교회(Korea Evangelistic Mission, KEM)를 설립하여 교수와 목회자와 방송선교사로 왕성하게 사역하였다. 1968년부터 라디오 기독교 방송국의 시간을 사서 최윤권, 김일엽(KEM 라디오방송 담당자)과 함께 방송설교와 ‘이형과 더불어’라는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설교는 서울, 대구, 부산, 이리, 광주에서 주일 오후 5시에, 서울을 제외한 대구, 부산, 이리, 광주에서는 주일 오전 8:30에도 방송이 나갔다. ‘이형과 더불어’는 CBS에서 매주 2회 10분간 방송되었다. 1970년에 송출된 방송결과를 보면, 청취자들로부터 2,729통(평균 매주 52통)의 편지를 받았고, 182통의 전화를 받았으며, 26번 개최된 모임에 297명이 참석하였다. 그 결과 243명이 생애 처음으로 교회에 나갔고, 172명이 침례를 받았다.

최순국 목사는 1974년 미국 시카고로 이민하여 10월 20일에 시카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여 23년간 섬겼다. 이 교회도 다른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들처럼 중도에 그리스도의 제자들 교단에 가입하였다. 유근희 박사(태평양아시아인 사역 실행목사), 노동국 박사(제자들신학원 동문, 일리노이 주 알링턴 하이츠에 소재한 그리스도의 제자들 소속 에버그린 그리스도의 교회 개척 목회자), 이상훈 박사(텍사스 주 포트워스 시 소재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 등이 최순국 목사의 영향을 받은 미국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 지도자들이다.

최순국 목사는 1989년에 노트르담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목회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시카고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는 동안 시카고 파크리지(Park Ridge)에 소재한 루터교종합병원(Lutheran General Hospital)의 정규직 원목으로 사역하였다.

최순국은 일본에서 당한 인종차별, 한반도에서 겪은 동족상잔의 뼈저린 경험을 거울삼아 일찍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이룰 수 있는 인종화합과 평화를 위해 헌신하였다.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민족들 간의 분쟁의 아픔을 겪으면서 타민족 공동체들 사이의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최순국은 “이웃을 섬기고, 그들에게 사랑으로 감동을 주며, 평화롭게 하고, 용서를 실천하며, 화해를 도출시키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나의 방법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신념으로 최순국은 한인 제자들 총회(Korean Disciples Convocation)를 설립하였고, 제자들신학원(Disciples Divinity House)의 동문들인 데이비드 가기와다(David Kagiwada), 조 앤 가기와다(Jo Anne Kagiwada) 등과 합력하여 현재 80여개 교회들이 가입해 있는 북미주태평양아시아인 제자들(North American Pacific/Asian Disciples, NAPAD)을 조직하였다.

최순국은 그리스도의 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 교단의 총괄 이사회의 회원을 역임하였고, 제자들신학원(Disciples Divinity House)의 이사를 1989-97년에 역임하였다. 그는 또 미국 인디아나 주 인디애나폴리스 시 파티마 연수원(Fatima Retreat)에서 1984년 7월 31일부터 8월 2일까지 개최된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Disciples of Christ) 산하 아시아계 미국인 제자들(American-Asian Disciples, AAD)의 제3차 회의 때 회장(소집자)으로 선출되어 아시아계 미국인 교회들을 이끌었다. 또 최순국은 1993년에 결성된 그리스도의 제자들 한국인 목회자회(Disciples of Christ Korean Fellowship)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봉사하였다. 2000년에는 이 친목회가 한국인 제자들 총회(Korean Disciples Convocation)로 발전되었다.

최순국은 1990년에 찾아온 뇌졸중에도 불구하고 중단하지 않던 사역을 내려놓고 1997년 3월에 은퇴하였다. 은퇴식은 그가 23년간 섬겼고, 한인 교회들에 지도력을 제공했던 시카고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Chicago Christian Church, Disciples of Christ)에서 개최되었다. 이때 북미주태평양아시아인제자들(NAPAD)로부터 감사패를 증정 받았으며, 그의 삶과 사역을 기념하기 위해서 '국내사역국'(Division of Homeland Ministries, DHM)에 '최순국장학기금’이 설립되었다. 북미주태평양아시아인제자들(NAPAD) 사역에 소속된 학생들이 정규 신학대학원에서 정식학생으로 등록한 경우에 이 기금을 신청할 수 있다. 최순국은 또 2000년 그리스도의 교회 교단에서 평가한 지난 1백년간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36명의 사역자 중에서 아시안 남성으로는 유일하게 선발되었고, 지난 20세기 그리스도의 제자들 100대 목사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시카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창립자이자 서울기독대학교(구 대학기독교신학교)의 공동설립자인 최순국 목사는 2002년 4월 14일 알링톤 하이츠 소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서울기독대학교로부터 명예신학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점을 감안하여 서울기독대학교 이강평 총장이 직접 시카고를 방문하여 명예신학박사학위를 수여하였다.

