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이남지역(협의회, 총회)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이야기
A History of Korean Christian Churches in the Southern Half of South Korea

조동호(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제3부 김찬영과 한성신학교

1950년대 충청이남지역에서 김은석 목사와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는 힐 요한 선교사와 한국성서신학교의 영향력이 매우 컸다. 전남에서의 힐의 영향력이 충청권에서만큼 크지는 못했지만, 학생들의 다수는 70년대 중반까지도 전남 출신이었다. 이후로는 학생들이 고든 패튼(Gorden and Sharon Patten) 선교사의 서울성서신학교와 최윤권 목사의 대한기독교신학교로 쏠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 무렵인 1972년 12월 22일 대한기독교신학교가 각종학교 설립인가를 받았고, 1973년 12월 29일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가 그리스도신학대학으로 인가를 받았으며, 1981년에는 서울성서신학교와 대한기독교신학교가 통합하였다. 그리고 1997년 12월 5일 대한기독교신학교는 대한기독교대학교로 승격되었고, 1999년 12월 28일에는 서울기독대학교로 개명되었다. 그리스도 신학대학교는 2005년 12월에 그리스도대학교로 개명되었다.

이들 대학에로의 쏠림현상은 인가도 있고, 서울에 소재한다는 매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힐의 은퇴 이후 한국성서신학교가 힐을 존경하는 목회자들로부터 신뢰를 얻는데 실패한 때문이기도 했다. 여기에는 1976-77년에 있었던 사건이 큰 몫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이후 가장 오랜 기간인 30년간 충청이남지역은 김찬영 목사와 한국성서신학교 혹은 한성신학교의 영향력아래 있었다.

1. 1970-1990년대의 김찬영 목사와 한성신학교

김찬영 목사는 1936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출생하였다. 김찬영은 부산에 내려가 장성만 목사가 세운 대교 그리스도의 교회에 출석하며 세족회 회원이 되었다. 1959년 8월에 힐 요한 선교사 가족이 부산을 통해 입국하였을 때, 통역이 되어 힐의 가족과 함께 대전으로 올라왔다. 대전에서 1962년까지 힐 선교사의 대전에서의 사역들을 돕다가 군에 입대하였다. 제대 직후 1965년 9월 5일 힐과 장성만의 도움으로 미국에 건너가 존슨성서대학(현 존슨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같은 대학 1학년에 재학 중이던 패츄리사를 만나 1967년 8월 25일 결혼하였다.

존슨성서대학을 졸업한 후 신시내티 크리스천 대학교 성서대학원에 입학하여 1969년 5월 10일 졸업하였다. 이후 신시내티 대학교와 루이빌 장로교 신학대학원에서 1년간 수학한 후, 부인 패츄리사(Patricia A.)와 자녀들을 데리고 1970년 11월 15일 귀국하였다.

김찬영 목사는 1972년 6월에 힐 요한 선교사가 정년으로 퇴임함에 따라, 가장동 유등천 변에 교실 2칸, 교회당 1채, 선교사 사택 2채, 보육원 단층 1채, 기숙사 1동을 물려받고, 1972년 1월 21일 36살의 나이로 한국성서신학교의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무렵인 1971년에 프레드와 엘리 호프만(Fred and Ellie Hoffman) 부부가 내한하여 한국 크리스챤 밋숀에 소속되어 사역하면서 프레드는 신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엘리는 대전 오정동 외국인 학교에서 가르쳤다. 한국성서신학교의 운영을 맡게 된 김찬영 교장은 1970-80년대 기간에 힐이 1969년에 시작한 본관 2층 공사를 완공하는 일로부터 시작하여 3층 증축, 우측으로 잇대어 지은 3층 신축교사, 신축교사에 잇대어 북쪽 방향으로 지은 3층 신축 선교관, 1968년부터 보육원으로 사용되던 1층 별관의 3층 증축과 부지확보에 온 힘을 쏟았다.

1977년 2월 16일 보건사회부 장관으로부터 그리스도의 교회 한국선교회를 설립인가 받았고, 다음 해인 1978년에는 부설 한성고등기술학교와 한성유치원이 설립되었다.

김찬영 교장은 교육부로부터 인가를 득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박정희 정권하에서 10년이 넘도록 그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었다. 전두환 대통령으로 정권이 바뀌고 나서야 비로소 4년제 대학령에 준한 각종학교 인가(문교 1041.4-133)를 받을 수 있었다. 1981년 2월 16일에 사립학교 법에 의해 학교법인 성령학원이 설립되었고, ‘한성신학교’란 교명으로 모집정원 신학과 40명과 기독교육과 30명 총 70명의 인가를 받았다. 교명을 ‘한국성서’의 줄임말인 ‘한성’으로 바꾼 이유는 서울 노원구에 이미 같은 이름의 4년제 각종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곧 이어 1983년 10월 5일에는 교육부로부터 대학학력인정교로 승격되었고(문교 1020-1646), 모집정원 60명(야간부 신학교 30명, 기독교육과 30명)이 증원됨으로써 한성고등기술학교가 폐교되고, 유치원만 유지되었다. 1986년 말에 학과증원(주간부 종교음악과, 야간부 사회복지과)과 1987년 말에 모집인원증원으로 입학정원이 총 180명이 되었다. 1998년 9월 8일 이후부터는 고등교육법에 의해 졸업생들에게 학사학위를 수여하였다.

이 무렵 한성신학교에 그리스도의 교회(총회) 소속 신학과 교수들로는 최용호, 장성우, 김상호, 조동호가 있었고, 선교사들로는 1981년에 입국하여 1983년에 귀국한 케리 옥스버거(Keri Augsburger), 1982년에 입국하여 1984년에 귀국한 마이크와 조안 노엘(Mike and Joan Noel), 1983년에 입국하여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후 1984년에 귀국한 비키 존스(Vicki Jones), 1987년에 입국하여 1989년에 귀국한 짐과 수지 몽고메리(Jim and Suzy Montgomery), 1987년에 입국하여 1989년에 귀국한 코리 프라이(Kori Frye), 1990년에 입국하여 1992년에 귀국한 캐런 터훈(Karen Terhune)이 있었다.

