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필자는 순복음교회에서 성장하였고, 신앙생활에 열심이어서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막연히 목사가 될 생각을 품고 있었다. 보고 자란 사람이 목사와 선교사밖에 없어서였는지 모른다. 선교사로부터 대학을 보내주겠다는 제안을 몇 차례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자력으로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선교사의 제안을 거절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생활은 출발부터 녹록치 않았다. 그 와중에 공부에 대한 열망이 커졌다. 그래서 찾아가 상의 드린 분이 최요열 담임목사님이셨다. 그분은 순복음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서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신 최요한 목사님의 동생이셨고, 김은석 목사님의 주례로 혼례를 치르신 분이었다. 졸업 후 서울 이태원 순복음 교회에서 시무하시다가 1960년대 기간에 힐 요한 선교사님이 막 시작한 한국성서신학교에서 교수로 섬기셨다.그분의 말씀이, “자력으로는 대학을 다닐 수 없으니 내가 써주는 편지를 가지고 대전으로 내려가서 김찬영 목사님을 만나 뵙고 이 편지를 전해 드려라. 그러면 그분한테서 무슨 말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필자가 찾아간 곳이 한국성서신학교였고, 김찬영 목사님은 미국에서 공부를 끝내시고, 가족과 함께 1970년 11월 15일에 귀국하신 30대 중반의 젊고 멋진 분이셨다. 1972년 6월에 힐 요한 선교사님은 은퇴를 하시고 미국으로 돌아가실 생각이었기 때문에, 김찬영 목사님이 그해 1월 21일에 한국성서신학교 제2대 교장에 취임하셨다. 교장 취임 후 첫 입학시험이 있던 날에 필자와 첫 만남이 이뤄졌다. 이후 필자는 졸업 때까지 학교의 온갖 궂은일을 하면서 김찬영 목사님을 도와 학교발전에 미력하나마 힘을 보탰다. 20대의 필자와 30대 중반의 김찬영 목사님과의 특별한 관계는 그렇게 온갖 궂은일 속에서 형성되어갔다.

졸업 후, 최초의 원룸강의실이었던 가장동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전도사와 한성고등기술학교 학생과장 겸 교사로 일하였다. 이 무렵 김찬영 목사님의 주선으로 1982년 1월 20일에 미국에 건너가 신학대학과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1987년 8월 1일에 귀국하였다. 세 가지 신학분야를 최종 점검하는 신학대학원 구두졸업시험 때, 성서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세 분야에 응시하였다. 필자가 가장 선호했고, 가장 많이 공부했던 분야는 조직신학분야였다. 역사신학분야는 공부의 양이 많고 어려워 미국인들조차 기피하는 분야였지만, 역사신학 교수님의 격려에 힘입어 응시하기로 마음먹고 공부했던 분야였다.

귀국 후 한성신학교에서 맡아 가르친 분야는 성서신학이었다. 많이 부족한 분야였지만, 조직신학은 이미 담당자가 있어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후 26년간 성서신학분야를 연구하면서 가르칠 수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 성서신학분야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펼치는 신약성서교회운동에 가장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필자가 미국에서의 공부와 귀국 후 한국에서의 공부를 통해서 역사신학에 관심을 갖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가톨릭교회와 유대교에 관한 공부 또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감사드리고 있다. 이러한 공부들이 모두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를 소개하고 이해시키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진 십자가에 기대어있다. 제 힘이나 능력으로 선 것이 아니다. 그 누군가가 예수님일수도 있고, 부모일 수도 있고, 친인척이나 선배일 수도 있고, 목사나 교우일수도 있고, 이름도 성도 모르는 무명인일수도 있다. 그렇게 우리는 누군가가 짊어진 십자가에 기대어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닌 것이다. 작고 초라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오늘이 있기까지 수많은 선배 목회자들의 십자가와 눈물과 땀과 배고픔과 고달픔과 외로움이 켜켜이 쌓이고 섞이고 다져져 딛고 설만큼 단단한 돌이 되었다.

필자는 1999년 3월에 그리스도의 교회 사이버 연구소를 인터넷에 개설하였는데, 장성우 교수님의 격려가 매우 컸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해서 문외한에 가깝던 필자는 이후 16년째 선배 목회자들의 헌신적인 삶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였고, 때로는 탄식과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금하지 못하였다. 또 밤낮없이 자료를 찾고 만들어 소개하는 일에 매진하면서 병도 나고 탈진상태에 빠져 결국 2008년 12월 31일자로 신학교로부터 명예퇴직을 선택하였다. 그 같은 노력과 헌신과 눈물이 우리 안에서 지속적으로 잇대어진다면, 우리가 희망하는 ‘큰 바위의 얼굴’ 같은 그 누군가가 반드시 나오게 될 것이다.

필자가 마음속에 늘 간직한 생각은 누군가가 반드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역사를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잡학을 하는 수준이지, 역사가가 아니기 때문에 필자가 직접 이 과제를 수행한다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 혹은 감불생심(敢不生心)이었다. 연구소도 그래서 시작한 일이었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필요한 과업을 수행해줄 혹은 논문을 쓸 그 누군가들을 위해서 자료들을 수집해 주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더는 미룰 수도 없는 일이고, 또 서울기독대학교의 백종구 박사께서 2016년 국내에서 개최되는 세계 그리스도의 교회 대회를 기념하여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역사를 세 파트로 나눠서 써보자는 제안도 있고 해서 이 과업을 직접 수행해 보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백종구 박사의 제안은 충청이북지역(협의회, 총회)의 그리스도의 교회의 역사와 충청이남지역의 그리스도의 교회 역사(협의회, 총회) 그리고 전국(교역자회) 그리스도의 교회의 역사들을 내부사정을 잘 아는 소속 구성원 세 사람이 나눠서 써보자는 것이었다. 백종구 박사의 제안은 이후 <스톤-캠벨운동대사전> 번역작업과 협의회 측의 사정으로 인해서 더 이상 진척되지 못했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그 제안이 언젠가는 다시 있을 것이라 믿고, 과제를 수행하고 싶었다.

필자가 의도한 작업은 ‘충청이남지역(협의회, 총회)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충청이남지역의 모든 이야기들이 여기에 포함된 것은 아니다. 필자가 갖고 있는 자료와 알고 있는 수준에서 이뤄진 미완성 작업일 뿐이다. 이일 또한 미래의 누군가를 위해서 놓는 초석일 뿐이다. 많이 부족한 작업이지만, 그나마 다행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작업을 통해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역사의 많은 퍼즐조각들이, 비록 여전히 제자리를 찾지 못한 퍼즐조각들이 많지만, 제자리를 찾았다는 점이고, 비록 여전히 오류가 많다고 보지만, 오류들의 상당 부분이 바로 잡혔다는 점이다. 이렇게 조금씩 진행시켜나가다 보면, 반드시 언젠가는 바람직한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숫한 역경과 극한 가난 속에서조차 손에 쥔 성서를 내려놓지 않았던 선배들이 이 작업으로 인해서 기쁨과 편안한 안식을 얻으셨으면 하는 바램을 갖는다.

2014년 8월 7일
소광(素光) 조동호 목사(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충청이남지역(협의회, 총회)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이야기
A History of Korean Christian Churches in the Southern Half of South Korea

조동호(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들어가는 말

사도행전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지역 선교와 시대별 핵심 인물인 베드로와 바울의 선교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베드로 이야기 속에 스데반이나 빌립 같은 사역자들 이야기가 삽입되고, 바울 이야기 속에 바나바를 비롯한 많은 수의 동료 사역자들 이야기가 삽입되었다. 따라서 사도행전은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전개되는 과정과 그 과정을 주도한 베드로와 바울의 활동을 중심으로 꾸며졌다. 또 사도행전은 베드로와 요한 같은 히브리파(팔레스타인) 유대인들에서 시작된 복음이 바울과 바나바 같은 헬라파(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로, 헬라파유대인들로부터 유대교에 개종한 헬라인 ‘하나님 경외자들’에게로, 또 이들에 의해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에게로 옮겨간 과정의 기술이자, 유대교인들에게서 시작된 복음이 기독교(그리스도의 교회)로 발전된 과정의 기술이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여러 형태의 신약성서교회운동이 ‘남은 자’ 또는 비주류 속에 항상 있어왔지만, 그리스도(인)의 교회가 그 정점에 서 있다는 것이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들(Churches of Christ) 또는 그리스도인의 교회들(Christian Churches/Churches of Christ)의 일부 역사가들의 입장이다. 개신교전래이후 이 땅에도 자생한 신약성서교회운동이 몇 차례 있었다.

캐나다 사람으로 침례교 출신이었던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은 1889년 7월에 입국하여 250여개의 교회를 세웠으나 어떤 교단에도 속하지 않은 채, 자신이 세운 교회들의 이름을 ‘대한기독교회’(Dai Han Kitock Kyouhay)로 불렀다. 이 이름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The Church of Christi in Corea)를 한자로 고쳐 부른 것이었다. 이들 교회들은 1936년 펜윅이 죽은 이후로 1950년까지도 침례교와는 어떤 연관도 없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교회로 이어지기보다는 침례교회로 흡수되었다.

1868년 평북 의주출생이었던 한석진은 백홍준과 서상륜의 전도를 받고 1891년에 마펫에게 세례를 받았다. 비록 그는 장로교 목사였지만, 이 땅에서 자생한 신약성서교회 운동가였다. 그는 1909년 일본 도쿄에 유학생들의 한인교회를 설립할 때 교단명칭을 쓰지 못하도록 설득하여 연합교회로 만들었고, 1915년에는 경기충청노회에 ‘조선예수교장로회’란 교단명칭을 “조선기독교회로 바꿀 것”을 헌의하였다. 한석진은 목회말년에 금강산 기독교 수양관 건립을 위해 헌신하였는데, 1926년부터 모금을 시작하여 1930년에 2층짜리 웅장한 돌집 수양관을 건립하였다. 기금은 모두 장로교회에서 나왔지만, 수양관 간판만큼은 ‘장로교 수양관’이 아닌 ‘기독교 수양관’으로 할 것을 고집하여 그대로 되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장로교회 목사로 남았다.

최태용은 감리교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한 강명석과 최상현 등이 펴낸 동인지, <신생명>(新生命)에 글을 발표하다가 28살에 <천래지성>(天來之聲)을 펴냈는데, 그는 여기에 “사람은 다만 그리스챤이란 일흠 외에 무삼 딴 일흠으로써 신자를 부르기 십허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리스챤 이외의 일흠으로써 여배(余輩)를 부르랴거든 여배(余輩) 또한 한 일흠을 제공하리라.... 여배(余輩)는 교회주의라는 것이 비진리오 악마의 오묘(奧妙)임을 주창한다.”고 적었다. ‘오직 그리스도인!'(Christian Only!) 운동을 펼친 신약성서교회 운동가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닌 ’기독교대한복음교회‘의 창시자가 되었다.

성낙소는 홍주성 의병군에 가담하려했다가 기회를 놓치자, 구세군에 가입하였다. 기미년 독립만세운동 때 영동지방의 유지와 청년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왜경에게 쫓기다가 처가에 피신하고 있던 중 1927년에 충남 부여군 세도면 화수리 2구 290번지 사랑채에 ‘기독지교회’(基督之敎會)를 개척하였다. 곧이어 성낙소는 이 교회출신 재일유학생에 의해 일본 도쿄 주재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사 커닝햄(William D. Cunningham)에게 소개되었고, 일본에 초빙되어 커닝햄이 세운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1년 조금 넘게 섬겼다. 이때 존 채이스 선교사와 친분을 쌓았다. 결국 성낙소만이 그리스도의 교회와 연결되어 신학교 교수와 필운동 그리스도의 교회의 담임목사로 헌신하였다.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에 의하면, 최요한이 1946년 2월 영흥장로교회 부흥집회 때 김은석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4월에 전남 함평군 엄다면 신흥리와 10월에 손불면 주포리(함평면 석성리로 이전)에 자생적 그리스도의 교회들을 세웠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된 성낙소, 강명석, 최상현 뿐 아니라, 동석기, 김은석, 최요한처럼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가 시작된 배경에는 교파교단 출신의 목회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당대의 교회가 신약성서교회(기독교)로 복원되어야 할 필요성을 의식했던 인물들이었고, 신약성서교회에 잇대기를 원했던 개혁가들과 그 줄기에 붙은 ‘남은 자’ 교회들은, 비록 소수였고, 비주류였지만, 하나님의 섭리로 기독교역사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왔음을 인식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20세기 중반기에 그 같은 운동을 펼치는 교회들이 미국과 세계 여러 나라에 있다는 소식과 그 내용을 듣게 되었고, 그들이 이미 발견한 사실들과 결합하여 한국적 그리스도의 교회들을 세우는 일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들 인물들 중에서, 특히, 충청이남지역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의 기술에 제한을 두었고, 사도행전의 기술방식을 따라 시대별 중심인물들과 그들과 함께 한 동료 사역자들과 지역별 중심인물들 이야기로 기술하였다. 이 기술은 또 앞으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사를 정립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세 개의 큰 줄기들 가운데 한 개를 다룬 것이다. 나머지 두 개는 충청이북지역의 그리스도인의 교회들(협의회, 총회) 역사와 전국 그리스도의 교회들(교역자회)의 역사이며, 이들 역사들은 내부사정을 잘 아는 소속 구성원들에 의해서 다뤄져야할 과업이다.

본 “충청이남지역(협의회, 총회) 그리스도의 교회 이야기”에서는 시대별로 제1부 김은석과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1950년대의 김은석 목사와 그의 동료들; 제2부 힐 요한과 한국성서신학교에서 1960년대의 힐 요한 선교사와 그의 동료들; 제3부 김찬영과 한성신학교에서 1970-90년대의 김찬영 목사와 그의 동료들, 그리고 부산 대학교회 장성만 목사,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최요한 목사, 광주 그리스도님의 교회 김동열 목사 등이 다뤄졌다. 이 작업에서 특기할 점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역사의 많은 퍼즐조각들이, 비록 여전히 제 자리를 찾지 못한 퍼즐조각들이 많지만, 제자리를 찾았다는 점이고, 비록 여전히 오류가 많이 있다고 보지만, 오류들의 상당 부분이 바로 잡혔다는 점이다.

이들과 이들의 동료 사역자들 이야기가 기술되기 전에 우선되어야할 작업이 힐 요한의 1950년대까지의 사역이다. 힐 요한은 이 시기에 김은석을 만났고, 힐은 1960년대에 김은석이 1950년대에 닦아놓은 충청이남지역의 기반 위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가장 왕성한 생애 절정기 13년(1959-72)을 보장받았기 때문이다.

 

제1부 김은석과 신화신학 성경연구회

1. 1950년대까지의 힐 요한 선교사의 활동

힐 요한(John Hill, 1913-2009)은 테네시 주 녹스빌에 소재한 존슨대학교(전 존슨성서대학) 4학년에 재학하던 1936년에 존 채이스(John Chase)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 한국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동년에 대학을 졸업한 힐은 2년간 온타리오 지방에서 목회를 시작하였으나 1938년에 사임하고 본격적으로 선교사가 될 준비를 갖췄다. 1939년에 에스더 비반즈(Esther Beavans)와 결혼하였고, 동년에 일본 도쿄에서 활동하고 있던 커닝햄(William D. Cunningham, 1864-1936) 선교사 부부의 일대기, <타오르는 횃불>을 읽었으며, 특히 한국 관련 부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윌리엄 커닝햄 선교사가 처음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때는 1907년이었다. 동년에 중국 상해에서 4월 25일부터 5월 8일까지 중국 개신교 선교 일백 주년 대회(China Centenary Missionary Conference)가 열렸다. 25개국 대표들을 포함해서 1,170명이 참석하였으나 중국인 대표는 10여명에 불과하였고, 대부분은 중국에서 활동 중인 선교사들이었다. 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상해로 가던 길에 한국에 온 커닝햄은 처음으로 한국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재일조선인대학살이 있었던 1923년 도쿄에 재일조선인교회를 설립하여 고통 받는 조선인들을 말씀으로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1924년 10월에 이원균이 한국에 파송되었고, 1931년 9월에 성낙소 목사가 조선포교책임자로 파송되었으나 1933년 9월에 이인범에게 그 권한이 넘어갔다. 태평양전쟁직전(1941)까지 이어진 커닝햄 선교부의 후원으로 ‘조선선교회 기독교회’에 교회 17(19)개[서울5, 인천4, 대구1, 마산1, 평북구성2(3), 정주(3(4), 신의주1]와 사역자 13명이 있었다. 이들 중 서울 2곳에서만 채이스가 주도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에 합류하였다.

1935년 3월에 마이클 쉘리(J. Michael Shelley) 가족이 최초의 선교사로 입국하였으나 그가 해롤드 테일러(Harold Taylor) 선교사에게 답장형식으로 보낸 1963년 1월 23일자 서신에 의하면, 건강문제와 “커닝햄 선교부의 감독아래 허락된 부정직과 비 그리스도인 행위들로 인해서” 그해 11월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쉘리는 커닝햄 선교부의 잘못을 입증할만한 자료들을 서울과 도쿄에서 수집하여 미국으로 가져갔고, “커닝햄이 존 체이스의 이력에 깔아놓은 먹구름을 제거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또 쉘리는 자신의 후원자들에게 한국으로 건너가기를 원하는 체이스를 후원해 줄 것을 제안하였다.