최순국 목사는 2002년 9월 16일 소천 하였다. 사모 명희로부터 미동과 데이비드(선동) 두 아들을 두었다

2) 김동수 목사

테일러 선교사는 자신이 발행한 <한국에 그리스도를>(For Christ in Korea) 1957년 6월호에서 김동수 목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김동수 형제는 나이가 67세이다. 육신은 날로 쇠하여가지만, 그의 신념만큼은 더욱 새로워지고 강해지고 있다. 그는 이미 9년간 선교부의 통역과 교수로 섬겼으며, 부인이 병약하여 간호에도 힘쓰고 있다. 또 김동수는 행방불명된 아들들의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김동수 목사를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년도는 대략 1952년에서부터 60년경까지이다. 테일러와 김동수가 언급한 9년은 실제로는 8년이다. 힐 요한 선교사가 재입국한 해가 1949년 2월 18일이기 때문이다. 힐 선교사를 도왔던 김동수 목사는 최순국이 군에 입대하면서 다시 테일러 선교사를 돕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테일러가 소개한 김동수 목사의 간증이다.

나는 내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를 내 모든 죄악에서 건져 주셨는가를 생각할 때면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밖에는 달리 아무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나는 한 때 큰 죄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님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죄악에서 빠져나올 희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부드러우셨고 능히 나를 죄의 나락에서 건져 올리셨습니다. 주님을 찬양합시다!

나는 영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지 일 년 되던 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았지만, 술을 끊지 못했고, 중독이 되도록 마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힘으로는 그 중독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술 마시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구세군에서 예수 그리스도님을 만날 때까지는 술을 끊어보려는 나의 노력이 번번이 허사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나는 그분에게 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굴복했을 때 그분은 나에게 술을 거부할 능력을 주셨습니다. 나는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고, 베드로의 입술을 통해서 말씀하신 구절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나 개인의 구세주로 발견하였고, 그분이 내 대신에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이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왜 구세군에서는 결코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풀지 않고, 또 그들에게 가르치지 않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나는 어떤 만족도 얻지 못했습니다.

나는 구세군 사역에 오랜 기간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대략 9년(실제로는 8년) 전에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힐 요한 선교사를 만났고, 그분이 나에게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제대로 침례를 베풀어주었습니다. 비로소 나는 마음에 만족을 얻었고, 그로부터 나는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교회 사역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 해 동안 나를 인도하시고 온전한 구원을 얻게 해주신 주님께 전심으로 감사와 찬양을 돌립니다.

6.25동란이 터지자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모두 피난을 가야했습니다. 모일 모시에 서울이 폭격을 받을 것이라는 보도가 나자 수많은 사람들이 피난길에 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피난길에 나섰을 때 많은 사람들이 되돌아오고 있었고, 그들이 말하기를 더 이상 어느 곳에도 숨을 곳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섰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살던 집으로 가지 않고 아들네 집으로 갔습니다. 곧바로 공산군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공산군들이 우리가 살았던 곳 근처에까지 와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후 3-4시까지 총질을 해댔습니다. 나중에 내가 나가봤을 때 나는 우리가 살았던 곳이 포탄을 맞아 박살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기도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제게 무슨 목적을 갖고 계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주님의 뜻이면 그것이 무엇이든 순종하겠습니다.” 내가 전에 살던 집으로 가지 않은 것은 정말 놀랍고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내게 임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때가 1951년 1월 4일 공산군들이 두 번째 남침한 때였습니다. 이것은 내 삶의 많은 체험들 가운데 한 가지에 불과합니다. 나는 전쟁 중에 네 명의 아들들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같은 사실을 마지막 줄에 쓰게 되어 송구합니다만, 그것은 정말 비극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3) 최윤권 목사

최윤권 목사는 최상현 목사의 둘째 아들로서 군에서 연락장교로 복무한 후에 제대하여 서울성서신학교에서 영어강사, 통역, 한길 잡지 편집 등의 일을 하다가 1956년 미국 산호세 성서대학으로 유학하였고, 1960년에 졸업하였으며, 링컨기독대학원을 1961년에 졸업하고, 1961년 11월 8일 귀국하여, 1962년 2월 5일 결혼하였다.