증원증과로 포화상태에 이른 한성신학교는 1986년 말에 충남 논산군 연산면 신양리에 12만평 교지를 확보하고, 1988년 4월 30일에 기공식예배를 드렸으며, 1989년 8월까지 본관 4층, 별관 4층, 기숙사 3층, 운동장 및 주차장을 갖춘 새 캠퍼스로 이전을 완료하였다. 공교롭게도 동년에 그리스도의 교회 협의회 제54차 총회 때 불협화음이 있었고, 이듬해인 1990년 2월 한성교역자들의 모임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총회가 발족되었다. 출신학교별 친목단체인 기목회와 한성교역자회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된 것이었다. 동년 4월 3일에 협의회 심의위원회가 총회에 가입한 회원들을 제명하였고, 4월 30일 <환원>지가 분리를 발표함으로써 분열이 고착되었으며, 여러 번의 통합을 위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김찬영 박사의 영향력아래서 30년간 배출된 수백 명의 졸업생들은 교회성장의 붐을 타고 교회를 개척하거나 기존교회의 목회자가 되었으며, 이들을 돕기 위해서 ‘교회개척후원회’가 김찬영, 조동호, 김상호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또 정부의 복지시책에 따라 충남권 최초로 배출된 수많은 사회복지사들이 공무원이 되거나 각 기관에 진출하였다. 음악학과 졸업생들 역시 각자의 지역에 음악학원을 개설하여 학원장으로서 미래의 꿈나무들을 양성하였다. 다수의 졸업생들이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몇 사람은 정규대학에 교수로 임명되었다. 김찬영 박사 체제에서 교장을 역임한 인물들은 김진문(1982-84), 김찬영(1985-91), 문원섭(1991-94), 이충구(전 공주교육대 학장, 1994-95), 박영배(직무대리, 1995-96), 최찬규(직무대리, 1996-97), 백형린(1997-99) 순이었다.

학교가 새 캠퍼스로 이전한 1990년대는 대학개편의 기회이자 위기였다. 캠퍼스 이전 초기 수년간은 입학정원 180명을 채우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캠퍼스가 대전권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는데다가 무리하게 충원된 교수진과 교직원, 노조설립, 대학개편을 바라는 학생들의 잦은 시위, 대학개편에 필요한 재원부족, 무엇보다도 캠퍼스 이전직후에 터진 내부 갈등은 지루한 법정공방으로 이어져 20여개 이상의 각종대학들 가운데 대학개편 1순위로 꼽히던 학교를 수렁에 빠지게 하였고, 장로교 목사 조준상이 1999년 9월 30일 이사장에 취임함으로써, 세기가 바뀐 2000년대는 2013년 8월 폐교 때까지 그리스도의 교회와 무관하게 운영되었다.

이로써 30여 년간 한성신학교의 발전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쏟았던 김찬영 박사 및 패츄리사 선교사 내외는 내부갈등이 빚은 법적제약으로 학교를 떠나야했고, 1998년 이후로 베트남과 중국 및 북한선교에 진력하였으며, 주로 중국에 거주하면서 중국 훈춘에 특수교육학교, 희망외국어학교, 복음식품유한회사(장애자 제빵기술교육 및 간식용 제빵공장), 희망농목개발유한회사(장애아동 재활승마 목장, 가축 목장, 옥수수 콩 경작지)를 설립하였으며, 2014년에는 중국 양포에 장애인, 고아원 및 양로원을 개원하였다. 또한 북한 나진시에 진료소 3곳(신해, 유현, 비파)과 120명을 수용하는 나선고아원을 헌당하였으며(2006년 5월 17일), 선봉시에 빵공장을 건립하여 매일 수천 명의 아이들에게 빵과 콩우유를 공급하고 있으며, 신해 목장과 유치원 2곳 및 탁아소 2곳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그밖에도 부모 없는 북한 청소년수용기술학교와 비즈니스텔을 건설 중에 있다.

김찬영은 한양대학교에서 교육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초기역사 - William D. Cunningham의 생애를 중심으로 - 1864-1936>, <예배학>, 설교집 등을 저술하였고, <예수의 마지막 주간>을 번역 출간하였다. 대전에 체류하는 동안 4년제 대학학력인정교 학장협의회 회장, 대전 외국어 학교 이사장, 그리스도의 교회 협의회 회장, 사단법인 한국 기독교 교역자 협의회 재단 이사장 및 대표회장, 재단법인 한국 크리스챤 밋션 이사장, 대전 기독교 연합회 회장, 충청남도 도정자문 위원, 대전직할시 시정자문 위원, 대전 YMCA 이사장, 사회복지법인 대전 생명의 전화 설립 이사장, 충남 경찰국 교목, 국제 와이즈멘 한국서부 지구 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부인 김 패츄리사는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고, 신학교 영내에 있었던 보육원에서 2남 2녀, 월남에서 온 남자아이 1명을 입양하여 미국에 보내는 등 큰 도움을 주었으며, 논산 연무읍의 에덴 보육원과 대전 자양동에 있는 피얼스 영아원을 도왔다. 또 패츄리사는 고아들의 외국 입양과 병든 아이들을 미국에 보내 무료수술을 받도록 주선하였다. 이런 일련의 일들로 인해서 1982년 대전시장으로부터 감사패를, 1989년 5월 5일 충청남도 지사로부터 표창장을 수여 받았으며, 1991년 5월 5일에는 보건사회부 장관으로부터 표창장을 수여 받았다.

2. 2000년대의 조준상 목사와 한민학교

장로교 목사 조준상이 1999년 9월 30일 이사장에 취임함으로써, 세기가 바뀐 2000년대는 2013년 8월 폐교 때까지 한성신학교가 그리스도의 교회와 무관하게 운영되었다. 조준상 이사장은 교장 내정자 원동연 박사(2000년 2월 14일 교장에 취임)와 더불어 1999년 10월 28일 이사장 취임식을 겸한 ‘가칭 한국대학교 설립 감사예배’와 여러 행사를 성대하게 치른 직후 - 이때 설립자 힐 요한, 재단법인 크리스챤 밋숀 이사장 노봉욱도 초대되었다. - 기독교교육과를 폐과시켰고, 증과 및 증원을 통해 입학정원을 280명으로 늘리는 한편, 다수의 교수충원과 시설보수에 재원을 투입하였으나 대학개편자금이 없어 실패하였고, 원동원 박사는 직접 영입한 교수들과 함께 중도 사퇴하였다. 원동연 박사는 교장 내정 직후 학과를 신설하고(국제관광학과 주간 40명, 야간 30명, 테크노경영정보학과 40명), 학생을 증원(국제사회복지학과 주간 10명, 신학과 야간 10명)하였으며. 이듬해 2월 14일 교장에 취임한 다음 멀티미디어학과와 생명식품공학부를 추가로 증과하였다.