커닝햄은 1936년 존 채이스(John Chase) 가족이 한국에 입국한 해에 소천 하였다. 채이스는 1927년 3월부터 7년간 커닝햄의 도쿄 선교부에서 사역하였으나 1934년에 결별하고, 1936년에 한국에 입국하여 1940년까지 4년간 사역하였다. 그가 한국을 제2회의 선교지로 선택하게 된 데에는 성낙소와 마이클 쉘리의 영향이 컸다. 성낙소는 커닝햄의 초청으로 1930년 5월부터 1931년 9월경까지 도쿄 재일조선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겼다. 이 기간은 커닝햄의 안식년이었으므로 커닝햄의 직무를 대리한 채이스와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채이스가 입국한 1936년에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출신의 토마스 힛치(Thomas G. Hitch) 가족이 입국하여 이북지역에서 사역하였다. 1936년 채이스의 설교를 듣고 한국 선교사의 비전을 품었던 힐 요한 가족이 1939년에 한국에 도착했을 때, 토마스 힛치 가족이 수개월 이내에 한국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존 채이스 가족도 이듬해인 1940년에 한국을 떠날 계획이었다. 힐 요한이 한국에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사로 입국하게 된 데는 퇴임을 앞둔 채이스 선교사의 발탁에서 비롯되었다. 채이스 선교사는 서울에 설립한 한국 크리스천 미션(Korean Christian Mission)과 4년간 일군 모든 선교업적을 힐 요한에게 인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힐 요한은 1940년 가을학기에 채이스가 설립한 목회자 양성소를 개교하였으나 일제 말기의 발악적인 기독교탄압으로 인해서 수개월도 유지시키지 못한 채, 그해 11월 짐을 꾸려서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서울주재 미국 대사관의 권고를 받아들여 대부분의 다른 미국인들과 함께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인들이 철수한 다음 해에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함으로써 미국이 태평양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힐은 이 기간에 미시간, 웨스트버지니아, 인디애나 등지에서 목회활동을 했고, 버틀러 대학교 신학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또 미 육군 군목(대위 예편)으로 미국, 필리핀, 일본에서 복무했다.

힐은 1949년 2월 18일 만 8년 3개월 만에 한국으로 되돌아왔고, 서울 연지동 자택에서 1949년 3월 15일 한국기독성서신학교(Korean Christian Bible Seminary)를 개교한 후 필운동교회로 옮겨 본격적으로 목회자 양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또 다시 불행하게도 이듬해인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갑작스런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으로 피난하였다. 9월 28일 서울수복 후 11월에 한국에 돌아와 5주간 머무는 동안 서울 장충동의 임대건물에서 신학교를 개교하였으나 중공군의 전쟁개입으로 전쟁이 악화되어 그해 12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듬해인 1951년 3월 14일 서울수복 후 7월 3일 한국에 돌아온 힐 요한은 서울 송월동에서 1951년 8월 4일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크리스천 미션 고아원을 시작하였고, 인천, 대전 판암동 및 대구에 고아원 설립을 돕고 후원하였다. 1955년에 가정문제가 발생하여 한국을 떠났다가 제인 키넷트 선교사와 1956년 3월에 재혼하였고 1959년 여름에 부산을 통해서 재입국하여 대전에 정착하였다.

1955년 말에 일본에서 사역을 하고 있던 해롤드 테일러(Harold Taylor) 부부가 입국하여 힐의 사역을 이어받았다. 그는 오자마자 새로 지은 신학교 건물을 포함해서 서대문구 송월동의 선교부 재산을 모두 팔았고, 그 때문에 현 서울기독대학교 부지와 건물을 구입할 때까지 수년 동안 신학교 운영이 중단되는 사태를 빚었다. 1955년 11월에 입국한 테일러가 수차례에 걸쳐 미국에 보고한 1955년까지의 한국교회 현황을 보면 교회가 75개로 나타나 있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는 불행히도 초기선교에서, 30여년의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기회나 결실을 얻지 못하였다.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20-40년대에 커닝햄 선교부에서 파송된 이원균, 이인범 등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나 열정이 없었던 인물들로서, 비록 그들이 17개의 교회들과 30개 이상의 선교기지들을 세웠다할지라도, 그들과 그들이 세운 교회들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둘째, 1935년에 입국한 마이클 쉘리 가족의 사역이 8개월, 1936년에 입국한 존 채이스 가족과 토마스 힛치 가족의 사역이 각각 4년을 넘기지 못하였다. 이 시기는 세계가 제1차 세계대전(1914-18)직후 찾아온 경제대공황(1929-33)을 겪은 직후였고, 일본이 만주침략(1931)을 시작으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1937-45)을 도발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1939~45)이 치러졌던 어려웠던 시기였다. 국내적으로는 이러한 전쟁을 치르기 위한 물자수탈, 강제동원, 일본 천황(가미사마)을 향해 절하는 동방요배와 신사참배 강요가 극에 달하여 각 교단의 총회에서 신사참배결의가 통과되던 때였으며(1938-39), 창씨개명과 일본어사용(1940-45)이 강요되던 어려운 시기였다.

셋째, 1939년에 입국한 힐 요한 가족은 일 년밖에 머물지 못하고 태평양전쟁으로 인해서 1940년에 한국을 떠나야 했으며, 1949년이 돼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2년을 갓 넘긴 1950년에 6.25전쟁이 일어났고, 1951년부터는 교회와 신학교 일 못지않게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써야했다. 힐 요한은 1953년에 안식년으로 미국에 들어갔다가 1954년 여름에 돌아왔고, 미군의 도움으로 송월동 선교부 옆에 3층짜리 신학교 건물을 세웠으나 1955년 봄에 부인 에스더 비반즈가 가정을 버리고 떠남으로써 7월에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테일러가 이전할 곳을 마련하지도 않은 채, 채이스가 마련한 선교부 건물과 힐이 새로 지은 3층 신학교 건물을 팔아버림으로써 수년간 목회자가 배출되지 못하였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들, 커닝햄 선교부에서 파송된 조선포교책임자들의 신약교회정신의 결여, 일제말기에 벌어진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제2차 세계대전, 국내에서의 물자수탈과 강제동원, 동방요배와 신사참배 및 창씨개명과 일본어사용의 강제, 이어진 6.25전쟁에 더해져 언어와 문화충격과 같은 제약들로 인해서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이 매우 짧고 불안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낙소, 동석기, 강명석, 최상현, 김은석, 함태영, 이신, 최요한과 같은 초기 내국인 목회자들의 분투와 헌신으로 <한국종교사>(김득종)에 의하면, 1943년에 6개(교역자 6명, 교인 909명)에 불과하던 것이,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 291쪽에 의하면, 1950년에 42개로, 또 태일러 선교사가 수차례에 걸쳐 미국에 보고한 기록에 의하면, 1955년까지 75개 교회로 발전할 수 있었다.

2. 1950년대의 김은석 목사

전술한바와 같이 1955년에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75개였다.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가 324쪽에서 인용한 <기독교 연감(1957)>에 의하면, 1956년 충청이남지역인 충북에 13개, 충남에 6개, 전남에 17개, 총 36개의 교회가 있었다. 힐 요한은 1972년에 쓴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 약사”에서 1949년 필운동교회에서 수업이 이뤄진 한국기독성서신학교의 학생이 70여명에 이르렀고, 이후에 교회들이 “우이동, 김포, 미아리, 신탄진, 부강, 심지어는 광주, 목포, 부산에까지 세워졌다. 김은석 목사는 나중에 세워진 이들 교회들 가운데 상당수를 세우는데 공헌하였고, 미 공군 군목, 할 마르틴을 통해서도 교육과 계몽이 상당히 이루어졌다.”고 회고하였다. 이는 김포(최춘선,1950년대), 신탄진(정찬성,1948), 부강(김은석,1946), 광주(최요한,1948;함태영,1951), 목포(최요한,1957)에 세워진 교회들이 김은석의 공헌으로 세워졌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김은석이 미국 공군 군종 할 마르틴(Hal Martin)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알게 되었다는 증언이 있으나 가능성이 낮다.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는 “김은석 목사와 충청 이남의 자생적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324-5쪽의 글에서 1946년부터 63년 1월까지 17년간 이뤄진 김은석의 활동의 산물로써 충청이남지역의 교회들이, <기독교 연감(1965)>을 인용하여, “1964년 충북에 16개 교회, 충남에 19개 교회, 소계 35개 교회, 전남에 24개 교회, 전북에 1개 교회, 소계 25개 교회, 도합 60개 교회”였다고 적고 있다. 1956년에 36개였던 것이, 힐 요한에 의해서 대전시 서구 가장동 21-5번지에 최초의 한국성서신학교 교사가 지어지던 1964년까지 만 8년 만에 24개가 더 늘어나 60개가 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20년 후, 김찬영에 의해서 한국성서신학교가 한성신학교로 개편된 지 만 4년이 지나고, 협의회와 총회로 나눠지기 만 5년 전인 1985년에 발행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협의회 교역자 수첩>을 인용하여, “충북에 31개 교회, 충남에 38개 교회, 소계 69개 교회, 전남에 58개 교회, 전북에 13개 교회, 소계 71개 교회, 도합 140개 교회”였다고 적고 있다. 20년 만에 충청이남지역에서만 80개가 더 늘어난 숫자이다. 이 괄목할만한 발전은, 다수의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교적을 타 교단으로 옮겨간 점을 고려해 볼 때, 실제로 세워진 교회들은 이보다 월등하게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충청이남지역에서 이뤄진 괄목할만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발전은 1946년에 환원하여 1963년 1월 21일 소천 때까지 17년을 섬긴 김은석의 공로가 가장 크다. 여러 증언과 정황으로 볼 때, 김은석이 김교인 장로의 초청으로 부강 오데골 장로교회로 부임한 것은 해방직후인 1945년 가을이었다. 김은석은 부임하자마자 100일 집회를 개최하였고, 이때 성령님의 역사가 크게 일어났으며, 노회의 자제하라는 권고를 무시함으로써 제명되었다. 1801년 미국 켄터키 주 케인 리지(Cane Ridge)에서 대부흥회를 주도하였다가 노회로부터 제명당하여 1804년에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한 장로교 목사 발톤 스톤에게 닥친 동일한 상황이 한국의 발톤 스톤이라 부를 수 있는 김은석에게 닥친 것이었다. 박점상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1946년에 김은석은 박점상과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여, 동년에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와 ‘신화신학 성경연구회’를 시작하였다. 이때로부터 한국의 사도 바울 김은석은, 마치 바울이 주후 46년부터 63년까지 선교여행을 통해서 키프로스, 터키, 그리스,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들을 세운 후 장로를 택하여 목회자로 삼은 것처럼, 1946년부터 63년까지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와 한국성서신학교에서 제자들을 양육하여 파송함으로써 충청이남지역에 수많은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세워지도록 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 신화신학 성경연구회는 충청이남지역 최초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요람이요, 이동 신학교였다.

1)신화신학 성경연구회

박점상 목사에 의하면, 1946년에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와 신화신학 성경연구회가 시작되었다. 김은석은 부강에서 병원을 개업한 신현창 장로와 더불어 신화신학 성경연구회를 개설하였다. 박점상은 1946년에 김은석과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지만, 이듬해인 1947년에야 부강으로 내려와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일하면서 부강교회 건축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정찬성 목사는 1946년에 공부한 신화신학 성경연구회 제1기생으로 알려져 있다.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 310쪽에 실린 “신화신학과 제자 양육”에 의하면, 신화신학 성경연구회는 처음에 ‘경천학’이라 불렸다가 “성령으로 거듭나는 체험의 장이라는 의미”로 신화신학으로 개명하였다. 김은석이 ‘경천’이란 용어를 즐겨 사용했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 것은 그가 10여년 후인 1957년 8월 26일(월)자 성서통독메모에서 “바울이 경천애인 생활한 것을 보고” 자신이 실천한 경천애인의 삶의 고달픔을 위로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날에 최춘선, 김영원, 김영숙, 이종만, 설하운, 태일러, 박은병이 집에 왔고, 김은영, 최근수, 이신, 김윤구, 김영애, 고광석, 임온년이 다녀갔는데, 이들 동료들을 접대해야 했던 사모 김완례의 불만이 여간 크지 않았다. 이 딱한 사정에 대해서 김은석은 고린도전서를 읽던 중에 “내가 크게 각성을 가지게 된 것은 4장 9절과 4장 11절 이하 바울이 경천애인 생활한 것을 보고 위안 받음. 지금 날마다 집에 당함은 생활난입니다.”라고 적었다.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초기에 공부했던 목회자들은 정찬성, 장주열, 김명석, 김재순, 최요한, 김상호, 구광서, 박점상, 김정만, 창현 함태영, 김동열, 이원노 등이었다. 10여년이 지난 1955년 4월 12일(화)자 성서통독메모에 의하면, 소수교회당에서 진행된 백일성경연구집회에 참석하여 당일 4시까지 공부한 사람들 중에는 “유경히, 곡봉예, 전도희, 최옥순, 이혜순, 정히순, 김옥히”(이상 여자), “이원노, 박장봉, 차대훈, 나연찬, 김명석, 김웅석”(이상 남자)이었다.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에 의하면, 성경연구집회들에 참석한 인원이 평일 10-20명, 주말 수십여 명에 달했다.

이밖에 김교인 장로의 아들 김태수, 김철수, 김명석의 아들이자, 김은석의 양아들 김성철 등이 부강교회 출신이자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공부한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들이며, 이신(이만수)도 6.25때 광주에서 김은석의 설교를 듣고 감리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한 목회자였다. 이처럼 수많은 인재들이 김은석의 신화신학 성경연구회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여 목회자와 교회개척자로서 고난의 길을 걸었다.

2)신화신학 성경연구회의 특징

첫 번째 특징은 백일성경연구집회였다. 김은석은 기회와 시간이 주어지면, 일일, 열흘, 한 달 혹은 한 달 반 등 제한 없이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백일집회를 선호하였다. 그가 1945년 가을에 부강 오데골 장로교회에 부임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백일집회였다. 이런 집회가 일 년에도 몇 차례씩 진행되었기 때문에 김은석은 일 년의 대부분을 집을 떠나 타지에서 동료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가족을 거의 돌보지 못했다.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1953-58)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1)1953년 8월초 전남 강진군 금동면 연화동 그리스도의 교회 집회소에서 연합성경사경회를 9월 15일까지 개최하다.

(2)1954년 6월 14일부터 전남 목포시 죽교동 391번지 2통 4반 해병대 앞 유달 교회당에 ‘그리스도의 교회 성경연구처’라는 간판붙이고 백일성경연구집회 인도하다.(유달 교회는 최요한이 1953년 4월 8일 광주에서 개최된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창립총회 무렵에 이적하여 세운 순복음교회였다.)

(3)1955년 2월 25일부터 6월 5일까지 충북 괴산군 소수면 수리 교회에서 백일성경연구집회 인도하다.

(4)1월 1일부터 3월말까지 공부하는 기간에 봉독함. (이것은 1957년 3월 6일 수요일 메모로써 1957년 1월 1일부터 3월말까지 충북 청원군 부용면 부강 교회에서 백일성경연구집회를 인도하고 있다는 뜻이다.)

(5)1957년 8월 31일(토) 아침은 또한 목포성경연구소에서 7:5-8장까지 봉독함... 김재순, 임남규, 이신, 김은석 4인이 결의 부강서 9월 17일부터 성경공부 시작하기로 함.” (최요한은 8월과 9월에 이 목포에서 속개된 성경연구집회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로 복귀키로 마음을 확정하고 목포시 대안동 11번지 자택에서 9월말부터 기도회 모임을 시작하여 10월 1일에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담임하던 목포 복음교회는 10월 5일 정식으로 사임하였다.)

이밖에도 1955년 10월 15일부터 전남 함평읍 함평면 석성리 신생동 교회당에서 연말까지 성경공부가 있었다. 김규상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1951년경 영광에서 100일 집회가 개최되었다.

김은석 목사는 1958년 5월 5일에 집중강의 일정을 학생들에게 통보하고 있는데, 이 통보를 받은 이들 가운데는 지철희(충남 금산군 추부면 성당리 벧엘교회), 김교인(전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 장로), 임춘봉(한국성서신학교 교수, 교가작사자), 김용순(신탄진교회), 설하운(부평보육원 원장 및 부평 그리스도의 교회), 최요열(최요한의 동생, 전 한국성서신학교 교수, 조동호의 소년시절 담임목사), 장주열(최요한의 큰 동서), 최춘선(김포교회, 사회사업가. 소천 전 30년을 맨발로 거리와 지하철에서 전도), 이종만(인천고아원), 김명석(김성철의 친부), 이신(미국 밴더빌트대 신학박사), 김정만(정찬성과 김은석의 제자), 김태수(김교인의 아들), 김동열(광주 그리스도님의 교회), 강순명(광주 천혜경로원) 등이었으며, 총 65명이었다. 또 1958년 7월 10일부터 소년성경학이 개설된다는 것과 8월 1일부터 9월 10일까지 성경공부가 있다는 통신을 총 54명과 6곳의 교회에 보내고 있다.

두 번째 특징은 이동 신학교였다. 김은석은 자신의 동료들과 더불어 해마다 지역을 바꿔가면서 성경연구집회를 개최하였다. 집회 장소들로는 부강, 광주, 목포, 해남, 함평, 부여, 오창, 괴산, 충주, 대구 등지였다.

(1)6.25전쟁 중이던 1951년에는 광주에서 있었다. 이때 교수는 김은석, 이신, 창현 함태영 등이었다.

(2)1952년에 광주에서 운영되던 신화신학 성경연구회를 이신이 시무하던 부여 합송리 그리스도의 교회로 옮겼다. 합송은 이흥식이 1950년 3월 19일 개척하였고, 정찬성이 1951년 5월 15일 제1대 목회자로 부임하여 10월까지 시무하였다.

(3)1953년 8월초에서 9월 15일까지 개최된 연합성경사경회는 전남 강진군 금동면 연화동 집회소에서 열렸다.

(4)1954년 5월 25일에 백호리 교회에서... 공부하였다. (이 메모는 전남 해남군에서 성경연구집회가 열리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5)1954년 6월 1일(화)부터 10(목)일까지 대구 동인동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김은석은 10일간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6)1954년 6월 14일부터는 ‘그리스도의 교회 성경연구처’라는 간판붙이고 최요한 목사가 시무하던 목포 유달 순복음교회에서 백일성경연구집회가 운영되었다.

(7)1955년 2월 25일부터 6월 5일까지 개최된 백일성경연구집회는 충북 괴산군 소수면 수리교회에서 인도되었다.

(8)1955년 10월 15일부터 1956년 1월까지 전남 함평읍 함평면 석성리 신생동 교회당과 청학동 교회당에서 백일성경연구집회가 있었다.

(9)1957년 1월 1일부터 3월말까지와 9월 17일부터 시작된 백일성경연구집회는 충북 청원군 부용면 부강교회에서 인도되었다.

세 번째 특징은 성서통독강의였다.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1953-58)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1)1954년 4월 21일(수)... 모여든 여러분과 같이 사도행전 5-6장 공부함.