최윤권 목사는 귀국 후 도원동교회에서 목회하면서 1963년에 통신신학을 개설하였고, 1964년에 <환원>지를 창간하였다. 그리고 1965년에 대한기독교신학교를 창립하였다. 대학설립에 대해서 최윤권 목사는 <내가 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역사>(2003) 61쪽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일 년 후 테일러 선교사와 갈라진 최윤권 목사는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더불어 대한기독교대학 기성회를 조직했다. 기성회 회장은 최순국 목사가 맡았고, 1965년 3월 18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 임시 교사를 마련하여 대한기독교신학교를 개교하였다. 최윤권 목사가 교장을 맡았고, 구광서 목사, 강병천 목사, 성수경 목사, 심영진 목사, 이신 목사, 김진문 목사, 최윤환 목사, 김규상 목사 등이 교수하였다. 물론 이 학교가 개교되기까지 선교사들로부터, 혹은 반대하는 교역자들로부터 핍박과 방해공작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무수한 협박장과 신체적 위협까지 느꼈다. 그러나 학생들은 모여들었고 교수들은 보수 없이도 열심히 가르쳤다. 그리하여 공백 되었던 교회와 교회 없던 농어촌들을 메워줄 훌륭한 인재들이 양성 되었고 앞으로 그리스도의 교회 발전을 도와줄 여러 가지 행사들이 계획되고 준비되고 실행되었다. 1965년 여름에는 최윤권 목사 소유 가옥과 최윤희 권사 소유 가옥을 팔아 효창동에 전 철도청 관사를 사들여 교사를 만들었으며, 최윤권 목사도 아주 그곳에 이주해서 살았다.

대한기독교신학교는 1972년 2월 학교법인 환원학원과 4년제 각종학교 설립인가를 받았다. 1982년 3월부터는 배도은(Gorden Patten) 선교사가 테일러 선교사의 대를 이어 운영하던 서울성서신학교와 통합하여 서울성서신학교 캠퍼스에서 대한기독교신학교란 이름으로 새 출발하였다. 이후 1985년 4년제 대학학력인정교로 지정되었고, 1997년 12월 대한기독교대학교로 승인을 받은 후, 1999년 12월 서울기독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최윤권 목사는 이곳에서 교장, 학장, 총장,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6년에는 지온보육원을 설립하였다. 최윤권 목사의 <내가 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사>에 63쪽에 따르면, 결혼 후 도원동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 그 곳은 빈민동네라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들도 많았고 버려진 아이들도 있었다. 교인들 가운데 정신장애를 가진 어머니가 있었는데 그녀의 네 명의 자녀들을 집에 데려다가 돌본 것이 첫 출발이었다. 1981년에 소천한 민지온 여사의 이름을 딴 지온보육원은 대한기독교신학교 캠퍼스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나 강서구 개화동 325-11번지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윤권 목사는 방송선교와 출판에도 열정을 보였다. <내가 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역사>(2003) 65쪽에 따르면, 70년대에 기독교방송을 통해서 최순국 목사, 김일엽 목사와 함께 ‘이형과 더불어’를 진행하였고, 그 후 단독으로 기독교방송 혹은 극동방송을 통해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교회 아워,’ ‘성서로 돌아가자,’ ‘기쁜 소식’ 등을 방송하였으며, 1990년대에는 심야에 대북방송까지 하였다. 1988년부터 90년대까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생활 속의 성경’이라는 텔레비전 종교 프로그램도 방송하였다. 저서로는 <깨어진 십자가> 1, 2, 3권과 <내가 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역사> 등이 있다.

4) 안재관 목사

안재관 목사는, 테일러 선교사가 최순국 목사를 자신의 오른팔이라고 말하였듯이, 서울성서신학교 근무시절 송월동 부지와 재산에 엉킨 실타래를 풀어 매도가 가능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신학교가 문교부로부터 인가를 얻는 데 필요한 제반사항들을 법전에 근거하여 일을 처리한 테일러 선교사의 수족이었다. 미국에 유학하여 링컨기독대학을 마치고 돌아와 최윤권 목사의 대한기독교신학교에서 설립협의회 상임위원과 제2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미국에 이민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목회하면서 ‘제자들’ 즉 ‘그리스도인의 교회(그리스도의 제자들)’<Christian Church(Disciples of Christ)>에 가입하였고, 유악기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들을 제자회로 결집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5) 김진문 목사