2000년 12월 21일 학교법인 성령학원 및 학교명 한성신학교가 각각 한민족학원 및 한민학교로 변경되면서 한성신학교로써 20년간 쌓아온 명성을 잃게 되었고, 학생수 감소와 부실운영 등으로 재정난은 날로 커져갔으며, 학과와 정원에 대한 재편이 불가피하였다. 2001년 1월 4일에 국제사회복지학과를 사회복지학과로 다시 변경되었고, 2003년 6월 12일 레저스포츠경영학부가 신설되었으며, 2005년 10월 20일 레저스포츠경영학부 레저스포츠경영학전공이 스포츠경영학과로, 경찰경호행정학전공이 경찰행정학과로 변경되었다. 이 와중에도 2004년 2월 27일자로 기관장 명칭이 교장에서 총장으로 바꿨다.

2001년에는 한민학교를 기반으로 세계사이버대학이 설립되었다. 이후 두 학교는 한민족 어린이 문화 축제, 한민족친선 문화축제 등에 동원되었다. 2006년 미국 LA에서 개최된 제1회 한민족 국제학술대회를 시작으로 전 소비에트 연방의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초청된 가운데 2008년 10월 첫 주에 국제환경포럼, 국제평화포럼, 국제대학자선축구대회, 국제할렐루야대회가 개최되었으며, 2008년 12월 12일에는 황산벌전투 최후전적지비가 한민학교 평화의 동산 앞에 세워졌다. 2009년 제2회 한민족 평화포럼, 2010년 제7차 한민족 국제학술대회, 터키에서 제8차 한민족국제학술대회가 개최되었고, 2010년 3월에 한글사랑 세계사랑본부가 출범되었다. 2010년 10월에는 제2회 한민세계신학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이와 같은 학술대회들의 논문집 및 결과집들이 출판되었다.

한민학교는 야구부와 축구부가 운영되고 있었다. 국제할렐루야대회 준비와 때를 맞춰 캠퍼스 정비와 함께 운동장이 인조잔디구장으로 변모되었다. 건물은 낡은 채 처음 그대로였지만, 대강당과 본관 1층이 큰 행사들을 치르면서 리모델링되었고, 폐교 직전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정돈되고 잘 가꿔진 넓은 캠퍼스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을 위한 내실이나 교육의 질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대외행사에만 치중함으로써 극심한 경영난과 학생감소를 겪었고, 2011년 말에는 다시 한민문화예술학교로의 개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잦은 학과변동 속에서도 폐교 때까지 살아남은 학과들로는 신학과, 사회복지학과, 음악학과, 경찰행정학과, 스포츠경영학과, 태권도외교학과, 글로벌새마을학과, 한민족전통문화예술학과, 액션영화학과, 재활승마학과가 있었다. 뒤쪽의 네 개 학과는 폐교 직전에 증과된 것들이다.

2012년 한민학교에 대한 다각도의 종합감사가 이뤄졌고, 2013년 5월 29일 교육부는 학교법인 한민족학원이 신청한 한민학교 폐교신청을 승인하였다. 이에 따라 한민학교는 8월 31일 자로 폐교하였고, 재학생은 타 대학교 유사 학과에 특별 편입학하였다. 조준상 체제에서 총장을 역임한 인문들로는 원동연(2000-01), 장성우(직무대리, 2001), 심태섭(2001-05), 최찬규(직무대리, 2005), 김병우(전 홀트아동복지회 회장, 2006- 2008), 조준상(2008-12), 박영술(직무대리, 2013) 순이었다. 학교설립이후 재단법인 한국 크리스챤 밋숀 이사장으로는 힐 요한(64-75년), 김 패츄리사(75-76년), 힐 요한(76-77년), 밥 워릭(78-81년), 김찬영(81-89년), 학교법인 이사장으로는 성완용, 김 패츄리사, 김찬영, 전영권, 조준상, 심정지(폐교 결정) 등이었다. 이 시절 유일한 그리스도의 교회 소속 교수로 남았던 조동호는 김병우 총장과 조준상 총장 재임 때 부총장으로 재직하다가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와 목회에 전념하기 위해서 2008년 12월 말에 명예 퇴직하였다. 퇴직한 후에도 명예교수의 직함을 가지고 2013년 8월 폐교 때까지 신학과에서 강의를 계속하였다.

3. 그리스도의 교회 총회의 출범

1990년 7월에 발행된 그리스도의 교회 총회회보에 실린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환원운동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란 글에서 장성우 목사는 다음과 같이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분열에 대해서 기술하였다.

    각 지방마다 조직된 교역자회는 상호간의 목회정보 및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으로 존재하였으나 1960년에 조직이 강화되고 목사 안수식을 거행하였으며, 1973년 김찬영 목사, 김규상 목사 등이 주도하여 대전에서 연합총회를 구성하였고, 이신 목사와 연합활동의 유대관계를 유지하여 그 명맥을 이어왔으나 최윤권 목사 등 대한기독교신학교측은 참여하지 않음으로 이신 목사측의 연합회는 1974년 (3월 25일) 한국적 그리스도의 교회 토착화를 위한 그리스도의 교회 선언을 발표함으로 1975년 (3월 4일) 김찬영 목사, 김규상 목사 주도하에 연합총회측과 “이 선언문 취지관철을 위해 노력한다.”는 합의로 총회와 연합회가 통합하여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총회”로 발족하여 환원운동의 대열을 정비하여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날인 1975년 3월 5일에 최윤권 목사 측은 이제까지의 침묵을 깨뜨리고 대한기독교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교역자회”를 따로 조직함으로서 단일화된 연합 활동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 이유는 교리적으로 환원운동하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조직을 배제하는데 왜 그런 교권화된 조직을 갖느냐 그런 교권화된 조직을 갖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지도자급에 속한 목사들 사이에 자기세력 확장을 도모하며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으며 권모술수가 난무하였지만, 그 진통 끝에 1978년 10월에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협의회”라는 명칭으로 다시금 통합을 보았던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는 특정 소수인들의 교파화로 전락되는 우려 속에 불안이 가중되었고, 심한 교회성의 상실과 소외를 경험하면서 1984년 4월에 세계사적인 유무악기의 통합을 서울 유스호텔에서 가짐으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미래를 기대하게 되었다.

    그 통합전문에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오직 하나님뿐임을 믿으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나뉘는 것을 원치 않는다”라고 서두에 명시한 바가 있었지만은 통합의 주역일치와 단결을 저해하고 분열을 조장하여 1984년 10월 22일에 소집된 협의회는 회원제명과 자격정지에 관한 보고로 대동단결된 회원권에 대한 축소와 이중 억압 장치는 중요 인물의 등장을 사전제제를 함으로 교회분열을 가속화시켜 1984년 11월 (26일)에 서울지방회는 김용웅 목사를 주축으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쇄신에 대한 백서"를 발표함으로 분열의 기미를 보임으로 유무악기의 통합은 사실상 깨어지고 말았다.