(2)1954년 4월 23일(금)... 저녁에 부강교회에서 여러 곳에서 공부 오신 분들과 같이 돌려 봉독하야 사도행전 8장 공부함.

(3)1954년 4월 30일(금)... 명(明) 5월 1일부터는 에스겔을 공부하기로 함.

(4)1955년 4월 16일(토)... 충북 괴산군 소수면 수리교회에서 2월 25일부터 시작한 백일집회에 이 다니엘서를 공부하는바 4월 16일은 수십 명이 공부하였다.

(5)1955년 5월 19일(목)자 메모에 의하면, 2월 25일부터 6월 5일까지 충북 괴산군 소수면 수리교회에서 진행된 백일성경연구집회에서는 로마서를 공부하였다.

(6)1955년 5월 24일(화)부터 26일(목)까지 남녀 16-18명이 모여 출애굽기를 공부하였다.

이상에서 보듯이, 김은석의 학업방식은 성서통독강의였다. 백일성경연구와 집중공부에 대한 어려움에 대해서 김은석은 1955년 5월 19일(목)자 메모에서 “금(今)번 이 공부 중에는 천신만고에 난관이 있었다.”고 적고 있고, 동년 10월 20일(목)자 메모에서는 “의외(意外)에 이 신생동에 성경 공부한다는 시작이 되여 일기가 치귀서(차가서) 고생이다.”고 하였다. 신생동이란 전남 함평읍 함평면 석성리 신생동을 말하며, 12월 16일(금)자 메모에서는 “금일 아침은 크게 추웠음(今朝는 大寒이 되엿슴).”이라고 적었다. 김은석과 그의 동료들이 겪었던 고충은 대개가 배고픔과 추위와 더위 또는 가족을 돌보지 못한데서 오는 가족들의 불만이었다.

네 번째 특징은 성령 충만이었다. 김은석이 1945년 가을에 부강 오데골 장로교회에 부임하자마자 100일 집회를 개최하여 성령님의 역사를 크게 일으킨 것을 문제 삼아 노회로부터 제명된 것에서 보듯이 김은석 사역의 특징은 성령 충만이었다.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 307쪽에 의하면, “그 당시 함께 성령을 받은 사람은 구봉례 집사, 김규상(목사), 김교인 장로, 윤정렬 사모, 김철수(목사), 오연우 장로, 전도희 집사, 황 집사, 김복수 집사와 그의 딸 김은영, 박오덕, 장 집사, 전도 부인 민명옥 등 70여 명으로 추산된다.”고 하였다. 이들 가운데 김철수, 김복수는 김교인 장로의 자녀들이고, 구봉례 집사는 김규상의 모친이다. 여기서만 목회자가 세 사람이 나왔는데,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김규상 목사, 김철수 목사, 전도희 전도사이다. 김교인 장로의 또 다른 두 아들인 김재순과 김태수도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가 되었다.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에 의하면, 김은석이 인도하는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은혜를 받고 목사가 된 사람들이 장주열과 최요한이다(315쪽). 김규상은 1951년경 영광에서 개최된 100일 집회에 참석하여 김동열과 함께 큰 은혜를 받고, 동년에 16살의 나이로 충곡 그리스도의 교회에 부임하였다고 한다(320-321쪽). 이신도 감리교신학교를 마치고 1950년에 전의 감리교회에서 목회하다가 6.25전쟁 때 피난생활을 하던 중 1951년 김은석이 인도하는 광주집회에 참석하여 김은석의 성령 역사에 크게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다(322쪽).

다섯 번째 특징은 전도실습이었다. 1955년에 충북 괴산군 소수면 수리교회에서 개최된 백일성경연구집회 때인 5월의 성서통독메모를 보면, 24일(화)부터 26일(목)까지 남녀 16-18명이 모여 출애굽기를 공부하였고, 27일 금요일에는 동리에 나가서 축호전도를 하였다. 1957년 9월 6일 금요일에는 몇몇 전도자들을 각기 다른 지역교회로 집회가게한 후에 본인도 하이도행 외령호를 타고 석양(夕陽)에 무안군 하의면 하태에서 개척하는 임혜숙 전도사를 위로 방문하여 주일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함께 심방하고 전도하였다.

3)한국의 바울 김은석 목사(1902.05.14음력-1963.01.21)

김은석은 황해도 평산군 당구리(속칭 붉은 바위 마을)에서 1902년 5월 14일(음력)에 태어났으며, 1963년 1월 20일 충곡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주일 저녁 집회를 인도하고, 밤 10시가 넘어서 찐 고구마와 날고구마를 먹고 탈장이 되었다. 소천하기 3년 전에 위 수술을 받았던 터라 그게 원인이 되어 복통을 일으켜 앓다가 다음 날 월요일(21일)에 충남 논산군 부적면 충곡 2구 최봉석 장로댁(고 명달재 목사 장인)에서 소천하여 충곡 2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최봉석은 김성철에게 김은석 목사의 유언과 유품을 전하였다. 김은석은 양아들 김성철이 대를 이어 꼭 목사가 되길 바랐다. 그가 그에게 남긴 것은 헐렁한 가방 하나였는데, 그 초라하고 낡은 가방 속에는 구리돈, 납 돈 몇 푼과 가방만큼이나 낡은 성경책 한 권만이 달랑 들어 있었다. 그 성경이 46년 만에 김성철 목사로부터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에 맡겨졌으나 연구소가 각고 끝에 펴낸 <한국의 바울 김은석 목사>를 읽은 김은석의 양녀 김명순의 후손이 찾아와 가져가 버렸다.

김은석 목사는 함께 찍은 사진으로 볼 때, 박점상 목사보다는 작고, 심영진 목사보다는 키가 컸다. 몸도 가날 퍼서 체중이 그다지 많이 나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키 170센티미터 이상에 체중 70킬로그램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성철 목사의 자서전, <삶이란, 감사하면 그것으로 O.K다>에 의하면, 김은석은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16살 때 자기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여인에게 장가를 들었으나 우울증을 앓던 가운데 살림집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집이 몰락해 중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신학공부를 하였고, 재혼하여 아들까지 얻었으나 아들이 세 살 때 죽고, 연이어 부인도 죽었다.

김은석은 일본으로 건너가 전도인의 삶을 살았다. 박점상에 의하면, 그의 일본 이름은 간다긴세기 신전 은석이었고, 별명은 합바지(무명바지) 조사(전도사)였으며, 시모노새끼(하관), 아사(김성철의 친부 김명석 거주), 덕산(박점상 거주), 동경지방 등 전국을 돌며 복음을 전하였다. 일본에서 만나 세 번째로 재혼한 사모 김완례(재혼)는 경성신학교를 나와 일본에서 전도부인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교우들이 접대로 떠준 얼음물을 마시고 냉병에 걸려, 자녀를 갖지 못하였다.

김은석은 해방직전에 한국에서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급전을 받고 귀국하여 전도생활에 전념하면서 서울 역전의 빨간 색 벽돌(세브란스) 빌딩을 빌려 ‘백만 귀환동포 영접위원회’라는 것을 운영하면서 큰 솥을 걸고 교회에서 쌀을 공급받아 오가는 사람을 먹이고 재우면서 귀환 동포들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당시에는 여관도 없던 때라 일본 중국으로부터 밀려오는 귀환 동포들의 수용소 역할을 하였다. 강신명 목사, 한경직 목사도 그 때 함께 활동하였다. 또 구국위원회의 위원으로서 애국활동을 하였다.

4)신약성서교회들의 개척자

김은석의 충실한 동료들은 목사 이신(13회), 김재순(24회), 전도사 김명석(26회), 김은영(22회), 고광석(12회), 임남규(10회), 전도희(23회), 자매 강신규(26회), 이혜순(9회), 김숙명(12회), 박종예 등이었다. 이들은 김은석의 동료들일 뿐 아니라, 순회여행을 함께한 동행자들이기도 하였다. 이름 옆의 가로 속 횟수는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1953-58)에서 이름이 적힌 빈도수이다. 이 성서통독메모에 적힌 목회자, 전도사, 장로, 집사, 성도들의 이름만 하여도 220여명이나 된다.

김은석이 개입한 교회들은 70여 곳에 이른다. 대부분이 그리스도의 교회들이지만, 타 교단의 교회들도 섞여 있다. 타 교단들의 교회 방문은 대개가 부흥회 인도 때문이었다. 김은석의 주 활동무대는 충청도와 전남이었다. 이곳에 그의 영향으로 세워진 교회들이 많았다. 그가 ‘백일집중성경연구회’를 주도한 지역들도 이들 지역이었다. 김은석은 제자양육을 위해서 집을 떠나 이들 지역들에 장기간 머물렀고, 특별한 일이 아니면 집엘 다녀오지 않았다. 김은석은 이들 기간에 지역교회들을 순방하며 부흥회를 인도하였고, 인근에 가정교회들을 세웠으며, 목회자를 임명하여 세웠다. 교회를 세우고, 목회자를 키워 임명하는 것은 사도 바울 선교의 특징적인 활동이었다. 김은석 목사는 바울과 동일한 수고를 남녀 동료들과 함께 수행하였다. 김은석이 성경에 삽입시킨 주소록에 적힌 교회들로는 경기 2, 경남 3, 경북 4, 서울 7, 전남 29(30), 충남 10, 충북 14, 장소 미확인 2, 도합 72곳이었다. 이 가운데 타 교단이 6곳 정도였다.

  • 경기도 서정리(평택) 교회
  • 경기도 수원시 세류동 1구 1통 30반 천막교회(*이곳이 혹시 1952년 10월 3일 개척된 신갈 그리스도의 교회일는지 모른다.)
  • 경남 진주 칠암동 318 교회(김은석 목사 동생 김경원 목사 시무)
  • 경남 통영군 도산면 도선리 1구 그리스도의 교회
  • 경남 함양군 안의면 안의 교회
  • 경북 금능군(김천시) 개령면 대광동 2구 대보 그리스도의 교회(장성우 목사 장모 김묘암 권사 설립)
  • 경북 대구 신천동 그리스도의 교회
  • 경북 대구시 동인동 교회
  • 경북 청도군 금천면 명포교회
  • 서울 마포구 아현동 교회
  • 서울 이태원 순복음교회(최요열 목사)
  • 서울시 도원동 교회
  • 서울시 서대문구 창천동 54번지 70호 성결교회
  • 서울시 서대문구 평동 16의 23호 그리스도의 교회 (교역자회)
  • 서울시 성동구 청량리 그리스도의 교회 (교역자회)
  • 서울시 중구 도동 2가 5번 그리스도의회 대한 감리회 감남교회
  • 양동교회(?광주광역시 서구 양동)
  • 전남 강진군 군동면 삼신리 연화동 교회
  • 전남 강진군 작천면 작천 교회
  • 전남 강진읍 기룡리 용동 교회
  • 전남 광주 남구 사동 22번지 그리스도의 교회
  • 전남 광주시 광산동 80번지 그리스도의 교회
  • 전남 광주시 금동 46번지 그리스도의 교회
  • 전남 목포 유달순복음교회 (최요한 목사, 그리스도의 교회 성경연구처가 이 교회당에 있었음)
  • 전남 목포시 죽교동 사구 동 399번지 교회
  • 전남 무안군 지도면 대조리 성결교회 (김완례 사모의 질녀 내외 시무)
  • 전남 무안군 현경면 평산 교회
  • 전남 순천 오순절교회
  • 전남 영광읍 교회
  • 전남 영광읍 도동리 교회
  •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 교회
  • 전남 함평군 손불면 궁산리 신흥부락 교회
  • 전남 함평군 함평면 석성리 신생동교회
  • 전남 함평군 함평면 석성리 청학동 그리스도인 집회소
  • 전남 해남 송지면 매화리 교회
  • 전남 해남군 백호리 교회
  • 전남 해남군 옥천면 교회
  • 전남 해남군 옥천면 도림리 김응임 노부인 댁 교회
  • 전남 해남군 옥천면 동리 윤철호씨 댁 동리교회
  • 전남 해남군 옥천면 신죽리 교회
  • 전남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 교회
  • 전남 해남군 옥천면 팔산리 화랑교회
  • 전남 해남군 옥천면 팔산리 황당 교회
  • 전남 해남군 옥천면 화당 교회
  • 전남 해남군 현산면 고현리 최정택 형제 예배처소
  • 전남 해남군 화산면 방축리 교회
  • 충남 논산군 부적면 충곡리 교회
  • 충남 대전 선화동 2구 315번지 그리스도의 교회
  • 충남 대전시 반암동 교회
  • 충남 대전시 신탄진 교회 석봉리 집회소
  • 충남 대전시 판암동 교회,
  • 충남 부여군 규암면 노하리 교회
  •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 교회(현 교역자회)
  • 충남 연기군 동면 갈산교회
  • 충남 연기군 동면 갈산리 칠미부락 교회
  • 충남 연기군 동면 월산동 활골 교회
  • 충북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 외령 교회
  • 충북 괴산군 소수면 소수면 수리 교회
  • 충북 중원군(충주시) 신이면 화석리 방축골 교회
  • 충북 청원군 강서면 문암 교회
  • 충북 청원군 남일면 방서리 교회
  • 충북 청원군 남일면 황청리 교회,
  • 충북 청원군 남일면 황청리 정유순 자매 집 교회
  • 충북 청원군 부용면 부강 교회
  • 충북 청원군 북이면 송정 교회
  • 충북 청원군 북이면 송정리 새테말 교회
  • 충북 청원군 오창면 가좌리 교회
  • 충북 청주시 영운동 교회
  • 충북 충주시 동양면 조동리 교회
  • 충북 충주군 소태면 복탄리 교회
  • 형성 교회
  • 화동 교회

김은석은 자신이 직접 1946년에 부강교회(충북 청원군 부용면)와 1951년 늦은 가을에 선화교회(대전시 선화동 2구 315번)를 설립하고 건축하였다. 김은석은 힐 요한이 1959년부터 대전에 정착하는 것을 도왔을 뿐 아니라, 동년 12월 1일 심영진 목사가 시무하던 대전 도마리 성화교회에서 시작한 한국성서신학교의 교수로 섬겼다. 이때의 교수진은 힐 요한 부부, 김은석, 심영진, 김태수(통역)였고, 이듬해인 1960년에 부산에서 이신이 교수진에 합류하면서 학교를 자신이 세운 선화교회로 옮겼다. 대전시 서구 가장동 21-5번지 캠퍼스부지에 건물이 들어서기까지 수업이 이곳에서 이뤄졌다.

5)김은석의 박애정신

김은석의 박애(博愛) 정신을 볼 수 있는 사례들은 많다. 그의 성서통독메모들(1953-58)에서 어려움에 처한 이들, 특히 교회와 전도자들을 돕기 위해서 자신의 경비를 써가며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첫째, 김은석은 1957년 3월 23일부터 24일까지 부모 잃은 고아들을 보육원에 위탁하기 위해서 이종만 목사가 운영하던 인천시 학익동 그리스도의 교회 보육원을 오양균, 김규제, 김규성 세 아이들을 데리고 방문하고 있다. 3월 23일 토요일 아침에 수원 동생네 집에 들러 아이들에게 아침을 먹인 후 오후에 인천에 도착하였다. 이런 일이 아닐지라도 김은석은 수시로 충남 부여군 합송리 구애보육원, 판암동 애생원, 인천 학익동 그리스도의 교회 보육원, 인천시 부평 그리스도의 교회 보육원, 청주시 영운동 박인회 양로원 등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성경을 봉독하고 말씀을 전하였다.

둘째, 김은석은 1955년 7월 29일 금요일 아침에 충북 청주 예배당 구입 문제로 이한상 형제의 부탁을 받고 서울 선교부에 올라가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 일을 하루에 처리하지 못해서 오던 길 밤에 천안의 황해여인숙에서 하루 밤을 묵어야했다.

셋째, 김은석은 1956년 7월 10일 화요일 새벽 2시경에 대전 은행동 자택에서 성경 요한복음을 봉독한 후에 새벽 4시 31분발 서울행 제6열 급행열차를 타고 선교부에 갔다. 선교부 방문의 목적은 김명석 전도사 사모에게 급하게 도와야할 일이 생겨서 도와줄 방도를 찾기 위해서였다. 이뿐만 아니라, 가좌교회의 일과 또 다른 일들도 함께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1955년 12월 27일자 메모에서 김은석은 가좌교회를 “핍박이 심한 개척이다.”라고 적고 있다. 따라서 김은석은 가좌교회에서 힘겹게 분투하는 전도희 전도사를 자주 위로 방문하였고, 동료들을 불러 모아 그곳에서 성경연구집회를 갖곤 하였다. 또 김은석은 1957년 9월 6일 금요일에 몇몇 전도자들을 각기 다른 지역교회로 집회가게한 후에 본인은 하이도행 외령호를 타고 석양(夕陽)에 무안군 하의면 하태에서 개척하는 임혜숙 전도사를 위로 방문하여 주일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함께 심방하고 전도하였다. 월요일 그곳을 떠날 때 느낀 점을 이렇게 적었다. “오늘 하의에서 떠날 때 임혜숙 자매에 외로와함 보면서 동정심이 심하였다.” 주의 일을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주의 일군들, 특히 여성사역자들의 노고에 대해서 김은석은 깊은 동정심을 가졌던 것 같다. 공부할 때나 전도할 때나 항상 그의 곁에는 남성 동료들과 제자들에 못지않게 헌신적인 많은 여성 동료들과 제자들이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넷째, 김은석은 병석에 누운 동료들을 찾아 위문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1955년 8월 16일자에는 병원에 입원한 고광석 전도사와 판암동 애생원을 김옥여, 이원노, 강신규, 김완례 사모 등과 함께 위로 방문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김은석은 자주 병이 나는 사모 김완례의 병간호에도 힘쓰고 있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볼 수 있다. 아무리 바쁘고 할 일이 많아도 김은석은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돌보는 일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6)김은석의 하나님과의 관계

김은석은 ‘하나님’이란 단어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창세기에 실린 ‘하나님’이란 단어에 일일이 체크를 해놓고 그 사용빈도수를 209회로 체크했던 그는 출애굽기에서도 ‘하나님’이란 단어에 큰 관심을 보이면서 사용빈도수를 112회로 체크하였고(성경 66권 전체에 쓰인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주란 단어에 동그라미 마크를 해놓았다), 총 1134절로 되어 있음을 적고 있다. 이는 그의 생각이 온통 하나님에 집중되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김은석은 등불과 관련된 생각이 많았다. 등불은 말씀(계시)의 불, 기도의 불, 성령의 불을 상징할 수 있다. 출애굽기 27장 21절에서 “燈天恒常(등천항상)”, 즉 ‘하나님 앞에 항상 등불을 밝힘’이라 적고 있고, 헌금관련 성구를 적은 메모지 옆에 열왕기하 8장 19절을 근거하여 “恒常一燈(항상일등) 주심,” 즉 ‘항상 한 등불을 주심’이라고 적고 있다. 또 출애굽기 29장 39절에서는 “朝夕(조석)으로 獻燈(헌등),” 즉 ‘아침저녁으로 등불을 밝힘’이라고 적고 있다. 이는 그가 말씀과 기도와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얼마나 희구(希求)하며 살았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김은석의 성서통독에는 한 가지 특이한 원칙이 있다. 구약과 신약을 함께 읽을 때에는 구약의 책은 장(章)의 순서대로 읽고, 신약의 책은 장(章)의 역순으로 끝장에서 시작하여 첫 장을 향해서 읽곤 하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구약과 신약을 함께 읽을 때에는 언제나 이 원칙을 취하고 있다.