김진문 목사는 1933년 2월 11일생으로서 평남 용강군 신녕면 신암리가 고향이며, 1950년 진남포 제일 고등학교, 1960년 서울성서신학교, 1961년 중앙신학교, 1963년 숭전대학교 영문과, 1975년 미국 임마누엘기독대학원(전 Immanuel School of Religion) 신학석사, 1984년 미국 국제신학대학원 신학박사 과정을 각각 졸업하였다. 그리고 1962-1964년 서울성서신학교 교수, 1965-1971년 대한기독교신학교 교장, 1982-1985년 한성 신학교 교장, 1983-1984년 한국 기독교 신학 연구원 교수, 1976년 한국 복음 선교회 대표, 1985년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협의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1966년 8월 4일 목사 안수를 받고, 1957-1962년 남산동 그리스도의 교회, 1962-1967년 필운동 그리스도의 교회, 1968-1971년 도원동 그리스도의 교회, 1976-1985년 신설동 그리스도의 교회를 각각 시무하였다. 김진문 목사는 지병으로 1985년 11월 10일 낮 12시에 소천 하였다.

 

6) 독립투사 오현팔(吳鉉八, 1895-1972) 목사

신약성서기독교를 표방하는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초기 목회자들은 성서의 가르침에 철저하였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였다. 몇 분 되지 않은 목회자들 가운데 동석기, 최상현, 성낙소, 김문화, 오현팔, 최춘선과 같은 애국지사들이 있었고, 존 J. 채이스 선교사의 협력으로 1937-40년 사이에 세워진 다섯 개의 교회들<신당정교회(김요한 목사, 미국 에모리 대학교 목회학석사 출신), 돈암정교회(최상현 목사, 연희전문학교 제1회 졸업생), 내수정교회(성낙소 목사, 한의사), 산돈암정교회(김문화 목사) 및 청량리교회(박판조 목사)>은 모두 일본기독교회 조선교단에 가입하기를 거부하였고, 동시에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서 1940-45년 사이에 성낙소 목사를 필두로 이들 목회자들은 일경에 불려가 모진 매를 맞았고, 김요한 목사는 세 차례나 투옥되었으며, 김문화 목사는 옥고를 치렀다. 1941년 후반기에는 다섯 개의 교회가 모두 폐쇄조치를 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암정 그리스도의 교회의 최상현 목사와 내수정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낙소 목사는 비밀리에 주일을 성수하면서 주의 만찬예배를 빠트리지 않았다. 채이스 선교사는 이 사실을 1941년 초와 1947년 초에 단기간 입국하여 직접 확인한바가 있다.

한때 <신학세계>의 편집인이었던 최상현 목사는 해방 후 미군정 때 연락관으로 활동하면서 교회를 지켜냈고, 애국지사였던 최춘선 목사는 김포지역에 거대한 토지를 소유한 거부였으나 6.25동란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된 가난한 이웃들을 돕는데 전 재산을 사용하였다. 그는 소천하기 직전 몇 년간 세상에 ‘맨발의 천사’로 알려졌다. 한의사였던 성낙소 목사는 일제의 핍박에 굴하지 않고 한약방을 열어 생계유지를 하면서 교회를 지켜냈다. 더불어 성낙소 목사의 필운동(46년에 개명)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군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독립투사 오현팔 목사의 후손들이 필운동 교회에 출석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오현팔 목사의 손자인 오수강 목사는 성낙소 목사의 손녀와 결혼하였다. 오현팔 목사는 사도 바울처럼 자신을 온전히 교회를 위해 바친 김은석 목사와 연락하고 지낸 사이였고, 미국 일리노이 주 소재 링컨기독대학 출신과 재학생들이 합심하여 서울기독교대학교의 전신인 대한기독신학교를 설립할 당시 설립상임위원회의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오현팔(吳鉉八, 1895-1972) 목사는 자가 여경(呂卿)이며, 호는 호암(虎巖)인데, 본적은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이다. 연희전문학교를 1919년 3월에 졸업한 최상현 목사보다 4년 늦은 1923년에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1913년 9월부터 의성인 김원교, 청송인 윤용암 등과 항일모의 군사훈련을 시작하였고, 1915년 2월에 광복단 본부 밀사로부터 경북도책 간부 및 영양군책에 임명되어 민족정신 고취 밀명을 받아 활약하였으며, 1919년 2월에 교회를 영양읍 서부동에 창립하였다. 같은 해 3월에는 독립만세운동 밀령을 받아 영양읍 현동 앞 시골에서 시위하였고, 이후 월남 이상재, 민세 안재홍 등 재경인사와 남정석 등과 항일운동단체를 조직하여 영양군 청기면 및 영양읍 시장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영양경찰서에 체포 구금되었다. 같은 해 10월 광복단 밀사이자 상해임정 밀사인 영해사람 이겸호 등과 연락하여 극비리에 소총 등 50여점을 들여왔으며, 본군 석보면 포산리에서 만세운동 중에 군중에게 발포하던 왜경 및 헌병들에게 호암 오현팔 목사의 매부인 안성룡 외 2명이 전사하였다. 그 사건으로 인하여 구금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특히 1930년 1월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대일보 등에 민족단결과 항일애국운동에 관한 시론(詩論) 논문을 게재하여 그 필화(筆禍)로 경상북도 경찰부에 체포 구금된 일이 있었다. 그 후 굴원동지회라고도 하는 오오회(五五會)를 권국찬(權國燦), 이철호(李喆浩), 주원술(朱元述), 조훈석(趙薰錫)과 함께 조직하였고, 오오회를 일방만우회(一方晩友會)로 확대하여 항일독립에 노력하는 한편, 국산품 장려운동과 일제의 농지매입을 반대하는 연사로 활약하면서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오현팔 목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영양교회는 1940년 4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철거당하였다. 1942년에는 서울 영등포 경찰서에서 `동양의 간디'라는 죄목으로 장기 구금되기도 했다.

