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이남지역(협의회, 총회)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이야기
A History of Korean Christian Churches in the Southern Half of South Korea

조동호(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제4부 부산, 경상도, 광주

1. 장성만 목사와 동서대학교

1)민석(民石) 장성만(張聖萬) 목사의 생애와 업적

민석(民石) 장성만 목사는 1932년 11월 2일(음력) 부산시 토성동에서 장용환(張容煥) 씨와 박보질(朴甫質) 씨의 장남으로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중학교 2학년(15세) 때에 사업가이시던 아버지를 잃고 여덟 식구의 장남으로서 어려운 시절을 겪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중학교(당시 6년제)를 마칠 무렵 6.25전쟁이 터졌다.

장성만은 원래 장로교 교인이었으나, 6.25전쟁 중에 부산으로 피난 온 백발의 동석기 전도자(목사)가 미국 문화원 강당을 빌려 행한 기독교 강연회에 자주 참석하여 새로운 기독교 교리를 들었고, 동석기 목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성서이외의 어떤 인위적인 교리나 신조도 거부하는 순수한 복음주의 신앙을 갖게 되었다. 침례를 행하고, 매주 성만찬을 행하며, 개교회 중심의 초대교회(사도행전 2장)로 돌아가는 것이 성서적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때부터 장성만은 장로교 교인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교인이 되었고, 서울에서 피난 온 신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에 매진하다가 낙동강 전투 때 국군에 입대하여 전투에 참가하였고,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겼다. 제대 후 다시 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부산 그리스도의 교회의 전신인 대교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이것이 1953년 1월 3일 첫 주일이었다. 자신의 집 2층 8조 다다미방에서 7명의 성도가 모여 성찬식을 행하며 감격스러운 첫 예배를 드렸다.

장성만은 학업과 목회를 겸하면서도 뜬 눈으로 새벽을 밝히면서 공부하고 기도하며 글을 썼다. 각종 청년집회에서 강연하는 것을 필두로 부산과 경남지방의 숱한 교회에서 전도 강연회를 열었고, 신문, 잡지, 방송 등을 통하여 글을 발표하였다. 이때 발표했던 글들을 모아 훗날 <생각 잃은 갈대>라는 첫 수필집을 발행하였다.

이후 교회는 발전하여 많은 젊은이들이 참석하였는데, 미국 선교사들도 내한하여 함께 예배를 드렸다. 이들이 바로 기독교 방송 선교를 위해 한국에 온 알렉스 빌즈(Alex and Betty Bills, 1956-1961) 가족, 조 세걸키(Joshep and Maxine Seggelki, 1958-1961) 가족, 버트 엘리스(Bert and Marjorie Ellis, 1958-1983) 가족들이다. 그 외에도 일본에 주재하는 마크 맥시(Mark Maxey), 데이비드(David), 심스(Sims), 오사카성서신학교 교장 클라크(Clark) 등이 자주 찾아와서 격려하였다.

장성만은 신학을 마치고 1960년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 후 1964년 1월에 교회는 부산 YMCA 3층 강당으로 옮겼다. 한편 장성만 목사가 부산시 북구 주례동 167번지에 세운 ‘동서기독교실업학교’의 강당에서 1966년에 그의 동역 선교사였던 리처드 래쉬에 의해 대학교회가 시작되었는데, 1967년 10월부터 윤금하 목사가 담임하고 있었다. 그런데 1970년 3월에 학교 캠퍼스 내에 새로운 예배당을 세운 후 위의 두 교회를 통합하여 명칭을 부산기독교회로 개명을 하고 장성만이 담임목사, 윤금하가 부목사로 시무하다가 1978년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게 될 때까지 장성만 목사는 이 교회에서 무급으로 25년간을 목회하였고, 7명의 청년들로 세족회를 조직하여 특별 신앙훈련을 시켰다. 여기에 김찬영, 신용철, 이동발, 박구하, 김동렬, 안대현, 양군(작고) 등이 참여하였는데, 이들 중에 두 사람이 목사가 되었다.

1978년부터는 부산기독교회를 윤금하 목사, 김호규 목사, 이우찬 목사, 송경언 목사가 차례대로 시무하였다. 그 후 2002년 연건평 800여평, 600여석의 본당을 비롯한 소예배실, 교육관, 식당 등 최첨단 시설을 갖춘 현대식 교회를 신축한 후 학교법인 동서학원 대학교회로 개칭하여 설립목사인 장성만이 담임을 맡았다.

이밖에 1960년대 이후 경상남북도의 교회들로써는 양정식 목사가 시무한 경북 안동군 풍산면 상리 안동복음중학교 및 안동 그리스도의 교회, 송영히 전도사가 시무한 경북 안동군 풍산면 죽전동 그리스도의 교회, 오현팔 목사가 시무한 경북 영양군 영양면 서부동 영양 그리스도의 교회가 있다. 1970-80년대에 세워진 교회들로는 성결교회에서 환원한 이병우 목사가 시무한 진영 그리스도의 교회와 강나루 목사가 시무한 동부제일 그리스도의 교회가 있다. 진영 그리스도의 교회는 장성만에 의해서 1975년에 경남 김해시 진영읍 좌곤리 462번지에 세워졌고, 동부제일 그리스도의 교회는 부산시 동래구 사직1동 100-2번지에 장성만의 제자로서 대한기독교신학교를 졸업한 강나루(본명 강병기)에 의해서 1983년에 세워졌다.

장성만 목사는 그의 에세이집에서 자신의 신앙적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신약성서의 신앙에 입각하여 환원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다음 몇 가지 나의 신앙적인 입장을 밝혀둔다.

    첫째, 교파의 분열은 어떤 이유에서든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현존하는 교파들이 진정으로 하나로 돌아오기를 원한다.

    둘째,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종류의 신조나 교리를 우리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모든 인위적인 문서를 버리고 성경으로 돌아오기를 원한다.

    셋째,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어떤 다른 이름도 우리의 흥미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인위적인 명칭을 청산하고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돌아오기를 원한다.

    넷째, 인간의 머리 속에서 짜낸 어떤 조직도 우리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조직 이외는 따라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명하시는 대로 겸손히 순종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다. '성경이 말한 것만 말하고, 성경이 침묵한 것은 우리도 침묵하자.' 이 표어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 보겠다는 환원 운동자들의 절규이다. 진정 교회의 단일화를 원한다면 인위적인 조직과 정치, 인간의 신조와 유전, 이 모두를 던져 버리고 성경에 절대 순응해야 한다. 진정 교회의 통합을 원한다면 새 교파, 새 신조, 새 교리를 만들지 말고 신약교회로 돌아가서 하나의 이름, 하나의 믿음, 하나의 세례, 하나의 소망으로 결속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 거대한 운동에 참가하여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 이 운동이 완수되는 날까지 우리는 잠시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다. 우리 앞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의 손엔 진리의 말씀이 쥐어져 있기 때문이다. (장성만의 <에세이전집> 중에서)

장성만은 이후 일본주재 마크 맥시(Dr. Mark G. Maxey, Kyushu Christian Mission) 선교사의 주선으로 일본에 건너가 클라크(Clark) 선교사가 교장으로 재직했던 오사카성서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이때가 5.16 군사혁명 당시였다. 그는 일본에서의 학업을 마치고 약혼녀(朴東順 여사, 이화여대 영문과 및 신시내티 성서 대학원 졸업, 경남전문대학 교수 및 이사장, 동서대학교 총장 역임)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신시내티 성서 대학원에서도 공부하였다.

1964년 늦은 여름 미국에서 귀국 후, 미국인 선교사 리처드 래쉬(Richard Rash) 부부와 함께 동래 온천장에 작은 2층 건물을 세 얻어 1965년 2월 1일 영남기독교실업학교로 2년제 대학과정을 출범시켰다. 래쉬는 장성만 목사가 귀국하기 전에 강원도에서의 사역을 정리하고 그가 미국에서의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는 대로 부산에서 함께 이 일을 하기로 이미 오래 전에 약속한바 있었다. 같은 해 11월 20일에는 부산시 변두리(당시는 동래군 사상면 주례리 냉정부락)에 땅을 임대하여 이층건물 '알파 홀'(후에 래쉬기념관으로 변경)을 건축하는 기공식을 거행하였고, 1966년 4월 2일 이곳으로 이사하면서 동서기독교실업학교로 개명하였다.

이 일이 나날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에 조직된 이 학교 재단이사회의 후원 때문이었다. 장성만 목사는 1969년 8월 5일 미국에 들어가 20개 주를 6개월간 순방하면서 도움을 호소한 결과 1969년 12월 1일 재미 재단이사회를 구성하였고, 1970년 5월 28일에는 교육부로부터 학교법인 동서학원 설립인가를 받아냈으며, 같은 해 12월 16일에는 부산실업전문학교의 정식인가를 받아냈다. 이렇게 해서 부산실업전문학교가 1971년 3월 1일 정식 개교되었다. 이후 부산실업전문학교는 1977년 8월 26일 경남공업전문학교, 1979년 1월 1일 경남공업전문대학으로 개편되었고, 1991년 11월 15일에는 또 하나의 4년제 동서공과대학 설립인가를 획득하여 1992년 3월 3일 개교하였고, 현재의 종합대학인 동서대학교로 크게 발전하고 있다.

장성만은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으며, 모두를 훌륭한 인물로 키워냈다. 그는 또 글쓰기를 좋아하여 1950년대에 기독교 문인들을 중심으로 부산 기독교문인협회를 창설하였고, 1963년 7월에는 수필동인회를 발족시켰으며, 동인지로 <隨筆>을 발행하였다. 이 밖에도 그는 1960년대에 <基督敎文藝>라는 계간지를 발행하였으며, 개인적으로도 월간 <아가폐>지를 프린트 판으로 발행하다가 후에는 월간 <로고스>지에 기독교사상과 생활지라는 부제를 부쳐 발행하였다. 이런 이유들로 그는 10권의 책을 펴냈다.

그는 또한 정치에도 입문하여 제11대, 12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민정당 부산시 지부위원장(2회), 민정당 집행위원, 민정당 노동특위위원장, 국회예산결산위 제4분과위원장, 민정당 정책위원회 의장, 국회부의장(12대)를 역임하였다.

(1)학력

부산 부민초등학교, 부산제일공업중학교(6년제, 현 부산공고), 일본 오사카성서신학교, 미국 신시내티 성서대학원, 미국 미드웨스트대학에서 신학박사(D.D.),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발전정책과정.

(2)경력(종교계)

대교 그리스도의 교회 목회(목사안수 받음), 부산 그리스도의 교회 시무(1953-1978년), 부산 기독교교회 협의회 부회장(1970년), 부산 기독교 문인협회 회장, 기독교 사회윤리 위원회 위원장, 부산 기독교 방송국 운영위원장, 목양회 창설 초대회장, 명예회장, 북구 교회 지도자협의회 회장, 명예회장,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교역자 회장, 성목회 명예회장.

(3)경력(교육계)

동서기독교실업학교 설립, 교장(1965-1970년), 부산실업전문학교 교장(1971-1977년), 경남공업전문대학 학장(1977-1982년), 부산 경남 전문대학장 협의회장, 동서공과대학 설립(1992년), 학교법인 동서학원(경남전문대학, 동서공과대학)이사장.

(4)경력(정계)

국회의원(11대, 12대), 민정당 부산시 지부위원장(2회), 민정당 집행위원, 민정당 노동특위위원장, 국회예산결산위 제4분과위원장, 민정당 정책위원회 의장, 국회부의장(12대).

(5)저서

장성만 에세이전집(1978년)(전5권): <생각 잃은 갈대>, <저 피안의 언덕에>, <뜻이 있는 곳에 길이>, <길가는 나그네>, <피리를 불어도>, 공저, <씨 뿌리는 사람들>.

수상집: <세 번째 부름>(1983년), <議政活動과 政策課題>(1984년), <民意와 政策사이>(1988년), <도전과 시련 그리고 새로운 약속>(1991년).

잡지: 월간 <아가페>발행인, 월간 <로고스> 발행인, 계간 <地域社會> 칼럼집필, <聖書文學>(1979년).

(6)상훈

대통령 표창(교육공로/1978년), 부산시 문화상(지역사회 개발부문/1977년).

(7)국제회의

APPU 제20차 총회 한국대표, 최고정책과정 세미나 참석(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 및 소련 극동문제 연구소), 대통령 특사로 노르웨이 방문(1991년), 國會議員 使節로 구라파(프랑스, 스웨덴, 영국, 독일) 의료보험제도 시찰, 미국 레이건 대통령을 위한 국가 조찬기도회 국회대표로 참석, MRA 세계대회 한국대표(스위스 코오 및 일본 오다와라), 크리스천 대회(일본 가고시마)에 특별강사로 참석, 기독교사절로 성지순례(요르단 및 이스라엘).