김은석은 가정보다는 교회와 복음전도에 최우선순위를 두었다. 예를 들어, 그는 출애굽기를 통독했던 1955년 1-2월 중에서 대전 자택에 머문 날은 단 하룻밤뿐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광주 집회소(김재순)에 있다가 대전 선화동교회로 바로 갔고, 다시 경북 금능군(김천시) 대보교회(장성우 목사의 사모 김순옥의 모친 김묘암이 설립)를 거쳐 충북 괴산군 소수면의 수리교회(장천호)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6일을 머문 후에 대전의 집에 와서는 단 하루 밤만 지내고 다시 논산 충곡교회(안영천)로 옮겨 가서 5일 이상을 그곳에서 머물다가 전남 영광으로 떠나 그곳에서 출애굽기 통독을 마치고 있다. 1954년 2월 2일에도 해남군에서 영산포행 차를 기다리는 중에 출애굽기 통독을 마치고 있고, 1956년 1월 19일에는 목포에서 출애굽기 통독을 마치고 있다. 출애굽기 통독을 마친 54, 55, 56, 57년의 시점이 모두 1-2월경이고, 57년만 부강교회이며, 나머지 세 번은 전남의 끝자락이어서 김은석 목사는 가정보다는 하나님의 교회와 복음전도에 최우선순위를 두고 살았던 분으로 여겨진다. 또 이런 남편과 아버지를 이해하고 모든 어려움을 이겨낸 사모 김완례와 양녀 명순, 양자 성철, 양녀 순희 자녀들의 희생은 김은석 목사에 못지않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7)김은석의 성서통독과 전도활동

김은석은 성서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교회들과 성도들의 집에서 읽었고, 버스와 기차와 배 안에서 읽었으며, 대중식당에서도 읽었고, 기차역에서도 읽었으며, 병석에서도 그날 분량을 반드시 읽었다. 그는 “일 년 동안 매일 3장씩이면 1095장 봉독. 구약 939장, 신약 260장, 신구약 합계 1199장. 성경보감 311 페이지 참고”라고 적고 있는데, 그는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서를 읽었다. 김은석은 1953년부터 1958년까지 매 장마다 언제 어디서 어디를 읽었는지를 메모해 놓았다.

김은석 목사가 전도하는 날은 365일 매일이었다. “1955년 3월 3일 목요일 마음에 감화되어 전도하는바 매일 일인씩 할 작정”이라고 적고 이어서 한 폐이지 촘촘하게 전도한 일자와 장소와 대상자의 성별, 이름, 나이를 적고 있다. 그의 의지가 얼마나 대단하였는가와 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가 남긴 성서의 한 페이지, 모세오경이 끝나는 신명기와 여호수아 사이의 빈 공간에 3월 3일부터 10월 말일까지 매일 일인 이상씩 전도하였다. 일일 단위로 전도한 사람의 이름과 나이를 빼곡히 적고 있다. 그는 심지어 주일에도 전도를 빼놓지 않았다. 한번 마음에 결정한 것을 실천에 옮기데 그것을 끝까지 이루고 마는 김은석의 의지력과 실천력은 가히 놀랄만한 것이었다. 10월 26일자에 더 이상 글씨를 쓸 공간이 없어서 아주 작은 깨알 같은 글씨로 이렇게 적고 있다. “26일부터 29일까지는 우연이 耳痛症(이통증)이 생기여서 外出不能(외출불능)으로 젼도 못함.” 병이 들어 외출을 하지 못할 경우가 아니면, 비록 그날이 주일이든, 생일날이든, 추석 같은 무슨 특별한 날일지라도 전도를 빼놓지 않았다.

김은석의 전도대상은 남녀노소 군인 경찰 교사부인 등, 구분이 전혀 없었다. 4월 17일 주일날에는 “校先妻(학교 선생의 처) 一人게 젼도”라고 적기도 하였다. 10월 22일 날에는 “목포 평화하숙 주인에게”라고 적고 있다.

김은석의 전도 장소는 부강, 대전, 연산, 소태, 충주, 서울, 강진, 상월, 목포 등 대한민국 구석구석이었다. 김은석은 이동이 잦았기 때문에 성서통독 때와 마찬가지로 버스와 기차를 이용하여 이동 중일 때에도 전도하였고, 출발지와 도착지에서도 전도하였다. 전도를 하지 못한 날은 “불젼인” 혹은 “젼불인”이라고 적고 있는데, 그 숫자가 일 년을 통틀어 몇 번 되지 않는다. 특히 8월 20일자에서는 “주님 앞에 죄송함. 금일은 불젼인”이라고 적었다.

김은석의 교회순방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집회를 포함한 전도활동과 성서강의였다. 그의 메모는 주로 성서를 어느 장소 누구의 집에서 몇 장까지를 읽었는가에 제한되기 때문에 어느 장소 어느 교회에 왜 갔었는지에 대해서는 혼인, 모친방문, 병석 등 특별한 경우들을 빼놓고서는 자세히 적어놓지 않았다. 그러나 “간다고만 하면 섭섭해 하니 답답함”이라고 적어놓은 것은 교회나 성도들이 그의 설교나 강의를 더 많이 듣지 못하는 데서 오는 서운함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에 그가 가는 곳에서는 항상 크고 작은 집회들이 열렸을 것으로 보인다. 목포교회 제2대 학생회장(1960년) 출신으로 1959년 12월 1일에 개교되어 54년만인 2013년 8월 31일에 폐교된 한성신학교에서 가장 오랜 40여 년을 가르쳤던 최용호 교수와 전남 해남군 화산면 방축리 교회 출신인 사모 박정자의 증언에 의하면, 김은석 목사가 지방에 도착하면 그날로부터 일주일에서 열흘씩 밤낮없이 집회가 지속되었고, 매번의 집회마다 시간제한 없이 수 시간씩 사경회가 지속되었다.

8)성서낙서를 통해서 본 김은석의 신학

김은석이 유품으로 남긴 성경책은 1920-30년대에 출판된 조선어와 한문이 혼합된 선한문(鮮漢文) 관주로써 너덜너덜해져서 김은석 목사가 손수 수차례 제본을 다시 하였는데, 책의 앞뒤페이지들은 떨어져 나가고 없고, 신약성서를 욥기와 시편 사이에 끼어 넣었으며, 메모를 위해서 간지들을 책들 사이에 끼어 넣고 꿰매어 성경의 일부처럼 만들었으며, 많은 낙서들을 남겨놓았다. 그의 성경책은 그의 손에서 떠난 지 46년 9개월여 만에 필자에게 전해져 필요한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성경책은 온통 낙서투성이다. 가죽커버를 열면, 첫 페이지에 ‘大慰之聖句 詩 九四 18-19’라고 큰 글씨로 적혀 있다. 가장 크게 위로를 받는 성경말씀이 시편 94편 18-19절이란 뜻이다.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시편 150편 끝 여백에 남긴 메모에서 시편의 말씀에서 받은 은혜를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1954년 7월 25일 주일에 본 시편 94편 9-150편까지 봉독하며 은혜 받음. 할렐루야! 성도의 노래 이 시편을 이와갓치 부족한 자 깃붐으로 봉독함은 진실노 주님의 은혜로다.”

김은석 목사는 요한계시록을 자주 읽었다. 천년왕국에 관련된 성구를 적어놓은 것을 보면, 그가 전 천년설을 믿었던 것 같다. 전 천년설은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에 천년왕국이 문자적으로 이뤄진다는 설로써 삶이 피곤하고 곤궁했던 시절에는 대부분 이 전 천년설이 유행하였다.

헌금(왕하 12:14-15, 22:7)과 헌물(출 36:3-7)과 헌납물(대상 29:8-14)에 대한 성구도 적어두었다. 특히 헌금은 계수하지 않는다고 적어 놓았다. 이들 성구들을 통해서 볼 때, 김은석은 사례금에 대해서 정산하지 않았으며, 헌금과 헌물은 풍족하고 넘치게 하되, 자발적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드려야 할 것을 가르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이와 비슷한 신념을 가졌던 목회자들이 교단 구별 없이 일부 있었는데, 궁핍해서 헌금조차 할 수 없었던 50년대의 일이었다. 그런데 교회와 경제가 동반 성장하던 1970-80년대에도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어서 교회에 부담을 준 사례들이 종종 있었다.

구약성서목록이 적힌 곳에 종(縱)으로 “1917년에 중국에서 느진비 성신이 임하야 참 예수교회 났타났씀.”이라고 써놓고 있는데, 1917년은 김은석 목사가 첫 부인을 맞이했던 때이다. ‘참예수교회’란 1917년 중국에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목표아래 산동성 출신의 장로교회 집사들이었던 안식일준수를 주장한 장빈, 침수세례를 주장한 은파, 방언은사를 주장한 장 바나바 세 사람이 창설한 ‘진야소교회’(True Jesus Church)를 두고 말한 것이다. 김은석이 참예수교회를 언제부터 알았는지, 참예수교회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또 얼마만큼의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참예수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와는 달리, 제칠 안식일(토요일) 준수와 방언 말함을 성령세례 받은 것으로 각별히 강조한다는 점을 뺀 나머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환원운동과 침례와 매주 성만찬에 있어서는 매우 유사하다(참고: http://tjc.or.kr). 특히 김은석이 성령의 은사에 관한 정통보수주의 견해와는 달리 성령체험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던 점에서 늦은 비 성령의 역사를 주장하는 참예수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김은석이 제칠 안식일 준수를 주장했거나 그날을 지켜 예배를 드렸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그가 남긴 성서통독메모들은 그가 주일을 철저히 지켰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은석은 교황의 호칭인 ‘하나님의 아들의 대리자’(Vicarius Filii Dei)를 666으로 믿으면서 천주교가 “십계명을 곳친 사실. 요리강령 28페이지에 참고, 안식일을 일료일노 변한 것. 364년 7월에 나오데게아 총회에서 선언함, 천주교 대요리 문답 제2편 81-83폐이지 참고, 개신교에서도 1554년 일료일을 안식일노 변함. 넷재 게명이 인침 밧는 것시다.”고 적은 것을 보면, 잠시나마 참예수교회의 안식일준수 주장에 공감했거나 그 쪽의 주장을 참고할 자료로 적어놓은 것으로 판단된다.

김은석의 강의내용 속에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관련된 침례와 매주일 주의 만찬뿐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와 교회명칭에 관한 것도 포함되어있었다. 요한복음과 사도행전 사이의 간지에 교회의 명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의미 있는 메모를 남겨놓고 있다.

교회명칭을 명시함

  • (1)광야교회라. 이는 구약시대(행 7:38)
  • (2)하나님의 교회라(행 20:28, 고젼 1:2, 갈1:13, 고후 1:1)
  • (3)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라(마 16:18)
  • (4)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라(롬 16:16,
  • (5)하나님 교회라(고전 11:16)
  • (6)모든 성도의 교회(고전 14:33)
  • (7)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딤전 3:15)

이후에 낫타난 교회말고도 만코만치만 이외는 지명을 따라 말한 것과 또 장소명에 따라서 있는대,

  • (1)아모개집에 있는 교회 예를 들면(몬 1:2)
  • (2)아모대 사람의 교회 예를 들면(살젼 1:1, 살후 1:1)에 말씀 갓튼 것인대 이를 드러라 말하자면 모도가 다 한분 하나님의 교회라든지 그리스도의 교회는 것인대 지금 이 교회명칭에 대하야 신중이 생각할 바 잇는 이유는 지금 현세에 잇서서 인위적이며 인본주의의 행동을 함으로 교회는 하나님의 피로 갑주시고 사신 것이라고 행 20:28에 말삼되엿고 고젼 14:33에도 하나님은 어지로운 일에 하나님이 아니시오 화평한 일에 하나님이시라 하며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그러하시다 하엿스니 우리 모든 신도는 잇태에 교회를 좀 잘 신중이 생각할 것시다.

9)김은석의 인간관계

김은석의 성공적인 사역의 배후에는 인간관계가 있다. 한 인간의 성공과 실패의 배후에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와 인간관계가 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크고 작은 공과(功過)가 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와 인간관계가 좋았을 경우에는 과(過)보다는 공(功)이 앞세워지게 된다. 뛰어난 하나님의 일군들에게도 크고 작은 실수가 없지 않다. 이 점은 김은석 목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후대에까지 존경을 받는 것은 공(功)이 과(過)보다 크고 인간관계가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은석의 좋은 인간관계를 말해주는 증거들은 많다. 먼저, 그가 관계한 혼인의 일만 보더라도 중국에서 2쌍, 일본에서 8쌍, 본국에서 60쌍, 총 70쌍이나 된다. 이들 중에는 지철희, 문원섭, 이원노, 김태수, 최요열, 김은성, 김규상, 박점상, 최순국, 김은영 등이 포함되어 있다. 61세의 짧은 일생을 마친 김은석 목사로서 70쌍 이상의 혼인에 관계하였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는가를 말해준다.

김은석 목사가 1960년에 연하장을 보낸 곳은 개인 38명, 교회 31곳이었다. 또 양녀 김명순의 결혼통첩을 개인 37명, 교회 25곳에 보내었다. 연하장을 보낸 곳과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다른 이름들도 꽤 발견되었다. 이뿐 아니라, 김은석은 별세자들의 명단까지 적어두었는데, 여기에는 정찬성(1957년 4월 25일), 김재순(1958년 2월 26일), 강순명(1959년 3월 12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심지어 이신의 부친(1954년 6월 16일)과 이종만의 모친(1957년 8월 14일) 별세 일자까지 적어놓았다. 이것은 동료의 기일까지 챙기는 그의 인간적인 면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믿어진다. 이런 점 때문에 그의 전도사역은 성공적일 수밖에 없었고 동료들이 늘 곁에 있었던 것이다.

혹자는 김은석 목사가 1960년에 발송한 연하장과 양녀의 결혼통첩이 생각보다 숫자가 많지 않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추측컨대 이때는 루머에 연루되어 얼마동안 칩거했다가 세상에 나온 터라 자신을 이해해줄 동료들이거나 꼭 받아야할 사람들에게만 선별해서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10)김은석의 세상사

김은석은 주의 일로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다. 그는 예수님의 삶에 잇대어 험한 가시밭길을 걸었다. 그는 교파교단의 비난과 핍박과 가난함과 곤고함과 싸웠다. 김은석에게 갈등과 시련은 늘 있었으나 그 때마다 성경봉독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새 힘을 얻곤 하였다.

김은석은 세상 즐거움을 완전히 끊어버린 사람이었다. 그의 일상은 기도하고 성경 읽고 전도하고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이었고 교회순방을 위해서 기차타고, 버스타고, 배타고 이동하는 것이었다. 낮이고 밤이고 시간만 나면 성경을 읽었다. 교회당에서, 강단 앞에서, 강단 옆에서, 강단 뒤에서, 교회의 골방에서, 목회자의 방에서, 자택의 방에서, 다락방에서, 심방한 성도의 방에서, 식사하던 식당에서, 기차에서, 버스에서, 배에서, 정류장에서, 터미널에서, 누구와 있든지, 누구와 동행하든지 상관없이,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이, 어디로 향하든지 상관없이, 시간만 나면 성경을 읽었다. 매일 그렇게 읽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읽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조반 전에, 조반 후에, 오후에, 늦은 밤에, 새벽에 읽었다.

김은석은 사생활이 없었다. 일 년이면 거의 대부분을 남의 교회와 남의 집에 머물렀고, 그것조차도 동료들과 함께였기 때문에 그에게는 숨길 것도 감출 것도 없었다. 그가 어쩌다 자택을 찾는 경우에도 동료들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다”(마 12:50)고 말씀하신 예수님처럼, 김은석도 함께한 주의 일군들이 그의 형제요 자매였다. 김은석은 자기보다 어린 동료들까지도 자주 ‘형’(兄)이라 썼고, ‘형제’라 호칭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김재순, 김명석, 이신, 최요한 등이 있었다. 진성구, 김교인 장로들을 호칭할 때는 항상 ‘님’를 붙여 썼다. 동료들이 여성인 경우에도 ‘님’자를 붙여, 박종예 자매님, 이원화 자매님, 전도희 자매님 하는 식으로 깍듯하게 불렀다.

김은석에게 세상일은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그는 양아들 김성철이 자신의 대를 이어서 목사가 되어주기를 바랐으나 평소 세상공부는 필요치 않다며 학교공부를 시키지 않았다. 김성철 목사가 충남상고와 충남대를 졸업한 것은 순전히 개인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김성철의 친부인 김명석(김주일) 목사도 이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김은석을 일본에 있을 때부터 추종하였으므로 그 역시 처자식들을 돌보지 못하였다. 처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 책망 받을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마 10:34-39).

