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이남지역(협의회, 총회)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이야기 A History of Korean Christian Churches in the Southern Half of South Korea
조동호(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제2부 힐 요한 선교사와 한국성서신학교 1950년대 충청이남지역에서 김은석 목사와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김은석은 1963년 1월 21일 충남 논산군 부적면 충곡리에서 소천 하였다. 이때는 이미 힐 요한 선교사가 대전시 도마동 가장동에 터를 잡고 한국성서신학교를 시작한지 2년이나 지남 시점이었고, 김은석도 함께 동역했던 기간이어서 김은석의 사역은 힐 요한에게 충분히 인계된 셈이었다. 1960년대는 힐 요한과 한국성서신학교의 영향력이 충청이남지역에 크게 미친 기간이었다. 전남에서의 힐의 영향력이 김은석만큼 또 충청권에서만큼 크지는 못했지만, 학생들의 상다수가 전남 출신이었다. 이 시기에 힐의 영향력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다른 선교사들과 신학교들보다 훨씬 더 컸다. 또 이 시기는 힐 요한 선교사의 생애 절정기였다. 일제의 탄압도 더 이상 없었고, 6.25와 같은 전쟁도 더 이상 없었다. 학생들과 목회자들로부터 사랑과 존경도 받았다. 다만 한 가지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턱없이 부족한 선교지원금이었다. 그는 1972년 6월, 한국 나이로 60세 때 한국에서 은퇴하였다. 그의 은퇴가 조금 빨랐던 이유는 모금의 어려움이 다른 현실적인 이유들 속에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1. 힐 요한 선교사(1913.03.22-2009.11.04) 1)힐 요한과 제인의 생애
힐 요한 선교사는 미국 오클라호마 주 애피톤(Apeatone) 근교 농장에서 제임즈 해롤드 힐(James Harold Hill)과 티나 비거스태프 힐(Tina Biggerstaff Hill) 사이에서 1913년 3월 22일 태어났다. 아래로 여동생이 두 명 있었다. 부친은 농부였고, 모친은 교사였다.
힐은 1923년 6월 10일(10살) 침례를 받았다. 로웰(Lowell) 고등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하였고, 테네시 주에 소재한 유서 깊은 존슨성서대학(Johnson Bible College, 현재 Johnson University)을 1936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동년 7월에 로웰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캐나다 온타리오 주 에일머(Aylmer) 소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2년간 목회하였다. 1947년에 버틀러대학교(Butler University) 신학대학원에서 M.A.학위를, 1963년에는 버턴신학교(Burton College & Seminary)에서 명예신학박사를 받았다. 존슨성서대학 채플에서 선교사들로부터 설교를 듣고 해외선교에 대한 관심을 키워가던 중에 한국에서 사역하던 존 채이스(John T. Chase)의 설교에 큰 감화를 받았다. 1938년 여름에 인디애나 주에서 열린 그리스도인 실천대회(Christian Action Conference)에 참석하여 영적인 각성을 체험한 직후 미국과 캐나다의 교회들을 순회하며 한국에 선교사로 나가기 위한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당시 두 사람의 생활비로 최소한 100불이 필요하였다. 1939년 4월에 에스더 에벌린 비반즈(Esther Evelyn Beavans)와 결혼하였다. 동년에 미국에서 일본 동경에서 활동했던 W. D. 커닝햄(William D. Cunningham, 1864-1936) 선교사 부부의 전기, <타오르는 횃불>을 읽었고, 한국 선교와 관련된 부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힐 요한과 에스더는 1939년 6월경에 한국에 입국하였다. 1924년 이후 한국에는 동경주재 커닝햄 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일하던 한국인 전도자가 있었으나 그는 후임 선교사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1935년 3월에 최초로 미국교회에서 파송된 마이클 쉘리(J. Michael Shelley) 선교사와 그의 가족이 입국하였으나 가족의 건강문제로 그해 11월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출신의 토마스 G. 힛치(Thomas G. Hitch) 선교사와 그의 가족이 한국에 세워진 커닝햄 교회들을 돕기 위해서 입국하였으나 그들 역시 1939년 힐 요한 선교사 부부가 한국에 도착한 직후 수개월이내에 출국한 상태였다. 1936부터 1940년까지 약 4년 동안 한국에서 활동했던 채이스 선교사 부부도 한국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어서 외국인 선교사로서는 힐의 가족만 남게 된 상태였다. 힐 요한 선교사는 존 채이스의 선교부와 사역을 인수받았기 때문에 출발이 좋은 편이었다. 힐은 사역준비를 마친 1940년 가을부터 채이스 선교사가 설립한 목회자 양성소를 개교하였다. 그러나 일제말기의 발악적인 기독교탄압으로 인해서 수개월도 유지시키지 못한 채, 그해 11월, 한국에 온지 1년 반도 못 채우고 짐을 꾸려서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서울주재 미국 대사관의 권고를 받아들여 대부분의 다른 미국인들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인들의 철수 후 일 년이 조금 지난 1941년 12월 7일 아침에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함으로써 미국이 일본과의 태평양 전쟁 및 제2차 세계대전에 휘말리는 불행한 일이 발생되었다. 힐은 1943년 웨스트버지니아 주 파덴시티(Paden City) 그리스도의 교회를 비롯해서 인디애나 주 등에서 목회활동을 하다가 미 육군 군목(중위)이 되어 미국, 필리핀, 일본에서 복무하였다. 1945년에 일본과 독일과의 전쟁으로 필리핀 섬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맥아더 장군의 명령으로 힐이 소속한 부대가 일본군을 향해 진격하던 중에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됨으로써 일본이 항복하게 되어 목숨을 건졌고, 대위로 예편되었다. 힐은 전후에 버틀러대학교(Butler University)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1947년에 M.A.학위를 받고, 1940년 11월에 한국을 떠난 지 8년 3개월만인 1949년 2월 18일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울 연지동에 살면서 3월 15일에 서울성서신학교(Korea Bible Seminary)를 개교하여 본격적으로 목회자 양성에 들어갔다. 이때 공산군에 납치된 후 행방불명이 된 돈암 그리스도의 교회 최상현 목사가 통역을 겸한 교수로 수고하였고, 한의사였던 필운동 그리스도의 교회 성낙소 목사 및 공산군에 피살된 백낙중 목사가 힐 요한 부부와 함께 교수로 수고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의 갑작스런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으로 피난하였다. 힐은 일본에 머무는 일 년여 동안 한국어 공부에 주력하였다. 그해 서울이 수복되자 11월에 한국에 돌아와 5주간 머무는 동안 서울 장충동의 임대건물에서 신학교를 개교하였으나 전쟁의 악화로 그해 12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포기를 모르던 힐은 이듬해 1951년 7월 3일 한국에 돌아와 서울 송월동 선교부에서 8월 4일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그리스도의 교회 보육원(Christian Mission Orphanage)을 시작하였고, 이후 선교부에 제휴된 여러 고아원들의 설립과 유지에 도움을 주었다. 1954년에 부인 에스더 비반즈가 신학생 2명과 부적절한 혼외관계에 빠졌다. 그 중 한 명은 결혼한 두 아이를 가진 아빠였다. 1955년에 에스더는 4명의 자녀를 가진 한국인 남자 친구와 살기 위해 둘 사이에서 난 아이를 데리고 가출함으로써 선교사역이 위태롭게 되는 중대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젊은 여선교사들이 젊은 한국인 남성과 연예하여 결혼한 사례는 종종 있는 일이었지만, 가정까지 버린 경우는 흔치 않아서 타격이 컸다. 힐은 1955년에 후임자인 테일러 해롤드(Harold and Ada Taylor) 선교사 부부에게 새로 지은 신학교 건물을 포함한 송월동 선교부 재산을 모두 물려주고, 쫓기다시피 한국을 떠나야 했다. 곧 이어 힐은 중국, 미얀마, 일본,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경험한 미혼여성 제인 키넷트(Jane Kinnett)와 재혼하였고, 1959년 8월에 부산을 통해서 재입국하여 알렉스 빌즈 가족과 함께 2개월을 지낸 후, 선교사가 없던 대전에 정착하였다. 힐 제인은 1921년 10월 23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출생하여 1946년 오리건 주 유진(Eugene)의 노스웨스트 기독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한 1946년 10월 31일부터 중국 쿤밍에서 선교사 사역을 시작하여, 1949년에는 미얀마 북부에서 1년간 사역하였다. 그리고 1951년 9월부터 1955년 여름까지 일본 오사카 성서대학에서 교수로 가르치다가 1955년 6월부터 10월까지 서울에 있는 한국 크리스천 미션에서 힐의 선교업무를 도왔다. 1955년 11월 로스앤젤레스에 돌아가 1956년 5월 25일 힐 요한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낳은 것으로 추정된다. 힐에게는 전처소생으로 추정되는 장녀 버지니아(Virginia), 제인으로부터 낳은 아들 데니(Denny)와 딸 티나(Tina) 그리고 한국에서 입양한 쌍둥이 형제 리노(Lino)와 더그(Doug)가 있었다. 제인은 초등부터 중등과정까지 가르치는 크레스톤 그레이드 학교(Creston Grade School)에서 교사로 일한바 있으며, 힐과 결혼한 후인 1956년부터 1959년까지 인디애나 주 레이크 카운티 소재 초등학교에서 가르쳤다. 1959년 8월에 한국으로 돌아와 대전에 정착하였으며, 1972년 6월 은퇴 후 미국으로 돌아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사역하는 동안 1973년 9월부터 1976년 6월까지 학교 요리사로 일하였다. 제인은 B형 간염으로 1982년 6월 29일 소천 하였다. 힐 요한 선교사는 제인과 함께 생애 50대를 한국에서 보낸 1960년대가 가장 성공적인 절정기였다. 그들 부부는 이미 선교사들이 정착한 서울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대전에 정착하여 가장동에 한국성서신학교와 한국 크리스천 미션을 세워 1972년 6월까지 10여년 넘게 교장으로 봉직하면서 주일마다 제자들의 교회들을 찾아가 필요한 도움을 베풀고 설교하며 침례를 베풀었다. 그는 1939년에 시작한 파란만장한 한국에서의 대역사를 마치고, 1972년 6월에 영구 귀국한 후에도 소천 때까지 미자립 교회들을 후원하였고, 한국교회의 발전을 위해 불철주야 기도했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산 증인이자 역사 그 자체이다. 제인이 소천한 후 이듬해인 1983년에 미조리 주 조플린(Joplin)에서 아이린(Irene)을 만나 재혼하였다. 미국인들은 노년에 혼자 남게 되는 경우, 짝을 만나 재혼하는 일이 매우 흔하다. 힐 요한 선교사는 2009년 11월 4일 97(만 96세)세로 소천 때까지 에덴보육원과 한국의 열악한 5개 그리스도의 교회들을 매월 후원하였고, 러시아 단기전도사역에도 참여하였다. 2)힐 요한 선교사의 유품 힐 요한 선교사의 유품이 추모 2주기를 맞이하여 2011년 11월 19일 오전 11시에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총회 산하 한성 신학교에 전달되었다. 전달식은 대전시 동구 용전동 소재 그리스도의 교회 총회 사무실에서 있었다. 힐의 맏딸 버지니아(Virginia) 여사가 이 유품을 보관하고 있다가 시카고 한인 기독교 방송국장으로 2001년부터 수고하고 있는 한성미주동문회 회장 김순철 목사와 상의하여 한국에 넘기기로 결정하였고, 이에 김순철 목사가 직접 한국까지 가지고와서 총회에 전달하는 노고와 희생을 감수하였다. 유품의 내용은 사진첩 2개, 다수의 슬라이드 사진, 네거티브 필름, 소수의 선교서신 복사본들이다. 이 유품은 1960년대의 것들로써 한국성서신학교의 초기 상황과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당시의 형편을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하고 유익한 자료들이다.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는 이 유품을 전달받아 내용을 정리한 후 화보집 성격의 소책자인 <힐 요한 선교사(John Hill)>(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2011)을 편집하여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홈페이지에 소개하였다.