오현팔 목사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의 지역분할 정책도 비판하였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영양에 교회를 개척하였다. 1919년에 개척한 장로교회가 1940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쇄된 것을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복원한 것이었다.

오현팔 목사는 “지금까지는 나라를 빼앗긴 슬픔과 독립 쟁취를 위해 싸웠으나 이제 나라를 찾고 국권을 회복했으니 더 이상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말한 뒤 각 정당의 초대와 국회의원 공천 등의 유혹을 일체 거절하였다. 더욱이 가족들에게 자신의 항일투쟁사나 그간의 고통과 압박에 대한 이야기를 일체 함구하도록 하는 등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는 결코 나서지 않았다.

오현팔 목사는 자신의 설교문에서 말하기를, “모리적(謀利的) 신앙가와 사대적(事大的) 신앙가들에게 속지 말고 성경대로 살려고 힘써야 할 것 아닌가. 하나님 앞에 통일교니 감리교니 천주교니 성결교니 장로교니 안식교니 하는 교파가 곧 당파가 용인될 것인가? 성경은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교회뿐이다. 그리스도인이 되어 그리스도의 교회로 모이자. 이것이 하나 되기를 기도하신 그리스도의 뜻일 것이다.”고 하였다. 오현팔 목사는 또 설교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란 어떤 것인가?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되심으로 그리스도의 말씀만을 순종하려는 교회다. 성경을 이탈해 규칙을 만들어 교인을 구속하고 마취시키는 수단과 방법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어그러진 시대에서 예수 믿음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 풍요로웠던 재산을 독립을 위해 모두 사용하고 남은 것이 별로 없었을 때에도 오현팔 목사는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신앙의 본이 되고자 노력하였다. 오현팔 목사는 목회자이면서 한의사로서 아픈 사람들을 돌보았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의 사람들을 배려하기 위해서 약을 3첩 이상 짓지 않았고 심지어 돈을 받지 않을 때도 많았다.

주일이면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보리갱죽을 해놓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을 전도자로 삼아 월급을 줘가면서 함께 살았다. 오현팔 목사는 교회가 건물이 아니고 성도의 모임이라는 것과 교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삶과 신앙을 나눠야 한다는 생각을 확고히 하였다.

오현팔 목사는 1963년 3월 1일 영양군수로부터 항일독립운동 공적표창을 받았고, 1971년 7월 경상북도지사로부터 항일독립운동 공적에 대한 표창을 받았으며, 같은 해 12월 20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항일독립운동 및 사회유공자 국민훈장(목련장)을 수여받았다.

7) 정인소(鄭寅笑, 1907.11.11-1977.8.27) 박사

<대한민국 인사록>, <(사진으로 본) 국회 20년 부록: 역대 국회의원 약력>, <역대 국회 의원 총람> 등에 따르면, 정인소는 소년시절부터 민족해방운동으로 일제 때 특별 고등요시찰인(日帝時特別高等要視察人)이 되어 128회의 검속투옥이 있었다. 특히 세계어(에스페란토)보급, 금주, 단연(斷煙), 아편, 공창(公娼), 축첩(蓄接) 등을 폐지하는 운동을 활발히 펼쳤다. 광복 후에는 군정청 학무국 계몽강사로 활약하였다. 사재를 투자하여 애지세계사(愛之世界社), 국제금주동맹, 한국세계어총연맹 등을 창립하여 총재에 취임하였다.