1954년 4월 첫 주말에 전남교회(최요한)를 다녀온 김은석은 다음날인 4월 6일 화요일 아침에 사무엘상 9:9-12:25까지를 대전시 선화동 2구 315번지 교회에서 읽었는데, 마음에 무슨 변화가 일었는지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런 중에 특별한 일리 엇슴은 나는 금일부터는 가족을 아주 떠나는 것을 선언.” 또 같은 날 부강교회로 옮겨서 저녁에 강단 앞에서 사무엘상 13-14장을 읽고는 “사랑받으며 봉독함”이라고 적고 있다. 다음 날인 7일 수요일에도 아침부터 밤까지 사무엘상을 읽었다. 그리고 10일 토요일 주일예배 참석차 대전에 왔고, 주일인 11일에는 교회를 사임하고 유호성 전도사에게 전임시키고 있다. 그리고 다음날 12일 월요일 아침에 평소 습관대로 성경을 읽고 조반 후에 부강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부인 김완례 사모가 병이 났고, 병자를 두고 떠날 수 없게 된 상황이 벌어졌다. 할 수 없이 그는 13일 화요일까지 남아서 병상을 지키다가 14일 수요일 부강으로 떠나고 있다. 그러나 김완례의 병은 그 주간 내내 완쾌되지 못했고, 김은석은 16일 금요일에 돌아와 병든 사모 곁에서 성서를 읽고 있다. 그리고 18일 주일을 지킨 후 19일 월요일에 대전시 은행동 2구 1번지 10통 41반으로 이사하였다. 대전 선화동 교회는 김은석이 구호물품의 잉여물자를 알뜰히 모아 팔아서 마련한 땅에 건물을 짓고 시작한 자기 교회였다. 그러나 사임을 했으니 집을 비어줘야 했을 것이고, 사모는 이 갑작스런 결정에 충격을 받고 쓰러졌을 것이다.

이 사건이 있었던 1954년 4월은 김은석의 심경에 어떤 큰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이 기간에 그는 영적으로 심적으로 상당히 고무된 상태였으며, 성경을 읽는 시간도 아침에 국한되지 않고, 늦은 밤이나 한 밤중까지 계속되곤 하였다. 그러나 1958년까지의 행적을 볼 때, 그가 가족을 떠나겠다고 선언한 것은 부흥집회와 성서연구집회에 전념하겠다는 뜻이었지, 가족을 버리겠다는 뜻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떻든 그의 출가선언은 가족에게 적지 아니한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이렇듯 김은석은 주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가족은 물론 재산까지도 포기할 수 있었던 희생적인 신앙인이었다.

김은석에게 설날과 추석 혹은 생일과 기념일 같은 특별한 날은 그의 인생에 전혀 의미가 없었다. 명절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거나 온 식구가 한 상에 둘러앉아 명절을 맞는 일이 적어도 그의 성서메모에서는 나타나 있지 않다. 1954년 2월 3일(수)부터 5일(금)까지가 설 명절이었는데도 그는 집엘 가지 않고 교회를 예방하는 요무(要務)로 2일(화) 전남 해남군 성전시장에서 대전행 차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영산포행 차를 기다렸고, 기다리는 중에서도 출애굽기를 읽고 있었다. 1955년은 1월 23일(일)부터 25일(화)까지가 설 명절이었는데 그는 22-23일(토-일)에 광주 집회소에 있었고, 24일 월요일 설날에서야 대전 선화동에 도착하여 25일까지 이틀 밤을 묵고, 26일(수)에는 다시 경북 금능군(김천시) 개령면 대광동 2구 대보 그리스도의 교회(장성우 목사의 사모 김순옥의 모친 김묘암이 설립)에 갔다가 27일(목)에 수리교회로 올라갔다. 1956년은 2월 11일(토)-13일(월)까지가 설 명절이었는데, 집에서 가까운 부강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가지 않고 교회에 남아 성경을 읽고 있었다. 1957년에는 1월 30일(목)부터 2월 1일(금)까지가 설 명절이었다. 그는 이때에도 부강교회당 골방에 머물며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읽었다.

김은석 목사는 기도의 용사였다. 그는 성경을 읽을 때 대부분 강단 앞과 강단 옆과 강단 뒤에서 읽었던 만큼 기도를 겸하였을 것이다. 그는 가끔씩 금식 중에 성서를 읽었다. 1955년 3월 16일 수리교회에서, 19일 부강교회에서 금식 중에 성서를 읽고 있다.

김은석의 삶은 하나님사랑, 인간사랑, 특히 인간의 영혼을 사랑한 삶이었다. 따라서 그의 삶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가르치고, 바르게 실천하기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경을 읽었고, 인간의 영혼구원을 위해서 전국 각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으며,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말씀 충만, 기도 충만, 성령 충만을 추구한 삶이었다. 그의 굵고 짧은 삶은 오늘 우리에게 “춘몽 같은 인생, 무엇을 하며,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를 진지하게 묻고 있다.

11)김은석 목사가 끼친 충격파

김은석은 그의 생애 마지막 17년을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몸 바쳤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해낸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초기 교회에 큰 부흥을 만들어낸 것처럼, 1950년대 김은석과 그를 작은 예수로 생각할 만큼 그를 신뢰하고 따랐던 동료들이 해낸 수고와 헌신은 충청도와 전남에 70여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게 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공로가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김은석 목사와 일부 추종자들은,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다”는 마태복음 10장 37절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천할 만큼 성서주의로 살았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그들의 가족들이 입은 고통이 상당히 컸다.

김은석의 주일날 성서통독은 평일의 성서통독과 그 내용이 달랐다. 그는 주중에 읽던 책을 계속 읽지 않고, 다른 책들(욥, 시편, 잠언, 전도, 아가)을 읽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책이 욥기서였다. 김은석은 1954, 56, 57년에 주일마다 욥기를 읽었다. 이 욥기서 40장의 여백에 이렇게 적었다.

    1955년 4월 17일 주일... 금일도 섭섭한 말을 듣게 되는 것은 김명석 형제 부인이 육적생활 불만으로 나를 원망한다 하며 또 김은성이는 활교회를 못가겠다는 뜻을 말함. 그 안해가 불만 언(言).

이 기록은 출가(出家)를 선언한 김은석 목사와 그의 동료들이 그들의 가족에게 끼친 충격이 얼마나 컸는가를 가늠케 한다. 자녀들은 물론이고 사모들의 원망과 원성이 적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1954년 4월 김은석의 폭탄선언이 김완례 사모를 충격에 앓아눕게 만든 점 등은 당시의 정황을 충분히 짐작케 하고도 남는다.

김은석 목사를 추종했던 동료들 가운데는 남성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여성들도 꽤나 많았다. 이점에 있어서는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루디아, 브리스길라, 뵈뵈와 같은 여성 동료들의 사역은 사도 바울의 선교에 큰 동력이었다. 여성 동료들의 사역이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란 점에 있어서는 김은석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김은석 목사가 꽤 많은 여성 동료들의 방에서 성서를 통독하고 있는 점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아마 그들은 김은석의 집회와 성서연구회를 돕고, 성서토론에 참여했거나 식사와 세탁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과의 잦은 접촉은 말 많은 사람들에게 루머의 빌미를 제공한다. 김은석의 몸을 아끼지 아니한 헌신과 희생으로 얻은 대가는 값으로 매길 수 없으며, 헤라클레스처럼 무거운 운명의 짐을 짊어지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으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성실하게 수행해냈음에도 불구하고, 호사다마란 말이 있듯이, 불행하게도 말년에는 악성루머에 휩싸이게 되었다.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에 ‘강신규’란 여성의 이름이 1954년 5월 1일부터 시작되어 총 26회 등장한다. 강신규는 김은석의 충실한 여성 동료이자 김완례 사모의 올케의 올케 또는 올케의 아들인 김은영 목사의 외숙모였다.

김은석은 말년에 창병(瘡病)으로 고생하였다. 그 때 그는 창병의 치료를 위해서 ‘강신규’의 거처에 머물며 간호를 받게 되었다. 그로인해서 악성루머가 퍼졌고, 루머의 사실여부를 밝히고자하여 모인 50여명의 목회자들 앞에서 김은석은 시인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를 사랑하고 존경했던 전국 그리스도의 교회 성도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를 사랑했던 많은 성도들은 이 사건을 연민과 동정으로 받아드렸고, 일생을 가시밭길을 걸으며 복음전파만을 위해서 자기 자신과 가족까지 돌보지 않았던 그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 사건은 김은석 자신에게도 극복하기 힘든 충격이었다.

루머는 진실 여부를 떠나서 치명적이기 때문에 악성이다. 예수님도 여러 가지 악성 루머로 인해서 재판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 뒤집어쓰신 죄목은 신성을 모독한다는 것과 민중을 선동한다는 것이었으며,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서 세금납부를 거부하고, 신성을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이런 몇 가지 죄목들을 이유로 십자가형에 처해지셨다. 바울도 전염병 같은 자, 유대인들을 소요케 하는 자,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 성전을 더럽히는 자라는 죄목으로 4년 가까이 옥살이를 하였으며, 석방되었다가 4년 후 67년경에 로마의 황제 네로 때에 목 베임을 당하였다. 로마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십자가형만큼은 면했다.

김은석 목사가 창병(瘡病)에 걸렀을 때 자택에 들어가지 아니한 것은 정말 아쉬운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년에 창병으로 고생할 때 집에 들어가 김완례 사모의 돌봄을 받지 않고, 강신규 자매에게 간 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첫째, 김은석은 김완례 사모를 편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성서통독메모에서 김완례 사모의 이름 뒤에는 언제나 ‘씨’자가 붙어 나타난다. 혹시 연상이 아닐까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늘 존대하였다.

둘째, 김은석은 사모 김완례와 가족들에게 평생 무거운 짐만 짊어지웠다. 가정을 전혀 돌보지 않았고, 전도 집회와 성서강의로 인해서 한 달에 한 번도 집엘 들어가지 못하였다. 집회와 순방이 많았기 때문이다. 1954년 4월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 즉 출가선언, 교회사임, 이사로 인한 김완례 사모와 가족이 받은 충격을 언급하였듯이, 비록 그 후로도 가족관계에는 전혀 문제가 없긴 하였지만, 말년에 창병으로 거동이 불편했던 김은석으로서는 차마 사모 김완례에게 자신의 병든 몸을 의탁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사모의 건강이 평소 좋지 않았던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셋째, 강신규는 김은석의 집회를 돕기 위해서 자주 동행했던 전도희, 김숙명 등 여러 여성들 가운데 한 명으로서 평생을 주를 위해 헌신봉사하신 존경하는 김은석 목사의 병든 몸을 치료하기 위해서 집으로 모셨던 분일 것이다. 김은석 목사나 강신규 자매 사이에 로맨스를 개입시키는 것은 매우 불경한 일이다. 김은석은 이 때 이미 60세의 나이였고, 일생동안 부부생활을 멀리하고 살았던 분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닌 에로스의 관계로 보려는 것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라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은석은 이 십자가를 피하지 않았고, 날아드는 루머의 돌 세례를 온몸으로 받았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이 문제를 기정사실처럼 받아드리게 만드는 또 다른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과연 김은석 목사는 자신과 세상과 끝없이 싸우며 괴로운 가시밭길을 걸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지상의 모든 고뇌를, 지상의 모든 수고를 그에게 짐 지웠으나, 저 장렬한 최후의 날까지 그는 이 수고를 훌륭하게 참아내었다. 비록 그는 한 알의 밀알로써 썩어졌지만, 그로 인해서 많은 생명의 열매들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지속적으로 맺히고 있다.

12)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

1945년 오데골 장로교회로부터 제명이 된 후 추종하는 교인들과 함께 이복춘(김규상 목사의 모친) 집사의 디귿자 기와 대청마루로 예배처를 옮겼다. 김은석은 이복춘의 큰방에서 거처하였다. 가족은 서울 북아현동에 머물렀다. 오랜 지기 박점상도 이웃하여 살았는데, 박점상의 증언에 의하면, 김은석은 1946년 박점상과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다.

이 무렵 누에를 기르던 잠실터를 매입하여 예배당을 짓고 교회명칭을 고민하던 중,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가 309쪽에 소개한 김정만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정찬성의 제안으로 이름을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로 지었다. 신화신학 성경연구회도 1946년에 시작되어 충청이남지역 그리스도의 교회 발전의 잠실(산실)이 되었다.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는 1946년에 창립되었으며, 제1대 김은석을 시작으로 김상호, 함태영, 이규승, 김청자, 김재중, 김평수 등으로 이어졌고, 현재는 한명호 목사가 현대식 2층 건물로 옮겨 목회를 하고 있다.

대전 성화교회 오재건 장로의 <신앙체험기>에 의하면, 김교인 장로는 대지 500평을 하나님께 바쳐 부강교회를 짓게 하였으나 후대의 목회자들이 교회대지를 여러 명목으로 조금씩 매도하여 1976-77년경에는 147평만이 남았다고 한다. 이 조차도 노리는 사람이 많아 여러 번 빼앗길 뻔했던 것을 김태수와 오재건의 노력으로 되찾은바 있어서, 김태수 목사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이 대지를 오재건 장로에게 관리를 위탁하였으나 오재건은 관리에 어려움이 있음을 알고 재단법인 크리스천 미션에 넘겨 안전하게 관리되도록 하였다.

13)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

1951년 봄에 광주에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교역자회가 조직되고, 김은석의 주례로 장주열, 최요한, 김재순, 창현 함태영, 이신(이만수), 김동열이 목사안수를 받은 이후 제1회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가 1959년에 개최되었다. 이 모임에 성낙소, 심영진, 장성만, 최요열, 이신 등 다수가 참석하였다. 1961년 8월 17일 부강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가 개최되었으며, 주제는 ‘신약교회로의 환원’이었다. 이 모임에 힐 요한, 장성만, 박재관, 김동열, 이종만, 정인소. 김찬영. 김성철, 심영진, 이신, 장주열, 성낙소, 안일승, 고재윤 등이 참석하였다. 1962년에는 신탄진 천막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가 개최되었고, 60년대 중반에는 한국성서신학교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가 개최되었다. 이 모임에 딕 래시, 힐 요한, 최용호, 힐 제인, 김중현, 고광석, 천명화, 장주열, 노봉욱, 임춘봉, 장성만, 최요한, 조규석, 이종만, 안일승 등이 참석하였다.

3. 김은석 목사의 동료들

김은석의 동료들은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서 여기에 다 일일이 거명할 수가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자료가 가능한 인물들만 선별해서 소개하려고 한다. 이들 가운데는 김명석(김성철 목사의 친부), 박점상, 김교인(1956-57년경에 순복음교회로 이적), 신현창, 김재순, 최춘선<김포교회, 사회사업가. 소천 전 30여년을 맨발로 거리와 지하철에서 전도. 1951년 6월 김은석, 정찬성과 함께 충주시 동양면 조동(동량)교회 설립>, 정찬성(순복음으로 이적), 김상호(순복음으로 이적), 김태수(부강교회 김교인 장로의 아들), 김재순(부강교회 김교인 장로의 아들), 함태영, 이신, 강순명(천혜 경로원), 이원노, 김정만, 심영진, 장주열(최요한의 큰 동서), 최요한, 김동열(광주 그리스도님의 교회), 장성만, 김은영, 고광석, 임남규, 전도희, 등 너무 많아 다 기술할 수가 없다.

1)김명석(김주일) 목사(1906-)

김명석의 본명은 김주일이다. 그는 1931년 25살 때 일본에 건너가 부인 구봉림과 함께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가까운 바닷가 ‘야마구치갱(山口峴) 아사’라는 동리에서 살았다. 그는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1953-58)에 26회 언급되었다. 그가 김은석을 처음 만난 것은 1936년 30살 때인 어느 주일날 아침 일본 산구현(山口峴)교회에서였다. 그날 김은석은 초청강사였다. 이후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고 늘 붙어 다니면서 집회를 인도하였다. 해방 후 경남 밀양에 가까운 예림이란 곳에 자리를 잡았으나 김은석을 추종하였으므로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 이 무렵 자녀를 갖지 못한 김은석에게 둘째 아들 김성철(1938.5.17-)을 1948년에 때 양자로 넘겼다.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공부하였고, 충북 괴산군 소수면 수리교회에서 목회하였다.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에 의하면, 1955년 후반기에 경남 통영군 도산면 도선리 1구 그리스도의 교회를, 1957년에는 충북 청주 영운동 교회를 섬겼다.

2)박점상 장로/목사(1928.3.23음력-)

박점삼은 1928년 3월 23일(음력)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으며, 1933년 4월 여섯 살 때에 묘산면 관기리에 있는 교회를 어머니를 따라 간 것이 믿음생활의 시작이었다. 어머니가 병에 들었으나 약도 없고 나을 길이 없어 점쟁이를 찾았는데, “당신은 큰 신(神)을 믿어야 병이 낫는다.”고 하였다. 하루는 꿈에 외국인이 나타났는데, 윗마을 교회에 찾아가서 보니, 강단 옆 벽에 걸린 예수님이 바로 꿈에 본 그분이었다. 그때부터 마음에 기쁨이 생기고, 교회 가는 것이 즐거워서 8킬로미터나 떨어진 교회를 일 년을 열심히 다녔더니, 일 년 후 알게 모르게 병이 다 나아 버렸다. 한편 아버지가 큰 외삼촌의 보증을 섰다가 집안형편이 심히 어렵게 되었으나 어머니는 맥추헌금을 넉넉히 작정하였다. 그 일을 어떻게 알았는지 사람들이 겁도 없이 헌금을 많이 작정하였다고 비방하였다. 하루는 박점상이 아버지가 만들어준 지개를 지고 어머니를 따라 산에 올라갔다가 싸리버섯을 발견하였는데, 두 번에 나눠서 가져와야할 만큼 양이 많았다. 장날에 내다 팔았더니 작정한 헌금을 내고도 돈이 남았다.

1937년 2월 열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도(東京都) 아다지(足立區)에 위치한 큰 강 건너 꽤 먼 거리의 일본인 교회를 출석하였는데, 그 교회는 매주일 성만찬을 거행하는 교회였다. 일본에서는 교파이름을 쓰지 않고 ‘기리스도노 코오카이’(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통칭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침례와 매주 성찬을 행하는 그리스도의 교회였다.