힐 요한 선교사는 본국에 돌아간 후에도 지속적으로 한국을 돕고 있었음을 그가 남긴 몇 장의 카본카피(cc.: 타자기에 두 장의 용지와 그 사이에 먹지를 넣어 복사본을 만든 것)와 1991년 12월 7일자 한국 크리스천 미션 이사회 회의록(사진)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다.
남겨진 카본카피에 의하면, 1978년 5월과 7월에는 밥 워릭(Bob and Joyce Warrick) 선교사 부부 앞으로 편지와 돈이 송금되었고, 1978년 9월에는 노봉욱 장로, 1982년 1월에는 죠 가맨(Joe R. Garman) 선교사 그리고 1989년 10월에는 안일승 목사 앞으로 힐 요한 선교사의 편지와 돈이 송금되었다. 1991년 12월 7일자 회의록에 따르면, 이사회는 일 년에 한차례 12월 7일경에 있었고, 이사들의 이름과 회의내용을 볼 수 있다. 재정보고에 따르면, 1990년 이월잔액이 3,261불 25센트였고, 1991년 수입이 9,172불 56센트였으며, 지출이 8,509불 51센트였다. 1990년에는 2곳의 보육원과 13명의 목회자와 교회들을 도왔으나, 1991년의 전반기 6개월은 12교회, 후반기 6개월은 11개 교회를 도왔다. 도움을 준 액수는 목회자의 경우 매월 50불에서 30불까지였다. 삼광 그리스도의 교회 안일승 목사가 매우 적은 액수의 급여(후원금)를 받고 대리인의 역할을 여러 해 동안 수행하였다. 3)재단법인 한국 크리스챤 밋숀 재단법인 한국 크리스챤 밋숀은 1964년 4월 17일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은 선교재단이었다. 노봉욱 에덴보육원 원장이 발로 뛰어 어렵게 받아낸 것이었다. 인가장소는 충남 대전시 가장동 79-5(구획정리 후 21-5)번지였으며, 설립이사들은 힐 요한, 힐 제인, 해롤드 디바(Harold DeBar), 에스더 디바(Esther DeBar), 임명진 장로, 노봉욱 장로 였다. 이후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유지재단’으로 개명되었으며, 현재 32개의 교회들이 가입되어 있다. 4)모금의 어려움 힐은 1964년 5월 2일자로 미국의 대리인인 디바(De Bar)에게 소식지 제작을 위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냈다. (1)대전 유천동 교회건축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300불이 즉시 필요하다. (충남 대덕군 유천면 도마리 소재, 현재의 대전 그리스도의 교회를 말한다. 63년 9월경에 시멘블록과 스레트로 40평 교회를 신축하고 있었고, 이 무렵부터 도마기독지교회로 불렸다.)
(2)섬에 보낼 신약성경, 전도지, 복음서, 연필 등이 필요하다.
(3)내동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3명의 남성이 침례를 받았고, 2명의 여성 신학생들(이영선, 하봉례)이 가서 설교하고 있다. (4)최요한은 성공적인 부흥목사이며, 많은 그리스도의 교회들에서 부흥집회들을 인도하는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담임자이다. 5)마명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있었던 결혼식과 신혼부부를 소개하였다. (6)성공적인 시골 교회로써 마명리 그리스도의 교회당과 성도들을 소개하였다. 힐은 1964년 4월에 그곳을 방문하여 설교하였고, 6명에게 침례를 베풀었으며, 결혼식에 참석하였다. (7)목포 인근의 압해도를 방문하여 순복음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교회에서 3일간 설교하였다. 안방이 비좁아 마당에 멍석을 깔고 예배를 드렸다. 힐 요한 선교사는 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사진첩에서 발견된 1965년 선교 소식(Newsletter) 쪽지에 의하면, 모금상황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보여준다. 한국에 돌아가는데 필요한 경비 3,500불 가운데서 석 달밖에 남지 않는 상황에서 모금된 돈이 불과 5불에 불과하다면서 2,500만 한국의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필요한 가전도구들을 대전에 실어 보낼 수 있을지를 소식지를 받아보는 이들에게 묻고 있다. 아래의 글(그림)은 1965년 재입국을 앞둔 상황에서 모금이 얼마나 힘겹고 눈물겨운 싸움이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힐은 이 험난한 가시밭길을 한국인과 그리스도의 교회들을 위해서 오직 믿음으로 걸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몇 가지 난관들
우리가 한국에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대가족과 짐 가방을 서부 해안에 끌어 옮길 수 있겠습니까? 온수기, 세탁기, 건조기, 요리용 스토브를 한국 대전까지 실어 보낼 수 있겠습니까? 한국에 돌아가기 위한 기금이 겨우 5불밖에 모금되지 않았습니다. 겨우 석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3,495불이 부족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말합니다. “그래. 하나님께서 예비하실 거야.” 그러나 우리는 이 소식지를 읽는 모든 이들로부터 신속한 응답이 필요합니다. 모든 분들, 예, 모든 분들이요. 우리는 기꺼이 여러분이 계신 지역에 방문하고 싶습니다. (아니면, 여러분이 이곳으로 오셔서 우리를 도와주시겠습니까?) 그러니, 이 열린 문을 통해서 - 그리스도를 위해서 찾아가야할 2,500만 명이 넘는 영혼들이 사는 한 작은 나라 - 한국에 펼쳐놓은 우리의 끝내지 못한 대사업에로 걸음을 옮길 수 있도록 꼭 우리들을 도와주십시오. 동시에 우리는 이들 기금들을 모금하며 돌아갈 준비를 합니다. 우리가 또한 우리의 한국 성서 신학교를 보존하여 운영하고 복음 전도자 양성을 위해서 한 달에 두 번씩 한국에 계속해서 기금을 보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굶주리고 있는 많은 한국인 목회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계속해서 도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많은 연약한 한국의 교회들을 도와서, 그래서 교회들이 ‘실패로’ 끝나지 않도록 도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네 개의 기독중학교들과 맹아어린이학교를 지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신학교 신축건물을 끝낼 수 있겠습니까?(위의 사진: 3분의 1의 공정을 보인 신축건물) 그것을 끝내고 설비하는데 필요한 경비는 고작 9,500불입니다. ‘옛 마귀’는 말하기를, “안 돼. 넌 그것을 할 수 없어. 넌 결코 한국에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옳지 않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그가 옳지 않았다는 것을 1959년에 입증하였고, 또 다시 1965년에 입증할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선 우리의 독자들과 ‘기도의 용사들’과 함께 우리는 반드시 승리를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말처럼,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반드시 말해야 합니다. 모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빕니다. (서명) 죤(John). 쪽지 뒷면에는 1959년 힐 요한, 힐 제인 선교사부부가 한국에 나와 대전에 정착할 시점부터 힐 선교사 부부를 미국 대리인들로서 자원하여 도운 해롤드와 에스더 디바(Harold and Esther De Bar) 부부에 대한 소개도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스타’ 디바 부부 해롤드와 에스더 디바 부부입니다. 그들은 1959년 7월 이후로 우리가 새로 시작한 때인 그 당시 이 사역의 공동 설립자들이요 발기인들로서 남한 크리스천 미션(Christian Mission to South Korea)을 위해 (자원하여) 많은 일을 해오셨습니다. 에스더는 우리의 매우 능력 있고, 능률적이며, 헌신적인 재정담당자(발송 대리인)이었습니다. 해롤드는 그동안 선교이사회 회장과 홍보 담당자로서 섬겨오셨습니다. 우리의 교회들에서 15명의 남녀 성별된 분들이 이사들로서 활동하시면서 그리스도인의 조언과 도움을 우리에게 주고 계십니다. <보내진 기부금은 세금감면이 됩니다.>
5)1960년대 충청이남지역 교회 상황 해롤드 태일러 선교사의 선교보고에 의하면, 1955년까지 전국에 75개 교회가 있었다.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가 324쪽에서 인용한 <기독교 연감(1957)>에 의하면, 1956년 충북에 13개, 충남에 6개, 전남에 17개, 총 36개의 교회가 있었다. 1965년 <기독교연감>에 의하면, 1964년 충북에 16개 교회, 충남에 19개 교회, 전남에 24개 교회, 전북에 1개 교회, 도합 60개의 교회가 있었다. 1956년에 36개였던 것이, 힐 요한에 의해서 대전시 서구 가장동 21-5번지에 최초의 한국성서신학교 교사가 지어지던 1964년까지 만 8년 만에 24개가 더 늘어나 60개가 되었던 것이다. 김은석이 성경에 삽입시킨 주소록에 적힌 교회들로는 경기 2, 경남 3, 경북 4, 서울 7, 전남 29(30), 충남 10, 충북 14, 장소 미확인 2, 도합 72곳이었다. 그러나 이들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인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명기하지 않았고, 또 1955년 해롤드 태일러의 선교보고와 1956년 <기독교연감>의 시기가 거의 같고, 김은석의 1953-58년의 주소록과도 시기가 같기 때문에 김은석의 자료를 도표에 넣지 않았다. 힐 선교사의 주소록에는 총 88개의 주소가 영어와 한글이 섞인 자필로 실려 있다, 그 가운데 겹친 주소가 2개, 교회가 아닌 주소가 4개, 따라서 총 82개가 그리스도의 교회주소들이다: 서울10, 전남26, 전북2, 충남21, 충북14, 경북2, 강원2, 경기5. 이들 가운데서 김은석 목사의 주소록과 겹치는 주소는 21개(전남10, 충남3, 충북8개)이다. 이것은 김은석과 그의 동료들에 의해서 1946-1959년 사이에 충청도와 전라도지역에 세워진 교회들 가운데 1971년까지 최소한 21개 정도가 생존해 있었다는 증거이다. | 충남 | 충북 | 전남 | 전북 | 소계 | 서울 | 경기 | 강원 | 경남 | 경북 | 부산 | 합계 | 1924-1941년 커닝햄선교부 | | | | | | | | | | | | 17 | 1955년 태일러 선교사 | | | | | | | | | | | | 75 | 1956년 기독교연감 | 6 | 13 | 17 | 0 | 36 | | | | | | | | 1965년 기독교연감 | 19 (+13) | 16 (+3) | 24 (+7) | 1 (+1) | 60 (+24) | | | | | | | | 1971년 힐 선교사 | 21 (+2) | 14 (-2) | 26 (+2) | 2 (+1) | 63 (+3) | 10 | 5 | 2 | | 2 | | 82 | 증감 | +15 | +1 | +9 | +2 | +27 | | | | | | | +7 |