정인소는 조선행정 사찰관, 아마 세계어 전문학관 관장, 국학대학 교수, 국민대학 교수, 푸람파싸 대학 학장, 국제웅변대학 학장, 청주대대학원 원장, 신생활일보사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자신이 설립한 한국세계어협회(Korea Esperanto-Asocio)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오랫동안 방송설교를 하였다.

정인소 박사는 청주대학대학원 원장을 지냄으로써 보궐선거에서 5대 국회의원(지역구 충청북도 음성, 소속정당 무소속)으로 당선했으나 5·16군사정변으로 인해서 의원선서를 하지 못하였다. 2013년 7월 13일자 경향신문, ‘48시간 국회의원 아시나요?’와 2013년 12월 8일자 중앙일보, ‘48시간 국회의원 괴산 김사만·음성 정인소…DJ도’에 따르면, 정인소는 1961년 5월 13일 치러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충북 음성에서 제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기쁨을 누렸다. 이날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정인소, 김사만, 김성환, 김종길, 김대중(전 대통령) 총 5명이었다. 이들은 선거 다음날인 5월 14일 중앙선관위로부터 의원 당선증을 받았다. 하지만 5월 16일 군사정변이 일어났고, 곧바로 국회는 해산되어버렸다. 이 바람에 이들 다섯 명은 금배지도 달지 못하고, 본회의장 단상에서 의원선서도 하지 못한 채, 세비도 한 푼 받지 못하고 의원직을 마감해야했다. 이들이 의원 신분을 유지한 것은 1961년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이었으나 시간상으로는 48시간 정도에 불과하였다. 이후 정인소는 8번 고향과 서울에서 총선에 도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정인소 박사는 일본 대판 부립중학교, 중국 북경 외국어 전문학교 세계어과, 일본 구주제대(九州帝大) 법대 법문학부 정경과(政經科)를 각각 졸업하였고, 미국 피풀스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정인소는 자주독립국가 건설과 더불어 세계평화 수립에 분투노력하였으나 반민특위가 조선총독부 경무부 촉탁, 황민생활사 사장을 지낸 경력을 문제 삼아 기소한바가 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인해서 재판은 중단되었다.

정인소 한국에스페란토학회(Korea Esperanto-Instituto, KEI)와는 별도로 1945년 한국세계어협회(Korea Mondlingvo-Asocio, KMA)를 독자적으로 설립하였다. 1947년 4월에는 ‘아마 세계어 전문학관’을 개관하여 관장으로 취임하였고, <세계어 문법>(36쪽, 프린트 판)을 내고, 6월 14일에는 서울 YMCA에서 ‘세계어 대강연회’(주제: 조선의 장래와 세계어)를 개최하였다. 8월 14일에 ‘아마 세계어 전문학관’ 제1기 졸업생이 배출되었고, 9월에 그의 <세계어 사전>(228쪽)과 <세계어 문법>(40쪽)이 애지세계사 출판으로 발행되었다. 시조사가 발행하는 1948년 9월호 <시조>(時兆)에 ‘문명국가의 금주정책’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52년 한국세계어협회를 사단법인화하고 <세계어의 사명>이란 책도 출판하였다. 1956년에 <세계어 문법 강의>(64쪽, 한국신생활사), 1957년에 <세계어 교과서>(96쪽, 한국신생활사)를 출판하였다.

참고로 ‘에스페란토’는 폴란드의 안과 의사 루도비코 라자로 자멘호프가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사용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 목적으로 창안한 세계어, 곧 인공어이다. 자멘호프는 고등학교 때인 1878년에 시험판을 만들었으며, 10여년에 걸쳐 에스페란토의 문법과 어휘를 개량하여 1887년에 <첫 번째 책>(Unua Libro)를 발표하였다.

정인소 박사가 해롤드 테일러 선교사와 서울성서신학교에 얼마나 관여하였는지는 1963년 개교식에 참석한 것 외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반면에 정인소 박사는 1960년대 초 존 J. 힐 선교사와 연관된 한국성서신학교 및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행사들에 집중적으로 모습을 보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정인소는 해롤드 테일러 선교사의 동역자이기보다는 존 J. 힐 선교사의 동역자로 분류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아래의 사진들은 그가 한국성서신학교의 이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선교사들과 내국인 동역자들, 특히 충청이남지역 사역자들과 고루 교제하였음을 보여준다. 정인소 박사의 옷차림은 늘 소박하였고, 검정 고무신을 즐겨 신었다.