12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큰 누님 댁으로 이사를 들어갔다. 그런데 주변에 교회도 없고 큰 누님은 믿지 않는 분이라 핍박이 있어 주일마다 산에 올라가 기도하고 성경 보면서 어머니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교회가 있는 지역으로 이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는데, 하루는 김은석 조사(전도사)가 우연히 찾아와 도쿄에서 아주 먼 거리에 위치한 야마구찌갱(山口峴) 도구야마시(德山) 가스가조(春一町) 8032번지를 소개해 주었다. 그곳으로 이사하여 갔더니, 몇 가구가 함께 사는 교회당이었는데, 마침 두 개의 빈 방이 있어서 그곳에서 정착하였다. 그곳 교인들이 예배당을 따로 짓기로 결정하고 건축을 시작하였을 때, 박점상의 모친은 소다제조회사에 다니며 모운 돈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벽돌을 헌납하였다.

이때부터 김은석 목사와 친분을 맺게 되었다. 이때의 김은석의 이름은 일본말로 간다긴세기 신전 은석이었다. 별명은 합바지(무명 바지) 조사(전도사)였고, 시모노세키(하관), 아사(김주일 거주), 덕산(박점상 거주), 동경지방 등 전국을 돌며 복음을 전하였다.

김은석 목사가 유명해지는 한편, 일본은 대동아전쟁 때부터 교회에 대한 간섭을 시작하였고, 목사들을 미국의 스파이로 의심했던 일본당국은 요주의 인물로 김은석을 꼽았다. 김은석은 신사참배와 동방요배(예배 시작 전에 현인신現人神으로 믿는 일본 왕이 살고 있는 동쪽을 향해 절하는 의식)를 거부하였으므로 문제가 되었다. 한번은 교회입구 통로에서 잡으러 온 왜경과 김은석이 어깨를 서로 마주치고 지나친 적도 있었다. 이후로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김은석은 박점상 가족과 함께 도쿄에 집을 얻어 이사하였다. 노동을 하면서 한 집에서 방 하나씩 차지하고서 김은석, 박점상 가족, 최창신 전도사와 그녀의 외손녀 히로코(홍자) 세 가족이 함께 살았다.

박점상은 김은석이 한국에서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급전을 받고 귀국하면서 헤어지게 되었고, 동경교회를 다니다가 18살에 해방이 되어 김은석의 주소를 들고 서울로 나왔으나 혼잡한 기차에 오르면서 지갑(수첩)을 도난당하여 찾지 못하고 고향 합천으로 갔다가 다시 김은석을 찾아 김제군 망경읍으로 갔다.

박점상은 한국에 나오면서 김은석이 맡겨둔 짐 가운데 무거운 것은 가져오지 못하고 코트와 의류만 챙겨왔다. 책은 왜경이 다 가져가 버렸기 때문에 남지 않았다. 1946년 박점상은 망경읍에서 담임목사의 도움으로 주소는 모르지만 김은석이 서울에서 300만 부흥운동의 부흥사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반가워 편지를 쓰고 받는 이의 주소를 무작정 “서울 김은석 목사님 귀하”라고만 써서 부쳤다.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몇 날이 못 되어 김은석으로부터 망경읍에서 40여리 떨어진 마채본 집사의 딸집에서 동짓날 만나자는 답신이 왔다. 그러나 김은석은 사정이 있어 오지 못하고 대신 다른 사람이 와서 김은석 목사의 소식을 전하였다.

김은석 목사 가족이 서울 북아현동에 있을 때 박점상은 이웃에 방을 얻어 살았다. 김은석이 아직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기 이전인지라 재건교회를 비롯한 몇몇 교회들을 탐색하였는데, 자신의 신앙과 맞지 않음을 깨닫고 1946년 박점상과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다. 김은석은 비록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령운동에서는 자신의 뜻과 맞지 않지만, 침례와 성만찬 등의 교리가 성서적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박점상은 1947년 부강으로 내려와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일하며 부강교회 건축에 힘을 쏟았다. 그는 1949년 4월 금강에서 침례를 받자마자, 정찬성 목사가 충북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에 세운 외령교회(지철희 목사의 누님 집. 당시 지철희는 12세 정도의 소년이었음. 후에 박점상이 전남 무안군 현경면 평산리 처가 마을의 정귀남 집사의 딸을 지철희에게 소개함)를 개척하여 섬기다가 신탄진 교회로 옮겨가자, 박점상이 외령교회 2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고 후에 수룡교회를 개척하였다. 1950년 6.25 동란 때 고향 합천으로 피난하였다가 9.28 수복 후 외령교회로 돌아갔으며, 1951년 1.4 후퇴 때 다시 합천으로 피난하였으나 살길이 막막하여 합천 세무서에서 8월까지 일하다가 김은석 목사가 이동 중에 징집 당하지 않도록 힐 요한 선교사를 통해서 미8군 종교담당자의 이름으로 통행증을 편지에 동봉하여 보내주었으므로 광주로 김은석을 찾아가 그곳 신화신학 성경연구회(김은석, 이신, 창현 함태영 등이 운영)에서 공부하던 자매 정규님과 김은석 목사의 중매로 1951년 8월 13일(음력) 결혼하여 전남 평산리 처가에 신접살림을 꾸렸다.

한편 처가 근방에 있는 전남 함평군 손불면 신흥 그리스도의 교회를 다니던 10여명의 성도들이 평산리에 있었는데, 교회가 30여리나 떨어져 있다 보니까 교인들이 박점상이 목회하다 온 줄로 알고 교회를 세워달라고 부탁하여 힐 요한 선교사에게 개척자금을 요청하였더니, 얼마간의 돈을 보내주었다. 이에 박점상은 신흥교회를 오가면서 눈여겨 보아둔 주포의 빈 집을 사서 그 재목을 배로 운반하여 처가가 내준 땅에 평산리교회를 건축하여 개척하였다. 그 후 얼마 못되어 충북 청원군 강서면 송절리라는 곳에 이성화 장로가 교회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교회(문암교회의 전신)로 환원하자 부임하여 섬기다가 다시 이성화 장로가 교회를 가지고 침례교회로 넘어감으로써 사임하였다. 얼마 있다가 1953년에 힐 요한 선교사의 연락을 받고 서울에 올라가 마중 나온 힐 선교사의 차를 타고 도강증 없이 한강을 건너 장충동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 반을 공부하였다. 1956년에 대전침례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식구가 일곱 명이나 되었음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학교에서 소개한 평택 서정리에 김은석의 큰 동생 집에서 서정리침례교회를 개척하였으며, 온양 온천침례교회를, 후에 장항교회를 1960년 졸업 때까지 섬겼다.

침례신학교를 졸업한 후 가족이 많아 받아 주는 교회가 없고, 가족부양도 문제인데다가 목회하면서 생활에 얽매이면 삯꾼 목회자가 될 것이라 믿어 목회를 그만 두었다. 그러고 나서 대전에서 기술자를 두고 시계방을 운영하면서 어깨너머로 기술을 습득하였고, 서울 남대문에서 노점상과 업자를 상대로 시계를 수리를 하던 중에 노동청이 시행하는 시험에 응시하여 시계수리1급자격증을 받았다. 1967년 성동 그리스도의 교회의 전신인 남산동 교회에서 장로안수(이때 김규상 목사 안수 받음)를 받고 재무로 시무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 장로회를 조직하여 총무를 맡아 보았다. 1982년에는 생활의 기반을 잡은 후여서 지온어린이집의 부속 교회에서 장로로서 무보수로 목회를 하다가 1983년 1월 남부 중앙 그리스도의 교회로 옮겼다. 남부중앙교회는 홍제 그리스도의 교회의 어떤 교인이 구입했던 것을 최윤권 목사가 재구입하여 교회가 지속되게 하였고, 후에 교회가 자금을 마련하여 최윤권 목사로부터 실비로 매입한 교회였다. 1983년 3월 14일 목사 안수를 받고 1950년대 김은석의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공부한 이원노(로) 목사와 함께 협동목사로 부임하여 은퇴할 때까지 담임하였다. 이때 명목상의 담임목사는 최윤권이었다.

박점상 목사는 서울기독대학교 법인이사로 36년간 섬겼고, 동 대학교에서 2009년 8월 24일 선교학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으며, 현재 한국기독교원로목사회 이사로 섬기고 있다. 사모 정규님과 더불어 혜숙 목사(전대웅 목사 사모, 방글라데시 선교사) 성희, 성숙, 혜자, 정숙, 정회, 남숙, 남희를 두었다.

3)김교인 장로(1890-1970)

김교인(金敎人)은 김은석 목사를 모셨던 부강 오데골 장로교회의 장로였다. 민 선교사로부터 전도를 받고 한문성경을 읽고 깨우친 후에 전도인 활동을 하고 선교사로부터 생활비보조금을 받다가 1936년에 부강으로 이사하여 양약방을 열었다. 오데골에는 김교인 장로가족과 김규상의 모친 구봉례 집사와 작은 어머니 정도가 모이는 장로교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예배를 인도하며 교회를 끌고 나갔다.

1944년 집안에 어려움이 있어 부인이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노회가 열려 참석하였다가 김은석을 소개받아 1945년 가을에 담임목사로 모시게 되었다. 김은석은 부임하자마자 100회 집회를 선언하고 시행하여 큰 부흥을 일으켰는데, 노회로부터 자제하라는 명령이 시달되었다. 이에 굴복하지 않자, 노회는 김은석을 제명하였다. 이 일로 김교인은 김은석, 정찬성과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고, 1946년에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대전 성화교회 오재건 장로의 <신앙체험기>에 의하면, 김교인은 대지 500평을 하나님께 바쳐 부강교회를 짓게 하였으나 후대의 목회자들이 교회대지를 여러 명목으로 조금씩 매도하여 1976년경에는 147평만이 남았다고 한다. 이 대지를 김태수 목사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오재건 장로에게 관리를 위임하였고, 오재건은 관리에 어려움을 느껴 크리스천 미션 재단에 넘겨 관리하게 하였다.

김교인은 1956-57년경에 순복음교회로 이적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에 김교인은 전남 함평군 함평면 석성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김교인은 최요한이 1946년 10월 전남 함평군 손불면 주포리에 개척하였다가 그 이듬해인 1947년에 함평면 석성리 청학동으로 옮겨 김교인 앞으로 등기된 땅 위에 세운 석성 그리스도의 교회를 순복음교회로 이적 시켰고, 추후 이 교회에 700평 땅을 바쳐 50평 예배당을 짓게 하였다. 이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에서 1956년 12월 13일 이후에 김교인과 석성리 청학동 그리스도인 집회소와 신생동 교회, 그리고 이들 교회들을 인도했던 노의수 집사(전도사)에 대한 언급이 모두 끊겼다.

순복음교회로 이적할 당시 김교인은 이미 서울로 거주지를 옮긴 상태였다. 김은석의 1956년 7월 16일(월)자 메모에 의하면, 김교인은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산18번지에 살고 있었다. 서울에서 그는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섬겼으며, 1970년에 숙한으로 신촌교회에서 소천 하였다. 사모 김정렬로부터 김재순 목사, 김태수 목사, 김철수 목사, 김복수 집사, 외손자 엄규석 목사 등을 두었다.

큰 아들 김재순(1922-1958) 목사는 해남, 영광, 함평, 금동(광주)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김은석 목사의 기록에 의하면, 1958년 2월 26일 광주에서 소천 하였다. 김태수 목사는 김은석의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공부하였고, 1955년 3월 3일 힐 요한이 교장으로 있던 서울성서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으며, 50년대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와 60년대 한국성서신학교에서 교수(통역)를 역임하였다. 70년대 중반에 미국에 이민하여 LA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겼다. 김철수 목사, 엄규석 목사도 LA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겼다.

4)신현창 장로

신현창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예수를 믿게 된 의사였다. 그가 김은석을 만난 때는 부강으로 이사하여 병원을 개업하면서였다. 김은석과 함께 신화신학 성경연구회를 조직하여 강사로 섬겼다. 1964년에 논산 충곡리 교회의 목회자로 부임하여 계시다가 소천 하였다.

5)정찬성 목사(1913.05.06~1957.04.25)

정찬성 목사는 충북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 반능(半陵)이 고향이다. 친구인 이학재(감리교 장로)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우체국에 근무하는 집배인이었다. 낮에는 편지를 배달하고 저녁에 교회를 다녔다. 일제가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강요하자, 정찬성은 신앙에 어긋난다면 가미사마에게 절하는 것을 회피하였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자전거를 타고 언덕길을 내려가다 미끄러져 절벽 아래로 떨어졌고, 다리가 얼음 속에 박혀 부상을 입게 되었다. 치료를 받기위해 청주 모 병원에 입원하여 있는 동안 병원에서 성경책을 주며 읽도록 권하였다. 마침 교회를 다니고 있던 터라 기도하기를, “내가 여기서 병을 낫게 되면 사도 바울과 같이 끝까지 복음을 전하겠습니다.”고 했는데, 기도한 후에 정말 다리가 낫게 되어 김용선 자매와 결혼까지 하였다. 결혼하고 나서야 김용선은 정찬성이 다리를 조금 전다는 것을 알았다.

이후 정찬성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노방전도를 다녔는데, 왜경들이 늘 추적하였고, 김상호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전통을 중시하는 집안 어른들의 핍박도 상당히 심했다고 한다. 그는 믿는 사람들(목사들)의 고발로 체포되어 청주 남조동, 대전 신탄진, 충주로 이송되면서 많은 고문을 당하였다. 감옥에서 나온 후에는 처형이 사는 만주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만주에서는 산에 올라 초근목피 하였고, 구두닦이 통을 만들어 왜경의 눈을 피해가며, “일본의 가미사마를 믿지 말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복음을 전하였다. 이 무렵에 만주 길림성에서 김은석 조사(전도사)를 만났다.

해방 후 고향인 충북 괴산군 불정면으로 돌아와 충북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 연못골 자택에서 반능교회를 하다가 적산건물인 사립학교를 구입해서 교회를 시작하였다. 이 무렵에 만주에서 만났던 김은석과 연락이 닿아 부강에서 해후하였다.

정찬성은 고려통신신학을 수료하였고, 1946년에 시작된 초창기부터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공부하였다. 1948년에 신탄진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6.25전쟁을 만났다. 전쟁 중에 김정만 목사(정찬성을 스승으로 생각함)가 살던 충북 청원군 북이면 송정으로 피신을 하였는데, 1950년 겨울에 북한군에 잡혀 밤새 고문을 당하였다. 북한군은 예수를 믿지 않으면 놓아주겠다고 했지만, 이에 굴복하지 않자 밤새도록 총대로 구타하였다. 아침에 북한군은 예수 믿지 않을 사람은 이쪽으로 나오라고 말하고, 남은 사람들을 향해서 총으로 난사하였는데, 당시 정찬성은 기도를 하느라 머리를 들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총알이 살짝 빗나가면서 구사일생하였다. 총알 세례를 받고 난 후, 눈을 뜨고 자기 몸을 꼬집어보니,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정찬성은 충청지방에 7-8군데 교회를 세웠다. 해방 후 고향인 충북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에 돌아와 외령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웠고, 1948년에 예배인도 차 심방하던 충북 충주시 노은면 수룡리 동막교회(현 시골 그리스도의 교회)가 무소속인 것을 알고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시켜 1949년 4월부터 1950년 6월까지 시무하였으며, 1951년에는 김은석, 최춘선과 함께 충북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의 조선기독교회를 조동(현 동량제일)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시켜 건지부락 산 밑으로 예배당을 이전하여 건립하였다.

그밖에도 소태 그리스도의 교회, 삼방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웠다. 정찬성은 1951년 5월 15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 3구 마을에 이흥식 전도자가 조남철의 가정에서 1950년 3월 19일에 시작한 그리스도의 교회에 부임하여 10월까지 1대 목회자로 섬기다가 이신에게 넘겼다. 이신은 그곳에서 김은석, 함태영과 함께 광주에서 하던 신학교를 이어갔고, 정찬성도 참석하여 공부하였다. 정찬성은 이 교회에 부임하기 위해서 약 400여리 떨어진 곳에서 오촌 조카와 가족들을 데리고 간단한 짐만 손수레에 싣고 14일 걸려 이사하였다. 그곳으로 가게 된 동기는 한 독지가로부터 수천 평의 땅을 헌납 받아 5촌 조카(정석기 장로)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하고 자신은 교회를 시무하기 위함이었다.

정찬성은 부여 합송리 신학교에서 있었던 성령론 논쟁 때 그리스도의 교회를 탈퇴하여 1953년 4월 8일 광주에서 개최된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창립총회 때 김상호와 함께 (추측컨대 최요한도 함께, 김교인은 그보다 3-4년 후에) 이적하여 1955년 4월 27일에 목사안수를 받고 기하성의 제1호 목사가 되었다. 이 무렵에 이신 목사도 부여 합송리를 떠났고, 김광수 목사/장로가 1954년 8월 7일 합송 그리스도의 교회에 부임하여 1956년 12월 30일까지 섬겼다.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로 이적한 정찬성은 충주순복음교회의 전신인 오순절 충주교회를 개척하였고, 1957년 2월 15일에는 기하성 본부의 후원으로 신탄진 강희천의 집을 매입하여 삼정순복음교회를 개척하였으나, 삼남 정형기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왜정 때 신사참배 거부로 매를 맞았던 것이 병이되어 복막염으로 4월 25일에 소천 하였다. 소천일자는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에 의존하였다. 정찬성 목사는 순교자 유족회에 등록되어있으며, 김상호 목사와 함께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희년 50인 인물’에도 올랐다.

슬하에 인자(목사 사모), 용기(공주 탄천순복음교회 목사), 형기(순복음예광교회 목사), 인순(집사)과 동순(일본 고베순복음교회 사모)을 두었다,

6)김상호 목사(1922-2007.11.24)

장로교회에서 집사로 섬기다가 김은석을 만나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다.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말씀을 배우던 중 김은석의 권유로 1949년 서울 필운동교회에서 강좌를 열었던 한국기독교성서신학교를 김은석과 함께 다녔다. 김상호는 이곳 교수들(힐, 성낙소, 최요한, 백낙중)의 다른 가르침은 다 좋게 받아드렸으나 성령론이 불만스러웠다. 6.25전쟁으로 신학교가 문을 닫자, 부강에 내려와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성령론 연구를 계속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이 무렵 김은석은,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 309쪽에 의하면, 1951년 늦은 가을에, 대전 선화동 2구 315번지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새로 개척한 상태였다. 아마 이 무렵 어느 날에 김은석 목사가 “김 형제, 교회를 받아 수고 좀 하게.”라고 김상호에게 부탁하였고, 김상호는 극구 사양하였으나 청원에 못 이겨 부강교회 제2대 교역자로 부임하였다.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1953-58)에서 김상호 목사의 이름은 단 한 차례만 등장하였다. “1957년 2월 23일(토)은... 아침식사 전은 김상호 목사와 담화함.” 그러나 김상호는 이미 그리스도의 교회를 탈퇴하여 광주에서 개최된 1953년 4월 8일 하나님의 성회 창립총회 때 정찬성과 함께 (추측컨대 최요한도 함께, 김교인은 그보다 3-4년 후에) 이적하여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희년 50인 인물’에 올랐다.