1946-59년까지의 김은석 목사의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의 영향으로 충청과 전남에 교회들이 많이 세워졌고, 1960-71년까지 힐 요한 선교사의 한국성서신학교의 영향으로 역시 충청과 전남에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다. 이 통계는 타교단으로 이적한 교회들과 생존에 실패한 교회들의 숫자가 빠져 있는 것이므로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교회들이 개척되었을 것이다. 대전시 가장동에 세워진 한국성서신학교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충남에서 교회수가 배가 넘는 15개가 증가하였고 충북은 1개, 전남에서 9개, 전북에서 2개가 증가하였다. 합계에서 1955년부터 1971년까지 16년 동안 7개 교회가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 숫자는 1956년부터 1971년까지 15년 동안 충청도와 전라도지역에서 합계 27개가 증가한 것에 비해 차이가 무려 20개나 난다. 이것은 그만큼 많은 숫자의 교회들이 타교단으로 이적하였거나 문을 닫아야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충청도와 전라도지역에서 27개의 교회가 증가한 것은 1950년대 김은석 목사의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와 1960년대 힐 요한 선교사의 한국성서신학교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소폭으로나마 꾸준히 증가했다는 것은 부침이 극심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그나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힐 요한의 주소록에 명기된 목회자들(50명) 강경준, 고광석(윤식), 고재윤, 김동식, 김동열, 김봉섭, 김상식, 김상신, 김순철, 김영신 김용순, 김은성, 김일순, 김재술, 김재업, 김정만, 김중현(장로), 김치연, 김칠성, 김현경, 김형주, 라명환, 명연재, 명철재, 민홍기, 박옥채, 설하운, 송영히, 심영진, 안병호, 안일승, 양정식, 오현팔, 유덕례, 이규승, 이백호, 이사돈, 이순애, 이안식, 임병선, 장주업, 장휘명, 조규석, 조충연, 최요한, 최용호, 최이선, 최태시, 함명덕, 함태영(창현), (2)힐 요한의 주소록에 명기된 교회들
- 강원도 강능(릉)시 병산리 병산 그리스도의 교회
- 강원도 강능(릉)시 옥천동 사서함8호
- 강원도 명주군 주문진읍 교항리 ---주문진 그리스도의 교회
- 경기도 시흥군 안양읍 내천동 706 안양 그리스도의 교회 장주열 목사
-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신갈리 신갈 그리스도의 교회 김재업 목사
- 경기도 이천군 장호원읍 이황리 장호원(황정) 그리스도의 교회 안병호 전도사
- 경기도 인천시 부평동 655, 부평 그리스도의 교회 설하운 전도사
- 경기도 인천시 숭의동 231 숭의 그리스도의 교회 김영신(?) 목사
- 경북 안동군 풍산면 상리 안동복음중학교 양정식 목사
- 경북 안동군 풍산면 죽전동 그리스도의 교회 송영히 전도사
- 경북 영양군 영양면 서부동 영양 그리스도의 교회 오현팔 목사
- 부산시 부산진구 긒성---개척관 내, 김봉섭 목사
- 부산시 중앙 YMCA내 - - - -
- 서울 마포구 대흥동 18 신촌 그리스도의 교회
- 서울 서대문구 갈현동 산 53 갈현 그리스도의 교회
- 서울 서대문구 역촌동 산 42-2 역촌 그리스도의 교회 김상식
-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299 홍제동 그리스도의 교회 조충연 목사
- 서울 성북구 삼선동 1가 274 돈암 그리스도의 교회 민홍기 목사
- 서울 영등포구 외발산동 197-3 광명 그리스도의 교회
- 서울 용산구 도원동산 10, 도원동 그리스도의 교회
- 서울 용산구 효창동 5의 198 중앙 그리스도의 교회
- 서울 종로구 명륜동 4가 85-4 대학 그리스도의 교회
- 서울 종로구 필운동 289 필운동 그리스도의 교회
- 전남 강진군 군동면 삼신리 연화동 그리스도의 교회
- 전남 강진군 기룡리 103 기룡 그리스도의 교회
- 전남 강진군 작천면 중앙리 작천 그리스도의 교회
- 전남 강진읍 서성리 103 강진읍 그리스도의 교회
- 전남 광주시 금동 46 금동 그리스도의 교회 김동열 목사
- 전남 광주시 학익동 그리스도의 교회 김동열(?) 목사
- 전남 목포시 고하도 고하 그리스도의 교회
- 전남 목포시 대안동 11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최요한 목사
- 전남 무안군 이로면 외달리 그리스도의 교회
- 전남 신안군 압해면 매화리 그리스도의 교회
- 전남 여천군(여수시) 돌산면 우두리 세구지 백초 그리스도의 교회 장휘명 전도사
- 전남 여천군(여수시) 화양면 장등 그리스도의 교회
-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 그리스도의 교회 최이선
- 전남 영암군 학산면 평리 그리스도의 교회 이순애
- 전남 진도군 군내면 대사리 그리스도의 교회
- 전남 함평군 손불면 궁사(산)리 그리스도의 교회
- 전남 함평군 함평면 석성리 그리스도의 교회
- 전남 해남군 계곡면 여수리 그리스도의 교회
- 전남 해남군 송지면 매화리 그리스도의 교회 김형주 전도사
- 전남 해남군 옥천면 동리 그리스도의 교회
- 전남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 그리스도의 교회
- 전남 해남군 옥천면 화당리 그리스도의 교회
- 전남 해남군 현산면 상구신리 구신리 그리스도의 교회 김일순 목사
- 전남 해남군 화산면 마명리(방축리) 그리스도의 교회 김중현 장로
- 전남 해남군 화산면 사포리(평호리) 그리스도의 교회 명연재 전도사
- 전남 해남군 화(황)산면 삼호리(옥동리) 삼호 그리스도의 교회 김상신 전도사, 유덕례
- 전북 김제군 백산면 조종리 태매, 대산 그리스도의 교회 라명환 전도사 <전북 김제군 공덕면 공덕리 금아 (대산교회), 김일수 남자집사, 염소키우는 분)>
- 전북 전주 금암동 728-156 그리스도의 교회 최용호
- 충남 논산군 부적면 충곡리 그리스도의 교회
- 충남 논산군 부적면 탑골리 금성 그리스도의 교회 함명덕 목사
- 충남 논산군 연무읍 동사(산)3동 880 그리스도의 교회
- 충남 논산군 양촌면 산직2구 신정 그리스도의 교회 이백호 전도사
- 충남 대덕구 탄동면 내동리 그리스도의 교회 명철재 전도사
- 충남 대덕군 북면 석봉리 신탄진 그리스도의 교회 김용순 목사
- 충남 대덕군 유성면 죽동리 그리스도의 교회 김칠성 전도사
- 충남 대전시 가양동 그리스도의 교회 김재술
- 충남 대전시 대사동 그리스도의 교회 이사돈 목사
- 충남 대전시 대화동 그리스도의 교회 김동식 전도사
- 충남 대전시 도마동 그리스도의 교회 심영진 목사
- 충남 대전시 산성동 450 그리스도의 교회 임병선 목사
- 충남 대전시 석교동 그리스도의 교회 박옥채 전도사
- 충남 대전시 선화동2구 315번지 선화동 그리스도의 교회 김치연 목사
- 충남 대전시 신흥동 161-33 신흥동 그리스도의 교회 김현경 목사
- 충남 대전시 판암동 476 판암 그리스도의 교회 고재윤 목사
- 충남 마산군 은봉면 산동리 그리스도의 교회
- 충남 보령군 주포면 마강2리 구슬 그리스도의 교회 최태시 전도사
- 충남 연기군 남면 월산리 황골 그리스도의 교회
- 충남 천원군(천안시) 병천면 병천리 그리스도의 교회 김순철 전도사
- 충남 홍성군 금마면 장성리 그리스도의 교회 강경준 전도사
- 충북 괴산군 불정면 과전리(외령리) 영촌 그리스도의 교회
- 충북 괴산군 불정면 영천리 반능 그리스도의 교회 김정만 목사
- 충북 괴산군 소수면 수(소)수리 그리스도의 교회 이안식 목사
- 충북 보은군 산외면 이식리 그리스도의 교회 고광석(윤식) 목사
- 충북 주원군(충주시) 노은면 수용(룡)리 노은 그리스도의 교회
- 충북 중원군 동양면 조동리 그리스도의 교회 조규석 목사
- 충북 중원군 소태면 덕은리 덕은(조기암) 그리스도의 교회)
- 충북 중원군 소태면 복탄리 그리스도의 교회
- 충북 청원군 강서면 문암리 그리스도의 교회 안일승 목사
- 충북 청원군 남이면 양촌 그리스도의 교회 김은성 목사
- 충북 청원군 남일면 방서리 방서리 그리스도의 교회 함태영(창현) 목사
- 충북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 그리스도의 교회 이규승 전도사
- 충북 청원군 북이면 송정리 송정 그리스도의 교회, 치 전도사
- 충북 청원군 옥산면 사정리 그리스도의 교회
6)힐 요한 선교사가 후원한 기독교 학교들
힐 요한 선교사는 충남 논산군 연무읍 에덴보육원의 설립자 노봉욱 원장이 미국 미시건 주립대학 철학과 교수로 정년퇴임한 로버트 스나이더(Robert M. Snyder) 박사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논산 순의도 중학교, 양정식 목사가 운영한 경북 안동군 풍산면 상리 안동복음중학교, 장호원과 충주에 세워졌던 총 네 개의 기독교 중학교들과 이리 맹아 어린이학교를 지원하였다. 그가 지원했던 이들 학교들 가운데는 자금부족으로 두 곳이나 문을 닫았지만, 1965년의 선교소식지에 의하면, 힐 선교사는 이들 수백 명의 가난한 소년 소녀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모금에 힘썼다.
7)힐 요한 선교사가 설립했거나 후원한 보육원들
힐 요한 선교사는 1951년 8월 4일 서울 송월동 선교부에 그리스도의 교회 보육원(Christian Mission Orphanage)을 시작하였고, 이종만 목사가 1952년 8월 1일에 설립한 인천 그리스도의 교회 보육원, 1950년대 초에 설립된 대전 판암동 그리스도의 교회 애생원, 1952년에 설립된 대구 배성보육원, 1959년 이후 홍경채가 설립한 부산 성광원, 노봉욱 장로가 1959년 10월 15일에 설립한 논산(연무) 에덴보육원에 지속적으로 후원금을 보냈다. 또 자신의 맏딸 버지니아가 대전 선교부에 1968년에 설립한 보육원(Taejon Christian Orphanage)을 직접 관리하였다. 이밖에도 충남 부여군 합송리에 구애보육원이 있었다. 이 무렵 고아들의 미국 입양에도 힘을 썼다. 충남 논산군 연무읍 순의도 중학교 설립기금의 3분의 2를 지원한 로버트 스나이더(Robert M. Snyder) 박사는 부산 성광원 법인 설립과 대전 선교부 보육원 건물건립도 지원하였다.
미국 시카고의 김순철 목사의 회고대로, 힐 요한 선교사는 일제치하와 전쟁후유증으로 궁핍하고 고단했던 한국에 와서 신학생들을 “어버이가 된 심령으로 가르치시고 입히시고 양육하셨으며.... 먼 앞날을 내다보시며 된장국의 국거리를 사 나르시던 정성 어린 손길”을 가졌던 심성이 매우 따뜻한 분이었다. 1961년 3월 2일에 쓴 춘선(春善)의 감사서신에 따르면, 힐 요한 선교사는 일기가 불순했는데도 불구하고 춘선의 결혼식이 있었던 인천까지 찾아가 축하하고 선물까지 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정성과 생명의 손길이 오늘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를 있게 하였던 것이다. 2. 한국성서신학교 1955년에 가정문제로 한국을 떠났던 힐은 이듬해인 1956년에 제인과 재혼하였고, 3년 후인 1959년 8월에 제인과 두 살이 다 된 아기 대니를 데리고 부산을 통해서 재입국하였다. 부산에서 두 달 동안 알렉스 빌즈 가족과 함께 지내다가 선교사가 없는 대전에 정착하였다. 알렉스 빌즈(Alex V. Bills) 가족은 1956년부터 부산에서 기독교 방송 선교부를 창립하여 전파선교를 감당하면서 방송국설립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던 때였다. 1950년대 말까지 부강교회와 선화교회를 설립하는 등 충청과 전라권에서 목회자 육성과 교회개척에 힘을 쏟으며, 수십여 개 교회들을 자신의 영향권아래에 두었던 김은석 목사와 논산(연무) 에덴보육원과 순의도 중학교 설립자 노봉욱 장로가 힐 가족의 대전 정착에 큰 힘을 보탰다.