(8)기타

수필 동인회 동인, 부산 문협 수필분과 회원, 부산 수필가협회 이사, 사단법인 한국 지역사회연구소 이사장, 민정동우 회장, 정우회 회장.

2)리처드와 멜바 래쉬(Richard and Melba Lash) 선교사

1957년 1월말에 딕과 멜바 래쉬(Richard and Melba Lash) 부부는 일본 오키나와로 가기로 했던 선교계획을 한국으로 바꿨다. 이 결정에 해롤드와 에이더 테일러(Harold and Ada Talor)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이때 래쉬 부부는 링컨성서신학교(현 링컨기독대학교)에서 추가 수업을 받고 있었다. 테일러 부부는 1955년 11월 13일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줄곧 래쉬 부부가 한국으로 오게 되기를 바랐다. <참고로 1950년대에 한국에 온 미국선교사들 가운데 링컨성서신학교 출신들이 꽤 많았다. 래쉬와 절친했던 조 세걸키 또한 링컨성서신학교 출신이었고,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 모교에서 일하였다. 따라서 한국인 지도자들 중에도 최윤권, 최순국, 안재관 등 링컨성서신학교 출신들이 많았다.>

래쉬 선교사는 1957년 한국에 도착해서 약 1년간 서울에 머물면서 테일러 선교사의 주선으로 한국말을 공부했고, 테일러 선교사가 교장으로 재직했던 서울성서신학교에서 가르치다가 1958년 5월 10일 강릉으로 선교지를 옮겼다. 선교지를 서울에서 강릉으로 옮긴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었겠으나, 첫째는 태일러 선교사가 존 채이스 선교사 및 존 힐 선교사가 키워온 선교부 건물과 부지 및 신학교 건물과 부지를 1958년에 팔았기 때문이다. 신학교는 새 부지와 건물이 마련되기까지 운영이 중단되어 가르칠 수 없게 되었다. 래쉬의 사모 멜바는 1958년 4월 24일에 쓴 선교서신에서 테일러가 3월 31일자에 건물과 부지를 매입하겠다는 사람을 만난 것으로 언급하였고, 자신들도 4월 하순에 강릉에 거처를 계약했다고 적었다. 둘째는 한반도 남서쪽에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제법 많지만, 강릉에는 한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강릉에서 북쪽으로 30여 킬로미터 떨어진 어촌에 가정교회가 한 곳 있었고, DMZ에 가까운 곳에 또 한 곳이 있었으며, 강릉에서 남쪽으로 7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또 한 곳이 있었지만, 건물이 팔리고 교인들이 흩어졌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적었다. 더 남쪽으로 내륙 산악지역 한 곳에 교회가 있었고, 또 다른 지역의 부잣집에서 6-7명이 모인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목사는 동해안 연안에 한 명밖에 없다고 적었다. 래쉬 가족은 동해안 최북단에서 부산까지 그리스도의 교회 상황이 이처럼 열악한 강릉지역을 선교지로 선택하였던 것이다. 당시에는 도로 사정과 교통편이 좋지 않아서 서울에서 강릉까지 자동차로 17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1960년 6월 16일 딕이 쓴 서신에 의하면, 래쉬 가족, 특히 멜바는 강릉에서 얻은 선교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5.16군사혁명으로 인한 사회불안, 과중한 업무, 각종 질병, 문화충격, 언어충격, 사단의 방해까지 겹쳐 좌절과 실망으로 우울증과 신경쇠약에 시달리곤 했다며 특별 기도를 부탁하였다. 다음 달 1960년 7월 20일자 서신에서 멜바는 이렇게 적었다.

    친구들이여, 우리는 여러분의 매일 드리는 신실한 기도후원이 없이는 여기서 우리의 일을 지속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이 일을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좀처럼 누그러질 것 같지 않은 엄청난 압박에 날마다 직면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매일의 전투에서 기꺼이 기도로써 우리와 함께 싸우시겠습니까? 우리는 임무를 띠고 이곳 “최전선”에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배후에서 신실하게 “실탄”을 공급해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임무를 수행해나가겠습니까? 또 여러분의 편지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격려가 되는지를 어떻게 설명해야하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언어를 쓰는 분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친교로 격려를 받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 영광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모국어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찬양하지 못한 채 수개월씩 지내야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만일 여러분이 그 같은 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조금치라도 이해하신다면, 여러분이 보내신 서신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기쁨이 되고 온기가 되는지를 상상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편지가 중요치 않을 것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마십시오.

래쉬는 1958년 8월부터 강릉시 옥천동에 장소를 마련하고 복음전도를 시작하였으며, 초등, 중등 및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다. 그 당시 대전에서 이름을 떨치던 김은석 목사가 강릉에서 집회를 열어 래쉬의 선교 일을 도왔다. 주문진 교회는 서울성서신학교에 다녔던 어느 여학생에 의해서 설립되어 자립의 길을 걷고 있었으며, 영동교회는 어느 석탄 광부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강릉교회는, 1959년 11월 25일자 서신에 의하면, 주일날 70-100명 정도가 모였고, 여름성경학교 때는 아이들이 평균 80여 명씩 모였다. 동년에 한국인 전임목회자가 부임하였다.

래쉬의 통역은 최종묵이 맡아 수고를 했는데, 통역으로 사역하는 동안 평산교회를 개척하여 설교하다가 래쉬 가족이 부산으로 옮겨간 1964년부터는 전임 목회자로 사역하였다. 그리고 1967년경부터는 강릉교회를 담임하였다. 강릉교회는 1969년 말에 선교보조금을 더 이상 받지 않겠다고 통보할 만큼 성장하였다. 1964년 2월 11일자 서신에 의하면, 평산교회는 250여명이 출석하였는데 대다수가 초신자들이었다.

래쉬는 1963년부터 한국인교회지원자클럽(Korean Church Helpers Club, KCHC)을 만들어 운영하였다. 이 클럽에 자신을 포함해서 세 명의 지도자를 두고, 선교헌금 100불을 종자돈으로 삼아 시작하였다. 이 돈이 매월 조금씩 불어나기를 바랐고, 미국의 후원자들뿐 아니라, 모든 한국교회들이 이 클럽에 동참해 주기를 바랐다. 매년 다섯 번째 주일을 KCHC의 날로 정하여 지키자고 하였다. 딕은 이 무렵 한국에서는 1천불이면 꽤 괜찮은 예배당을 지을 수 있었다고 적었다. 1967년 9월 25일자 서신에 의하면, KCHC에 모금된 돈이 탄광(영동)교회 건축에 쓰였다.

1963년 11월 20일자 서신에 의하면, 강릉에서의 사역의 제한성, 두 딸의 교육문제, 장성만 목사가 지속적으로 부산에서 함께 일하자는 권유 등으로 인해서 부산으로 선교지를 옮기기로 결정하였다고 진술하였고, 1964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부산에서 활동하였다. 래쉬는 장성만 목사가 귀국하기 전에 강원도에서의 사역을 정리하고 그가 미국에서의 학업을 마치고 귀국하는 대로 부산에서 함께 대학설립을 하기로 이미 오래 전에 약속한바 있었다. 장성만 목사는 미국 신시내티성서신학대학원(Cincinnati Bible Seminary)에서 학업과 교회순방을 마치고 1964년 늦은 여름에 귀국하였다. 그 공백 기간에 래쉬는 부산에서 대전 한국성서신학교로 출강하였다. 1964년 12월, 1966년 12월, 1971년 6월 졸업사진에서 딕 래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래쉬는 장성만 목사와 함께 1964년 가을에 동래 온천장에 작은 2층 건물을 세 얻어 1965년 2월 1일 영남기독교실업학교로 2년제 대학과정을 출범시켰다. 같은 해 11월 20일에는 부산시 변두리(당시는 동래군 사상면 주례리 냉정부락)에 땅을 임대하여 이층건물 ‘알파 홀’(후에 래쉬기념관으로 변경)을 건축하는 기공식을 거행하였고, 1966년 4월 2일 이곳으로 이사하면서 동서기독교실업학교로 개명하였다.

1965년 2월 2일(화요일, 설날)자 래쉬의 서신에 의하면, 2월 1일에 기독교실업훈련학교(Christian Worker's Training Institute)가 개소되었다고 썼다. 1월 30일 토요일에 입학시험과 면접이 있었고, 20명 모집에 33명이 지원하였다. 31일 주일에 부산시내 교회에서 특별감사예배가 드려졌고, 2월 1일 월요일에 개강예배가 있었다. 강의는 수요일 3일부터 시작되었다. 2일이 설날이었기 때문이다. 수업방식은 오전에 신학교 커리큘럼과 유사한 과목들을 가르쳤고, 오후에는 농장에서 실습을 하였다. 농장의 첫 프로젝트는 돼지사육이었다. 이 학교는 현재의 경남정보대학과 동서대학교의 발전되었다.

래쉬는 1971년 5월 1일자 서신에서 15년간의 한국 사역을 끝내고 8월경에 한국을 완전히 떠나겠다고 선언하였다. 안식년을 가진 3년을 제외하면 4년씩 세 차례 총 12년간 사역하였다. 그 일을 래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바쁘게 살았던 기간이었고, 기쁨과 역경이 함께한 나날들이었다. 그 기간에 우리는 가볍게 깰 수 없는 많은 관계들을 형성시켜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들과 단절해야할 시간이 가까이 온 것이다. 그게 아니면, 나는 “스트레칭”이란 말을 대신 써야할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는 대양을 가로지르는 작별여행에서 살아남을 또 우리가 미국 어느 곳엔가 안전하게 자리를 잡은 후에도 여전히 때로는 우리를 잡아당길 꽤 많은 관계들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결정한 데에는 학교 인가(승인)가 생각보다 빨리 났고, 따라서 입학정원의 증가와 학생들이 내는 등록금 수입으로 경제적 자립이 가능해졌으며, 외국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의 한계가 제한적이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라면 발전하는 학교에 남아 그 공을 함께 누릴 수 있겠지만, 학생들을 위해서라면 자신보다 더 유능한 인물이 자기가 차지한 자리에 대신 설 수 있도록 자신이 빠져줘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목회 경험은 없지만, 목사관에서 보고 자랐으니 가능하지 않겠느냐, 혹은 지난 14년간 11,000통, 거의 매일 2매 정도의 편지를 쓰느라 타이핑을 했으니 작가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며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의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 스스로 위로하였다. 래쉬 가족은 한국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기 얼마 전 ‘케빈’이라고 이름을 지은 미숙아를 입양하였다.

한국을 떠나기로 작정한 1971년 8월 첫 주에 부산시 사상구 주례동(당시는 동래군 사상면 주례리) 교정에서 전국 그리스도의 교회 목회자 수련회가 개최되어 한꺼번에 작별인사를 할 수 있었고, 둘째 주부터 강릉지역을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다섯 개 교회가 발전하고 있는 모습을 기쁨으로 둘러볼 수 있었다. 주문진교회는 출석교인이 거의 100명에 가까웠고, 탄광(영동)지역 교회는 새 건물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으며, 래쉬가 방문하기 전날 5명의 새신자가 침례를 받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아름다운 산중에 새로 세워지고 있는 교회도 방문하였다.

비행기 삯을 아끼기 위해서 래쉬는 두 딸과 함께 멜바와 케빈보다 먼저 8월 31일에 한국을 떠났다. 멜바와 아기 케빈은 며칠 뒤에 한국을 출발하였다. 래쉬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어, 미네소타성서대학에 시간제 선교학 교수로 채용되었고, 동시에 학교가 소재한 로체스터 프레전트 그로브(Pleasant Grove)에 소재한 60-70명 정도의 교인을 가진, 그러나 100여명이 출석하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설교자로 채용되었다. 교회소유의 큰 목사관이 있어서 주택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2. 부산에서의 라디오 방송선교

1)알렉스와 베티 빌즈(Verlen Alex & Betty Bills)

(1)알렉스 빌즈의 생애와 방송선교에의 비전

1950년대 이후 부산에는 그리스도와 교회와 관련하여 두 개의 원대한 꿈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나는 한국인 장성만 목사가 펼친 교육 100년 대계(大計)의 성공한 꿈이었다. 그의 꿈은 오늘날 동서대학교, 경남정보대학, 동서사이버대학교로 실현되었다. 또 하나는 벌렌 알렉스 빌즈가 펼친 실패한 기독교라디오극동방송국에의 꿈이었다. 자금 부족으로 알렉스의 꿈이 비록 실패로 끝나긴 하였으나 그의 꿈은 아름답고 옳았으며 원대한 것이었다. 그가 실패한 기독교극동방송국에의 꿈은 그도 그리스도의 교회도 아닌, 1954년 5월 1일 재단법인 한국복음주의 방송협회 창립(초대 이사장 황성수)으로 시작된 오늘의 ‘극동방송’(FEBC)에 의해서 이뤄지고 있다. 오늘의 FEBC는 알렉스의 꿈이 옳았고, 반드시 성공했어야 할 위대한 과업이었다는 점을 잘 웅변한다.