    1989년 9월에 대전에서 개최된 54차 협의회 총회는 출신학교간의 갈등을 표면화 하였으며 1990년 2월에 유성 경하장에 모인 한성교역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 총회“를 창립하게 되면서 3월에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에 가입 청원을 하여 실행위원회에서 허락을 받게 되었다.

    보수교단인 그리스도의 교회가 KNCC 가입은 한국 교회 전체에 큰 충격을 주면서 협의회측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총회측 임원 9명을 교단분리자로 또한 총회측 중진목사를 불법안수자로 제명 처분하여 크리스챤 신문에 공고하였는데 안수에 같이 참여한 서울 출신 김종진 목사는 왠지 그 명단에서 제외를 시키고 발표하였던 것이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총회는 끝내 KNCC에 가입하지 못하였음. 가로 속 글자는 인용자의 것임)

이후 1992년 9월 1일 협의회와 총회로 같은 출신교역자들이 양분되어 있는 것이 합당치 않아서 모교인 한성신학교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총회라는 명칭으로 재통합되었으나 해를 거듭하면서 다수가 협의회로 되돌아가거나 타 교단으로 이적하였다.

1)그리스도의 교회 총회 인준 한성신학원

그리스도의 교회 총회는 한성신학교를 잃은 아픔을 딛고, 학교의 50년 전통과 뿌리를 잇고, 목회자 수급에 대처하기 위해서, 1990년 7월 12일 총회 임역원회의에서 한성신학연구원 개설을 가결하여, 이미 법인과 교명이 변경된 때로부터 총회직영 한성신학원을 대전광역시 동구 용전동 총회회관에서 운영하고 있다. 총회 소속 수십 명의 목회자들이 이 총회직영 한성신학원을 통해서 배출되었다.

2)1970-90년대 한성(한국성서)신학교 졸업생들

1970년대 이후 한국성서신학교 또는 한성신학교 졸업생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교회에 끝까지 남아서 사역하다 소천 했거나 여전히 헌신하고 있는 목회자들은 다음과 같이 대략 120여명에 이른다.

  • 강빌립, 강성기, 강신봉, 강희경, 강춘원, 강희수, 고문석, 곽순식, 구제남, 권선이,
  • 권순영, 권영신, 권인만, 권한임, 김광호, 김곤만, 김길태, 김대희, 김덕전, 김복철,
  • 김선국, 김영수, 김영태, 김원섭, 김원철, 김용강, 김용순, 김정한, 김종기, 김종헌,
  • 김진만, 김진산, 김현민, 김호규, 김흥덕, 나혜찬, 노양호, 도재호, 명달재, 명재석,
  • 문광석, 문대호, 문원섭, 민동규, 박광덕, 박남용, 박병호, 박문자, 박옥채, 박용규,
  • 박운식, 박윤배, 박윤성, 박인용, 박재규, 박종덕, 박종식, 박형용, 배성용, 배수인,
  • 배용호, 백장현, 서상열, 시계수, 신경자(사모), 신득규, 신용문, 심상종, 심충재,
  • 심혜전, 안건홍, 안수종(사모), 오경세, 오광은, 오세영, 오일영, 오호진, 오홍근,
  • 원구범, 유수형, 유일종, 이금숙, 이두식, 이복동, 이석원, 이선길, 이우찬,
  • 이원재(2014년 이적), 이일로, 이재수, 이재청, 이정기, 이창우, 이춘식, 이현담,
  • 임계화, 임원혁, 장동혁, 장생규, 장성식, 전미식(사모), 전승종, 전용재, 정기덕,
  • 정덕규, 정영심, 정일호, 조남중, 조남춘, 조동숙, 조동호, 조억만, 주경림, 주형근,
  • 지원용, 지철희, 창영수, 최창업, 한기현, 한명호, 한정석, 한창섭, 홍근배, 홍기옥,
  • 홍진기<총125명>

3)그리스도의 교회 총회를 통해서 개척된 교회들

1985년에 전체 그리스도의 교회 숫자는 286개에 달했다. 1998년에는 그 숫자가 증가해서 전체 그리스도의 교회가 364개에 달했고, 2003년에는 403개에 도달하였다. 2003년도 총회 소속의 교회가 61개, 협의회 소속이 237개, 교역자회 소속이 105개에 달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한성신학교에서는 조동호 교수의 제안으로 김찬영 학장, 조동호 교수, 김상호 교수가 주축이 되어 1987년 12월에 한성신학교 교회개척후원회를 조직하였다. 졸업생들의 개척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성신학교가 1989년 8월 연산캠퍼스로 이전한 이후로 10여 년간 김찬영 학장과 김상호 교수가 분쟁에 휘말려 학교를 떠나게 됨으로써 후원회의 운영이 중단되었다. 이후 후원회 결성을 제안했던 조동호 교수는 이 후원회를 개인적으로 지속시켜나갔다.

아래의 도표는 한성신학교 재학생 또는 졸업생들이 1988년부터 2008년까지 21년간 그리스도의 교회 총회 소속으로 교회를 개척한 숫자와 1990년부터 2011년까지 총회가 개척예배를 주관한 숫자를 표시한 것이며, 가로( ) 속의 숫자는 비한성신학교 출신 목회자들이 교회를 개척한 숫자이다. 총회개척 숫자와 남녀 목회자 숫자는 연도별로 추적 가능한 범위 내에서 표시한 것이므로 정확성이 다소 떨어진 것일 수 있다. 교회숫자에는 기관이 포함되었다. 목회자 숫자에는 전도사가 포함되었으나 장로회원들은 제외되었다.

연도

한성신학교

졸업생개척

총회

개척

총회

교회수

협의회

교회수

교역자

교회수

총회목회자

교단

합계

합계

1985

 

 

 

 

 

 

 

 

286

1988

9

 

 

 

 

 

 

 

 

1989

2

 

 

 

 

 

 

 

 

1990

7

5(1)

 

 

 

 

 

 

 

1991

5

 

 

 

 

 

 

 

 

1992

4

 

 

 

 

 

 

 

 

1993

4

8(3)

 

 

 

85

83

2

 

1994

2

2(1)

 

 

 

78

73

5

 

1995

2

 

 

 

 

 

 

 

 

1996

2

 

 

 

 

 

 

 

 

1997

1

 

 

 

 

 

 

 

 

1998

5

 

 

 

 

 

 

 

364

1999

4

7(1)

 

 

 

76

71

5

 

2000

4

4(1)

 

 

 

76

70

6

 

2001

3

 

 

 

 

60

52

8

 

2002

1

2(1)

 

 

 

 

 

 

 

2003

 

 

61

237

105

 

 

 

403

2004

 

2(1)

61

 

 

73

57

16

 

2005

1

3(2)

68

 

 

77

58

19

 

2006

4

7(5)

74

 

 

86

65

21

 