한국성서신학교는 ‘대전성서신학교’라는 이름으로 힐 요한(John Hill) 선교사에 의해서 1959년 12월 1일에 개교되었다. 첫 수업은 대전광역시 도마동 대전 그리스도의 교회당 (당시 충남 대덕구 유천면 도마리 성화교회, 심영진 목사시무. 1958년에 신축된 20평 흙벽돌집)에서 20여명의 학생으로 시작되었으며, 교수진은 힐 요한 선교사 부부, 김은석 목사, 심영진 목사, 김태수 목사(통역), 김찬영(통역) 등이었다. 이듬해인 1960년에 부산에서 이신 목사가 교수진에 합류하면서 대전역에서 가까운 선화교회(고광석 목사시무)로 옮겼다. 이신은 1959-60년에 부산문화방송에서 방송설교를 하고 있었다. 힐은 1961년에 가장동 유등천변의 큰 부지를 매입하여 천막교회를 시작하였고, 선교사 주택, 예배당, 학생숙소 등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때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은 근로 장학 명목으로 학비와 기숙사비를 면제 받을 수 있었다. 가장동 캠퍼스시대가 열리면서 1962년 3월에 교명을 서울에서 쓰던 한국성서신학교(Korea Bible Seminary)로 바꿨고 이 명칭은 20년간 사용되었다. 당시 테일러 선교사가 송월동 선교부 재산을 모두 팔았고, 현 서울기독대학교 캠퍼스 부지와 건물을 매입할 때까지 수년 동안 신학교 운영이 중단되고 있었다. 이로써 1940년대에 간헐적으로 운영되었던 신학교의 맥을 잇는 동시에 1950년대 기간에 김은석 목사(1963년 1월 21일 소천)의 신화신학 혹은 그리스도의 교회 성경연구회 영향권 아래 있었던 충청 전라권의 교회들과 목회자들은 한국성서신학교와 힐 요한 선교사의 지도력아래 놓이게 되었다. 힐 선교사는 1964-65년 사이에 생애 두 번째 안식년을 보내기까지 가장 긴 만 5년의 기간을 선교사로서 가장 활동적이고 가장 보람차게 보냈다. 이때의 교수들은 힐 요한과 제인, 김은석, 심영진, 이신(1966.09 미국유학), 최요열, 김이영(김찬영, 통역, 1962년 말 입대, 1965.09 미국유학), 소교민(통역), 리처드 래시(Richard and Melba Lash), 김히영(통역 및 음악), 임춘봉 등이었다. 이 무렵 화가였던 이신 목사는 메노라(일곱 줄기 등대)를 양각한 신학교 현판을 제작하였고, 전남 무안군 현경면 평산 그리스도의 교회를 시무한바 있는 임춘봉 목사는 교가를 작사하였으며, 부산에서 알렉스 빌즈의 방송선교부 PD로 있다가 군에 입대한 김찬영 통역의 후임으로 교수진에 합류한 김히영 교수는 교가를 작곡하였다. 대전교도소 교무과장 김치연 및 졸업생들 가운데 이은수, 김은석의 양자 김성철(충남대 졸업), 최용호(80년대 초 미국유학), 천명화(목원대 졸업), 인원영, 최금생(YMCA 간사), 박태규(통역) 등이 19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초에 합류하였다. 선교사들로는 프레드 호프만(Fred and Ellie Hoffman)과 힐의 맏딸 버지니아(Virginia)가 합류하였다. 힐의 지도력으로 1960년대에 90여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고, 상당수가 교회를 개척하거나 기존교회들을 섬김으로써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발전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일부는 미국으로 건너가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들을 설립하였다. 힐이 재임했던 1960년대 기간에 가장동 캠퍼스에는 선교부와 선교사들을 위한 2층 저택과 단층 주택(소실), 학생들이 만든 시멘트블록 교회당과 기숙사와 몇 채의 작은 직원 숙소들 및 고아들을 위한 단층 벽돌슬래브주택이 있었다. 1961년경에 힐 선교사 가족과 선교부를 위한 2층 주택과 또 한 채의 단층 주택 및 신학교 기숙사가 지어진 다음, 1962년에 가장동 그리스도의 교회당이 신학교 강의실 겸용으로 지어졌다. 이 교회당은 교사가 건축될 때까지 1960년대 전반기 동안 신학교 원룸강의실로 쓰였다. 처음 지을 때는 마룻바닥이었으나 마루를 들어내고 시멘트바닥으로 바꾼 후 책상을 겸할 수 있도록 책받침을 넓게 만든 장의자를 사용하였다. 교실이 급했기 때문에 안팎의 벽을 시멘트로 미장도 하기 전부터 강의실로 쓰였다. 비록 장소가 누추하고, 책상은 열악하며, 춥고 덥고 배고프던 시절이었지만, 학생들의 배움에 대한 열정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던 때였다. 근로와 학업을 겸했던 이 시대의 청장년들은 오늘날의 청장년들보다 정신적으로 월등히 성숙했었다.
힐은 1964년에 최초의 교사건물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현관이 딸린 사무실 2칸, 교실 2칸짜리 본관건물이었다. 1959년 여름에 한국에 나와 대전에서 사역을 시작한 힐 요한 선교사 가족은 힘겨운 5년을 보낸 후 미국에 돌아가 안식년을 보내고 1965년 한국으로 돌아올 준비를 하면서 선교소식지를 후원자들에게 보낼 때, 3분의 1의 건축공정을 마친 본관건물의 사진을 실었다. 힐 선교사는 이 건물을 완전히 끝내는데 필요한 경비가 9,500불이라고 적었다. 힐 선교사 내외는 이 건물을 끝내기 위해서 힘겨운 모금전쟁을 펼쳐야 했다.
힐은 건축공정을 끝내고 커튼까지 드리운 이 건물을 몇 년간 교사로 사용하다가 선교사역 30년 주년이 되던 1969년 봄에 2층으로 올리는 증축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자금이 부족하여 1971년 초여름까지 지연되다가 선교사 조 가맨(Joe Garman)과 김찬영의 도움으로 1972년 초여름에 완공되었다. 그해 1972년 6월에 힐과 그의 가족은 한국에서의 선교사역을 완전히 접고 모든 사역을 김찬영과 패츄리샤(Patricia) 선교사내외에게 위임하고 귀국하였다. 이때로부터 90년대 말까지 근 30년간 충청이남지역의 교회들과 목회자들은 김은석 목사와 힐 요한 선교사에 이어 김찬영 목사의 지도력아래 놓이게 되었다.
<사진설명> 위의 사진들은 힐 요한 선교사의 마지막 학기였던 1972년 3월과 6월에 각각 찍은 것이다. 3월 개강기념 사진(상)에서는 현관 2층 상단에 교명을 새기기 위한 작업이 진행 중인 것을 볼 수 있고, 6월 송별 사진(하)에서는 2층 공사가 완료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 사진은 힐 요한 선교사 내외가 한국에서의 선교사역을 완전히 접고 모든 사역을 김찬영 목사 내외에게 위임하고 귀국하기 직전에 촬영한 송별사진이다. 2층의 창밖으로 커튼이 휘날리고 있다. 중앙 상단은 한글로 반달 모양으로 ‘한국성서신학교’라고 음각(陰刻)하였고, 밑에는 일직선으로 ‘KOREA BIBLE SEMINARY’라고 새겼다.
3. 힐 요한 선교사의 제자들(1960-71년) 1960년대를 대전시 서구 가장동 21-5번지 신학교에서 보낸 학생들이 정확히 몇 명이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 1972년에 힐은 졸업생이 90여명에 이른다고만 하였다. 힐 요한 선교사가 1960년대 기간에 찍은 사진들을 살펴보면, 연대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한 가지 도움이 될 수 있었던 팁은 김찬영 목사(한양대 교육학 박사), 이신 목사(밴더빌트대 신학박사), 김히영 교수의 도미(渡美)시점이다. 김찬영 박사는 힐과 함께 부산에서 올라와 한국성서신학교에서 힐 요한 선교사의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영어를 가르치다가 1962년 말 혹은 63년 초경에 입대하였고, 1965년 9월 5일에 도미(渡美)하여 학업을 마치고 70년 11월 15일 귀국하였다. 이신 박사는 1966년 9월에 도미하여 71년 8월에 신학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왔다. 그리고 김히영 교수는 63년 봄부터 71년 8월 12일 음악선교사로 미국에 이민 갈 때까지 힐 요한 선교사의 통역과 음악교수를 맡았다. 따라서 김찬영 목사가 함께한 사진은 59년 말부터 62년까지이며, 이신 목사가 함께 사진은 65년까지이며, 김희영 교수가 함께한 사진은 63년 이후 70년까지이다. 이곳에 실린 졸업 또는 재학생들의 이름은 파악 가능한 경우에 한한 것이며, 졸업생만 95명에 이른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 가운데 대략 25퍼센트 정도만 그리스도의 교회에 끝까지 남아 사역하였다. 이 25퍼센트는 70년대 이후 한성신학교 또는 한민학교 졸업생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잔류한 수치보다 월등히 높은 것이다. 1970-80년대는 한국에 전도 폭발이 있었던 시대였으므로 졸업생들 가운데 다수가 타 교단에 들어가 성공적으로 목회사역을 이어갔고, 학업을 지속하여 학위를 갖추는데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들 중에는 복음교회의 윤기열 목사, 라명환 목사, 홍성교회의 유기성 목사, 인천장로교회의 최정성 목사(한성신학교 교수 엮임), 대천교회의 장세동 목사, 예산교회의 신성철 목사, 인천감리교회의 천명화 목사(한성신학교 교수 엮임) 등이 있다. 1970년대에는 미국으로 이민을 간 졸업생들이 꽤 많았다. 이들 중 다수가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여 시무하였고, 사업에도 성공하였다. (1)추정 가능한 졸업생 명단
- 제1회(61년 12월): 고재윤, 윤기열, 김영애
- 제2회(62년 6월): 김송차, 조사환(태영)
- 제3회(62년 12월): 안일승, 인원영, 남충열, 유정숙, 최명순
- 제4회(63년 12월): 신영기, 최창운, 송명희, 이은수
- 제5회(64년 12월): 임홍만, 박병문, 최용호
- 제6회(65년 6월): 이영선, 하복례, 박경식, 김인숙, 김도영, 김은영, 남동식, 최금생, 강신웅, 김승일, 한욱동, 박문자
- 제7회(65년 12월): 유근희, 최태시, 천명화, 유문자, 김재업, 라명환, 박영자
- 제8회(66년 6월): 고원필, 김경주, 조규석
- 제9회(66년 12월): 송행자, 김영애, 이백호, 김준배
- 제10회(67년 6월): 최정성, 이덕환, 박태규, 조오환, 박근화, 유기성
- 제11회(67년 12월): 김은미
- 제12회(68년 7월): 김재술, 석만영, 최중원, 이용복, 임병선
- 제13회(68년 12월): 현정규, 김호규, 이정식, 김규화,
- 제14회(69년 6월): 안병호, 박군희, 나몽기, 최이선
- 제15회(69년 12월): 장휘명, 채동수, 김수영, 정진성, 김용임, 최세동, 김순철, 이영호
- 제16회(70년 6월): 함태욱
- 제17회(70년 12월): 김영현, 전금자, 최송희
- 제18회(71년 6월): 송완현, 김정례, 순동식, 김동식
- 제19회(71년 12월): 오순덕, 박옥채, 강신의, 이사운, 장건일, 지정자, 조경숙, 엄정자, 유덕례
- 제20회(72년 12월): 박종서, 안승학, 이선재, 조남중, 권영옥, 주형근, 오홍련. <총 95명>
(2)힐 선교사에게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가나다순)
- 강신웅, 강신의, 고원필, 고재윤, 권영옥, 권오천, 김경주,
- 김규화, 김도영, 김동식, 김복례, 김성철, 김송차, 김수영,
- 김순철, 김승일, 김영애, 김영현, 김용임, 김은미, 김은영,
- 김인숙, 김재술, 김재업, 김정례, 김준배, 김형주, 김호규,
- 김효자, 나몽기, 남동식, 남충열, 라명환, 문안심, 박경식,
- 박군희, 박근화, 박남용, 박문자, 박병문, 박영자, 박옥채,
- 박종서, 박태규, 서광석, 석만영, 송명희, 송완현, 송행자,
- 순동식, 신성철, 신영기, 안병호, 안승학, 안일승, 양태윤,
- 엄정자, 오순덕, 오홍련, 유근희, 유기성, 유덕례, 유문자,
- 유정숙, 유창윤, 윤기열, 이덕환, 이백호, 이선재, 이사운,
- 이영선, 이영호, 이용복, 이은수, 이정식, 이종대, 이춘만,
- 이춘식, 이홍렬, 인원영, 임병선, 임영일, 임홍만, 장건일,
- 장휘명, 전금자, 전상희, 정수모, 정진성, 조경숙, 조규석,
- 조남중, 조동호, 조성식, 조사환(태영), 조순례, 조오환, 주형근,
- 지정자, 지철희, 채동수, 천명화, 최금생, 최명순, 최세동,
- 최송희, 최용호, 최이선, 최정성, 최중원, 최창운, 최태시,
- 최창효, 하복례, 한규덕, 한욱동, 함태욱, 현정규, 홍순기<총 119명>
(3)미국에서 활동 중인 동문들 이은수 목사(본과1회, 뉴욕 동산교회), 신영기 목사(제4회, 일리노이 병원 정신과 상담의사), 박경식 목사와 김인숙 사모(제6회, 목회은퇴 후 기도원 사역), 김히영 교수(국제 와이즈맨 클럽 총재 역임), 유근희 박사(제7회,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 아시안/태평양 교회 담당자 역임), 이영선 사모(제6회), 하복례 전도사(제6회), 최태시 목사(제7회), 고원필 목사(제8회), 이백호 목사와 박근화 사모(제9회), 현정규 목사(13회)와 오순덕 사모(제19회), 유정숙, 최창효, 장휘명 목사, 김순철 목사(제15회, 시카고 기독교 방송국 국장) 등이 있다. 이영선(6회) 사모의 남편은 미국 C.M.A 교단 감독을 역임하였다.