알렉스 빌즈(Verlen Alex Bills)는 1921년 4월 12일에 태어나 2002년 5월 14일에 소천 하였고, 베티 페이 빌즈(Betty Fay Bills)는 1927년 8월 10일 태어나 2012년 3월 2일(금)에 소천 하였다. 두 사람은 교회 캠프에서 만나 결혼하였다. 알렉스는 그곳 캠프에서 매일 저녁 말씀을 설교한 전도자였고, 베티는 예배 때 반주를 한 피아니스트였다. 그들은 1947년에 결혼하여 55년간 함께 살았다.

알렉스와 베티는 ‘크리스챤 라디오 밋숀’(Christian Radio Mission, CRM)을 세워 일본에서 5년, 한국에서 5년간 방송전파선교사로서 선교방송프로그램의 기획과 제작뿐 아니라, 후속사업(follow-up work)으로 성경통신강좌, 교회개척, 지도자육성 등의 선교사역에 전념하였다. 반면에 베티는 음악 사역자로서 라디오선교방송 프로그램을 위해서 노래한 합창단과 앙상블을 지도하였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베티는 마을이 태풍으로 위태롭게 되자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을 구출하였다. 이에 정부는 그녀의 용감한 행동을 칭송하며 표창장을 수여하였다.

빌즈 가족은 1961년에 CRM사역을 완전히 접고 고향 미국 텍사스로 돌아갔고, 후일 텍사스 주 휴스턴 소재 트리니티 교회(Trinity Church)에서 사역하였다. 이때 트리니티 성서신학교/사우스텍사스 성서신학교를 세워 교수로도 활동하였다. 그는 후일 오순절 은사운동의 역사가와 자료수집가로 변신하였고, 그가 소장했던 4천권의 서적은 풀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 데이비드 알렌 허버드 도서관 특별서고(David Allan Hubbard Library’s Special Collections)에 기증되었다.

베티는 선교사, 목사, 교수였던 알렉스의 아내요, 목회파트너로서 미국으로 돌아간 후 아마릴로(Amarillo)고등학교에 조지 거슈윈회(George Gershwin Society)를 창립하여 회장을 역임하였다. 베티는 40년간 피아노교습을 하였으며, 전국 피아노 교사 협회(National Guild of Piano Teachers)와 다른 전국 음악조직들에서도 오랜 기간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베티는 오클라호마 대학교에서 음악과 피아노를 전공하여 학사학위를, 오클라호마시티 대학교에서 ‘제2언어로써의 영어교육’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베티는 또 제2언어로써의 영어교육제공사의 교사로서 근무하며 많은 외국인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그녀는 다년간 텍사스 주 휴스턴에 소재한 한 사립기독학교에서 교장을 역임하였다. 이뿐 아니라, 베티는 라이프송 합창단(LifeSong Choir)에서도 20여 년간 봉사하였다. 현재 그의 자녀들 가운데 세 사람(Becca Bills Upham, Guy Don Bills, Kathleen Harder)이 라이프송 합창단에서 활동하며, 2006년 선교연주여행 때에는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집회를 가졌고 방송도 되었다.

알렉스와 베티는 슬하에 다섯 자녀를 두었다. 그중 캐스린(Kathleen Harder), 베카(Becca Bills Upham), 벌렌 알렉스 빌즈 2세(Verlen Alex Bills II)는 일본 오사카에서 나서 일본과 한국에서 자랐고, 가이 돈(Guy Don Bills), 브라이언(Brian L. Bills)은 한국에서 나서 자랐다. 캐스린과 베카는 미주리 주 조플린에 소재한 그리스도의 교회 소속 오자크 기독대학(Ozark Christian College)을 졸업하였다.

(2)‘크리스챤 라디오 밋숀’(Christian Radio Mission)

일본의 베테랑 선교사인 마크 맥시(Mark Maxey)의 “일본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 백년”(Christians in Japan 100 Years, 1883-1983)에 의하면, 알렉스와 베티 빌즈 부부는 1951년에 일본 오사카(Osaka)에 선교사로 부임하였다. 빌즈 가족이 일본에 건너간 것은 라디오전파선교를 위한 것이었다.

알렉스 빌즈의 비전은 기독교복음을 전할 라디오방송국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그가 처음에 선교방송국을 세우려고 계획했던 곳은 중국 서부지역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공산국이어서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일본을 택하였다. 일본이 상업방송국을 허가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가능성이 있겠다는 생각에서 일본으로 갔지만, 일본정부도 허가할 생각이 없었다. 알렉스는 그 대안으로 상업방송국들의 시간을 사서 자신이 직접 제작한 라디오선교프로그램을 방송하였다.

일본 그리스도의 교회 라디오선교방송은 이미 1947년에 시작되었다. 오사카성서신학교의 해롤드 콜(Harold Cole)이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갔을 때 기금을 모아 오사카에서 가장 큰 방송국의 시간을 사서 첫 방송 프로그램을 송출한바가 있었다. 알렉스가 1951년 일본 오사카에 온 이후로는 ‘크리스챤 라디오 밋숀’(Christian Radio Mission, CRM)이 선교방송을 총괄하고 주도하였다. 이후 호카이도에 있는 미군 군목들이 기금을 모아 그곳에서 일본어 프로그램을 방송하였는데, 이것을 주도한 인물은 로버트 스코트(Robert Scott)였다. 그 사이에 마닐라의 DZAS 단파방송국들이 CRM에 프로그램의 제작을 요청하여왔다. 그들은 그것을 일본(인)을 향해서 송출하는 방송국들에 넘겼다. 또 다른 진전은 인디애나 주 가레트(Garrett)의 월터 코블(Walter Coble) 형제자매가 영어프로그램의 제작을 CRM에 의뢰하였다. 그들은 그것을 유럽 라디오 룩셈부르크에서 방송하였다. 이것과 관련해서 CRM은 후속(follow-up) 서신을 관리하고 성경통신과정을 청취자들에게 제공하였다. 오사카성서신학교의 마틴 클라크(Martin Clark)가 독창(solo)과 프로그램의 아나운서로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였다. 1952년 가을에 엑시 풀츠(Exie Fultz)가 일본에 주재한 알렉스 빌즈를 돕기 위해 합류하였고, 특별히 전파선교방송의 후속사역과 성경통신과정의 사역을 맡았다.

‘크리스챤 라디오 밋숀’(CRM)의 최종 목표는 방송국을 설립하여 자신의 방송을 송출하는데 있었다. 그렇게 되면, 상업방송국의 시간을 비싼 가격에 사서 일주일에 몇 번 짧은 시간 전파를 쏘는 대신에 매일 몇 시간씩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부분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최적지에 기독교라디오방송국을 세우도록 허가를 내주는 국가를 찾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이 한국정부였다. 1954말에 한국정부는 부산에 기독교라디오방송국을 세워 운영해도 좋다는 허가서를 내주었다.

알렉스는 일본에서 월간소식지 <파장>(Wave Lengths)를 발행하였다. 또 베티와 함께 오사카성서신학교에서 가르쳤다. 알렉스는 기독교라디오방송 관련 과목들(기독교라디오, 시청각매스컴)을 가르쳤고, 베티는 음악을 가르쳤다. 두 사람의 강의는 모두 미래의 방송요원을 육성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밖에도 중고등학교 등에서 영어성경을 가르쳤다.

CRM이 기독교방송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제작하여 FM상업방송국의 시간을 사서 방송하기 위해서는 스튜디오가 필요하였다. 알렉스와 엑시 풀츠는 오사카에 스튜디오를 마련해보려고 애를 썼다. 1954년 말에는 오사카성서신학교가 캠퍼스에 부지를 제공하고, CRM이 스튜디오와 사무실로 쓸 건물을 짓기로 합의를 보았다.

한편 알렉스는 일본에서 전파선교를 시작한지 만 일 년 만인 1952년 1월에 이미 한국과 오키나와가 방송국 설립의 최적지라는 확신을 갖기 시작하였고, 한국과 일본 오키나와에 라디오선교방송국을 세우려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이것이 삶이다”(This Is Life)라는 방송선교프로그램을 제작하여 주일 아침 6:30-7:00시에 NJB_JOOR을 통해서 전파선교를 시작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독창, 뚜엣, 여성합창, 라디오 성경드라마, 설교 등으로 꾸며졌으며, 이후 홋카이도를 비롯한 일본 전역과 필리핀 마닐라에서 일본어로 방송되었다. 유럽에서는 “성경 그리스도인 프로그램”(The Bible Christian Program)이 매주 월요일 밤에 영어로 유럽의 17개국에 방송되었으며, 2백만 명이 청취하였다.

알렉스 빌즈는 1953년 9월에도 선교사들에 대한 한국정부의 호의를 강하게 신뢰하며 인천에 라디오기독교방송국 설립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다. 1954년 4월에는 극동방송이 자신들에게 정기적인 한국어 방송프로그램을 시작하도록 요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1954년 11월 월간 소식지에서 알렉스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계획을 피력하였다.

    한국(KOREA)

    한국은, 작금의 세계에서 기독교선교에 가장 큰 기회의 나라로써, 우리가 행동해 주기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할 사람들은 준비를 마쳤고, 빌의 가족은 부산으로 옮겨가기 위해서 도쿄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산에서 건물매입도 가능합니다. 동양선교회는 전시(戰時)에 본부로 사용했던 건물을 우리에게 4천불에 매도하고자 합니다. 기회가 그곳에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우리가 라디오선교방송국을 소유할 수 있도록 허가를 내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또 정부는 즉시 국영방송국들의 시간을 우리에게 할애해 줄 것이며, 우리가 한국인 방송직원들을 훈련하고 다른 필요한 기초 작업을 펼치는 동안 준비될 기독교복음프로그램들을 송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주택 매입에 필요한 돈의 절반 이상이 확보되었습니다. 이 사역에 교우 여러분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와주신다면, 이 일은 착수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기부금은 동시에 필요합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일을 시작하게 할 수 있는 주택을 매입하려는 이 기회는 두 번 다시없을 것입니다.

    일본에서 우리가 하던 일은 엑시 풀츠와 우리의 훌륭한 일본인 직원들이 지속시켜 나갈 것입니다. 우리의 유럽에서의 영어방송도 지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내려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사역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에서 크게 확장시켜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자신이 소유한 라디오선교방송국을 세운다는 궁극적인 목표에 한발 더 다가서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방송국 허가서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한국에 살고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부산은 우리가 전파사역을 펼쳐나갈 이상적인 장소입니다. 한국 정부는 기독교사역에 대해서 아마 세계에서 가장 호의적일 것입니다. 기술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전파를 송출하기에 최적인 바다에 인접한 곳들, 무관심지역인 일본의 서부연안에 일본어 방송을, 광둥, 상해, 대만에 이르는 중국의 연안 도시들에 중국어 방송을 송출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한국어 프로그램들은 남쪽 대한민국을 커버할 뿐 아니라, 심지어 북한의 죽의 장막까지 침투해 들어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엄청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전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고, 절실하며, 호응도가 높은 심장부에 세 나라의 언어로 방송할 기독교라디오방송국을 세우는 것입니다.

알렉스는 1955년 3월 소식지에서 1954년 말에 한국에 머물면서 한국정부로부터 부산에 기독교선교라디오방송국 설립허가서를 받고 일본으로 돌아왔다고 전하였다. 특히 1956년 4월 서신에서는 허가서에 대해서 언급하며 이렇게 적었다. “그 문서는 한국 정부가 부산에 라디오선교방송국을 세우고 운영하는 것을 승인한 허가서였다."(That paper was a written approval from the government of Korea to erect and operate a missionary radio broadcasting station in Pusan, Korea.) 이것은 과거 10년간 이 목적으로 노력하고 기도한 결과라고 피력하였다. 부산 라디오기독교방송국의 설립은 대한민국만 커버하는 것이 아니라, 죽의 장막인 북한, 중국, 러시아를 커버할 수 있는 최고의 선교도구라고 확신하였다. 알렉스는 부산에 선교방송국을 설립해도 좋다는 허가서를 받자마자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가 한국에서 함께 사역할 선교사들의 모집과 기금의 확보를 위해서 노력하였다.