<순복음가족신문>에 의하면, 김상호는 그리스도신학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였고, 충청도 지역에 40여 교회를 개척하였다. 남원순복음교회, 청주순복음교회, 부산순복음교회를 담임하였으며, 여의도순복음교회 교무국장, 교육처장, 교무처장,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 주임목사, 엘림복지타운 원목으로 시무하였다. 김상호 목사는 2007년 11월 24일 소천 하였다.

7)맨발의 성자, 만교 최춘선 목사(1921-2001.09.08)

최춘선 목사는 김은석의 제자로서 김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 시무하였고, 사회사업가였으며, 소천 전 30여년을 맨발로 거리와 지하철에서 전도하다가 소천 하였다.

최춘선은 말년에 지하철역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쳤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자비의 초대,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의 초대... 예수 십자가는 생명의 젖 줄기, 평화의 젖 줄기, 그래서 십자가 젖 줄기 하나, 교회 하나, 교단은 여러 개가 있을지라도 교회는 하나다!”

(1)김은석 목사와의 관계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초기역사>(김찬영) 131쪽에 의하면, 최춘선은, 1949년 힐 요한 선교사 가족이 한국에 돌아왔을 때, 김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시무하고 있었다. 힐 요한도 1972년에 쓴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 약사”에서 이 무렵에 김은석의 영향으로 김포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진 점을 인정하였다. 1951년에는 김은석, 정찬성과 함께 충북 충주시 동량면 조동리의 조선기독교회를 조동(현 동량제일)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시켰다.

최춘선의 이름은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1953-58)에 14회 등장하였다. 최초의 언급은 1953년 8월 24일자로 되어 있다. 이 날 최춘선은 김은석, 이복춘, 이시봉과 함께 충북 충주시 남주동 2구 350번지 그리스도의 교회를 시무하는 정찬성 전도자를 상봉하였다. 1957년 6월 6일에는 송안성과 함께 김은석 목사의 대전 자택에 머무른 후 7일 아침에 서울로 올라갔다. 1957년 7월 11일(목) 오후에는 김은석이 경기도 김포군 양서면 송정리 만교 최춘선의 자택에 도착하여 저녁에 김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스가랴 7-8장을 봉독하였다. 13일(토)에는 김은석과 함께 경기도 부천군 오정면 도당 원경선의 자택에 머물렀다. 1957년 8월 26일에는 편지를 받고 최춘선이 김은석의 대전 자택으로 내려왔는데, 김영원, 김영숙, 이종만, 설하운, 태일러, 박은병도 참석한 자리였다.

최춘선의 이름은 김은석의 통신 및 신화신학 성경연구회 명단에 빠짐없이 들어 있다. 김은석은 1958년 5월 5일에 집중강의 일정을 동료들과 학생들에게 통보하였는데, 이 통보를 받은 이들 가운데 최춘선이 포함되어 있다. 또 1958년 7월 10일부터 소년성경학과가, 8월 1일로 9월 10일까지는 집중성경공부가 있다는 통신자 명단에도 최춘선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김은석 목사가 1960년도에 연하장을 보낸 자들의 명단과 양녀 김명순의 혼인 청첩자 명단에도 최춘선의 이름이 들어 있다.

또 <목포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 319쪽에 실린 김정만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최춘선은 부강교회 김은석에게 쌀가마를 직접 가져다주기도 하였다. 이토록 최춘선 목사는 김은석 목사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그리스도의 교회 목회자였다.

 

(2)무소유와 희생의 삶

최춘선은 겸손하고 사랑이 많은 목회자였다. 어린아이들에게도 언제나 존댓말을 하였고,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는 등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실천하였다.

최춘선은 김포공항으로 들어가는 큰 길에서 인천 국도까지 수십만 평의 땅을 유산으로 받았던 거부였고, 자동차를 다섯 대나 소유하였었다. 그러나 6.25 직후 길에 떠도는 노숙자들과 거지들을 집으로 데려와 거두기 시작하였고, 국가나 단체의 보조 없이 고아들을 길러냈다. 또 유산으로 받은 땅을 실향민과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었다. 도와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땅을 조금씩 떼어주고서 남은 건 단지 3천 평뿐이었다. 땅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믿었기에 등기도 하지 않았다. 그걸 알고 누군가 그 땅을 자기 앞으로 등기해 남은 땅마저도 다 빼앗겨 버렸지만 힘든 표정 한번 짓지 않고 찬송가를 부르면서 수백 명이나 되는 고아들을 데리고 서른 번도 넘게 이사를 다녔다.

내일 아침 먹을 쌀만 남았을 때도 누가 와서 먹을 것이 없다고 하면 그마저도 퍼주었다. 아내가 “우리 아이들은 무엇으로 먹이냐”고 걱정하면 “성경에 하나님이 다 먹이신다고 기록되어 있다”면서 달랬다. 새 옷을 사다드리면 밖에 나갔다 들어오실 때 다 떨어진 헌옷으로 바꿔 입고 들어오고, 심지어는 “바울아(아들) 너는 따뜻한 옷이 또 있지?”라고 말하며, 아들의 잠바들도 모두 나눠줬다.

최춘선 목사는 독립유공자였기 때문에 도장하나만 찍으면 증손자까지 4대가 학비지원을 받으며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지만, 보상을 받기 위해 독립운동을 한 게 아닐 뿐 아니라, 나라가 반쪽인데 그 돈을 받을 수 없다며 끝까지 도장을 찍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춘선은 5남매를 목사와 교수 등으로 길러냈다.

3)맨발의 전도자

최춘선은 일본 와세대 대학을 나와 5개 국어를 할 줄 아는 수재였고, 가가와 도요히코와 우치무라 간조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일본 유학시절 군사훈련을 거부하다 어려움을 당하게 되어 만주로 가서 광복군의 섭외부장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전후에 김은석을 만나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공부하였으며, 김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추측컨대 20여 년 가깝게 고아들을 돌보다가 1970년 초 50세 무렵에 모든 사역을 접고 문서선교와 노방전도에만 전념한 것 같다.

최춘선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데는 2003년부터 ‘팔복’ 프로젝트를 추진하던 김우현 감독이 맨발로 길거리 전도를 하는 할아버지 최춘선을 우연히 알게 되어 그분의 일상을 다큐로 만든 동영상을 인터넷에 무료로 공개한 이후부터이다.

광복군 섭외부장을 지냈던 최춘선은 대한민국이 분단 상태에 있으므로 아직 완전한 독립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1970년 초 50세 무렵에 “남북통일이 되기 전엔 절대로 신발을 신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는 지하철에서 젊은이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쳤다. “미스코리아 유관순, Why Two Korea? 미스터코리아 안중근, Why Two Korea?” 이 외침은 유관순과 안중근과 같은 사람이 참 한국인이며, 그런 이들만 있다면, 왜 두 개의 한국이 있겠느냐는 의미였다고 한다.

아들 최바울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최춘선은 아들의 결혼식 때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발을 신었고, 버스기사에게 떠밀려 골반 뼈가 부서졌을 때도, 예수쟁이라는 핍박을 받았을 때도, 발바닥에 유리조각이 박혀 피가 흘렀을 때도 결코 전도를 멈추지 않았다. 최춘선은 2001년 9월 8일 80세의 일기로 소천 하던 순간까지 30년을 넘게 맨발로 다니며 전도하였고, 소천 하던 바로 그 날도 1호선 수원행 열차에서 전도하던 중에 의자에 앉은 채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으며, 대전 현충원 제2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8)창현 함태영 목사(1914.5.24-1983.11.28)

창현 함태영은 부친 함봉표의 항일의병전투참가로 왜경에 쫓기고 옥고까지 치름으로써 가세가 기울고 몇 차례 이사를 다녀야했던 환경에서 청소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20대 초반에 부친의 유훈, “生則義士 死則義鬼”(살아서는 항일의사가 되고, 죽어서는 항일의귀가 된다)에 따라 항일운동을 꾀하였고, 목사가 된 이후에는 “生則福音 死則麥粒”(살아서는 복음전도자가 되고, 죽어서는 밀알이 된다)의 신조로 도시보다는 농촌, 난민촌, 빈민촌에서 목회자로, 교육 사업가로, 신약성서교회 운동가로 일생을 헌신하였다.

함태영은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순천에서 부친이 세운 사립학교에서 초등학문을 배운 후 17세가 돼서야 비로소 보통학교를 마쳤다. 18살에 부산으로 건너가 고학으로 중학과정을 21살에 마쳤고, 이 기간에 공사장에서 미장, 조적, 조각, 설계 등을 배워 건축기술자가 되었다. 같은 해 일본군징용을 피하여 만주에 머물다가 이듬해인 1936년 22세 때 담양선 철도 부설작업 한국인 조장을 맡았는데, 칼을 찬 일본인 조장이 한국인들을 멸시함으로 대항하여 맞서다가 일본인 조장이 빼든 칼에 함태영이 턱에 부상을 입었고, 이를 방어하던 함태영의 괭이에 일본인이 맞아 죽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담양사건은 동아일보에 보도된 사건으로써 정당방위를 인정받아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일본인들이 복수를 하려고 함으로 피신하여 신의주로 갔다. 이때 항일운동의 일환으로 학교동창 1명과 함께 압록강철교를 절단하려다가 발각되어 미수에 그쳤다.

1937년(23세)에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선천으로 옮겨 기독교인 정용옥을 만나 결혼하였고, 장모 이봉녀 권사의 권유로 예수님을 믿고 이듬해 24살 때 세례를 받았다. 1941년 27세 때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경찰서에 감금되었으나 탈출 후 만주에서 숨어 지내다가 1944년(30세)에 고향 순천에 혼자 내려와 몸을 숨겼다. 그러나 발각되어 투옥되었다가 8.15광복 때 석방되었다. 함태영은 곧바로 순천고등성경학교에 입학하였고, 장로교 해룡면교회 전도사로 사역하다가 사재를 처분하여 전남 승주군 별량면에 장로교회를 개척하였다.

1947년(33세)에 순천성경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마포구 도화동으로 온 가족이 이사하여 월남난민촌에 임시로 기거하면서 강순명(교역자회) 목사를 도와 천막학교에서 교육과 전도에 힘썼다. 이때 김은석의 가족은 아현동에 거주하였는데, 그의 양자 김성철과 함태영의 장자 함동진이 이 천막학교에서 함께 공부하였다. 이런 이유로 이듬해 10월 19일에 발생한 여순반란사건을 피할 수 있었다. 이 무렵 마포가 내려다보이는 도화동산에 대지를 마련하여 주택을 짓고 점포를 운영하면서 종친인 함태영(咸台永, 심계원 원장 및 대한민국 부통령 역임) 목사가 학장으로 재직한 조선신학교(현 한신대)에 입학하여 장로회신학교(현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였다. 장로회신학교는 1947년에 조선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신학생 51명이 김재준 목사의 신학입장에 반발하자 총회가 조선신학교에서 나온 학생들을 중심으로 새로 시작된 신학교이다. 장로교는 기존세력인 통합파에서 1951년에 고려파(고려신학교)와 1953년에 기장파(조선신학교)가 떨어져 나갔다.

함태영은 이 무렵에 북에서 월남한 장로교 재건파신자 정희건을 만나 사귄 후 학업과 생업을 위해서 함께 나무젓가락 공장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두 사람은 함께 신약성서교회 운동에 매료되어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고, 서울성서신학교(교장 힐 요한 선교사, 현 서울기독대학교)에 편입학하여 1955년 3월 3일 제1회로 조국형, 김봉석, 성수경(성낙소 목사의 아들), 김태수(60년대 한국성서신학교 교수역임), 김현숙(60년대 한국성서신학교 이사 엮임), 이종윤, 유현성, 정희건(교역자회 소속), 변승택, 이홍미, 최병식과 함께 졸업하였다.

함태영은 1950년(36세)에 6.25전쟁이 터지자 홀로 고향인 전남 승주군 외서면 장산리로 피신하였다가 공산주의자인 초등학교 친구의 밀고로 붙잡혀 옥고를 치렀으나 선친과 형제들의 도움으로 몰래 풀려나 숨어 지냈고, 가족들은 서울 함락 2주 후에 별도로 피신하였으나 사모 정용옥이 승주군 해룡면으로 친정 식구들을 찾아 나섰다가 공산주의자들의 검문에 걸려 투옥되었다가 탈출 후에 가족이 모두 안전한 부산으로 피신하였다. 부산에서는 1951년 2월 9일 기독교신보사가 주관이 되어 조직된 기독교선무원으로 발탁되어 국방부정훈국 산하에 파견되어 군목으로 종군하였다.

함태영은 1951년 3월에 전남 광주시 방림동의 서병렬(徐炳烈) 목사의 집으로 옮겨 거주하였는데, 이곳에서 이신(李信)을 만나 사귀게 되었다. 이신은 감리교신학교를 마치고 1950년에 전의 감리교회에서 목회하다가 6.25전쟁으로 고향 돌산에 피신하여 지내던 때였다.

광주 학동에 창틀까지 축조된 상태에서 6.25전쟁으로 중단된 큰 교회당 건물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각지에서 모여든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공부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김은석의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공부하던 전라지방 젊은이들과 통합하기에는 장소에 문제가 있었다. 이에 함태영은 1951년 5월에 광주 사직동공원 및 방송국 입구에 사재를 처분한 돈과 부친의 지원금과 영광의 임모 장로의 헌금으로 일본 적산가옥 2층을 매입하여 광주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고, 이 건물에서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강좌를 개설하였다. 김은석과 김태수의 가족들도 같은 건물에 입주하였다. 의술을 가진 함태영의 셋째 동생 함태중이 재정을 후원하였고, 김은석, 이신, 김태수 등이 교수로 섬겼다. 이 건물에 강순명 전도자가 1952년 7월 13일에 천혜 경로원을 설립하였다. 이때 화가 지망생이었던 이신은 받침에 헬라어로 ‘로고스’ 글자를 삽입한 ‘메노라’(일곱 가지 등대) 문양과 교명을 새긴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신화신학 성경연구회) 현판을 제작하였다. 10여년 후 이신은 대전 한국성서신학교(전 한성신학교)의 현판도 동일한 모양으로 제작하였다. 그리고 동년 1951년(37세)에 김은석의 집례로 이신, 최요한, 장주열(최요한의 동서), 김재순(김교인 장로의 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또 함태영은 6.25전쟁 중에 통행의 제한을 받는 젊은 신약성서교회 전도자들을 위해서 종군당시 사귀었던 미8군 군목을 찾아가 통행증에 사인을 받아 통행에 불편이 없도록 도움을 주었다.

함태영은 동년(1951) 가을에 충남 논산군 부적면으로 이사하여 충곡리 그리스도의 교회와 신교리 그리스도의 교회(현 금성교회)를 개척하였다. 동년(1951)에 이신도 정찬성이 1951년 5월 15일에 부임하여 10월까지 제1대 목회자로 섬긴 합송리 그리스도의 교회로 이주하여 광주에서 운영하던 신학교(신화신학 성경연구회)를 이곳에 개설하였고, 김은석, 함태영, 이신이 교수로 수고하여 김확실, 정찬성 등이 배출되었고, 환원신학 잡지, <로고스>를 발행하여 전국 그리스도의 교회에 배포하였다.

함태영은 1952년 11월 15일에 충남 논산군 부적면 신교리 마을회관을 빌려 복음공민중학교를 설립하였다. 함태영의 가족은 복음중학교 관리와 교사들의 식사제공문제로 거소를 충곡리 교회에서 신교리 교회로 옮겼다. 함태영의 셋째 동생 함태중은 운영후원자로, 막내 함태욱은 영어 강사로, 사모 정용옥은 교사들의 식사제공과 세탁 등으로 헌신하였다. 함태욱은 후일 서울성서신학교를 거쳐 한국성서신학교를 나와 여러 교회들에서 목회하였다. 복음공민중학교는 후일에 창현의 후배 겸 제자인 이춘식 목사가 인수하여 대명중학교로 개명하였다.

함태영은 1953년(39세)에 부친 송암 함봉표 지사(음력 3월 24일)와 사모 정용옥(7월 13일)을 사별하였다. 함봉표 지사는 유림에 속했으나 맏아들 함태영의 목회활동을 물심양면으로 도왔으며, 사모 정용옥은 모친과 함께 함태영을 예수님께 인도하여 목회자가 되게 하였고 영양실조와 병고로 32세에 요절하기까지 헌신적으로 뒷바라지 하였다. 당시의 궁핍했던 생활을 함태영이 남긴 요약설교지가 각종 이면지, 즉 경리장부, 요금고지서, 영수증, 전단지, 캘린더, 전보지, 결혼청첩장 등이었던 것에서 엿볼 수 있다. 사모가 눈을 감는 날 함태영은 부여 귀암면 합송리 신학교에 가 있어서 임종을 보지 못했다. 사모는 장남 동진에게 “내가 죽은 후에 동생들을 잘 돌보고 아버지를 극진히 모셔라”고 유언으로 당부하였고, 고요히 찬송을 부르며 하늘나라로 가셨다. 동년 1953년 8월 4일 힐 요한과 통역 최순국이 신교리교회와 복음중학교를 방문하였다. 이 시기에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와 복음중학교를 물질로 크게 후원하던 함태중이 중병으로 사경을 헤맸었고, 함태영은 경기도 광주군 분원리 소재 숭실중학교의 교장과 교목을 맡아 이사하였다. 힐 요한은 이신과 함께 숭실중학교를 찾아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함태영은 동년 11월에는 서울 마포구 도화동산의 주택을 김모 여전도사에게 기증하여 도원 그리스도의 교회의 출발점이 되게 하였다.