4. 힐 요한 선교사의 교회 후원 힐 요한 선교사는 많은 돈을 모금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늘 선교비가 부족하였다. 그가 활동했던 시절은 한국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도와야할 곳이 너무 많았다. 이런 사정 때문에 힐은 생활비를 줄여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힐은, 노봉욱의 <힐 요한 선교사의 한국 선교> 14-15쪽, “발간사”에 의하면, “나는 천국에 갈 때까지 이 일(한국 교회 후원)을 계속할 것이다”(I will continue to do this work until I go into Heaven)고 한 자신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켜냈다. 힐 요한 선교사는 1960년대 기간에 충청이남지역에서 일생 중에 가장 활발한 사역을 펼쳤고, 생애 절정기인 50대를 보냈다. 거의 매주일 지방의 교회들을 방문하여 설교하고 침례를 베풀었으며 예배당 건축과 목회자들의 생활을 도왔다. 여기에 그가 남긴 1960년대 사진들 가운데 몇 장만 골라서 소개하였다.
5. 힐 요한 선교사의 동료들 힐 요한 선교사의 동료들은, 김은석 목사의 동료들도 그렇지만, 대부분이 20-30대의 젊은이들이었다. 사진만으로 볼 때는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모두 성숙해 보이지만, 그들의 출생연도를 따져보면, 20대 또는 30대인 경우가 상당히 많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끌었던 지도자들은 대부분 이처럼 젊은 청장년들이었다. 아래에 소개한 사진들 속의 인물들도 성낙소, 김은석 등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20-30대 청장년들이다. 아래의 사진은 연대와 장소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몇 장 안 되는 성낙소 목사의 사진이다. 성낙소는 필운동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1940-50년대 기간에 힐 요한 선교사를 도와 신학교 교수로 섬겼다.
다음의 사진 역시 연대와 장소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몇 장 안 되는 김은석 목사의 사진이다. 이 사진 속에서 김은석의 유일한 유품인 성경과 가방을 볼 수 있다. 사진 속의 교회는 높은 산 아래 위치하고 있고, 부강교회와 선화교회와도 모습이 달라서 자신이 목회한 교회는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1)고광석 목사 고광석 목사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다. 그러나 그는 1950년대 중반부터 김은석 목사의 제자와 동역자로 활동하였고, 힐 요한 선교사가 대전에 정착한 1959년 초창기부터 시작하여 60년대 내내 힐 선교사의 사역에도 적극 동참하였다.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1953-59년)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내용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고광석은 신화신학 성경연구회 학생이었다. 고광석은 1955년 충북 괴산군 소수면 소수교회에서 진행된 백일집중공부에 참여하였다. 김은석은 이때 이미 그를 전도사로 호칭하였다. 1955년 5월 27일자 메모에 의하면, 이날 남녀 합하여 18명이 공부하였는데, “소수교회당에서 백 일간에 공부하는 중에 공부함. 김재순 목사 서울 가심. 고광석 전도사님은 권영수, 전도희 두 분과 전도 가심.”이라고 적었다.
둘째, 고광석은 바울의 디모데처럼 김은석의 충실한 제자였다. 김은석이 가는 곳에 바늘과 실처럼 동행하였다. 1955년 6월 18일(토) 오후에 김은석, 김완례 부부와 동행하였고, 7월 8일에는 김은석과 함께 청주에서 소수교회로 향하였다. 또 12월 21일(수) 아침에는 김은석과 함께 서울성서신학교 숙사에서 지냈다. 1957년 4월 27일(토)에는 고광석이 김은석, 김규상 등과 함께 전남 해남군 마산면 장성리에 머물렀다. 김은석 목사의 병문안 또는 부름을 받고 자택을 방문한 기록이 1958년 1월 27일까지 몇 차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셋째, 고광석은,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들을 근거로 볼 때,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 출신이었거나 충북 청주시 영운동이 거주지였거나, 1956년 어느 시점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영운동에 개척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은석 목사는 1956년 6월 23일(토) 아침에 청주역에서 기차타고 소수교회로 가기 위해서 강신규 자매와 함께 영운동 고광석 전도사 집에서 나온 것으로 기록하였고, 8월 17일(금)자 기록에 의하면, 김은석이 김은영, 고광석, 노의수와 함께 충북 청주시 영운동 교회당에 머문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로 영운동 그리스도의 교회는 김은석의 주소록에 남아있지만, 힐 요한의 주소록에서는 찾을 수 없다. 넷째, 고광석은 병약하였다. 1955년 7월 19일 아침에 김은석이 대전 자택에서 부강으로 향하였는데, 부강에 도착해 보니, 고광석 형제가 병중이어서 수리교회에 가지 못한 것을 알게 되었다. 1955년 8월 16일 김은석은 사모 김완례와 김옥여, 이원노, 강신규와 더불어 병원에 입원한 고광석 전도사를 병문안하고, 대전 판암동 그리스도의 교회 애생원(愛生園)을 방문하였다. 고광석 목사는 1960년대 힐 요한 선교사의 선교사역에도 적극 동참하였다. 힐 요한 선교사는 가족과 함께 1959년 8월에 부산을 통해서 입국하여 대전에 정착하였다. 1959년 12월 1일 심영진 목사가 시무하는 충남 대덕구 유천면 도마리, 성화교회에서 신학교를 개교하고 예배당 앞에서 기념 촬영한 사진에 고광석이 힐 요한 부부, 김은석, 심영진, 김태수, 오재건, 고재윤, 김찬영 등과 함께하였고, 수업시간 혹은 개강예배에도 참석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듬해 1960년에는 고광석이 시무하던 선화동교회로 옮겨 수업을 계속하였다. 이후 1960년대 중반에 한국성서신학교에서 개최된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에 참석하였고, 힐 선교사가 남긴 사진들에서 그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2) 지철희 목사 지철희 목사는 1937년 8월 29일생으로써 소년시절부터 그리스도의 교회 목회자들을 자주 접할 기회를 가졌다. 12세 무렵에 정찬성 목사가 충북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 교회를 지철희의 누나 집에서 시작한바가 있고, 20대에는 박점상 목사로부터 전남 무안군 현강면 평산리 교회의 정귀남 집사의 딸을 소개받아 김재순 목사의 약혼식 주례와 김은석 목사의 결혼식 주례로 1957년 11월 말에 결혼하였다. 김정만 목사도 결혼식에 참석하여 축하해 주었다. 지철희는 젊어서 김은석 목사를 비롯하여 다수의 초기 목회자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충북 청원군 부용면 부강교회와 충북 괴산군 소수면 소수교회에서 이뤄진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 참석하여 강의와 설교를 듣고 목회자가 되었다. 이 무렵 함께 공부한 사람들은 이혜순, 나연찬, 김태수, 김철수, 심영진, 박병우, 김정만, 박점상, 김은성, 김은영, 모갑경 등이었다. 지철희 목사는 이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였다.
당시 부강에서 성경공부를 하려고 모인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가난했다. 나도 그랬지만, 대략 모인 사람들이 100-150명 이상이었는데, 항상 있는 사람은 7-8명 정도로써 대략 식량을 가져오는데 1-2말 가져오고 반찬도 제각기 가져오고 그래서 부족한 식량을 채우기 위해서 부강 근처 들녘으로 가서 버려진 배춧잎 무청, 고구마줄기 같은 것 그리고 장날이면 장터에 버려진 먹을 만한 것들을 주어다가 충당하고 없으면 금식하고 그러다가 힘들면 집으로 돌아갔다. 마치 전기충전소와 같이 은혜와 말씀이 그리우면 또 약간의 양식을 가지고 찾아왔다. 그러면서도 불만이 없고 그저 형제자매 모매님 하면서 걱정해주고 위로하였다. 환자가 많이 왔는데, 함께 간호하고 기도하며 누가 무엇을 시키지도 않고 무엇을 하라는 감독도 없었다. 전남 지방에서 많은 성도들이 왔고, 주로 청주와 대전근방에서 왔다. 충주에서 이종석, 이갑수, 정석기, 이원로(노), 조춘식, 김정만, 지철희, 이안식, 이학재 등이 왔다. 좀 더 이야기를 하자면, 설교를 듣다가 너무나 기쁘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찬송이 나오고, 결국에는 설교자나 듣는 이가 자연히 합창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무릎 꿇고 기도하고 성령이 강하게 역사 하시면 무릎을 꿇은 채로 30-40㎝까지 뛰기도 하였다. 얼마나 뛰었는지 결국 마루 장까지 꺼졌다 한다. 그러다가 기쁨을 이기지 못하면 부강 장날 거리를 급히 오고 가면서 외치기를 이 썩은 보리 찬밥 덩어리들아 회개하고 돌아와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라. 생명 떡으로 배불림을 받고 쉼을 받으라. 그리하면 영생을 얻으리라 라고 외쳤다.