알렉스는 1956년 3월 소식지에서 자신의 계획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첫 단계로써 1956년 6월(실제로는 12월 13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에 부산으로 이사하여 땅을 사고, 이미 매입이 끝난 부산의 주택을 수리하며, 작은 방송기지와 선교사들의 주택들을 짓기 시작하여 가을이나 겨울쯤에 건축을 끝내면 방송장비들을 구입하여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한국어 프로그램을 부산지역에 방송한다는 것이었다. 여기까지에 필요한 기금이 5만2천불이고, 이후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방송을 제작하여 한국 전역, 중국, 일본에 전파를 송출하는데 4만8천 불의 예산이 더 필요하다고 하였다. 알렉스가 10만 불을 목표로 모금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알렉스의 또 다른 서신에 의하면, 10,000와트(watt)를 송출할 수 있는 방송국을 만드는데 필요한 비용이 10만 불 정도라고 보았다. 당시보다 10년 혹은 20년 후까지 버트 엘리스와 조 세걸키 가족의 급여가 4-5백 불이었고, 싱글이었던 버지니아 힐의 급여가 150불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였다. 오늘날의 원화가치로 보면 10-12억 원에 해당되는 액수였다. 1950년대에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개 교회와 개인들을 상대로 이 정도의 큰돈을 모금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큰돈은 이미 일본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역에 필요한 비용과는 별도로 추가로 필요한 돈이어서 더더욱 모금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알렉스는 1와트당 10불이 필요하며, 그 돈이면 200명에게 복음이 전파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계산에 따라 5천불이면 500와트를 살 수 있고, 10만 명에게 복음이 전파될 수 있다고 선전하였다.

또 알렉스는 1956년 3월 소식지에서 한국선교의 중요성을 재차 피력하였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선교지들 가운데 한 곳이며.... 지금은 모든 선교지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고 하였다. 그는 또 “한국은 선교역사가 80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인의 비율이 극동에서 가장 높은 나라이다. 일본이 인구의 0.5퍼센트, 인도가 1퍼센트인 것에 비해 한국은 7퍼센트에 이른다”고 하였다. 그는 또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첫째, 한국에서 종교는 애국심과 무관하지만, 일본에서는 다수가 종교인을 애국심이 약한 자로 간주한다.

둘째, 교단의 선교회들이 정책적으로 한국에는 보수주의 선교사들을 보낸 반면, 일본과 중국에는 진보주의 선교사들을 파송하였다.

셋째, 한국에는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이 많았다. 이들이 끼친 영향이 크다.

넷째, 오늘날 한국에 부흥운동이 크게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바치는 충성심 가득한 우리의 메시지를 들어야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단순히 순종하기를 배워야 한다. 이 사역은 그들이 분열을 일으키는 근대 교파주의 교단들에 인도되기 전에 이뤄져야 한다.”

1956년 5월 소식지에 의하면, 알렉스는 켄터키 주 루이빌에서 개최된 북미주그리스도인대회(North American Christian Convention)에 참석하였고, 5월 9일(수) 저녁에 일백여 명 정도가 모인 한 세션에서 자신의 방송선교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알렉스의 프레젠테이션을 듣고 난 직후에 인디애나 주 윌리엄스포트(Williamsport)에 소재한 그리스도의 교회의 더글러스 딕키(Douglas Dickey)란 목회자가 일어나 제안하기를, 각각의 교회에서 50명 단위의 후원클럽을 만들어 각 사람이 향후 20개월 동안 매 주 25센트씩 기부하게 하자고 하였다. 계산상으로는 매 클럽 당 1,083불의 모금이 가능한 제안이었다. 이 ‘50클럽“(50 Clubs) 제안에 알렉스는 한껏 고무되었다. 이런 클럽이 100개만 매월 운영된다면, 자신의 구상은 성공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이 모임을 마치자마자 알렉스는 이 모임에서 25명의 설교자들과 지도자들이 6만5천 불의 기부를 CRM에 약속하였다고 소식지와 서신을 통해서 선전하였고, 이후 각 교회가 이런 형식의 후원클럽을 운영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호소하였다. ‘50클럽’을 통해서 후원금이 당도하긴 했어도 그 액수는 미미하였다.

(3)CRM 법인설립

알렉스 빌즈 가족은 1954년 말에 한국정부로부터 부산에 라디오선교방송국을 세우고 운영하는 것을 승인한다는 허가서를 받고 미국으로 건너갔고, 1956년 12월 소식지에 의하면, 무려 22개월간의 미국 체류를 끝내고 1956년 11월 16일에 한국을 향해서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배를 탔다고 적었다. 미국 체류기간이 길어진 것은 함께 일할 선교사 모집과 기금모금이 원활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기간에 법인의 설립과 9명의 새로운 사역자들을 모집하는데 성공하였다. 여기에는 네 가족과 한명의 독신 여성이 포함되었다. 따라서 CRM의 가족은 12명의 성인과 12명의 자녀들로 구성되게 되었다. 알렉스 빌즈 가족은, 1956년 12월 서신에 따르면, 11월 20일에 일본 도쿄에 도착하였다. 1957년 1월 소식지에 의하면, 1956년 12월 13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한국 상륙이 늦어진 이유는 미국 내 위원회와 새로 모집된 사역자들과의 좌담이 있었고, 출발 전까지도 기금의 모금이 원활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 라디오 사역 관계로 하와이 호놀룰루에 내려 며칠간 머물려야했으며, 일본에 거주하는 선교사들과 사역자들과의 좌담 때문에도 두 주간 머물러야 했다.

1956년 9월 24일 일리노이 주 댄빌(Danville)에 소재한 제2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CRM Incorporated’의 법인설립정관에 서명하는 모임이 있었고, 일리노이 주 국무장관의 허가를 받아 합법적인 법인회사가 출범되었다. 이 서명식에 벌렌 알렉스 빌즈(V. Alex Bills), 엑시 풀츠(Exie Jane Fultz), 더글러스 딕키(Douglas Dickey), 로버트 릴리(Robert Lillie), 제임스 퍼니스(James Furniss), 버트와 마조리 엘리스(Bert & Marjory Ellis)가 참석하였다.

(4)한국 CRM의 성과

한국에서의 사역은 생각보다 진척이 매우 더뎠다. 1957년 1월 16일 서신에서 알렉스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토지매입이 다음 단계는 아닙니다. 다음의 일은 여러분에게 달렸습니다. 수중에 가지고 있는 돈이 토지매입에 턱없이 부족합니다. 이 한 건에만 14,000불의 비용이 듭니다. 우리가 기금을 확보하기까지는 사실 아무 것도 더 이상 진척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모든 교우들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건을 주님의 인도하심에 맡긴다면,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돈이 정확히 필요한 시간에 수중에 들어올 것입니다.

    ‘50클럽’을 통한 모금도 물론 토지매입에 필요한 시간 내에 충분히 채워지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능한 빠르게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크리스챤 라디오 밋숀’ 교우들에게 우리와 함께 앞으로 한 거름 내딛기를 요청합니다.

1957년 4월 소식지에서 알렉스 빌즈는 한국에서의 사역을 다소 서두른 경향이 있지 않았는가를 의심하였다.

    기초부분은 건물의 다른 부분에 비해서 눈에 거의 띄지 않습니다. 건축자는 종종 기초가 구조물의 다른 부분을 잘 떠받쳐줬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러나 위기가 크게 닥치면, 기초는 무시당하거나 지나치게 서둘러집니다. 기초는 친구들에게 보여줄 것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이곳 한국에서 우리가 직면한 상황입니다. 우리는 지금 성공적인 라디오사역을 위해서 수년간 기초를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면한 현실만을 볼 때는 거의 이룬 것이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1957년 7-9월호 소식지에 의하면, 한국에 도착한지 7개월 만에 토지매매계약서에 서명하였고, 1958년 2월 소식지에 의하면, 1958년 1월 9일에서야 부산시 광안동 부지에서 기공식을 가졌다. 여기까지 오는데 만 13개월이나 걸렸다. 알렉스는 부지선정의 신중과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실은 기금이 부족해서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데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계획(작전)도 좋았고, 조직과 노하우(실전경험)도 있었지만, 돈(실탄)이 부족하였다. 오사카에서 해오던 사업의 유지에다 큰 자금을 요하는 부산에서의 새로운 사업을 위한 모금에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무렵 미국도 경제사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제1세계대전, 1930년대 경제대공황, 태평양전쟁과 제2세계대전, 한국동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알렉스가 부산에서 진행시킨 건축도 대부분 시멘트블로크를 찍어 말린 후 집을 짓는 수작업이었다. 1958년 9-10월경에 비로서 기초 작업을 시작하여 12월 소식지에서야 비로소 기초를 완성하고 블록을 쌓기 시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2월 26일에는 마룻대(ridgepole)를 올리는 상량식을 가졌다. 알렉스가 부산에 온지 만 2년이 되는 때였다. 이 상량식에 목수들과 김홍균(CRM 매니저), 장성만(CRM 설교담당, 대교교회 목사)과 김히영(CRM 번역과 음악보조)도 참석하였다. 통역 김히영은 CRM에서 PD로 사역하다가 1963년부터 대전에 올라와 김찬영을 대신해서 힐 요한 선교사의 사역을 도왔다.

그러나 이 상량식에 알렉스가 한국에 불러들인 다른 선교사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CRM 소식지도 1959년 2월(47번)호를 끝으로, 그것이 마지막 소식지는 아니었겠지만,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결과론적으로 알렉스 빌즈가 추진한 부산에서의 사역은 계획대로 진척되지 못했고, 이에 실망한 선교사들과 미국의 지원자들이 CRM을 탈퇴함으로써 실패로 끝난 허황된 꿈이 되고 말았다.

2)알렉스 빌즈의 동료들

(1)엑시 제인 풀츠(Exie Jane Fultz)

엑시는 부친 밀턴 월터스(Milton Walters)와 모친 내니 밴스(Nannie Vance) 사이에서 1918년 2월 14일 미국 일리노이 주 마셜(Marshall)에서 출생하여 11살 때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침례를 받았고, 마셜 타운쉽 고등학교를 1935년에 졸업하였다. 25세 때 결혼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때 남편과 사별하였다. 엑시는 스마트 어피어런스 뷰티(Smart Appearance Beauty) 대학을 1945년에, 신시내티성서신학교를 1949년에 졸업하고, 버틀러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재학하던 중에 방송선교사의 소명을 받았다. 1951년에 선교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여 1952년 11월 6일에 알렉스 빌즈(Verlen Alex Bills)가 창립한 크리스챤 라디오 밋숀(Christian Radio Mission, CRM)에서 사역하기 위해서 일본 오사카에 상륙하였다. 오사카에서 편지업무와 일본어 성경통신강좌와 유럽인을 위한 영어 성경통신강좌를 담당하였으며, 1953년 4월에 고베로 옮겨가 CRM의 전파선교방송 고베 통신원들과 함께 후속사역(follow-up work)을 담당하였다. 일본인들의 반응은 대체로 냉담하였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믿고 침례를 받는 이들이 고베에서도 생겨났고, 고베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졌다. 알렉스 빌즈는 방송국 설립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한국으로 옮겨가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엑시가 서서히 그의 업무를 이어받아 일본 전파선교방송을 책임지기 시작하였다.

엑시 풀츠에 의한 CRM 소식지는 1959년 2월(47번)호까지만 남아있다. 이후 엑시 풀츠는 자신이 1958년부터 계획한 ‘니폰 크리스천 방송 협의회’(Nippon Christian Broadcasting Association)를 1959년 6월 8일에 설립하여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또 1960년 1월부터는 방송진행표를 뜻하는 ‘큐시트’(The Cue Sheet)란 소식지를 2개월마다 한 번씩 발행하였다. 엑시 풀츠는 일본 CRM의 사역을 사실상 책임졌던 인물로서 알렉스 빌즈가 일본에서 펼쳤던 모든 사역을 그대로 이어갔다.

알렉스 빌즈의 충실한 사역자였던 엑시 풀츠(우측 끝 사진이 1959년 때의 모습)는 고베 근처 아와지 섬(Awaji Island)에 토지를 매입하고 그곳으로 옮겨 은퇴할 때까지 사역을 이어갔다.