8) 이기구 목사

이기구 목사는 1952년 10월 3일 신갈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고, 같은 지역에 중학교를 세워 건물을 짓고 운영하던 중에 해롤드 테일 선교사로부터 가끔씩 지원을 받았으나, 최윤권 목사의 <내가 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사>에 의하면, 그는 훗날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로 넘어 갔다. 테일러 선교사가 발행한 선교지 <한국에 그리스도를>(For Christ in Korea) 1956년 6월호에 의하면, 6.25전쟁 당시 이기구 목사의 사모가 숨어 지내던 동굴입구에 포탄이 떨어져 100여명 이상이 죽었고, 사모도 죽었다고 판단되어 무덤까지 팠으나 숨이 붙어 있음을 알고 리어카에 실려 피격 장소에서 벗어난 후 오랜 기간 병원에 입원했어야 했다. 그녀의 모친 또한 포격의 희생자로서 반신불수로 지내야했다.

9) 그리스도의 교회가 낳은 사랑의 원자폭탄 진성구 장로

진성구는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 그리스도의 교회의 창립자이자 장로였다. 6.25동란 때인 1950년 11월 6일에 마을 빨갱이들에 의해서 교인 25명(주변에 40여명)이 신앙 때문에 순교를 당한 교회이다. 1950년대 초에 이동 신학교였던 신화신학성경연구회(그리스도의 교회)가 최요한 목사의 유달교회(당시 순복음교회)에서 모였었는데, 그 장소가 바로 진성구 장로가 제공한 목포시 죽교동의 건물 2층이었다. 진성구 장로는 최요한 목사의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1957년 9월 창립 때부터 교회를 떠난 1968년까지 10여 년간 섬겼고, 김은석 목사가 자주 그의 집에서 묵었다. 김은석 목사와 그의 동료들에게 김교인 장로(전남 함평)와 더불어 진성구 장로의 집(목포)은 바울과 그의 동료들에게 드로아의 가보의 집과 빌립보의 루디아의 집처럼 선교의 허브들이었다. 또 진성구 장로는 1957년 무렵 테일러 선교사가 운영했던 서울성서신학교의 이사로 섬겼다. 해롤드 테일러(Harold Taylor) 선교사가 발행한 선교지 <한국에 그리스도를>(For Christ in Korea) 1957년 2월호에 이 진성구 장로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실려 있어서 이곳에 소개할 목적으로 번역하였다.

진성구 장로는 1950년 10월 말 어느 아침에 수확을 앞둔 벼를 살펴보려고 논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러 명의 마을 사람들이 나타나 진성구 장로를 에워쌌다. 그리곤 “거만하게 굴지 마라. 세상이 바꿨다. 양키의 똥개들인 너희 그리스도인들을 말살해 버리겠다.”며 주동자가 엄포를 놓았다. 그들의 눈은 살벌했고 강경했으며 냉정했다. 그들의 이 소행은 마을의 나지막한 언덕 너머에 진을 치고 있는 공산군 지도자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꾸민 짓이 분명해 보였다.

그들은 그날 밤 진성구를 작은 방에 가뒀다. 내일 진성구를 인민재판에 세울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진성구를 납치하기 전부터 이미 그의 운명을 결정해 놓고 있었다. 진성구는 너무 두려운 나머지 “이제 이 땅에서의 내 삶은 끝이구나!”라고 생각하였다. 진성구는 최후를 잘 맞이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주님의 평안이 임했고, 마음이 안정되었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진성구는 자기 자신이 산중턱 동굴에 버려져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그곳까지 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진성구는 쪼그리고 앉아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돌연 살아온 지난날이 회상되었다. 특히 그가 결혼직후에 꿨던 꿈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때 그는 꿈에서 두 개의 가지가 돋아난 큰 나무를 보았는데, 한 가지에는 세 개의 열매가 매달려 있었고, 다른 가지에는 다섯 개의 열매가 매달려 있었다. 그런데 세 개의 열매를 매단 나뭇가지의 열매들이 땅에 떨어지지는 꿈이었다.

정신을 차려 진성구는 산에서 기어서 내려왔고, 벌목꾼에게 발견이 되어 그들 부부로부터 수일간 정성스런 간호를 받았다. 그 사이에 공산군들이 쫓겨 북쪽으로 퇴각하였고, 마을은 그들로부터 해방되었다. 진성구는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하면서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지만, 자신의 세 아들들이 이미 마을 빨갱이들로부터 살해된 후였다. 마을의 빨갱이들은 곧 체포되었다. 친구들은 진성구에게 총을 건네주면서 그들에게 복수하라고 등을 떠밀었다.