고 김은석 목사님의 설교는 대략 열변이 아니고 조용한 강의식이었다. 신구약 성경을 오가면서 구약에서 물으면 신약에서 답을 하고 신약에서 물으면 구약에서 답이 나오는데 정확하고 일반적으로 아는 답보다 훨씬 새로웠다. 그래서 듣는 이가 무릎을 치며 기뻐하고 감사하곤 했다. 내가 보기로는 어느 성경학자보다도 더 성경을 많이 알고 성경을 통달한 분이었다. 어느 산이든 풀밭이든 앉으면 그 자리에서 밤새워 기도하고 쉬고 먹는 시간외에는 성경을 보고 찾는데, 성경이 걸레쪽같이 낡고 찢어진 것을 보았다. 그래서 많은 목사들이나 성도들이 존경하고 그에게 모인 것 같다.
지철희 목사는 최요한 목사가 평산리 처가 마을에 1947년 1월초에 세운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결혼한 1957년에 첫 목회를 시작하였다. 평산리 교회는 1960년대에 대전 한국성서신학교에서 가르친 임춘봉 목사와 박점상 목사가 목회하였고, 지철희의 장인인 정귀남 집사(전도사)가 예배를 인도하던 중에 갈라져 오늘날에는 무안 현경현화 그리스도님의 교회로 이어가고 있다.
참고로 성낙소 목사는 단기 4286(1953)년 7월 3일에 <신약교회 목회학>를 발행한바 있다. 이 귀한 책을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가 지철희 목사로부터 기증받아 매우 어렵게 편집한바가 있다. 지철희는 이 책을 장인 정귀남 집사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하였으나 책 뒷장 겉표지에는 “평산 그리스도의 교회 1958년 2월 10일 구입 지철휘”라고 적혀 있다. 김은석 목사가 신화신학 성경연구회 집중강의 일정을 통보하기 위해서 보낸 1958년 5월 5일자 전보수신자에 지철희 목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김은석은 1958년 7월 10일부터 소년성경학이 개설된다는 것과 8월 1일부터 9월 10일까지 성경공부가 있다는 통신문을 총 54명과 6곳의 교회에 보내었는데, 그 속에도 지철희 목사가 포함되어 있다. 이후 지철희 목사는 한국성서신학교에서 학업을 지속하였고, 1973년에 제21회로 졸업하였다. 지철희는 일평생 교회개척에 힘을 썼으며, 개척 후 교회가 성장하면 미련 없이 새로운 개척지를 향하여 떠나곤 하였다. 충남 금산군 추부면 성당리 벧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오랫동안 시무하였고, 암으로 투병 중에 73세의 나이로 2010년 11월 21일 소천 하였다.
3)노봉욱 장로 노봉욱 장로는 1959년 10월 15일 충남 논산군 연무읍 동산리에 에덴보육원을 설립하였다. 이어 연무 그리스도의 교회, 세광고등공민학교, 학교법인 순의도 학원, 충남 보육교사 교육원 등을 설립 운영하였다. 에덴보육원 원장 또는 이사장으로서 노봉욱 장로는 40여 년간 700여명의 고아들을 길러냈다. 노봉욱 장로는 나희화 사모로부터 3남2녀를 낳았으나 원생들과 똑같이 생활하며 형 동생 누나 언니 등으로 친형제자매의 의를 맺도록 하였다. 노봉욱은 원주대학 사회사업과를 졸업하였고, 중앙대 사회개발 대학원 사회교육과를 수료하였다. 오신초등학교와 서울 호제초둥학교에서 교사로서 가르쳤고, 세광고등공민학교 설립 및 동교 교장, 학교법인 순의도 학원 설립 및 순의도 여중교장, 충남 보육교사 교육원 설립 및 동원장, 사회복지법인 에덴원 이사장 및 에덴보육원 원장, 사단법인 한국 아동복지시설 연합회 충남도지회장, 사회복지법인 한국사회복지협의회 충남도 부회장, 재단법인 한국그리스도의 교회 유지재단 이사 및 이사장,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협의회 부회장, 논산 YMCA 설립 및 초대이사장, 중국 조선족 어린이 사랑 회장을 역임하였다. 상훈으로는 충남도지사 공로표창 2회, 보건복지부장판 공로표창 2회, 국무총리 공로표창, 제3회 전국사회복지대회 대회장상, 국민포장 수훈,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하였다.
노봉욱은 평남 용강군 오신면 내덕리 노촌 (노씨만 모여 사는 마을) 부락에서 태어나 거기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였고,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집에서 약 4Km 떨어진 덕해 장로교회를 다녔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노봉욱은 15세에 서울로 올라와 휘문중학교에 입학하여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하숙을 정하였다.
중학교에 입학한 1939년 봄 첫 주일 때 성경 찬송가를 옆에 끼고 골목길을 나선 후 찬송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 곳이 돈암 그리스도의 교회였다. 그곳에서 담임 목사였던 최상현 목사와 힐 요한 선교사를 만났고, 그분의 자녀인 최윤권 목사, 최윤모 장로도 거기서 만났다. 이후 노봉욱은 힐의 동료로서 일평생을 동역하였다. 노봉욱은 돈암교회와의 관계를 <힐 요한 선교사의 한국 선교> 92쪽 “나와의 만남”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나의 인생은 돈암 그리스도의 교회로부터 빛나게 펼쳐졌다. 나는 돈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집사가 되었고, 주교 반사, 유년부 부장도 지냈다. 최상현 목사님으로부터는 너무나 큰 사랑과 은혜를 입었다. 아기가 태어나면 이름도 지어주셨고, 큰 병이 났을 때면 병원비도 대어 주셨고, 그러던 분이 6,25사변 때 이북으로 납치 당하셨으니.... 그뿐 아니라 지금도 최목사님 댁과 사돈관계까지 맺고 있고, 이렇게 굳게 맺어진 인연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John J. Hill 선교사님과도 그 때부터 지금까지 (그분 연세 93세) 주안에서의 사랑의 교제, 그분 선교 사업을 돕게 되었으니... 이상의 돈암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는 너무나 놀랍고 나의 인생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인 것을 믿고 그분께 감사 찬송을 드리는 바이다. 4)심영진 목사(1921.2.28-) 심영진 목사와 김은석 목사의 관계를 알 수 있는 근거는 몇 장의 사진들뿐이다. 1958년 4월 13일 산상연합집회 중에 김은석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고, 한국성서신학교가 설립된 직후, 교수로서 1959-60년 겨울에 힐 선교사 부부, 김은석, 김태수 및 오재건, 고재윤, 고광석, 김찬영 등과 함께 자신이 시무한 충남 대덕구 유천면 도마리 성화교회(현 대전 그리스도의 교회) 앞에서 찍은 사진이 있지만, 심영진의 이름은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나 통신 및 신화신학 성경연구회 명단에서 찾을 수 없다. 심영진은 유교와 불교를 전전하며 10여년을 방황하다가 계시를 받고 개종하였다. 1953년 충남 대덕군 유천면 도마리 309번지 유천면장 손기섭씨 가정에서 성도 9명으로 장로교회를 창립하였고, 1954년 4월에 현재의 대전 그리스도의 교회 장소로 옮겨 천막교회를 세웠다. 1958년 8월에는 흙벽돌로 20평 교회를 신축하고 교회명칭을 성화교회로 하였다. 한국성서신학교가 1959년 12월 1일에 시작된 장소가 바로 이 건물이었다.
심영진은 바로 이 무렵, 즉 1958년경에 김은석을 만나 환원하였다. 성경을 읽고 세례에 대해서 연구하다가 그가 받은 약식세례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그 일로 고심하고 있던 차에 마침 김은석 목사가 대전 은행동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저물도록 세례에 관해서 토론하였으며, 그 후 일주일간 매일 만나 성경을 놓고 토론하던 중에 더욱 침례를 받아야겠다는 결심을 갖게 되었다. 같은 주간에 방서리 교회에서 김은석 목사가 인도하는 부흥회가 있었는데, 함께 가자는 권유를 받고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돌아왔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심영진은 1958년 4월 13일 산상연합집회에 참석한 기념으로 김은석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집회에서 돌아온 심영진 목사는 김은석 목사로부터 부부가 대전 유등천에서 침례를 받았다. 심영진은 이 사실을 교회에 알리고 양심상 장로교회를 할 수 없다고 설득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시켰다. 1963년 9월에 시멘블록과 스레트로 40평 교회를 신축한 후 성화교회(聖火敎會)를 도마기독지교회로 개명하였다. 그리고 1975년 12월 4일에 연화 벽돌로 91평 교회를 신축하고 교회명칭을 대전 그리스도의 교회로 변경하였다. 그 후 5년 만에 현재의 건물인 500평 규모의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1958년에 환원한 심영진 목사는 1960년대 기간에 한국성서신학교에서 교수로서 가르쳤고 힐 요한 선교사와 협력하였다. 또 심영진 목사는 1959년에 개최된 제1회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에 성낙소, 장성만, 최요열, 이신 등과 함께 참석하였고, ‘신약교회로의 환원’을 주제로 1961년 8월 17일 부강교회에서 개최된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에도 힐 요한, 장성만, 박재관, 김동열, 이종만, 정인소. 김찬영. 김성철, 이신, 장주열, 성낙소, 안일승, 고재윤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심영진은 현재의 대전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30여 년 동안 사역하면서 <계시록 연의>, <계시록 서기>, <성막 조성론>, <선지자의 사명>, <창조와 섭리>를 저술하였고, 은퇴하고 서울 돈암동교회를 담임하다가 다시 대전으로 내려와 개척교회를 섬겼다. 사모 박영자로 더불어 일곱 남매를 두었다.
5)김치연 목사
김치연 목사는 평안남도 중화군(당시) 출신으로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하였다. 오랫동안 대전교도소 교무과장으로 있으면서 선화동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겼고, 1965년부터
1970년대 기간에는 한국성서신학교에서 교수로서 가르쳤다. 퇴임 후 대전 시온 그리스도의 교회를 시무하였다. 김치연은 1949년에 교도관의 일을 시작하였으며, 1967년 10월 28일자 동아일보 7면 보도에 의하면, 교도관의 날을 맞아 대전교도소장이 18년 동안의 교도관생활에서 1백46명의 좌익수들을 전향시키고 무의무탁한 남녀수형자들에게 짝지 맺어준 공로를 인정하여 “대전교도소 교무과장 金致淵(김치연)(44)씨에게 표창장을 수여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또 1984년에는 대전, 대구, 전주, 청주 등을 돌면서 무려 1050명의 좌익수를 전향시킨 공로로 법무부로부터 교정대상 교화부문을 수상하였다. 이 일로 김대중 노무현 문민정부 때, 여러 차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는 증언을 들었다.
1974년 8월 15일 국립극장에서 거행된 광복절 행사 도중에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려다가 육영수 여사를 사망케 한 23세의 재일교포 문세광에게 1974년 11월 14일 사형이 집행될 때 김치연 목사가 3분 동안 문세광을 위해 기도하는 동안 문세광은 두 손을 마주잡은 채 고개를 숙이고 계속 울먹였다고 전한다. 김치연 목사는 노환으로 2013년 10월 29일 소천 하였다.