(2)플로라 매이 구른지(Flora Maye Guernsey)

플로라 매이 구른지(Flora Maye Guernsey)는 1934년 3월 10일 미국 인디애나 주 헤브론(Hebron)에서 출생하였으며, 한국에 나올 당시 갈색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23세의 독신 여성이었다. 1952년에 헤브론 고등학교를, 1957년에 링컨성서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링컨신학교에서는 기독교교육을 전공하였다. 그녀는 업무비서, 음악보조, 성서강의를 위해서 1957년 10월에 한국에 입국하였다. 그러나 알렉스의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자 플로라 매이 구른지는 심사숙고 끝에 1959년 2월 25일 배로 부산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갔다. 부산을 떠나기 직전에는 조 세걸키와 버트 엘리스의 새로 막 시작한 방송선교를 도왔다. 조와 맥신 세걸키에 의하면, 그녀는 1958년 10월에 한국에 머문 선교사들과 미국에 대기 중인 가족들이 모두 탈퇴함으로써 장래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다행히 그녀는 일리노이 주 졸리엣(Joliet)에 소재한 선교단체(Mission Services)에 직원으로 초빙되어 1959년 2월 25일에 한국을 떠났다.

(3)조와 맥신 세걸키(Joshep & Maxine Seggelki)

조 세걸키(Joshep Seggelki)는 태평양 전쟁 때 항공모함에 승선하여 전기기사로 복무하였다.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맥신 앰버그(Maxine Amberg)와 결혼하여 1946년부터 일리노이 주 링컨에 거주하면서 링컨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집사와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다가 링컨성서신학교에 입학하여 1957년에 졸업하였다. 이때가 32살이었다. 조는 1956년 9월 9일에 안수를 받았고, CRM의 업무추진담당자(Traffic Manager)로 1958년 1월 31일에 한국에 입국하였다.

1957년 12월 26일 오후 3시 30분에 미국 일리노이 주 링컨을 출발하여 1958년 1월 7일 오후 6시 30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탔고 1월 26일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 일본의 첫인상은 깨끗하고 매력적인 나라였다. 1월 28일 짐을 찾아 고베로 가는 배를 탔다. 고베에는 엑시 풀츠(Exie Fultz), 마르틴 클라크(Martin Clark), 이사벨 디트모어(Isabell Dittemore) 등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 오사카성서신학교를 방문한 후 오후 1시 배를 탔고 다음 날 아침 8시에 일본 시모노세키 인근의 모지(Moji)에 도착하였다. 다시 출발하여 부산 만에 31일 아침 8시에 도달하였다. 멀리 보이는 부산의 모습은 컬러풀한 일본과는 확연히 다른 음울한 모습이었지만, 한국의 이민국 직원들은 일본인들보다 훨씬 친절하였다. 부산항에는 플로라 매이 구른지(Flora Maye Guernsey) 양과 알렉스 빌즈(Alex and Betty Bills) 가족이 마중 나와 있었다. 출입국관리소를 빠져나오니 ‘크리스챤 라디오 밋숀’(Christian Radio Mission)의 중창단이 환영하였다. 그들에 대한 첫인상은 매우 좋았고 친절하였다.

부산에서 처음 출석한 교회는 장성만 목사가 시무하는 대교 그리스도의 교회였다. 조와 맥신 세걸키는 미국에 보낸 두 번째 서신(1958년 5월)에서 대교교회의 색다른 예배풍경을 상세히 설명하였고, 버트 엘리스 가족이 5월 3일에 도착하였다는 것과 아울러 굳맨 가족, 클레멘스 가족, 클레어 포웰이 한국에 도착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피력하였다. 다른 한편 엘리스 가족이 오던 날 집에서 준비한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서 항구에 마중을 나가기 전에 한 달 치 급료와 각종 청구서를 해결할 300불을 은행에서 찾아 빌즈의 요리사에게 맡겼는데, 엘리스 가족을 데리고 빌즈의 집에 돌아와 보니 식사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고, 돈도 요리사도 사라지고 없었다는 황당한 경험을 소개하였다. 또 다른 한편 장성만 목사의 대교교회가 4월에 14명에게 침례를 베풀었는데, 조 세걸키가 7명, 장성만 목사가 7명씩 침례를 베풀었다는 기쁜 소식이었다.

조와 맥신 세걸키는 1959년 1월경의 쓴 세 번째 서신에서, 자신들이 선교와 선교지에 대한 큰 기대감을 갖고 부산에 온지 일 년이 조금 지났지만 실망이 컸던 것과 CRM에서 탈퇴하게 된 사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계획은 여러분이 기대했던 것만큼 결코 이뤄지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우에서도 동일하게 사실이었습니다. CRM에 대한 실망감은 정말 커져갔습니다. 우리는 여러분들 가운데 많은 분들과 서신을 주고받았습니다만, 어떤 분들에게는 이것, 즉 우리가 CRM에서 사임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지난 1958년 10월 25일, 국내 위원회의 여섯 분..., 국내 사역자들 (Ray Goodman family, Bob Clemens family, Lewis Myers family, and Clair Powell), 그리고 선교지의 선교사들은 (Bert Ellis family, Flora Maye Guernsey, and the Seggelke family) 벌렌 알렉스 빌즈에 대한 신뢰의 부족과 CRM의 사역방법이 우리와 국내에 계신 분들에게 잘못 전달되었기 때문에 사임하였습니다.”

또 다른 전단에서 조 세걸키는 말하기를, 그들이 한국에 도착했을 때 “프로젝트는 예상되었던 것대로 되지 않았고, 실망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적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걸키 가족과 엘리스 가족은 자신들이 한국에서 할 수 있는 다른 길을 찾으려고 힘썼고, 한국에 오려고 준비 중인 미국의 예비 선교사들의 앞날도 불투명해졌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플로라 매이 구른지는 1959년 2월 25일에 본국으로 돌아갔다. 1959년 초부터 버트 엘리스 부부와 조 세걸키 부부는 합심하여 ‘한국방송선교’(Korean Broadcasting Mission)를 설립하고 부산문화방송(HLKU)에서 시간을 임대하여 4월 16일부터 매일 하루 두 번, 일주일에 세 시간씩 방송을 시작하였다. 소요비용은 급여를 포함해서 하루에 23불씩이었다. 부산문화방송 사장과도 친해져서 조와 버트는 부산문화방송국 자문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하였다. 1958년 12월에는 테일러 부부, 래쉬 부부, 여러 한국인 사역자들의 추천을 받아 방송설교자로 이신 목사를 채용하였다. 선교방송과 함께 걸려오는 전화상담, 가정에서의 성경공부, 전도용 문서발송을 통해서 후속선교를 이어갔다.

‘한국방송선교’(KBM)는 1959년부터 계간으로 ‘킬로사이클’(Kilocycles)이란 이름의 소식지를 발행하였다. 비용은 세걸키 가족과 엘리스 가족이 공동으로 부담하였다. 알렉스 빌즈를 도왔던 더글러스 딕키(Doug Dickey, Williamsport, IN) 목사가 회계를 맡아주었다. 이들은 주일 저녁에 별도의 예배모임을 시도하였고, 설교 때 통역을 사용하였다. 매주 평균 35명 정도 참석하였다고 한다. 조와 버트는 방송선교와는 별도로 각각 별도의 성경공부반도 운영하였고, 1959년 9월에는 교회를 개척하였다. 출석인원은 50-70명 정도였다고 한다. 버트와 조의 가족 역시도 자금 부족으로 애를 먹었다. 특히 버트 가족의 경제난이 심하였다. 날이 갈수록 빚이 늘었기 때문에 1959년 9월부터는 방송을 하루 한 번으로 줄였다. 조의 경우 1960년 서신에 의하면, 매월 200불 정도의 후원금이 채워지지 않고 있었다.

조 세걸키 가족은 1960년 6월부터 안식년을 떠나는 테일러를 대신해서 서울에 머물렀으며, 테일러 가족이 돌아오면 안식년을 가진 후 1962년 봄에 돌아올 계획이었다. 버트 엘리스 가족은 1962년에나 안식년을 가질 수 있게 되는 셈이었다. 따라서 부산에서의 일은 버트 엘리스가 전적으로 책임을 지게 되었다.

1960년 4월 서신에서 조와 맥신은 4월 15일에 이신 목사가 서울에 올라가 목회하기 위해서 사임하였다고 적었다. 이신은 이때 부산문화방송을 통해서 매일 밤 10시에 행한 설교들을 모아 기독교문사에서 1980년에 <산다는 것, 믿는다는 것>을 펴냈다. 이때 이신 목사는 방송뿐 아니라, 두 개의 신문에도 기사를 실었다.

조와 맥신 세걸키 가족은 1961년 7월에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1962년 7월에 한국으로 돌아와 더욱 활기차게 선교할 계획이었고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1962년 6월 서신에 의하면, 한국으로 돌아올 구체적인 계획을 밝히고 있고,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출발할 배까지 예약해 둔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에 관한 자료를 더 이상 구하지 못해서 그들이 무엇 때문에 한국에 돌아오지 못했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리처드 래쉬의 서신에 의하면, 세걸키는 1962년 한국정부로부터 비자를 거부당하였고, 링컨기독대학에 취직이 되어 미국에 남았다고 한다.

(4)버트와 마조리 엘리스(Bert & Marjory Ellis)

버트 엘리스 가족은 알렉스가 한국정부로부터 선교방송국 설립 허가서를 받고 나서 부산에 세우려고 한 방송국의 프로그램제작부 담당자로 입국하였다.

버트는 신시내티성서신학교, 링컨성서신학교 및 밀리건 대학에서 수업을 받았고, 플로이드 존스 종교음악학교(Floyd Jones School of Sacred Music, Indianapolis, IN)에 입학하면서부터 목회를 시작하여 한국에 오기 직전에는 미주리 주에 소재한 카불(Cabool) 그리스도의 교회를 3년째 담임한 것을 비롯해서 총 18년간 목회사역을 하였다. 그는 목회자로서 다년간 크고 작은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감독한 유경험자였다.

1958년 3월 소식지에 의하면, 엘리스 가족은 1958년 4월 7일 혹은 9일에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올드 콜로니 마리너(Old Colony Mariner)에 올라 5월 3일에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버트 엘리스 가족이 한국에서 행한 사역은 조 세걸키와 함께 한국방송밋숀(Korean Broadcasting Mission)을 설립하고 부산문화방송(HLKU)에서 시간을 임대하여 매일 3년간 전파선교를 한 것이었다. 다섯 개의 성경클럽을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상대로 운영하였고, 이들 클럽에 125명 정도가 등록하였다. 또 라디오 방송 청취자들과 기타 원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경통신강좌를 개설하였으며 한번에 100명 정도 등록하였다. 시내 선교부 건물 채플에 동광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여 예배들 드렸고, 평균 40여명, 최고 100명까지 참석하였다. 어린이 주일학교는 참석인원이 평균 300명이 넘었다.

버트와 마조리 엘리스 가족은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2년 정도의 안식년 끝에 1964년 4월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 때 학생성경클럽이 4개였고, 참석인원이 100여명에 이르렀다. 동광교회는 여전히 지속되었고, 어린이 주일학교에 참석하는 어린이의 숫자는 1965년에 평균 425명, 12월 19일에는 510명, 성탄절에는 550명까지 참석하였다.

1966년 1월에는 동아 그리스도의 교회가 부산에 개척되었다. 1966년 5월에 이 교회의 주일학교에 참석하는 어린이는 350-400명에 이르렀다. 엘리스 부부는 초교파인 부산 연합신학교에서도 가르쳤다.

엘리스 가족은 1982년 6월경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에서18년 목회, 한국에서 25년 선교를 비롯해서, 1983년 6월 서신에 의하면, 47년 가까이 사역하였다. 1983년 11월은 버트가 65세가 되는 해였다. 아들 존은 밀리건 대학을 나온 후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할 계획이었지만, 실천에 옮기지 못한 것 같다.

3)CRM 선교사가 되려고 준비 중이던 가족들

(1)레이와 로레타 굳맨(Ray and Loretta Goodman)

레이와 로레타 굳맨(Ray and Loretta Goodman)은 미 공군에서 8년간의 전자기술자로 일하였다. 일리노이 주 빌리빌(Believille) 소재 제일 그리스도의 교회에 소속한 집사(1961년에는 장로)로서 링컨성서신학교를 졸업하는 1958년에 한국에 올 계획이었다.