2007

1

4(3)

69

 

 

91

68

23

 

2008

1

3(3)

72

 

 

94

68

26

 

2009

 

3(3)

73

 

 

109

68

41

 

2010

 

1(1)

92

 

 

114

70

44

 

2011

 

3(3)

92

 

 

108

65

43

 

합계

62

54(29)

+31

 

 

+23

+13

+41

+117

이 표가 보여주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남성목회자는 줄어든 반면 여성목회자는 큰 숫자로 늘어났다. 1993년 남성 목회자가 83명이던 것이 2001년에는 52명으로까지 줄었다가 이후 서서히 늘어나 70여명의 수준을 회복하였다. 1993년부터 2001년까지의 급격한 숫자의 변화에는 두 가지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하나는 아직 여성목사안수가 없던 때라 여성목회자의 숫자가 한 자리 수에 불과하다는 점이고, 또 한 가지는 1990년 총회가 결성된 직후 총 85명의 목회자 숫자에는 협의회 소속 한성신학교 출신들이 다수 포함되었다가 총회와 함께 하지 않고 협의회에 남기로 한 회원들을 제외시켰기 때문이란 점이다. 한성신학교 출신 협의회 소속 회원들이 빠진 2000년대 이후에는 총회의 남성 목회자들의 숫자가 서서히 증가하였다. 그러나 남성 목회자들의 숫자는 2011년 이후 은퇴 또는 타 교단 이적으로 다시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반면에 여성 목회자들의 숫자는 1993년에 2명에 불과했던 것이 2011년에 43명까지 된 것에서 보듯이 꾸준히 증가하였다. 이는 총회가 여성목회자 안수를 전향적으로 받아드린 때문이었다.

둘째, 개척된 교회숫자에 비해서 교회숫자는 실제로 크게 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해마다 다수의 목회자들이 밀물처럼 총회에 가입했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개 교단의 전체 교회숫자는 협의회가 분열되기 이전인 1985년에 286개, 협의회가 분열된 이후인 1998년에 364개로 78개나 증가하였고, 2003년에는 403개로 1998년보다 39개나 늘어났다. 이 증가 수치는 수많은 목회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개척교회 수치가 보여주듯이 많은 교회들이 새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셋째, 1988년부터 2008년까지 21년간 한성신학교(한민학교) 졸업생 및 교수들에 의해서 개척된 교회가 62개이다.

넷째, 확보 가능한 총회회보에 실린 개척교회는 1990년부터 2011년까지 54개이다. 그 가운데 29개가 비한성신학교 출신의 목회자들이 세운 개척교회 숫자이다. 표에서 빠진 1991-92, 1995-98, 2001, 2003년도까지 총 8년간 비한성신학교 출신 목회자들에 의해서 설립되었을 교회들을 추정한다면, 40여개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보면, 1988년부터 2011년까지 24년간 총 100여개의 개척교회가 총회 소속으로 세워졌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100여개 개척교회들 가운데 총회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 다수가 실패했거나 타 교단으로 이적한 때문이다.

다섯째, 2009년 총회회보를 기준으로 했을 때, 총 73개의 교회들 가운데 한성신학교 졸업생 및 교수들이 세운 교회들이 22개 정도, 총회신학원에서 공부한 목회자들이 40여명, 기존교회들이 13곳 정도 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것은 한성신학교 졸업생 및 교수들이 세운 교회들 총 62개 가운데 40여 개가 생존에 실패 또는 타 교단으로 이전하였고, 35퍼센트인 22개 정도만 남았다는 뜻이 된다. 반면에 총회신학원을 통해서 총회에 가입한, 다수의 여성들을 포함한 목회자들은 대부분 총회원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섯째, 개척된 교회들의 대다수가 생존에 실패했거나 이적했음에도 불구하고, 2003년부터 2011년까지 교회숫자가 조금씩 늘어나 31개까지 증가한 것을 볼 수 있다. 교단합계에서도 1985년에 286개이던 것이 1998년에는 364개, 2003년에는 403개로 증가한 것을 볼 수 있다. 1985년부터 1998년까지 14년 동안 78개가 증가하였고, 1999년부터 2003년까지 5년 동안 39개가 늘어 19년 동안 총 117개가 증가하였다. 발전이 더디기는 해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일곱째,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가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신학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은석의 신화신학 성경연구회, 힐 요한과 김찬영의 한국성서(한성)신학교, 현재의 서울기독대학교와 그리스도대학교 및 협의회와 총회에 목회신학원이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이곳 교육기관에서 배출된 학생들 대부분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남아 헌신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남은 자들을 예비하셨다.

4. 김찬영 목사의 동료들

1)이춘식 목사

이춘식 목사는 젊은이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인 교육자였다.

첫째, 이춘식은, 선배이자 스승인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 함태영이 1952년 11월 15일에 충남 논산군 부적면 신교리 마을회관을 빌려 복음공민중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1953년 3월과 7월에 각각 부친과 부인을 사별할 뿐 아니라, 재정을 후원하던 동생 함태중까지 중병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었고, 경기도 광주군 분원리 소재 숭실중학교의 교장과 교목을 맡아 떠나게 되었을 때, 복음공민중학교를 인수하였고, 장소를 옮겨 이름을 대명중학교로 바꿔서 운영하였다. 이 학교는 이후로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둘째, 이춘식은, <양촌소망교회 104년 역사> 69-70쪽에 의하면, 1956년 11월 13일 충남 논산군 양촌면 인천리 기독교대한감리회 인천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하여 1973년 8월까지 17년간 사역하는 동안 청년사역에 정성을 쏟았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교회성장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의 재임 시 그의 영향으로 10여 명의 청년들이 목회자의 길을 선택하여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셋째, 이춘식은 그가 17년간 담임을 맡았던 충남 논산군 양촌면 인천감리교회(현 양촌소망교회)를 떠나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한국성서신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1973년부터 1986년까지 한국성서신학교 교수로 재임하는 동안 학생들에게 열정적으로 환원정신을 가르쳤고, 학생들에게 늘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구원의 15단계 등의 저서를 남겼다.

이춘식은 성공적인 목회자였다.

첫째, 그가 김찬영 목사의 권유를 받아들려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기 직전 인천감리교회에서 17년간 사역하는 동안 기도처를 설립하였고, 예배당건축을 두 차례 하였다. 재임기간에 재적인원이 223명까지 늘어나 자립의 기반을 닦기도 하였다.