6)김히영 교수 김히영 교수는 김찬영 목사가 군에 입대하면서 그의 후임으로 1963년 봄에 힐 요한 선교사의 부름을 받고 한국성서신학교에서 통역과 음악교수로 수고하였다. 이 무렵 신학교의 이사들은 이종만 목사, 김현숙 전도사, 임명진 장로, 노봉욱 원장이었고, 교수들로는 이신 목사, 임춘봉 목사(교가작사자), 심영진 목사, 최요열 목사 등이었다. 김히영 교수는 교가를 작곡하였다. 그의 지도아래 최정성, 이백호와 같은 재학생들로 구성된 남성4중창단이 결성되었고, 찬양사역에 힘썼다. 한국성서신학교에 오기 전 김히영은 1957년 이래 알렉스 빌즈(Alex and Betty Bills)가 창립한 부산 소재 기독교 방송 선교부(Korea Christian Mission)에서 방송 프로제작, 음악편집을 맡아 일하였다. 방송선교부에 근무하는 동안 기독교 방송 선교부 전속 한국 최초의 남성 사중창단, ‘넷소리’를 창립하였고, 설교 통역 등을 담당하였다. 1959-60년 무렵에 이신 목사도 부산에 내려가 방송설교를 하였다. 빌즈 선교사는 방송국 허가를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끝까지 허가를 받지 못하자 크게 실망한 나머지 가족과 함께 1961년에 고향인 미국 텍사스 주로 돌아갔다. 김히영은 1971년 8월 12일 음악선교사로 가족과 함께 미국 미주리 주 조플린 소재 오자크 신학대학으로 이민하였다. 조플린에서 1974년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여 근 20년간 봉제공장을 운영하면서 와이즈멘 활동을 하였다. 이후 그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월셔 와이즈멘 클럽회장(197-78), 미주 남서 지구 후리웰이 지방장(1981-82), 미주 태평양 남서지구 총재(1987-88), 미주 지역 총재(1955-96), 국제 총재(1988-99) 등을 동양인 최초로 역임하였다.
7)고재윤 목사
고재윤 목사는 한국성서신학교를 1961년에 제1회로 졸업하였다. 그는 한국성서신학교가 개교된 1959년 12월 1일부터 수강한 첫 학생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개교직후 충남 대덕구 유천면 도마리, 성화교회(현 대전 그리스도의 교회) 예배당 앞에서 기념 촬영한 1959-60년 겨울 단체 사진 속에서 고재윤이 발견되고 있다. 고재윤은 졸업 후 목회를 시작하여 문암 그리스도의 교회, 신갈 그리스도의 교회(1983-1987년) 등에서 사역하였다. 1970년대에는 한국성서신학교에서 다년간 근무하였다.
8)안일승 목사 안일승 목사는 한국성서신학교를 1962년에 제3회로 졸업한 후 문암, 삼광 등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사역하였다. 특히 그는 힐 요한 선교사가 미국에서 보낸 후원금을 해당 교회들에 보내하는 업무를 오랫동안 맡아 보았다. 9)김순철 목사 김순철 목사는 한국성서신학교를 1969년에 제15회로 졸업하였다. 그는 대전 그리스도의 교회 출신으로써 졸업 후 충남 병천에서 목회하였다. 미국으로 건너가 1982년부터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새소망교회를 개척하여 18년간 사역하다가 2001년부터는 1978년에 개국하여 20만 한인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는 시카고 한인기독방송국을 맡아 수고하고 있다. 이 방송은 주변 위스콘신 주부터 인디아나 주까지 청취가 가능하다. 채널 임대비용으로 매월 2만 5천불이 들어가는 큰 선교 사업이다. 시카고기독교방송은 아침 6시부터 밤12시까지 송출되며, 선교사 인터뷰, 선교사의 시간, 설교, 선교현장 리포트, 찬양 등으로 꾸며진다. 김순철 목사는 방송선교의 위력에 대한 간증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어떤 분이 복잡한 일 때문에 자살을 결심하고 미시간호수에 빠져 죽으려고 차를 몰고 가다가 기독교방송 설교를 듣고 자살을 포기했대요. 호수로 차를 몰고 가면서 들은 방송설교 내용이 “자살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인간적으로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살인이다. 죽을 마음을 가질 정도로 독한 생각을 품었다면, 반대로 잘 살아보겠다는 마음을 강하게 먹으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는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돌이켰다고 해요. 김순철은 시카고지역교회 협의회장, 교역자회 회장, 지역평통자문위원 8년, 그리스도의 교회 미주한인교회총회 총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 한성미주동문회 회장과 맥코믹 신학교 동문회장을 맡고 있다.
2011년 11월 19일에는 한성미주동문회 회장의 자격으로 힐 요한 선교사 추모 2주기를 맞이하여 힐 요한 선교사의 1960년대 유품(사진, 등)을 한국에 가지고 나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총회에 전달하는 노고와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고재윤, 안일승, 김순철 이외에도 최용호(64년, 제5회, 한성 신학교 교수, 다락 그리스도의 교회 은퇴), 최금생(65년, 제6회, YMCA간사, 한성 신학교 교수, 대전횃불회장 역임, 열린 그리스도의 교회). 박문자(65년, 제6회, 부곡 그리스도의 교회), 유근희(65년, 제7회, 박사, 북미주 태평양/아시아 제자들 그리스도의 교회 담당자 은퇴), 최중원(68년, 제12회, 장수 계월 그리스도의 교회), 김호규(68년, 제13회, 경남정보대학 교목실장 및 학장, 대학교회 목사 역임), 안병호(69년, 제14회, 장호원 그리스도의 교회), 장휘명(69년, 제15회, 미국), 김동식(71년, 제18회, 주월 산돌 그리스도의 교회 은퇴), 박옥채(71년, 제19회, 소망 그리스도의 교회), 조남중(72년, 제20회, 평리 그리스도의 교회), 주형근, (72년, 제20회, 초대 그리스도의 교회) 등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평생을 헌신하였거나 하고 있다. 이들 중 몇 사람은 제3부에서 다뤄지게 될 것이다. 10)오재건 장로(1938.5.15- ) 오재건 장로는 대전에서 가장 큰 두 개의 그리스도의 교회, 대전교회와 성화교회의 창립멤버이자 공로자이다. 16살 때인 1953년 대전교회가 가정에서 시작될 무렵부터 출석하였다. 1952년 15살 때 부친을 여윈 14대 종손이었지만, 교회를 출석하면서부터는 제사를 거부하는 예수쟁이로 소문이 났고, 군에 입대해서도 온갖 핍박을 견디며 교회에 출석하여 목사라는 별명을 얻고, 교사와 성가대원으로 섬겼다. 극심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온갖 고생을 무릅쓰며 주경야독하였고, 모친께 효도하며 동생들을 보살펴 노인회의 추천으로 효자 상을 받기도 하였다. 집안의 어른들이 14대 종손이 되어 제사를 거부하는 예수쟁이가 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심하게 핍박하였으나 포기하지 않고 전도하여 입교한지 9년 만에 모친을 시작으로 친인척들을 모두 구원시켰고, 집안에서 목회자와 교회의 중직들이 배출되게 하였다. 그는 입교한 날로부터 미신을 타파하고 철저하게 주일을 지켰으므로, 궁핍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주일날에는 품을 팔러가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물질의 복을 주셨고, 수많은 신앙체험들을 갖게 하셨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1999년에 작성한 신앙 체험기,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에 실려 있다.
오재건은 대전교회가 천막교회, 흙담교회, 20평 흙벽돌교회, 33평 시멘트블록교회로 바뀔 때마다 앞장서서 건축 일에 헌신하였고, 28년간 출석하는 동안 주일학교 교사, 구역예배 인도자, 네 번의 교회당 건축, 재무, 염 등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였다. 그러나 대전교회가 크게 성장하는 과정에서 교회재산의 공동소유화 및 재정관리의 합리화를 건의하였다가 담임목사의 반발로 갈등을 빚던 중 1981년에 이미 9년 전에 대전교회를 떠났던 방봉권, 임춘자, 정삼규 등, 옛 교우들과 재결합하여 탁구장으로 사용했던 큰 도로가 사택 2층에 성화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자를 모신 후 발전시켜 나갔다. 1983년 5월 20일에는 3층으로 확장하여 2층은 사택 20평 교육관 20평으로 쓰고 3층 40평을 본당으로 사용하다가 건평 약 250평을 새로 건축하여 1992년 6월 20일 헌당하였다.
이밖에도 오재건은 교파를 초월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국내의 여러 교회들과 미국,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키르기스스탄, 타지크스탄, 필리핀, 미얀마, 태국, 베트남, 대만, 중국 등 해외의 많은 나라들에서 ‘사랑의 터치’라 일컫는 일종의 의료봉사를 통해서 많은 이들의 병을 고쳤으며, 200여개 교회들의 전도활동에 큰 유익을 끼쳤다. 그는 또 1977년 봄에 정일호 목사가 충주시 교현동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할 당시, 교현동 산등성이에 대지 60평, 건평 25평되는 건물을 매입할 수 있는 자금을 헌금하였고, 이 건물은 오랫동안 충주교회의 교육관으로 쓰였다. 동년에 부강교회에 남아있던 147평의 대지가 소송에 휘말려 빼앗기게 되었을 때 소송비를 부담하여 승소판결을 받게 하였고, 소유권자인 김태수 목사가 미국으로 이민을 갈 당시 등기관리자로 있다가 연이어 부지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재단법인 크리스챤 밋숀에 넘겼다. 또 경북 영신 근처 상원 그리스도의 교회가 개척될 당시 200평대지 구입을 주선하였고, 성화교회의 일부 성도들과 함께 상원교회당과 사택의 벽을 쌓았다.