 

 

 

 

(2)밥과 필리스 클레멘스(Bob and Phyllis Clemens)

밥과 필리스 클레멘스(Bob and Phyllis Clemens)는 1958년에 발파라이소(Valparaiso) 기술학교를 마치고 전자기술 준(準)학사를 1958년 10월에 받으면 한국에 입국할 계획이었다. 해군에서 전자학 분야에 복무하였다. 밥은 CRM이 내분을 겪자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에 소재한 WICS-TV에 엔지니어로 취업하였고, 밥과 필리스는 버트와 조가 새로 시작한 한국방송선교(KBM)의 미국 대리인(representatives)으로 봉사하였다.

 

 

 

(3)클레어(Clair Powell)

클레어 포웰(Clair Powell)은 엔지니어링과 기계설비 분야에서 감독과 자문을 하기로 약속하였다. 클레어는 하와이에서 단기 선교사로 사역한 경험을 갖고 있었으며, 라디오 엔지니어 일급 자격증 소유자로서 가족을 미국에 두고 부산에 와서 일 년간 머물 계획이었다.

 

 

 

 

 

 

(4)루이스와 돌로레스 마이어스(Lewis and Dolores Myers)

루이스와 돌로레스 마이어스(Lewis and Dolores Myers) 부부는 교육업무를 맡아보기 위해서 1959년에 부산에 오려고 계획하였다.

 

 

 

 

 

 

 

 

 

 

 

3)한국 CRM의 실패의 원인

1972년에 힐 요한 선교사는 그 원인이 “심한 내분과 버트 엘리스와 조 세걸키의 반대” 때문이었으며, 그로 인해서 한국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정 반대였다.

첫째, 선교사들 간의 친분을 보면, 힐 요한과 제인 부부는 1959년 8월 부산에 입국하였을 때 알렉스 빌즈의 집에서 2개월을 체류하다가 대전으로 올라왔다. 대교교회 장성만 목사는 방송설교자로, 한국성서신학교에서 교수와 힐 요한 선교사의 통역이 되기 직전에 김히영은 알렉스의 CRM에서 번역과 음악PD로 사역하였다. 반면에 장성만 목사와 함께 동서기독교실업학교를 개척한 리처드 래쉬 가족은 조 세걸키 가족과 절친하였다. 래쉬는 세걸키 가족에 대해서 여러 차례 언급하였지만, 빌즈 가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래쉬 가족은 세걸키 가족과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여름휴가 등을 함께 보내곤 하였다. 서울에 주재한 해롤드 테일러 선교사 가족은 알렉스 빌즈나 조 세걸키 가족 모두와 대체적으로 잘 어울렸다.

둘째, 알렉스 빌즈는 한국 정부로부터 부산에서의 라디오선교방송국 설립과 운영에 대한 허가서를 받고, 그 허가서를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22개월간 모금운동을 펼쳤고, 그 허가서를 가지고 1956년 12월 13일에 부산으로 옮겨왔다.

셋째, “심한 내분”이란 설립자와 협력자들 사이에 있었던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갭을 좁히지 못한데서 비롯되었다. 알렉스는 방송선교라는 비전을 품은 이상주의자였고, 그 비전을 이미 5년 넘게 현실로 옮기고 있었던 강력한 추진자였다. 알렉스는 실제로 많은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버트와 조는 알렉스의 사업을 돕기 위해서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아니한 냉철한 현실주의자들이었다. 버트는 1960년 전반기에 필립스에게 쓴 KBM서신에서 “그 이상은 비현실적이었고, 그 프로젝트를 고안한 사람은 전혀 믿을만하지 못했다.”(the idea was impractical and the man who had originated the project was completely untrustworthy)고 말하였다. 자신들이 CRM에서 탈퇴한 것은 “일을 엉망으로 만든 헛짓들 끝에”(After vain attempts to do something with the mess) 내려진 결단이라고 하였다.

넷째, 그들 사이에 있었던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자금부족이었다. 거대한 프로젝트에 비해 자금이 턱없이 부족하였던 것이다. 지난날 한성신학교가 대학개편이란 비전을 품고 캠퍼스를 충남 논산시 연산면 신양리로 옮기고 나서 근 20년간 학생들과 교직원들에게 기대와 실망으로 파도타기를 시키다가 끝내는 폐교에 처한 상황과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한성신학교 재학생, 동문, 교직원들이 겪었던 실망과 좌절감은 필설로 다 표현될 수 없는 것이듯이, 알렉스의 설교와 프레젠테이션에 감동받아 그와 그의 선교를 돕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또 모든 난관을 무릅쓰고 한국에 건너온 선교사들이 선교방송국 공사의 진척과 진행과정을 보고나서 느낀 실망감과 좌절감 또한 그에 못지않았을 것이다. 조 세걸키의 1959년 1월경의 서신에 의하면, 선교에 선교지에 대한 큰 기대감을 갖고 부산에 온지 일 년이 조금 지났지만, “계획은 여러분이 기대했던 것만큼 결코 이뤄지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우에서도 동일하게 사실이었습니다. CRM에 대한 실망감은 정말 커져갔습니다. 우리는 여러분들 가운데 많은 분들과 서신을 주고받았습니다만, 어떤 분들에게는 이것, 즉 우리가 CRM에서 사임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지난 1958년 10월 25일, 국내 위원회의 여섯 분... , 국내 사역자들... , 그리고 선교지의 선교사들은... 벌렌 알렉스 빌즈에 대한 신뢰의 부족과 CRM의 사역방법이 우리와 국내에 계신 분들에게 잘못 전달되었기 때문에 사임하였습니다.”라고 적었다.

이 실망은 곧이어 알렉스의 사업을 비현실적이고 믿을만하지 못하다고 비판한 그들 자신에게서도 찾아왔다. 버트와 조는 선교운영자금의 부족으로 이신 목사를 비롯한 직원들을 퇴사시켜야 했고, 부산문화방송에서 시간을 사서 송출하던 방송 횟수를 매일 2회에서 1회로 줄였으며, 끝내는 방송선교를 접어야 했다. 총회나 총회산하의 선교국을 거부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개교회가 선택한 선교사들에게 직접 선교하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모금에 탁월한 재능을 갖추지 않는 한 누구나 자금부족을 겪게 될 것이고, 결국 중도에 선교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이 알렉스에게도 닥쳤을 것이다. 동료들의 부정적인 견해는 미국 교회들에 알려졌을 것이고, 그것이 알렉스에게는 진행하던 사업을 접어야할 만큼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결국 알렉스 빌즈 가족은 1961년에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1983년까지 부산에 남은 버트 엘리스 가족도, 1962년 5월 서신에 의하면, 선교자금의 부족으로 1년 반 동안을 생활비의 절반을 빚을 갚는데 쓰면서 버텼으나 집세도 내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엘리스 가족은 1962년 7월경에 본국으로 돌아가 긴 안식년을 보내다가 1964년에야 돌아왔고, 1983년까지 부산에서 사역하였다.

크든 작든 하나의 조직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조직 안에 일치와 평화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 1953-55년 사이 힐 요한과 폴 잉그람(서울 선교부)과의 내분, 1958년 한국 CRM의 내분, 1977년 힐 요한과 김찬영의 내분, 1980년대 후반에 시작된 한성신학교의 내분은 조직의 순수성을 빙자로 내분(개혁)을 일으키는 것과 순수성에 문제가 있더라도 이해하고 포용함으로써 일치와 평화를 지키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유익한가에 대해서 숙고하도록 만드는 사건들이다. 빈대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운다는 속담이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은 신약교회 본래의 순수성을 회복하자는데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한 분열이 자주 있어왔다는 것을 환원운동사는 말해준다. 이것은 비단 그리스도의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조직의 순수성에 관한 논쟁은 초대교회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왔고, 1950년대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도 이 문제의 연속이었다. 다른 한편 순수성에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고 포용함으로써 평화와 일치를 지킨 때도 많았다는 것을 환원운동사는 보여준다. 순수성의 문제는 분열을 가져오고, 일치와 평화의 문제는 순수성을 해친다. 이 두 가지 순수성과 포용 사이의 갈등, 그리스도의 교회식으로 말하자면, 교회일치와 신약교회회복 사이의 갈등을 3세기에 걸쳐 고민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단체는 이 지상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빼고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일치와 순수성 사이에 늘 갈등이 있어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경건하게 고민하면서 끝임 없이 조절능력을 키워나가야 한다. 우리는 이 능력이 부족할 때 조직이 와해될 수 있다는 경고에 귀를 기우려야할 것이다.

3. 김동열 목사와 광주 그리스도님의 교회

이 글은 필자와 몇몇 목회자들이 2002년 11월 22-23일 양일간 김동열 목사를 직접 찾아가 보고 듣고 읽고 정리한 내용임을 밝힌다.

첫째, 김동열 목사는 그리스도의 교회 총회나 협의회 또는 교역자회에 소속된 그리스도의 교회 소속 목사가 아님을 밝혀 둔다. 김동열 목사가 2002년 11월 22-23일에 건넨 명함에 의하면, 소속이 “그리스도님의 교회교역자회 광주 그리스도님의 교회(Kwang Ju Church of Christ)”로 되어 있다. 이는 김동열 목사가 ‘그리스도님의 교역자회’란 모임을 오랫동안 따로 주도해 왔고, 또 그들만의 모임을 따로 갖고 있었으며, 1940-50년대를 제외하고는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에 소속된 목사로서 활동하지 않고, ‘그리스도님의 교역자회’ 소속으로 활동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 381쪽에 의하면, 김동열 목사의 “폐쇄적 근본주의 노선을” 타 교단에서 이단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이로 인해서 광주와 전남지역의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발전하는데 있어서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둘째, 김동열 목사의 부친 김용수는 장로회 소속 목회자였으나 세례를 매우 중요시 하여 김동열 목사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1990년 12월 26일자로 건국훈장을 받으셨고, 2002년 8월 15일 광복절에는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애국지사의 가족에게 드리는 감사의 편지를 받은바 있는 뼈대 있는 집안이었다.

김동열의 부친에 대해서 상이한 자료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 289쪽에 의하면, 1940년 3월 25일에 김요한, 최상현, 김문화, 성낙소, 박판조가 기독의 교회 신학을 제1회로 졸업하였고, 이 가운데 김문화는 “김동열의 아버지”라고 하였다. 또 지철희 목사의 글에 의하면, 김용수를 김용환이라고 호칭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김용하를 잘못 기억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용하는 김용수 목사의 자이다. 김문화가 김용수의 또 다른 이름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음은 지철희 목사가 김용수 목사에 대해서 남긴 글이다.

    김동열 목사님의 부친은 순교를 하셨는데, 김용환 목사님이시다. 김용환 목사님은 일제말엽 때 목사로서 복음을 전하시다가 신사참배 거부 문제로 투옥을 당하셨고, 많은 고문과 고통을 받던 중에 해방을 맞이하여 출감하셨는데, 오갈 때가 없어서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 사택에서 간호를 받으시면서 기거를 하실 때에 내가 딱 한번 뵌 기억이 난다. 연세는 어떻게 되셨는지는 모르고 후리후리한 키에 깡마른 얼굴과 움푹 들어간 눈, 뾰족한 턱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기운이 없어서 사람들이 옆에서 부축하여야만 걷고 일어설 수가 있었는데, 그 분의 설교하시는 목소리는 장정이 힘 있게 말하는 것처럼 낭랑하였고 우렁찬 목소리였다. 그 당시 내가 들은 설교는 신천신지를 말하는 천국론이었다 그 당시 나는 어려서 몰랐는데 들은 사람들은 꼭 천국에 온 것처럼 기뻤다고 한다. 그 당시 내가 듣기로는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아주 귀하고 유명한 목사님이시었다. 또 들은 바로는 김동열 목사님이 저렇게 성경을 잘 알고 그 어느 학자보다도 유명한 것은 그의 부친이신 고 김용환 목사님이 연구해서 기록한 노트를 보고 깨닫고 안 것이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또 성경 주석가인 박윤선 목사나 바클레이 목사의 주석 학문보다 한 단계 더 앞선다고 한다고도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귀하신 그의 부친이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순교를 하셨다는 소식을 소문으로 알았다. 그래서 우리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산실은 부강교회가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부강교회에서 김용환 목사님이 순교하신 것을 아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셋째, 김동열은 두뇌가 명석하고 과학과 수학에 뛰어나 젊어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원고 없이 자유자재로 강의하였으며, 한학과 한자에도 박식하고, 예술적인 감각을 겸비하였을 뿐 아니라, 취미활동으로는 수석과 괴목을 수집하였고, 성석회(聖石會)란 모임의 회장직도 맡았다.