둘째, 1973년 8월 인천감리교회를 사임하자마자 바로 그달 5일에 대전 산성 그리스도의 교회에 담임목회자로 취임하여 1980년 4월 27일까지 시무하였다. 1981년 3월 1일 만목 그리스도의 교회에 취임하였고, 같은 해에 인근 어곡리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1985년부터는 한성신학교 교수이자 신흥 그리스도의 교회의 담임 목회자였던 최용호 목사가 미국에 유학을 떠나 있는 동안 동료 최용호를 대신해서 신흥교회를 맡아 보살피던 중 1986년에 소천 하였다.

2)정일호 목사

정일호 목사는 1939년 1월 24일 부친 정재관, 모친 권자자 사이에서 6남 2녀 중 차남으로 대전시 서구 변동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일찍이 복음을 받아 들여 예수님을 믿고 태평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감리교회 권사로서 교회를 섬기면서 기자로 사업가로 활동하였으나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여 1971년부터 목회를 시작하였다. 충주 중앙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여 담임 목회자로 섬기던 중 지병인 당뇨로 인하여 2011년 5월 11일 대전선병원에서 소천 하였다.

정일호는 충청이남지역에서 크게 활약했던 김은석 목사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목회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기도와 성령 충만을 모토로 환원운동을 펼친 성령운동가였으며, 성령운동에 기초한 한국적 환원운동을 주장한 부흥사였다.

정일호는 교회 개척가였다. 그는 상삼교회, 충주중앙교회, 창동중앙교회, 당우리교회, 팔봉교회, 원평교회, 은혜로운 교회 총 7개 교회를 개척하였다. 한성 교역자회를 이끌기도 하였으며, 그리스도의 교회 총회 총회장을 1990-2008년 사이에 총 13차례 역임하면서 총회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정일호는 1982년에 한성신학교를 졸업하였고, 1986년에 캘리포니아 신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 1992년에 명예신학 박사학위를 각각 받았다. 정옥춘 사모 사이에서 3남 1녀를 두었다. 초대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여 시무하는 정영현 목사, 정영민(캐나다 선교), 충주중앙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어받아 시무하는 정영성 목사, 정영심이 있다.

3)장성우 목사

(1)주의 손에 이끌려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다

장성우 목사는 1939년 1월 28일(음력) 충북 청주에서 부친 장병호(張秉浩), 모친 연옥순(延玉順) 사이에서 2남2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장병호는 충북 괴산군 청안면 효근리에 소재한 500년 역사의 장씨 가문에서 태어나 성장한 후 고향을 떠나 청주에 자리를 잡고 사업에 종사하였다.

장성우는 청주에서 태어나서 주성초등학교, 청주중학교, 청주고등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2학년(15세) 때 친구를 따라 당시 청주 석교동에서 가까운 기독교장로회소속 청주제일교회(당시 구연직 목사 시무, 후임으로 기독교서회 조선출 목사가 부임)에 출석하였다. 이 일은 장씨 가문에서 처음 있는 일로써 장성우의 일생에도 결정적인 순간이 되었다. 장성우는 소문난 기독학생이 되었고, 부친을 비롯하여 가정 전체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가문에서 다수의 목회자가 배출되었다.

장성우는 성균관대학교 경제과를 나온 후 군복무를 마치고 체신부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에 다니던 중에 대한기독교신학교(현 서울기독대학교) 제1회 졸업생인 김순옥을 만나 교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청혼을 하자 장모 김묘암 권사(필운동 그리스도의 교회 집사, 성낙소 목사 시무)가 사위될 사람이 침례를 받지 않고 약식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를 들어 결혼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 기막힌 반대 사유에 “도대체 당신들이 다니는 교회에서 제대로 교육받은 목회자가 있느냐? 만나게 해 달라. 만일 그 목회자가 반대하면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하여 당시 기독교신학교 교장이었던 최순국 목사(시카고에서 작고하셨는데, 최순운 목사의 형)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성경말씀에서 세례를 연구하여 침례를 받으라는 조건으로 결혼승낙을 받았다. 고려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고 대한기독교신학교(교장, 최윤권 목사) 신학과 야간에 편입하여 졸업을 하게 되었다. 이때 교수들로는 환원운동을 가르친 최윤권 목사, 사도행전을 가르친 성낙소 목사의 아들인 성수경 목사와 구광서 목사, 강병천 목사, 김진문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후에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1967년 1월 4일에 최윤권 목사로부터 침례를 받았다.

장성우는 육군하사로 제대한 직후 얼마동안 한양신학교가 소속된 하나님의 교회(현 대한예수교장로회)에 다닌 적이 있었다. 이 무렵에 장성우는 교단 중앙위원회의 집행위원회가 서울 서대문에 소재한 영천교회(이현래 전도사 시무)의 담임목회자를 일방적으로 징계하고 해임하는 것을 보았다. 이에 장성우는 중앙집권제의 병폐를 깨닫고 신학교 동기가 시무하는 필운동 그리스도의 교회(박시래 전도사 시무)로 환원하였다.

성수경 목사의 저서 <초대교회 신앙교리>를 편집하여 출판하면서 성경이외의 어떤 인위적인 교리나 신조도 거부하는 순수한 복음주의 신앙을 배웠고, 가장 옳고 이상적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침례를 행하고, 매주 성만찬을 행하며, 개교회 중심의 초대교회(사도행전 2장)로 돌아가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믿게 되었다.

장성우는 필운동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안수집사로, 장로로 장립 받고 섬기면서 서울성서신학교에서 강사로 가르쳤다. 이때부터 그리스도의 교회 총회에 참여하여 총회이사, 회계를 맡아서 그리스도의 교회 개척교회를 후원하였다.

이후에 운영하던 사업이 부진하여 고뇌하던 중에 해남의 동리 그리스도의 교회에 머물면서 10여명의 교인을 데리고 목회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첫 목회였다. 그 후 서울로 올라와서 신월동에 1978년 12월 10일 강남제일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여 첫 예배를 드렸고, 이듬해인 1979년 2월 11일에 창립예배를 드렸다.

강남제일 그리스도의 교회는 침례를 철저히 실행하고 매주 빠지지 않고 주의 만찬을 시행하였으며, 이상적 그리스도의 교회의 목표로 열심히 목회하여 성도들이 늘어나서 150여명이 모였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로 성장하였다. 장성우 목사는 문서선교에도 관심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회 이사장 패튼(배도은) 선교사와 깊은 인연을 맺고 활동하였다.

장성우는 창립예배를 드린 1979년에 그리스도의 교회 총회(총회장 조충연, 목사고시위원장 강병천, 심사위원장 김동수, 안수위원 조충연, 김동수, 김진문, 김정만, 최순운)로부터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 뜻 깊은 해에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의 교회는 총회(현 총회가 아님)와 협의회로 나눠졌다. 총회에서 조충연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출되자, 최윤권 목사가 중심이 되어 대한기독교신학교측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교역자회를 구성하였기 때문이다.