11)버지니아 힐(Virginia Hill) 힐 요한 선교사의 맏딸로서 미국 미주리 주 조플린 시에 소재한 오자크기독대학(Ozark Christian College)에서 기독교 교육학을 전공하였다. 졸업 후 한국크리스챤밋숀(Christian Mission to South Korea)을 설립하여 1966년 8월 29일 입국하여 3년만인 1969년 5월 30일 귀국하였다. 한국성서신학교에 머무는 동안 기독교교육, 영어회화, 영어성경을 강의하였고, 여성3중창을 지도하여 조 가맨 선교사의 부흥전도여행(1967년
10월 18일부터 12월 30일까지) 때 찬양을 불렀다. 버지니아 힐의 서신에 의하면, 부흥전도여행기간에 결신하고 침례를 받은 사람이 일천 명이 넘었다고 한다. 또 충남대학교에서 영어회화를 매주 4시간씩 강의하였고, 매주 화요일 저녁에 6명의 그리스도인 의사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으며, 매주 수요일 저녁에 믿지 않는 직업군인 두 명과 몇몇 여성들에게 전도목적으로 영어성경을 가르치면서 그들의 회심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기도하였다. 또 매주 목요일 저녁에는 30여명의 간호실습생들에게 영어성경을 가르쳤고, 매주 금요일 저녁에는 50여명이 참석하는 대학생친목회(University Bible Fellowship Club)에서 영어성경을 가르쳤다. 이밖에도 선교사 자녀들을 가르쳤다. 가르치는 일말고도 틈틈이 영아원, 논산 에덴 보육원, 부산 성광원, 임홍만 목사의 장호원 기독중학교, 교회들을 방문하고, 극빈 속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신학생들, 목회자들, 영아들, 고아들, 복음중학교 학생들, 대전 수침교 아래 거지들의 의식주를 걱정하며 지속적으로 미국의 형제들에게 목적헌금(임홍만 목사의 기독중학교, 논산 에덴 보육원, 부산 성광원, 한국성서신학교운영기금, 목회자후원기금 등), 특별지원(헌옷가지, 겨울옷가지, 기독교서적, 각종 사전류, 성서지리궤도, 성경, 카메라필름 등) 등을 요청하였다. 버지니아 힐의 서신에 의하면, 1966년에 마크 맥시 일본 주재 선교사가 한국성서신학교를 방문하였고, 한국성서신학교는 1967년 봄 학기에 52명이 등록하였으며, 6월에 남학생 5명, 여학생 1명이 졸업하였다. 동년 8월에 고하도에서 목회자 수련회가 개최되었고, 약 65명의 목회자들과 15명의 여전도사들이 참석하였다. (딕 래쉬에 의하면, 1971년의 목회자 수련회는 부산시 사상구 주례동 경남정보대학에서 있었다.) 버지니아 힐은 1968년 4월 18일에 논산 에덴보육원으로부터 15명의 고아들을 인수받아 대전 크리스천 보육원(Taejon Christian Orphanage)을 개원하였다. 보모로는 김은미, 김부금, 조선희, 김은희, 유문자 등이 수고하였고, 고아원은 세계보건기구 공무원인 엘리자베스 멈이 세내들어 거주하던 선교부의 일층에 있었다. 그 후 한국성서신학교 교내에 ‘스나이더 홀’이라 명명한 단층 주택이 건립되었는데, 대전 크리스천 보육원이 이 건물에 입주하였다. 미국 미시건 주립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정년퇴임한 로버트 스나이더(Robert M. Snyder) 박사는 이 건물이외에도 충남 논산군 연무읍 순의도 중학교 설립기금의 3분의 2와 부산 성광원 법인설립을 지원하였다. 보육원을 설립한 지 만 일 년이 지난 1969년 4월 30일에 버지니아 힐이 쓴 서신에 의하면, 보육원에 아이들이 23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버지니아는 한국에서의 모든 사역을 접고 그해 5월 30일에 본국으로 돌아갔다.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가는 부모인 힐 요한 선교사 내외와 함께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 3개월 후 한국에 나온 조와 린다 가맨(Joe and Linda Garman) 부부가 보육원과 신학교 관리를 안식년을 맞은 힐 선교사 내외를 대신해서 10개월간 책임졌다. 미국에 돌아간 버지니아는 하비 벤두어(Harvey Bendure)와 결혼하여 슬하에 세 명의 딸을 두었다. 버지니아 힐은 1967년에 한국의 주일 예배의 특징을 미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세하게 소개하였다. 그녀가 경험한 독특한 이 한국의 예배문화는 이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조차, 노년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젊은이들에게는 생소한 느낌을 줄 수 있고, 또 언젠가는 잊힌 문화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여기에 남기기로 하였다.
주일은 한 시간가량 걸리는 새벽 4시30분 기도회(찬양과 기도)로 시작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밥, 김치(맵게 절인 배추), 김 혹은 콩나물국, 그리고 종종, 운이 좋은 날이면, 계란 또는 말린 작은 생선으로 아침을 준비한다.
오전 9시에 어린이 주일학교가 있다. (대부분의 교회들은 성인주일학교가 없다. 대신에 주중에 모임을 갖는다.) 어린이 주일학교는 새신자 그리스도인 고등학교 소녀들 또는 청장년들에 의해 인도된다. 이 예배는 10시까지 이어진다. 대예배가 10시 30분에 시작된다. 그러나 찬양은 10시 15분 혹은 교인들이 오는 대로 곧바로 시작된다. 그들은 목회자를 위해 성미(쌀)주머니들을 들고 와 예배당 뒤쪽 성미상자에 넣는다. 그리고 남성은 예배당 한편 바닥에 그들의 자리를 잡는다. 반면에 여성들은 다른 편 바닥에 그들의 자리를 잡는다. 그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머리를 숙여 각자 기도를 한다. 개개인은 아끼고 또 아껴서 마련한 각자의 소중한 성경과 찬송가를 지참한다. 그들은 찬송가를 부른다. “저 멀리 푸른 언덕에.”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죄짐 맡은 우리 구주,” 기타 다른 자주 부르는 찬송가들을 부른다.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 작은 흙벽 건물이 폭발할 지경에 이른다. 그러고 나면 한 교인이 대표로 나와 기도한다. 그의 목소리는 감정에 따라 높낮이가 달라진다. 교인들, 특히 나이든 남성과 여성들은 감동에 따라 요동치며, 아멘으로 화답한다. 설교자는 성경을 봉독한 후 힘 있게 설교하며, 그리스도께 나오라고 초청한다. 초청송을 부른 후, 헌금송과 헌금기도를 드린다. 헌금을 걷기 위해 긴 막대기가 달린 헌금바구니를 남집사와 여집사들이 돌린다. 마지막으로 주의 만찬이 있는데, 대개의 경우 목사들이 집례한다. 장로들은 남성들에게, 여집사들은 여성들에게 분병과 분잔을 제공한다. 침례식은 날씨가 따뜻할 때 (때로는 심지어 겨울에도) 개울이나 강에서 집례된다. 때때로 가까운 목욕탕(‘오프로’ 혹은 커다란 일본식 욕탕)에서 집례된다. 점심식사는 아침식사와 거의 동일하다. 저녁식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7시 30분 혹은 여름인 경우 9시에도 시작되는 저녁예배에 참석한다. 저녁예배는 주의 만찬이 없는 것만 빼고는 오전 예배와 거의 동일하다.
12)해남
그리스도의 교회
6. 힐 요한 선교사의 1976-76년 복귀
1972년 6월에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던 힐 요한 선교사 부부가 불과 4년 만에 미국에서 하던 사역들을 접고 1976년 8월 16일 한국에 돌아와 이듬해 1977년에 돌아간 일이 있었다. 선교부와 신학교를 되돌려 받기 위해 왔다가 실패하고 돌아간 사건이었다. 김찬영 교장이 신학교를 불법으로 운영하고, 교회에 지원해야할 일부 후원금을 유용한다는 투서가 힐에게 보내졌던 것 같고, 의심을 품은 힐이 분개하여 한국에 나와 선교부와 신학교를 되찾아 이신, 심영진, 김태수 등 다른 동료들에게 넘기려고 했던 것이다. 노봉욱 장로의 <힐 요한 선교사의 한국 선교> 78-79쪽에 의하면, 한국에 돌아온 힐 선교사부부는 당시 기획실장의 방해로 신학교에 들어오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미국에 출장 중이던 김찬영도 급히 귀국하여 서로 마주보고 앉게 되었다. 노봉욱 장로의 증언에 의하면, 힐과 김찬영의 대화는 싱겁게 끝났다고 한다. 신학교 교장직과 운영권을 내놓으라는 것과 문전박대를 했던 최 모 기획실장을 해임하라는 힐의 모든 요구를 만 40세였던 김찬영이 순순히 응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때의 일에 대해서 노봉욱은 79쪽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다음 과제는 학교 운영권 문제요, 김찬영 학장 거취문제였다.... 김찬영 학장이 학교 운영하는 동안 시행착오와 잘못도 있지만, 그간의 공도 인정해야 하는 것은 그가 학장 재직 시 학교 부지 확장과 교사 증축 등 이룩한 공도 있고 하니, 그것을 인정 그와 함께 협력하고, 이사장직과 학장직을 안배키로 하되, 우선 Hill 선교사께서 택일토록 권유했다. 드디어 Hill 선교사의 승낙을 얻어 운영권 문제는 일단락 된 듯 했으나, 그 후 곧 번복 백지화되어 원상태로 강경노선으로 선회되었다. 1977년 봄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이신 박사, 심영진 목사, 김태수 목사, 김정한 목사 등이 힐 요한 선교사와 함께 학교를 접수하기 위해서 찾아와 재학생들을 강의실에 모아놓고 설득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교직원과 재학생들이 강력히 항거함으로써 그들의 뜻이 무산되고 말았다. 이때의 일을 노봉욱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렇게 엎치락뒤치락 난항을 거듭하게 된 배후에는 Hill 선교사의 또 다른 측근자 L. 목사 제의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나와의 의견이 다른 그분들과 Hill 선교사집 응접실에서 만나게 되었고, 그 자리에는 Hill 선교사 내외분도 함께 했다. 토론이 극에 달하자 쌍방은 감정이 격해져 인신공격 등 고성이 오고 가게 되는 상황에 이르자, Jane Hill 사모님이 갑자기 대성통곡하면서 문을 박차고 내실로 들어갔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Hill 선교사 사모님은 본국으로 단신 귀국했고, 뒤를 이어 Hill 선교사도 귀국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로써 한성신학교 운영권은 그대로 김찬영 학장 몫으로 남게 되었다. 힐은 미국으로 떠난 대신에 견제장치로 일본에서 사역하던 밥 워릭(Bob and Joyce Warrick) 선교사 부부를 1977년에 한국에 초청하여 한국성서신학교에서 근무케 하였다. 선교사들의 후원비 유용에 대한 의심은 언제나 있어왔다. 일본에서 커닝햄과 채이스의 분열도 그래서 일어났고, 강명석 목사(전도자)도 주변 인물들로부터 비슷한 유형의 모함을 받고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여 47세에 요절하였다. 김찬영 목사는 1972년 36살의 젊은 날에 교장의 일을 맡아 그 어렵던 1970년대에 학교를 키워보려는 열망에 학교 부지를 확장하고 교사를 증축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행착오나 실수가 있었을는지 모른다. 밀가루 한 포대만 집에 있어도 감지덕지하던 시대에 먹고사는 수준이 확연히 달라 보여 동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던 점도 한몫했을 것이다. 교회후원금 유용에 대한 의심의 진실 여부를 떠나서 힐 요한, 이신, 심영진, 김태수, 김치연, 노봉욱 등의 선배 목사들의 지지와 협력을 얻지 못한 것은 그 후로도 두고두고 가슴 아픈 일이 되고 있다. 1977년에 일본에서 대전으로 건너온 밥과 조이스 워릭 선교사 부부는 한국 실정을 잘 이해하고 협력하다가 별반 문제점이 없어보였는지 1978년에 일본으로 다시 돌아갔고, 1981년에 은퇴한 후 미국 인디애나 주로 돌아가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소천 하였다.
밥과 조이스 워릭은 1965년에 일본에 건너가 고아원을 시작하였다. 일본의 베테랑 선교사인 마크 맥시(Mark Maxey)의 “일본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 백년”(Christians in Japan 100 Years, 1883-1983)에 의하면, 밥과 조이스가 운영한 고아원은 도쿄에서 멀지 아니한 사이타마 현 사야마Sayama)에 있었고, 줄리어스와 버지니아 플리노어(Julius and Virginia Fleenor) 부부가 함께 사역하였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는 도쿄 변두리에 소재한 크리스천 아카데미(Christian Academy)에서 일하였다. 딸 바버라(Barbara)가 1971-72년 사이에 일 년간 그들과 함께 일본에서 사역하다가 돌아갔고, 1977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정규 교사로 사역하였다.
힐은 자신이 보내는 교회후원금을 밥 워릭을 통해서 전달하도록 하였고, 이후 노봉욱 원장, 안일승 목사, 조동호 교수(한성신학교 교회개척후원회), 다시 안일승 목사에게 이 일을 맡겼다. 힐 선교사의 교회후원금은 작은 액수로써 한 푼도 착오가 있을 수 없는 목적기부금이어서 대리인은 그 돈을 환전하여 전달하면 끝이었다. 1960년대 힐 선교사의 모금형태를 보면, 대부분 목적후원금이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런 경우 후원자가 지정한 목적대로 써야하므로 힐 선교사가 임으로 쓸 수 없는 돈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