넷째, 과학과 수리적인 논리에 밝은 만큼 합리적이고 귀납적인 성경이해를 추구하였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문시대를 거쳐 오신 분이므로 많지 않은 그분의 저술과 직접 가사를 쓰시고 편집한 성가집, 「주 예수님을 찬양하세」에는 한문과 한자로 된 부분이 많았고, 오늘날의 청장년들에게는 이질적인 부분들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또 김동열은 성경말씀을 가감할 우려가 있고, 기록은 율법과 같이 죽이는 의문에 해당되는 것이며, 마음을 피곤케 한다는 솔로몬의 말처럼 기록보다는 주님의 말씀을 더 사모하고 그 명령을 실천하고자 저술을 삼갔다고 진술하였다. 성경 66권에 더 보탤 책이 없고, 주님의 말씀만 말하고 전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설교도 강연도 강의도 시간을 정확하게 맞춰야하는 방송설교에서조차도 항상 원고 없이 성령님의 감동만으로 행하여왔음으로 저술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섯째, 김동열은 그간 펼쳐온 환원운동을 성령님의 영감을 통한 운동이라고 확신하였는데,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었다.

1)주님의 책에로의 환원 - 주님의 책의 말씀만 말하고 전하자.

철저하게 성경의 말씀대로만 가르치고 행한다는 신념이 강하셨다. 해석상의 차이와 실행의 차이, 곧 견해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으나 성구를 줄줄 인용하실 뿐 아니라, 철저하게 성경대로만 주장하고 강조한다는 느낌이었다.

2)하나님에게로의 환원 -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3)주님의 권위에로의 환원 - 주님께로 돌아가자.

주님의 권위에로의 환원은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그분의 권위를 높이고자한 운동으로써 ‘그리스도님’의 사상이 이에서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 그리스도님, 예수님, 하나님, 성령님으로 높여 부르며, 명함이나 간판 또는 교회이름에도 동일한 높임말로 쓰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광주 그리스도님의 교회’라는 명칭이다.

그리스도님의 권위가 강조되면 될수록, 4세기 이후 가톨릭교회가 오늘날까지도 그래왔던 것처럼, 그리스도님의 사도이자 보냄을 받은 종인 (김동열은 작은 종이란 뜻의 소복小僕이란 한자용어를 씀.)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에 간극(間隙)이 생기게 되어 있다. 그 간극은 목회자의 절대적 권위로 인해서 비롯되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교회 내에서 성도들의 목소리가 목사의 목소리보다 더 커진 상황에서는 나름대로 정당성이 확보되는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현시대의 조류와는 많은 부분에서 동떨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광주 그리스도님의 교회에서는 예배가 짧고 일사분란하고 질서정연하며 고요하고 순종적이며 성도들이 밀물처럼 거의 동일한 시간에 입당했다가 거의 동시에 질서정연하게 썰물처럼 예배당을 빠져나간다. 잘 훈련되고 교육된 풍경이었지만, 이 역시 구경꾼들에게는 낯선 모습일 것이다. 광주 그리스도님의 교회에서는 매주일 예배 때에 주님의 만찬을 거행하며, 거의 매일 한번 꼴로 일주일에 여덟 번 30분씩 모여 예배드린다고 한다. 보통 교회의 새벽예배 또는 저녁 기도회를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저녁에 집회가 있는 날이면 새벽 모임은 생략된다. 또 성도들이 일상생활에서 피곤하지 않도록 밤 9시에 잠자리에 들어 새벽 모임에 나오기까지 최소한 일곱 시간을 수면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그리고 헌금이나 구제 사업은 개인이 자발적으로 은밀히 하도록 가르친다. 헌금과 금전에 관한 설교는 일 년에 한번 성경의 말씀대로만 가르치고, 일체 언급치 아니한다고 강조하셨다. 헌금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 곧 해놓고도 잊어버려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헌금 시간을 따로 두지 않고 헌금기도도 하지 아니하며, 헌금 바구니를 앞줄에 놓고 예배를 시작하면 찬송하는 시간에 헌금바구니에 가까이 있는 이들 가운데 바칠 분들이 헌금을 하고 다른 자리로 옮겨 놓으면 또 다른 사람이 바치고 하는 방식으로 헌금한다고 한다. 따라서 광주 그리스도님의 교회에는 예산이 따로 없다. 그러나 교회에는 아무 빚도 없고 운영에 어려움이 없다고 한다. 아무에게도 아무 빚도 지지 말라한 말씀을 철저하게 실천하며 성도들에게는 일체의 헌금을 강조하지 않는 것이다.

기도는 혼자 은밀히 있을 때 자유롭게 마음껏 기도하고, 또 기도를 많이 하도록 가르치지만, 집회 때에는 길게는 3분, 짧게는 1분 정도 묵상으로 기도하게 한다. 평소 기도를 많이 하는 자들은 예배시간에 길게 할 필요가 없으므로 중언부언하지 말 것과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 의를 드러내려 하지 말 것을 강조한다고 진술하였다.

광주 그리스도님의 교회는 매사에 말씀으로 철두철미하게 가르치고 지키기를 가르치나 성도들은 인격체이기 때문에 일체의 강요나 간섭을 하지 아니한다고 한다. 따라서 매우 자유로운 교회라는 것이 김동열 목사의 주장이다.

또 한 가지 광주 그리스도님의 교회는 행정에 있어서 민주주의란 방식을 도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님의 권위가 강조되고, 그분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종들에 순종하는 것이 성서적인 것이므로 교회 내에서는 민주적인 방식이나 제도를 거부한다. 민주주의는 복음에 역행하는 거짓된 소리라 하셨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민(民)이고, 오직 한분 예수님만이 주(主)님이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에 ‘예’만하고,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마리아가 일군들에게 지시내린 대로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명령을 따르는 것이 성서적이라 하였다. 주(主)와 민(民)의 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므로 주님의 권위는 더욱 높여야 하고, 백성은 더욱 민화(民化) 내지는 노복화(奴僕化)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천국복음 안에서는 민주화가 용납되지 않고, 교회에 주님 이외의 주인이 있을 수 없으므로 제직회가 있어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김동열 목사는 일찍이 “성경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그 신앙은 보장받을 수 없다”는 주장을 초교파적으로 많은 교회들에 다니며 설교하셨고, 초창기에는 그 길이 막혀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점차 목사만의 독특한 색깔을 드려내기 시작했고, 그것들이 일선의 교회들로써는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들이었을 것이다. 심지어는 그리스도의 교회 내에서조차 수용이 쉽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

남들이 이단이라 하는 경우에는 성경풀이에 심각한 문제가 있고 치명적이거나 잘못된 교리를 가르칠 때도 있고, 단지 그 주장하는 바가 기존의 고정관념과 다르거나 독특하여 듣게 되는 경우도 있다. 전자는 예수님의 신성과 성령님의 인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여호와증인들이 해당될 것이고, 후자는 다수의 횡포로 볼 수 있는 것으로써, 예를 들면, 대다수의 목사들이 전천년설을 주장하는데, 그 가운데 한 두 목사만이 무천년설이나 후천년설을 주장한다면, 반드시 이단이란 소리를 듣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김동열 목사는 후자에 속한다.

김동열 목사의 평소 소신은 실천에 있었다. 귀로 들을 때 눈으로 보는 듯 하고, 눈으로 볼 때, 귀로 듣는 듯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백문불여일견, 백견불여일사, 백사불여일행”(빌 4장 9절 -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즉 백번이나 되풀이해서 들어야 한번 보게 되고, 백번이나 되풀이해서 보아야 한번 마음에 생각하게 되고, 백번이나 되풀이해서 생각해야 백번씩이나 듣고 보고 생각한 것을 행하게 된다. 그만큼 실천하기가 어렵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성경대로 실천하기를 힘써야한다고 강조하였다.

김동열 목사는 양력으로 1922년 9월 5일에 태어났다. 광주가 대대로 이어온 고향이며 부친 김용수(자 김용하) 목사께서 일제 때 투옥되어 계시는 동안 일본에서 성장했으며,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자이기 때문에 학력이나 경력 등에 대해서 기억도 않고 말도하지 않는다 하였다. 침례는 1945년 겨울 혹은 46년 초에 받았고, 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를 잠시 다녔으나 신앙이 맞지 않아 그만 두었고, 보수적인 다른 신학교를 마쳤다.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한 후에는 송월동 성서신학교와 서울성서신학교 등에서 성서를 가르쳤으나 테일러 선교사 등과 뜻이 맞지 않아 부강총회이후 신탄진에 잠시 머물다가 광주로 내려와 독자적으로 사역하였다.

김동열 목사의 언행에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가정할지라도, 크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교계 일각에서 김동열 목사를 “자칭 보내신 자”라고 주장하는 이단자로 본다는데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것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겠다고 판단하였다.

광주 그리스도님의 교회에서 만든 책자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는 제목의 B5사이즈의 49쪽의 책자가 있는데, 이 책자의 제목은 요한복음 6장 29절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이며, 이 성구에 대한 해설을 2003년 4월에 “주 예수님의 소복 김동열” 쓴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책자 목차 중 4장 4절의 제목이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자기는 종이요. 예수님은 그리스도님이시며 자기는 민(民)이다.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준행함이라.”로 되어 있고, 본 책자 30-31쪽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2.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주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성령님의 말씀을 들으면.

3. 믿게 되는 바이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드님이시오 그리스도님 되심을 알고 믿는 바이다.

4. 예수님을 주님과 그리스도님으로 믿는 만큼, 자기는 예수님의 종이요 예수님의 백성이 되어 무슨 말씀 하시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준행하니, 이 사실이 곧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요, 또한 예수 그리스도님과 함께 하는 것이요, 결국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친증(親證)하신 바이다.

그리고 49쪽의 결론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八)결론컨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요 3:34)고 하심과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고 하신바 이 두 말씀은 몽침(夢寢)에도 망각해서는 아니 되는 구원의 진리이시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지적할 필요가 있는 부분은 김동열 목사는 자신을 항상 일컬어 “주 예수님의 소복 김동열”이라 한다는 점이요, 한 순간도 예수 그리스도를 ‘님’자 없이 “그리스도”라 호칭하지 않고 언제나 “그리스도님”으로 호칭하여 그리스도를 높이고 있으며, ‘님’자 없이 “그리스도”라 호칭하는 것을 선생님에게 “선생”이라 호칭하는 것처럼 상스러운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자칭 보내신 자” 곧 자칭 메시아로 주장한다는 비판가들의 주장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밖에도 누가복음의 비유를 설명한 <실상(實相)과 비유(比喩)의 오의(奧義)>라는 시리즈 책자들이 있으며, <문오언이행지자(聞吾言而行之者)>란 A4사이즈 20쪽의 글이 있는데, 이 한문 제목은 마태복음 7장 21-27절의 일부인 중국어로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란 뜻이다. 여기서도 먼저의 책자에서와 같이 평소의 소신인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지 말고, 보기만 하지 말고, 생각만 하지 말고, 그대로 옮겨 실천하자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김동열 목사의 글들은 소천 후 자녀들이 몇 권의 책으로 엮어 출판하였다.

김동열 목사는 여섯 살 아래인 김태희 사모로부터 김환 목사, 김승복 목사를 비롯해서 4남 3녀의 자녀들을 두었다. 자녀들은 결혼하여 자녀들을 낳고 모두가 김동열 목사 내외분과 한 집에서 살았다. 김동열 목사는 당뇨를 지병으로 앓았으나 김태희 사모가 먼저 2005년 5월 3일 소천 하였다. 이에 김동열은 사모 묘역 근처에 컨테이너를 놓고 자주 왕래하면서 기도생활을 하다가 3년 후인 2008년 8월 23일 소천 하였다. 광주 그리스도님의 교회는 김환 목사, 김승복 목사 등이 이끌고 있으며, 현재 남아 있는 그리스도님의 교회들은 다섯 곳이다.

다음은 지철희 목사가 김동열 목사에 대해서 젊은 시절 직접 보고 또 듣고 한 내용을 근거로 적은 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분의 신앙과 성격은 다분히 사도 바울처럼 사도적이었다.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되지 않은 신앙은 모두가 마귀였다. 바로 회개하지 않고 거듭나지 않은 자에게는 인사도 하지 말고, 집에 들이지도 말고, 동참하지도 말라. 부모라 할지라도 예수 믿지 않으면 마귀다고 하셨다. 그러니 가지도 말고 절도하지 말라 라고 할 정도로 칼날처럼 아주 예리하고 무섭고 엄하셨다. 그리고 이 분의 강의는 육가원칙에 따라 논리적이었고 질서 정연하였다. 어느 누구도 이 분의 원칙논리를 꺽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 분에게 밀린 사람들은 할말이 없으니까 괴변가라고도 하였다. 괴변가라는 말 속에는 말을 잘하는 말쟁이라는 뜻이 담겨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래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초창기 때 내가 아는 김은석, 김재순, 정창석, 장주열, 김상호, 최요한, 최요열, 김주일(이상 목사), 이한성 장로, 김장로 등 많은 분들과 조화되지 못하고, 모이고 만나면 교리문제를 놓고 토론하며 다투고 논쟁하다 헤어지면, 김재순 목사는 이곳저곳을 오가며 눈물로 화해를 시키려고 애쓰셨다.