총회측에는 김찬영, 이종만, 김규상, 김진문, 김태수, 김정만, 최순운, 김철수, 김용웅 등이 함께하였고, 이신 박사도 미국에서 귀국한 후 합류하였다.

장성우 목사는 목회를 하면서 학업에 정진하여 미국 필라델피아 훼이스신학대학원에 유학하여 목회학박사를 취득한바가 있다. 미국에서 방을 함께 쓴 한국에서 큰 장로교회를 맡아 시무하던 목사가 이르기를, “서울에서 일반대학교를 나온 장목사가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회를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자기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학위를 제대로 갖춘 사람이 거의 없는 줄로 알고 있었다고 말하였다. 장성우는 그때 충격을 받고 귀국한 후로는 방송, 연합단체, 신문 등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홍보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1982년에 출판된 설교집 <일곱 촛대의 비밀>이 3판까지 출판되는 인기를 얻었고, 그로 인해서 교파를 초월하여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12개 교단으로 구성된 ‘한국기독교교역자협의회(한교협)’에 그리스도의 교회 대표로 참여하였다. 한교협의 실행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서기를 맡아 활동하면서 신문, 잡지, 방송과 같은 매스컴에 글을 발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를 널리 홍보하였다. 이 당시 한교협에는 한경직, 정진경, 이영수, 최훈, 조원길, 문은식, 정인도, 허송 등의 목사들과 한동숙 집사(현 웨스민스터대학원 이사장) 등이 지도자로 참여하였다.

강남제일 그리스도의 교회는 다수의 목사들을 배출하였다. 장로로 시무했던 김종기(만목 그리스도의 교회), 후임자인 김종현(강남제일 그리스도의 교회), 전도사로 시무했던 김점용(신갈 그리스도의 교회), 오세황(호주 거주, 맹인선교회), 박영완(그리스도의 교회 칠레선교사), 정기영 선교사(박영완 목사 사모), 한문희(천안, 감리교), 반현구(청주, 성결교), 김춘기(인천, 성결교), 장혁(대전, 기독교장로회), 장지은 전도사(대전, 온누리교회, 그리스도대학교 강의) 등이 그들이다. 그 무렵 서울시 강서구에는 강남제일교회 이외에도 신월중앙 그리스도의 교회(배흥옥 목사 시무)와 신성 그리스도의 교회(장휘명 목사 시무)가 있었다.

(2)주의 손에 이끌려 한성신학교 교수로 부임하다

1980년대 초 대전의 한국성서신학교는 1981년 2월 16일 교육부로부터 학교법인 성령학원 한성신학교를 인가받고, 1983년 10월 5일 4년제 대학학력인정교로 승격된 더 나은 인가를 위한 교수인력의 충원이 불가피한 상태였다. 이때 장성우 목사는 한성신학교의 전임교수로 임명을 받고 후진양성을 위해서 서울 소재의 강남제일 그리스도의 교회를 전도사로 시무하던 김종현에게 맡기고 거주지를 대전으로 옮겼다. 신학교에서는 실천신학 교수로서 예배학, 성례전, 환원운동사 등을 가르쳤다. 이 기간에 학업을 지속하여 부산 동아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교육행정학석사를 받고, 2급 교사자격증을 받았다. 1987년 10월 15일에는 두 번째 설교집 <고독한 승리>가 발간되었는데, 역시 좋은 평판을 받았다.

한성신학교는 1987년 말까지 입학정원 180명에 신학과(주야), 기독교교육과(주야), 음악과(주), 사회복지학과(주야)로 발전하였다. 신학과는 주야간 각각 40명씩 80명이 입학정원이었고, 별도의 목회학과도 운영하고 있었다. 이 무렵 주간에는 젊고 활기찬 젊은이들로 캠퍼스를 메웠고, 야간에는 직장인, 공무원, 군인 등 좋은 인재들로 강의실이 채워져 있어서 그들을 가르치는 보람이 대단하였다.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왜 나는 그리스도의 교회 교인인가>와 <21세기 교회개혁의 이상>를 번역 출판하였으며, <환원교리와 역사>를 저술하였다.

장성우는 1995년에 대전대학교에서 행정학박사 과정에 입학하여 연구를 시작하였다. 실천신학분야인 교회행정을 일반행정에 접목시켜 발전시킬 방안을 찾는 학위논문을 위해서 행정학을 연구하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1998년 2월에 “한국교회 분석-체제이론적 접근”의 논문을 완성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2012년 1월 10일에는 성광문화사를 통해서 책으로 출판하였다. 2004년 3월 1일 21년에 걸친 교수생활을 정교수로 정년퇴임함으로써 마감하였다.

장성우는 신학교 재직시절 적극적으로 자료를 찾아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에 제공하였고, 운영자를 격려하였을 뿐 아니라, 동료 교수들인 최용호, 조동호와 합력하여 졸업생 또는 재학생들을 독려하여 교회를 개척토록 하여 그리스도의 교회 총회 소속 중부지방회를 설립하였다.

장성우 교수는 강의실에서 서울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성장시켰던 목회경험과 머릿속에 담아왔던 이상적인 신약성경교회를 학생들에게 유감없이 피력하였다. 교회는 “성경이외의 인위적인 교리, 신조, 교파를 배격해야한다. 신약성경의 순수한 복음에로 돌아가야 한다. 사도전통대로 매주 주의 만찬과 침수세례를 시행하여야한다.”고 외쳤다.

그의 신앙의 관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시대에 필요한 이상적 교회이다. 교파분열은 어떤 이유에서든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일이다. 모든 교파들은 성경이외의 조직과 신조와 헌법을 버리고 교회를 하나로 통합하고, 각 교회가 독립적으로 운영되도록 해야 한다.

둘째, 교회는 회중 중심적이고 민주적이어야 한다. 감독정치, 장로정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위적 신조와 교리에서 벗어나 신약성경에로 돌아가 단순하고 양심적인 신앙을 가져야 한다. 교파교회는 중앙집권의 횡포를 버려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산산 조각난 주님의 교회를 본래적이고 순수한 사도들의 전통에로 회복시켜야 한다.

셋째,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는 그리스도의 교회, 오직 그리스도인이 구성원이 되는 그리스도인의 교회,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교리, 그리스도인의 예배, 그리스도인의 침례 등, 그리스도인이 인정되고 강조되는 교회, 오직 그리스도만을 구세주로 인정하는 교회, 그래서 다른 이름들이 쓸모없게 되는 교회, 곧 그리스도의 교회 또는 그리스도인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넷째,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는 것을 침묵하자.”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 일치가 현실적으로 어렵고 힘들더라도, 인위적인 조직과 교권, 인간이 만든 신학과 신조와 전통,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성경말씀, 특히 신약교회의 기초인 사도전통에로, 신약성경에로 돌아가야 한다. 진정한 교회통합은 신약교회로 돌아갈 때 가능해진다. 신약교회로 돌아가 한 분 성부 하나님, 한 분 성자 예수님, 한 분 성령님, 한 몸 교회공동체, 한 믿음, 한 침례, 한 소망에로 돌아가야 한다.