이 목불인견의 상황에 처한 진성구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세 명의 아들들을 모두 잃은 그의 마음엔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찬 듯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성구는 그 같은 복잡한 감정들이 그리스도인인 자신에게 웬일인지 낯설게만 느껴졌다. 자신의 눈앞에는 금지옥엽 같은 아들들을 묻은 세 개의 무덤들이 있고, 또 그들을 죽인 살인마들이 있었으며, 자신의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이 일을 어찌해야하는가?

마을 밖에 언덕 주변으로 세 사람이 끌려갔고 또 한 사람이 권총을 들고 그들을 뒤따랐다. 얼마쯤 후에 세 발의 총소리가 났다. 그 총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누구나 보복살인이 이뤄졌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었던 진성구는 그들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6개월 후에 각자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951년 봄철에 세 사람이 말없이 세 개의 작은 무덤위에 꽃다발을 놓고 가는 것이 목격되었다. 그 무덤들은 진성구의 집에서 가까운 언덕비탈에 있었던 것이다.

금년 봄(1957)에 진성구 장로와 그의 부인은 6.25동란이후 낳은 다섯 번째 아이의 출산을 기다리고 있다. 진성구 장로는 적어도 몇몇 꿈들은 이뤄진다고 믿고 있다.

나가는 말

잊혀 있던 역사를 되살리는 일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과연 그 일이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할 만큼 가치가 있고 중요한 일인가? 잊힌 그대로 두어도 누구도 아쉬울 것이 없고, 어쩌면 발굴하지 않고 묻힌 그대로 두어 영원히 잊히도록 방치하는 것이 차라리 더 낫지 않는가? 이 질문은 필자가 종종 자신에게 던졌던 물음이다. 하물며 독자들 가운데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어찌 없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경험한 바로는 우리 민족의 한이 맺힌 서글픈 역사에서조차도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코끝을 찡하게 만들며 눈가에 이슬이 맺히게 하는 가슴시린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이 바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이야기들 속에 담긴 감동이요, 한이며, 안타까움이다. 잘난 선배이든 못난 선배이든 우리 모두는 선배들이 몸 바쳐 겹겹이 쌓아올린 지층위에 발을 딛고 서 있다. 우리가 딛고 선 지층들 속에 무엇이 매장되어있는지, 그것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들의 성공과 실패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그 속에 어떤 보물과 고증학적 파편들이 숨어있는지 어찌 궁금하지 않겠는가!

만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나라가 실재함을 믿는다면, 이 땅에서 가장 가난하고 누추하게 살면서도 작지만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온몸을 바친 선배들의 상급이 어찌 명예와 부를 누린 이들의 것보다 작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참고도서

Maxey, Mark. “Christians in Japan 100 Years (1883-1983).” http://www.bible101.org/japanmissions/page05.htm

Chase, John T. The Korean Messenger: Korea for Christ. Digitized by Dr. Scott Seay of the Christian Theological Seminary, Indianapolis, Indiana, 2 July, 2015.

Cunningham, W. D. Tokyo Christian 1901-1997. Published by the Yotsuya (Cunningham) Mission, Christian Churches/Churches of Christ and Digitized by Dr. Scott Seay of the Christian Theological Seminary, Indianapolis, Indiana, 30 June, 2015.

Cunningham, W. D. Tokyo Christian. Published by the Yotsuya (Cunningham) Mission, Christian Churches/Churches of Christ and Digitized by Dr. Timothy Lee of the Brite Divinity School of Texas Christian University, Fort Worth, Texas, no date.

Taylor, Harold. For Christ in Korea. Digitized by Dr. Scott Seay of the Christian Theological Seminary, Indianapolis, Indiana, 2 July, 2015.

김경중. ‘존. T. 채이스(John Trawrick Chase)의 한국선교: 한국기독교선교회(Korean Christian Mission)를 중심으로.’ 서울기독대학교 대학원, 2011학년도 석사학위논문, 2012년 7월.

김찬영.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초기역사: William D. Cunningham의 생애(1864-1936)를 중심으로> 한성신학교, 1991.

성낙소. <기독의 교회와 성낙소와의 관계> 편집 및 부록: 김종기, 조동호.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2010. <인터넷자료: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http://kccs.info)>.

조동호, <충청이남지역(협의회, 총회)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이야기>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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