    어느 때였는지 또 어느 교단 목사들었는지 또 어느 역에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목사들이 많이 탄 기차객실에서 김동열 목사가 노방 전도를 하였는데, 때는 한여름인 지라 모두다 시원한 여름 옷차림을 하였는데, 김동열 목사는 겨울 가죽잠바를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여러분들이여, 주 예수님을 믿고 나같이 큰 복을 받고 영생하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큰소리로 외치자 객차 안에 손님들이 듣고 코웃음 치며 폭소가 터져 나왔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차안에 있던 여러 목사들이 비웃고 무시하면서 던지는 말이 “영생은 이생에 있는 거요? 내세에 있는 거요?” 묻는 말에 대답은 그들이 두 번 다시 묻지 못하도록 하는 답을 하였고, 오히려 목사의 설교에 숙연하였고 나중에는 은혜를 받고 더 많은 설교를 들었으면 하고 아쉬워하였다고 한다.

    새벽이면 광주시내 모 공원에 산책을 나온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하였는데 전도하는 설교의 말씀에 매료되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듣곤 하였다고 전한다.

    한번은 헌병 백차가 앞에서 가고 군대가 행군을 하는데 군대 행렬을 멈추게 하고서 군인들도 예수를 믿고 천당에 가야 한다고 전도를 하였는데, 지휘관이 왔다가 오히려 은혜를 받고 군 작전을 방해한 죄를 용서받았다고 한다. (군 작전을 개인이 방해하면 즉시 총살형을 받았다고 한다.)

    남편이 보따리를 가지고 큰 장사를 하였는데, 부인에게 이 날도 일찍이 장사하러 가야겠으니 새벽 아침을 하여 달라고 하는 남편 말에 쌀바가지를 들고 집 앞 우물가에 쌀을 씻으러 나왔다. 마침 전도를 하러 가는 중에 목사는 이 여자를 만나서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하였는데, 시간이 가는 줄을 모르고 남편이 부탁한 말도 잊고 목사의 설교말씀 속에 끌려 들어갔다. 남편은 이때나 밥상이 들어올까 저 때나 밥상이 들어올까 기다리다가 아무 인척이 없어서 우물가를 나와 보니 아직도 쌀바가지를 들고 얼굴이 상기된 채 설교를 듣고 있더라고 하였다. 그 일로 후에 남편도 결국 예수를 믿었다고 한다.

    김동열 목사에게 은혜를 받은 군의관(당시 중위)이 있었다. 이분은 김동열 목사가 직접 데리고 충북 괴산군 소수면에 있는 소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왔을 때 나도 직접 본 사람이다. 전방 모 부대에 근무하는 장교였지만 주일날이면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반듯이 전남 광주시 금동 1번지에 소재 한 그리스도님의 교회에 와서 목사의 설교를 들어야 한다고 하는 분이었다.

    전남 함평군 손불면 신흥리에 신흥교회가 있다. 그 당시 박모 전도사가 담임하였고, 김동열 목사에게 은혜 받고 그의 심복이 되었다. (이 교회는 나 지철희 목사의 처고모님이 나가는 교회다.) 어느 날 박 전도사의 아들인지 딸인지가 병이 들어 죽었다. 그런데 시체를 안고 집집마다 거리마다 다니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부활한다.”고 했다고 한다.

    처고모님에게 직접 들었는데,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들을 포함한 모든 목사들은 목사로 인정하지를 않고 교인들도 더욱 그러하였으며 오직 당신이 보고 아는 성경말씀대로 알고 믿으면 형제요 자매이고 당신이 가르친 대로 믿어야 된다는 편이 강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든 아니든 교제를 단절하고 오직 나, 여기, 여기라고 하는 편이 강하였다.

    하나님의 종이 또는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을 안 믿는 자는 마귀의 종인데, 하나님을 안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찌 절을 하며, 어찌 인사를 하겠느냐? 또는 찾아가겠느냐? 라는 식의 사상이 강하였다. 내가 본 견해로서는 그렇다. 그래서 처고모님은 친정에를 못 오고 간혹 와도 마음이 괴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카사위 된 나와 토론을 많이 한 적이 있다. 그때 나의 대답은 사람 속에는 사도 바울이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고 하신 말씀처럼 악은 죄이다. 그러나 주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셨다고 말한 적이 있다.

    김동열 목사는 특히 로마서 강해의 권위자로서 다른 복음서도 외우지만, 로마서는 아침 밥상을 받아놓고 꼭 1장 1절부터 끝장 끝 절까지 다 외운 후에 밥을 드셨다는 말도 있다.

    지금까지 쓴 글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아마도 김정만 목사와 미국에 가 있는 양정식 목사에게 들은 것 같다

나오는 말

충청이남지역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이야기는 아직 미완성이다. 이 책자에 부가되어야할 준비 중인 일부 목회자들의 약전이 남아 있고, 기존의 자료들도 보강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현장에서 헌신하고 있는 수많은 목회자들의 영웅적인 이야기들이 아직 기록도 되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졸저를 잠정적으로 마치면서 우리 목회자들의 삶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첫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온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을 사랑하고 계신 것이 매우 분명하다. 그 증거가, 역설적이지만,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들과 목회자들이 겪어온 시련이다. 시련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 겪는 운명이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시련을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서 사랑하는 자들을 단련하시고, 진정한 영웅이 되게 하신 후에 때가 차면 해같이 빛나게 하신다. 그러나 그때, 곧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계절이 오기까지는, 아직 시련의 끝은 아니다.

둘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목회자들은 장차 큰일을 맡게 될 자들이다. 그 증거가, 역설적이지만, 작은 것에 충성하였기 때문이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라고 주님은 말씀하셨고, 또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라고 말씀하셨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목회자들은 작지만 순수한 신약성서교회를 추구하였다. 그에 대한 이 땅에서의 보상은 지나치리만큼 초라했으므로 저 천국에서 그 보상이 클 것이라고 믿는다.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한 재물과 명예와 권세만큼 천국의 보물창고에 고스란히 쌓여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셋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목회자들은 시련을 극복한 영웅들이다. 시련을 많이 겪었던 만큼 위로가 클 것이라고 믿는다.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받았던 만큼 하늘의 하나님과 천군과 천사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게 될 것이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목회자들이 지난 80여 년간 이 땅에서 걸어온 길은 험난한 가시밭길이요 십자가의 길이었다. 선배목회자들은 과연 자신과 세상과 끝없이 싸우며 괴로운 가시밭길을 걸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지상의 모든 고뇌를, 지상의 모든 수고를 그들에게 짐 지웠으나, 저 장렬한 최후의 날까지 그들은 기도와 성령 충만함으로 이 수고를 훌륭하게 참아냈다. 비록 그들은 한 알의 밀알로써 썩었지만, 그들로 인해서 많은 생명의 열매들이 80여년이 지난 지금도 지속적으로 맺히고 있다.

넷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목회자들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들이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였다. 바울의 삶을 누구보다 잘 아는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그와 그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예수님의 삶에 철저히 잇대어져 본받는 것이었음을 밝혀주었다. 누가는 예수님의 삶의 특징을 예루살렘 시온에로의 오름으로 설명하였다. 이 오름은 배척과 박해가 따르는 십자가와 죽음의 길이었다. 그런 만큼 예수님은 이 길을 기도와 성령 충만함으로 완주하셨다. 기독교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되는 과정에 셀 수 없이 많은 위기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점점 왕성하여 든든히 서 가고 흥왕하여 수가 더 많아져 세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이 예루살렘에로의 오름과 기도와 성령 충만한 삶에 잇대어 본받아 살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산 것처럼, 그는 지금 우리에게 자기가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산 것처럼, 자신의 삶을 본받아 예수님을 추종하기를 바라고 있다. 필자가 김은석 목사를 한국의 사도 바울이라고 칭한 것처럼,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선배목회자들의 삶은 그리스도와 바울을 본받는 삶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기도와 성령 충만함으로 무장하여 지극히 작은 것들에 충성하면서 셀 수 없이 많은 위기들을 기회들로 바꿔나간 영웅들이었다.

다섯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목회자들은 마지막 시대를 위한 남은 자들이다.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키고 제자리를 지켜온 하나님이 남겨놓으신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삶은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각 시대마다 하나님이 남겨두었던 남은 자들에 잇대어져 있다.

여섯째, 한국의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더디지만 꾸준히 발전해 왔다. 그 증거가 다음의 표이다.

  • 1943년에 6개뿐이던 교회가 1950년까지 8년간 36개 증가하여 총 42개, 연평균 4.5개씩 증가하였다.
  • 1951년부터 1955년까지 5년간 교회가 33개 증가하여 연평균 6.6개씩 증가하였다.
  • 1956년부터 1971년까지 16년간 교회가 7개 증가하여 연평균 0.44개씩 증가하였다.
  • 교회성장의 붐이 일었던 1972년부터 1985년까지 14년간 교회가 204개나 증가하여 연평균 14.57개씩 가장 왕성하게 증가하였다.
  • 1986년부터 1998년까지 13년간 교회가 78개 증가하여 연평균 6개씩 증가하였다.
  • 1999년부터 2003년까지 5년간 교회가 39개 증가하여 연평균 매년 7.8개씩 증가하였다.
  • 1943년부터 2003년까지 61년간 연평균 6.6개씩 증가하였다.
  • +숫자는 직후연대통계에서 직전연도통계를 뺀 숫자이다. 1971년에 충북에서만 2개 교회가 줄었을 뿐, 중도탈락자들이 그토록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꾸준히 성장하였다.
     
     

 

충남

충북

전남

전북

소계

총회

협의회

교역자

총합계

1941년

커닝햄

 

 

 

 

 

 

 

 

17

1943년

 

 

 

 

 

 

 

 

6

1950년

 

 

 

 

 

 

 

 

42

+36

1955년

테일러

 

 

 

 

 

 

 

 

75

+33

1956년

연감

6

13

17

0

36

 

 

 

 

1965년

연감

19

+13

16

+3

24

+7

1

+1

60

+24

 

 

 

 

1971년

힐 요한

21

+2

14

-2

26

+2

2

+1

63

+3

 

 

 

82

+7

1985년

협의회

38

+17

31

+17

58

+32

13

+11

140

+77

 

 

 

286

+204

1998년

 

 

 

 

 

 

 

 

364

+78

2003년

 

 

 

 

 

61

237

105

403

+39

  • 1924년 10월에 이원균이 한국에 파송되고, 1931년 9월부터 성낙소 목사가 맡았던 조선포교책임자 직임과 ‘동경사곡선교회 기독교회’가 1933년 9월에 이인범에게 그 권한이 넘어가 ‘조선선교회 기독교회’로 변경된 후 태평양전쟁직전(1941)까지 이어진 커닝햄 선교부의 후원과 노력으로 거둔 결실은, 서울기독대학교의 백종구 교수의 2012년 연구논문에 따르면, 교회 17개(서울4, 인천4, 대구1, 마산1, 평북구성5, 신의주1 등), 포교소 30개 이상, 사역자 13명, 교인 737명이었다. 연도별로 세분해 보면, 포교소가 1925년 1개, 1929년 4개, 1932년 5개. 1935년 18개, 1938년 6개, 1940년에 30개 이상 있었고, 교회가 1930년 1개, 1933년 7개, 1934년 8개, 1935년 12개, 1938년 14개, 1940년에 17개로 점차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들 17개의 교회들과 사역자들은, 용산교회의 이난기 목사이외에는, 커닝햄과 갈라선 채이스가 1936년에 설립한 ‘한국 크리스천 밋숀’(Korean Christian Mission) 소속의 그리스도의 교회들에 합류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인범은 1945년 7월 19일에 조직된 ‘일본 기독교 조선 선교단’에 이들 교회들을 가입시켰고, 성낙소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인범은 해방 후 장로교회로 넘어가 전북 여산읍 교회에서 시무하다가 폐병으로 사망하였다. 불행하게도 이들 교회들과 사역자들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에 아무런 유산을 남기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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