(3)주의 손에 이끌려 노숙자 교회를 개척하다

장성우 목사는 정년퇴임을 1년 앞두고 안식년을 얻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여생을 무엇으로 보답할까를 고민하였다. 그 무렵 대전역 주변에 노숙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들에게 다가가 애로사항을 묻고 침식을 해결해 주려고 애썼다. 그러나 물질로는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기도 중에 깨닫고 노숙자를 위한 교회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제자들인 도중교(선천장로교회 시무), 홍기옥(상삼 그리스도의 교회 시무)과 함께 중리동에 지하 40평을 얻어 중부 그리스도의 교회를 시작하였다. 이성헌 장로가 합류하였고, 김영태(신정 그리스도의 교회 시무), 노태석(참빛 그리스도의 교회 시무), 박무행(기아대책 대전충남본부장)도 합류하여 노숙자 목회를 도왔다.

장성우는 목사와 교수로서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을 쉬지 않았고, 강남제일 그리스도의 교회, 중부 그리스도의 교회, 사랑 그리스도의 교회, 명성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여 시무하였다.

(4)주의 손에 이끌려 시인으로 활동하다

새빛 장성우 목사를 시인으로 만든 것은 ‘보리피리’로 천형인 나병의 처절함을 읊어 주목을 끌었던 시인 한하운이었다. 그를 만난 것은 4.19후에 대학생을 중심으로 청량리에서 흥국직업소년학교를 운영할 때였다.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보고 그가 격려차 찾아와 손을 잡아주었을 때였다. 그와의 만남을 계기로 글을 쓰기 시작하여 10권의 책을 펴냈다. 제40회 <월간아동문학> 번역부문 신인상에 1997년 6월에 당선되었고, 2006년 1월 20일 <크리스챤문학>과 동년 4월 28일 <문학사랑>에서 시로 신인상을 받고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동년 4월 6일 한국문인협회(Korean Writers' Association) 아동문학부문과 7월 27일 국제펜클럽한국본부(Korean Center PEN International)에 외국문학번역부문에 각각 회원으로 허입되었다. <대전문학사랑>에서는 2010년 6월 1일 인터넷문학상도 받았다. 시인으로서 시집 <카이로스의 만남에서>를 출판하였고, 국제크리스챤작가협회 중부지회장, 계간크리스챤문학 운영이사, 대전펜클럽 운영위원을 역임하였다.

기독교신문에는 정론 ‘편견을 넘어 더불어 사는 사회로’ ‘새로운 시작, 새로운 도전’ ‘더불어 생각한다’란에 ‘근본으로 돌아가자’ ‘인간 생명 존엄에 앞장서자’ ‘교회는 영적각성으로 자정능력을 회복할 때’를 쓰고, 기독교신문 칼럼에 ‘기독교인 윤일병을 보는 눈’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교회의 과제’ 등 수시로 발표를 하고 있다. 아침이면 인터넷 시마을에 시를 쓰고 사진을 올리며, 좋은 문인들과 교류함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지낸다. 평생 목회를 했고, 신학대학교수로 목회자를 양성 했고, 저술활동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

장성우는 목회자로서 두 권의 설교집을 펴냈는데, 큰 인기를 얻었다. 그는 첫 번째 설교집 <일곱 촛대의 비밀>(태광출판사, 1982) 서문에서 “이 땅에 종식되어야 할 교회의 외형화, 대형화의 비극을 바라보면서 서글픈 미래도 생각했다. 교회가 만일 내일을 바라보는 눈과 냉정한 사명을 잃어버린다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나 죽은 것이다. 호황이 지나면 불황이 오듯이 반드시 역사의 과거를 결코 헛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하겠다.”라고 썼는데, 교회가 호황을 누리던 시대에 미래를 정확히 예측한 예언자적인 안목이 돋보인 글이다. 두 번째 설교집 <고독한 승리>(태광출판사, 1987) 역시 호평을 받았다.

그는 또 교수로서 여러 교재들과 번역서들을 펴냈는데, 교재들로는 <환원교리와 역사>, <예배학>, <기독교 변증학>, <성례전>, <그리스도의 교회 조직신학>이 있고, 번역서로는 마샬 레게트의 <21세기 교회개혁의 이상>(태광출판사), 레로이 부라운로우의 <왜 나는 그리스도의 교회 교인인가>(태광출판사)가 있다. 그밖에 시집 <카이로스의 만남에서>가 있고, 환원운동과 행정학에 관련된 논문들이 다수 있다.

(5)주의 손에 이끌려 살아온 생애에 감사하다

장성우 목사는 주의 손에 이끌려 살아온 생애를 감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함께 동역한 훌륭한 목회자들에 대해서 늘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그들 가운데 한성신학교 교수로 불러준 중국 훈춘의 김찬영 박사, 미국 시카고의 최순국 목사, 최순운 목사, 김순철 목사, 로스앤젤레스의 안재관 목사, 이종만 목사, 고 양정식 목사, 김성철 목사, 한명철 목사, 이성학 목사, 김태수 목사, 김철수 목사, 김정인 목사, 최태희 목사, 안대진 목사, 서울의 신조광 목사, 인천의 장성영 목사가 있다. 또 늘 존경하는 마음을 담고 있는 최윤권 목사, 김정만 목사, 조충연 목사가 있다. 오랜 기간 함께 사역한 신학과 동료들인 박영배 박사, 최용호 교수, 김상호 교수, 조동호 교수에게도 한결같은 우정에 감사하고 있다. 그는 또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와 일찍 소천한 몇몇 신학자들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지 않는다. 기도원에서 암 투병이던 이신 박사를 문병하였고, 금호동 그리스도의 교회(현, 신설동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고, 한성신학교 교장을 역임한 김진문 목사가 간암으로 소천하였을 때 가슴아파하였다. 특히 김진문 목사는 장성우 목사가 강남제일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할 당시 매월 선교비를 지원했던 분이었다.

장성우 목사는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큰 딸 장지은 전도사는 그리스도대학교 신학과 및 이화여자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백석대학교에서 선교학박사를 받고 그리스도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고, 둘째 딸 장지나 집사도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있다. 아들 장혁 목사는 대전 주님의 은혜와사랑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김찬영 목사의 다른 동료들에 대해서는 추후에 자료가 정리되는 대로 이곳에 추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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