1955년(41세) 3월 3일에 서울성서신학교(현 서울기독대학교)를 제1회로 졸업을 하였다. 이 무렵에 함태욱도 서울성서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57년(43세)에 전북 이리로 주거를 옮겨 교회개척장소를 물색하였으나 마땅한 곳이 없어, 주거지를 전주로 옮겨 금암동에 주택을 지었고, 인후동 반공포로 정착촌의 주택을 매입하여 전주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겸하여 정착촌 의무실을 개설하였다.

1958년(44세)에는 금암동의 주택을 매각하고, 전북 완산군 용진면 소양리(현 전주시 소재)에 대지 200평에 건평 100여 평의 건물을 매입하여 용진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고, 완제품 약종상을 차려 원광대학교에 다니던 장남 동진이 군입대할 때까지 운영케 하였다. 함태영은 자신보다 13세나 아래인 이신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자주 초빙하여 부흥집회를 개최하고 침례를 베풀며 목회사역을 협의하였다.

1960년(46세)에 청주에서 양로원을 운영하며 교회를 개척하였다. 1962년(48세)에는 목회를 쉬며 시험을 받았다. 대전시 가오동 천변(川邊)에 판자로 움막을 짓고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서 시멘트블록 공장을 운영하며 노동에 시달렸고, 갓 제대한 동진이 작업을 도왔으나 경영이 부실하였다. 이 무렵 타 교단으로부터 유혹이 있었으나 물리치고 신앙노선을 지켰다.

1964년(50세)에 충북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와 남일면 방서리 그리스도의 교회를 담임하였다. 건축이 전문이므로 교회를 꾸미고 보수하는 일을 자주 하였다. 한 번은 교회의 지붕을 보수하다가 낙상하여 갈비뼈가 상하는 중상을 입기도 하였다.

1970년(56세) 1월 25일 장남 동진이 최윤권의 주례로 결혼하였고, 1974년(60세)에는 논산 대명중학교 설립 20주년 기념식에서 설립자로서 공로표창과 황금메달을 부상으로 받았다.

1975년(61세)에 서울시 서대문구 홍제동 장자 동진의 집에서 이신, 구강서, 이종만, 조충연, 설하운, 함명덕, 임상규(이상 목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회갑연을 가졌다.

1980년(66세)에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와 방서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의 목회를 마지막으로 노환(반신마비와 당뇨) 때문에 은퇴하였고, 1983년(69세) 11월 28일 충남 대전시 가오동에서 소천 하였다.

창현 함태영(唱泫 咸泰英) 목사는 “生則福音 死則麥粒”(살아서는 복음전도자가 되고, 죽어서는 밀알이 된다)의 신조로 도시보다는 농촌, 난민촌, 빈민촌 등지에서 목회자로, 교육 사업가로, 신약성서교회 운동가로 재물과 재능을 다 바쳐 헌신하였고, 남의 땅에 세운 시멘트 블록 움막과 낡은 찬송가와 성경책과 몇 권의 신학서적만을 남겼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07년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75주년 기념대회 때 함태영과 장자 함동진에게 환원상(메달)을 각각 수여하였다.

창현 함태영의 부친, 송암(松庵) 함봉표(咸鳳表)는 항일의병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운 독립지사로서 일제의 핍박을 피하여 전남 승주군 외서면 장산리에 정착한 유림에 속하였으나 맏아들 함태영의 목회활동을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사모 정용옥은 친정 모친과 함께 함태영을 예수님께 인도하여 목회자가 되게 하여 궁핍했던 시절 불평 없이 남편을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하다가 영양실조와 병고로 32세에 요절하였다.

함태영의 막내 동생 석비 함태욱(晳譬 咸泰昱) 목사는 서울성서신학교(현 서울기독교대학교)와 한국성서신학교(전 한성신학교)를 나와 창현 함태영 목사의 목회활동과 복음중학교에 기여하였고, 장남 함동수 전도자(교역자회)가 시무한 청주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고 동역하였다.

순동식 목사는 창현 함태영의 셋째 사위로서 복음중학교 출신이며, 한국성서신학교를 나와 대전과 홍성 등에서 목회활동을 하였다.

장산 함동진(長山 咸東振)은 함태영의 장자로 전북일보사 서무원, 시사통신 전북지사 무전사, 합동통신 전북지사 부무전사(副無電士) 등 주경야독으로 전주 공업 고등 기술학교 무선통신학과를 졸업하고 원광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서울성서신학교(서울기독대학교)와 한국성서신학교(대전)를 각각 중퇴하고, 서울기독대학 통신신학을 나와 서울 응암동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개척교회 전도 활동을 하였고, 1970년대에 문서전도의 일환으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 본부’라는 이름으로 문서전도지를 저술하고, 서신회답도 하였으며, ‘신약교회’라는 연재물을 필경으로 작성하여 두 곳 교회의 주보에 제공하였다. 현재는 문인(시인, 아동문학가. 서예인, 한국문인협회 회원, 기독교문인협회 회원, 한국아동문학회 회원 등)으로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함동진은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였다. 1991년 6월 11일(음력4월30일) <창현 함태영 목사 전기>를 작성하였고, 1993년 함태영 탄생 79주년에 수정 증보하여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사 연구에 기여하였다.

9)이신 목사/신학박사(1927.12.25-1981.12.17)

이신의 자녀들이 펴낸 <슐리얼리즘과 영(靈)의 신학>에 의하면, 이신(李信, 1927-1981)은 전남 돌산 출신으로 그림그리기를 좋아하여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부산 초량상업학교(부산상고)를 나와 은행원으로 일하면서도 예술에 대한 탐구는 계속되었고, 이로 인해서 얻어진 ‘근원적인 것’에 대한 갈구는 마침내 그로 하여금 신학의 길을 걷게 하였다. 1945년에 결혼한 이신은 이듬해 1946년에 미술도구를 팔아 마련한 돈으로 감리교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50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충남 전의에 전도사로 부임하였으나 6․25전쟁으로 고향에 피신했다가 이듬해 1951년 봄에 김은석이 인도하는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공부와 집회에 참석하여 성령의 역사에 감동을 받았고, 신약성서교회로 돌아가자는 신약성서교회운동과 일치운동에 공감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다.

1951년 늦봄에 광주에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교역자회가 조직되어 김은석이 회장으로 뽑혔고, 목사안수식도 있었다. 이때 이신도 장주열, 최요한, 김재순, 함태영, 김동열과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동년 5월에 함태영이 광주 사직동공원 및 방송국 입구에 있던 일본 적산가옥 2층을 매입하여 광주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신화신학 성경연구회)를 개교하였는데, 이때 이신은 교수로 섬기는 일을 처음 시작하였다. 또 이때 이신은 받침에 헬라어로 ‘로고스’ 글자를 삽입한 ‘메노라’(일곱 가지 등대) 문양과 교명을 새긴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 현판을 제작하였다. 10여년 후 이신은 대전 가장동의 한국성서신학교의 현판도 동일한 문양으로 제작하였다.

1951년 가을에 함태영목사가 충남 논산군 부적면으로 이사하여 충곡리 그리스도의 교회와 신교리 그리스도의 교회(현 금성교회)를 개척하였고, 이신 목사도 정찬성이 1951년 5월 15일부터 10월까지 제1대 목회자로 섬긴 합송리 그리스도의 교회<이흥식 전도자, 김확(학)실 자매가 조남철의 가정에서 1950년 3월 19일 개척>로 이주하여 광주에서 운영하던 신학교를 옮겨와 김은석, 함태영과 함께 운영하였고, 환원신학 잡지, <로고스>를 발행하여 전국 그리스도의 교회에 배포하였다. 이 무렵에 이름을 이만수(李萬修)에서 이신(李信)으로 고쳤다.

이신이 부여 합송리 교회에서 목회할 때, 타 교단에서와 마찬가지로, 성령님의 특별한 외적 역사, 즉 사도들과 같은 특정인에게 주어졌던 신유, 예언, 방언 말함과 같은 특별한 은사들이 신약성서의 완성과 신약교회창립이후에도 여전히 특정인에게 주어지고 있는가, 아니면 끊겼는가에 대한 견해차이, 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세례의 본질이 신유, 예언, 방언과 같은 특별한 은사인가, 아니면 구원의 약속을 보증하고 인치시며 인도하시는 성령의 내주 동거하심인가를 놓고 목회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 이신을 포함하여 김은석을 추종하던 많은 이들은 전자, 즉 특별한 은사가 지속되고 있다는 성령론을 공유하였으나 선교사들과 성낙소를 비롯한 일부 목회자들은 후자 즉 특별한 은사가 끊겼다는 정통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성령론을 공유하였다. 이 문제는 부여 신학교에서만이 아니라, 서울 신학교에서도 지속되었다.

이 논쟁으로 인해서 정찬성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탈퇴하여, 1953년 4월 8일 광주에서 개최된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창립총회 때, 부강 교회를 잠시 맡았던 김상호와 함께 (김교인 장로는 그보다 3-4년 후에) 이적하여 1955년 4월 27일에 목사안수를 받고 기하성의 제1호 목사가 되었다. 이 무렵에 이신 목사도 부여 합송리를 떠났고, 김광수 목사/장로가 1954년 8월 7일 합송 그리스도의 교회에 부임하여 1956년 12월 30일까지 섬겼다. 최요한 목사도 이때 그리스도의 교회를 떠나 1953년 초부터 유달 교회(순복음)를 개척하여 시무하였고, 1957년 9월까지 목포 복음교회를 담임하다가 1957년 10월 1일에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함으로써 다시 환원하였다. 반면에 1960년대 중반에 최요한의 동생 최요열(순복음신학교 제1회 졸업)은 순복음교회로 다시 넘어갔다.

이런 일련의 문제로 부여 교회를 사임한 이신은 전남 영암 상월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회하다가 다시 상경하여 힐 선교사를 만나 신학교를 도와 일하면서 동역하였다. 이신은 1953년 힐과 함께 함태영이 교장 겸 교목을 맡아 옮겨간 경기도 광주 분원 숭실중학교를 격려차 방문하였다. 함태영은 동년 7월 13일에 사모 정용옥과 사별한 후 자신이 설립한 충남 논산 신교리 소재 교회와 복음중학교를 떠나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 후 이신은 충북 괴산에 있는 수리교회로 옮겨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이 무렵의 상황이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1953-58)에 나온다. 이신의 이름은 1954년에 2회, 57년에 11회 나오는데, 이신은 김은석과 함께 목포 유달 교회(순복음)와 본인이 시무하는 수리교회에서 신화신학 성경연구회 강좌를 열어 가르치고 있었다. 이신과 김은석은 1954년 6월 14일부터 최요한의 목포 유달 교회(순복음) 예배당에 ‘그리스도의 교회 성경연구처’라는 현판을 붙어놓고 백일성경연구집회를 시작하였는데, 이틀 뒤 16일(수) 이신의 부친이 별세하였다. 1955년 2월 25일부터 6월 5일까지 수리교회에서 백일성경연구집회가 있었고, 1957년에 8-9월에도 목포 유달 교회(순복음)와 수리교회에서 가르쳤다. 이신과 김은석 등의 헌신적인 노력과 우정으로 9월 집회 후에 최요한 목사는 그리스도의 교회로 다시 환원하였다.

최요한 목사는 1946년 2월초에 김은석을 만난 이후로 1947년 7월에 영광 무영교회를 환원시키는 등, 전남 함평군 손불면 신흥리에 신흥 그리스도의 교회, 10월초에 전남 함평군 함평면 석성리에 석성(청학동) 그리스도의 교회(손불면 주포리에 세웠던 것을 이전), 1947년 1월초에 전남 무안군 현경면 평산리에 평산 그리스도의 교회(1951년 음력 8월 13일부터 거주한 박점상은 자신이 건축하여 개척하였다고 증언함), 1948년 3월초에 광주 사동 그리스도의 교회, 1950년 전북 고창에 고창 그리스도의 교회, 1952년 1월초에 전남 목포시 남교동에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고, 1951년 늦봄에 광주에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교역자회로부터 동서 장주열, 김재순, 함태영, 이신, 김동열과 함께 목사 안수까지 받았던 최요한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1953년 초에 목포시에 유달 교회(순복음)를 개척하였고, 1955년 9월 25일에는 목포 복음교회를 담임하였다. 그러던 최요한 목사는 1957년 8-9월에 김은석, 이신 등이 인도하는 집회들을 통해서 복귀하기로 마음을 확정하고 10월 1일 전남 목포시 대안동 11번지에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최요한 목사가 돌아와 오늘의 목포교회로 발전시킨 데에는 이신과 김은석 등의 헌신적인 노력과 우정과 신념과 확신의 공유(공감)가 있어서 가능하였을 것이다.

또 이신은 1957-58년에 1951년 광주에서 만나 교제한 함태영이 전주에 개척한 전주 그리스도의 교회와 용진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열고 침례를 베풀었다. 함태영의 장손 함동진도 1958년 6월에 이신으로부터 침례를 받았다.

이신은 1959년과 60년 전반기에 부산문화방송을 통해서 매일 밤 10시에 방송설교를 내보냈다. 이때 행한 설교들을 모아 기독교문사를 통해서 1980년에 펴낸 책이, <산다는 것, 믿는다는 것>이다. 1959년에 부산에서 버트 엘리스 선교사 부부와 조 세걸키 선교사 부부가 한국방송밋숀(Korean Broadcasting Mission)을 설립하고 부산문화방송(HLKU)에서 시간을 임대하여 매일 하루 두 번, 일주일에 세 시간씩 방송하였다. 동년 12월에 태일러 부부, 래쉬 부부, 여러 한국인 사역자들의 추천을 받아 방송설교자로 이신 목사를 채용하였다.

한편 전 부인 에스더 비반즈(Esther Beavans)의 가출로 1955년 한국을 떠났던 힐 요한은 선교사 제인 키넷트와 재혼 후 1959년 여름에 부산으로 입국하였다. 두 달간 알렉스 빌즈 가정에서 머물다가 대전으로 올라와 김은석, 심영진, 김태수 등과 함께 그해 12월 1일에 대전성서신학교를 지금의 대전 그리스도의 교회당에서 20여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1960년에 이신이 부산에서 교수진에 합류하였고, 교통편을 고려하여 학교를 대전역에서 가까운 선화교회로 옮겼다.

이신은 이후 서울 돈암동교회에 부임하여 목회하였고, 1965년 9월부터는 대한기독교신학교(현 서울기독대학교)에서 조직신학과 희랍어를 가르쳤으며, 교회를 사임하고 1966년 9월에 마흔 살의 늦은 나이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림을 그려 학비를 조달하고, 고국에 있는 가족의 생계까지 짊어지는 고학 끝에 1967년 5월에 네브라스카(Nebraska) 기독대학을 졸업하고, 8월에 드레이크(Drake)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였다. 드레이크대학교를 한 해 동안 다니다가 1968년 9월 밴더빌트(Vanderbilt)대학교 신학대학원으로 옮겨 1969년 12월에 신학석사학위, 1971년 5월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

귀국직후 삼선동의 서울 그리스도의 교회에 부임했다가 사임하고 자신이 1958년 6월에 전주 용진교회 부흥회 때 침례를 베푼 창현 함태영의 장손 함동진과 함께 종로2가 한국기원 건물 강당에서 서울기독교회를 개척하여 예배를 드리다가 혜화동으로 옮겨 1973년까지 지속시켰다. 이때 함동진은 주보발행과 기타 문건을 필경 발행하였다. 이신은 또 월 2회식 회원들이 순차적으로 돌아가며 주제를 발표하고 토의를 하는 ‘포이에티스트’라는 학술모임을 결성하고 이끌었다. 이 모임에 함동진(서기, 일신제강주식회사), 강성기(효광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 광주 및 부여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에서 수학), 김소영(시인, 상록서점운영), 김응삼(호남정유주식회사 훈련과장), 김태수(그리스도의 교회 목사), 방하식(홍제 중앙 그리스도의 교회 장로, 중앙일보사 조사부 부장, 미국이민), 안광남(철학인), 안동수(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최승(서울영어학원장), 윤기열(그리스도의 교회 목사, 후일 기독교대한복음교회로 이적), 김송자(그리스도의 교회 목사, 미국이민) 등이 참석하였다.

1975년 여름 명륜동 산동네의 무허가 집이 시에 의해서 헐리자 수리교회로 내려가 1978년까지 목회하다가 서울 원효로의 친척집에 머물렀고, 1981년 열악한 식사와 주거 환경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설교, 강의, 번역 등의 일을 강행하다가 병을 얻어 12월 17일 오산리 순복음 기도원에서 소천 하였다.

이신은 1951년 이후 줄곧 1950년대에 김은석의 신화신학 성경연구회, 1960년대 전반기에 한국성서신학교(전 한성신학교)와 대한기독교신학교(현 서울기독대학교)에서 가르쳤고, 목회와 방송선교활동을 겸하였다.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이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강사(문화신학), 중앙신학교(현 강남대학교, 윤리학), 그리스도대학교(히브리어 및 신학), 대한기독교신학교(현 서울기독대학교, 조직신학), 순복음신학교 등에서 강의하였고, 윤성범의 ‘한국종교사학회’의 연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저서로는 방송설교를 묶어 만든 <산다는 것, 믿는다는 것>이 있고, 번역서로는 니콜라이 베르자이예프(N. Berdyeav)의 <노예냐 자유냐>와 소천 후 변선환 박사가 번역을 마무리 짓고 출판한 베르자이예프의 <인간의 운명>이 있으며, 유고집으로는 <이신의 슐리어리즘과 영의 신학>과 <이신 시집: 돌의 소리>가 있다. 이밖에도 1974년 3월 25일자에 쓴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언,” 1980년에 출판된 <기독교대백과사전>에 실린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환원운동의 전개,” 순복음교회 청년 선교지 <카리스마>에 기고한 “카리스마적 신학,” “삶과 죽음,” “이단이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 공직으로는 1972년에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 회장, 1979년 한국기독교신학회 회장을 각각 역임하였다.

이신 목사의 업적은 한국적 그리스도의 교회의 설립, 곧 성서가 가르치는 신앙과 교회의 원형태를 회복하여 한국적 토착화 그리스도의 교회를 만들려고 한데 있다. 그는 설교 때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논하였고, 종이에 무언가를 끌쩍일 때면 항상 “근본”이라는 단어를 먼저 적어놓고 시작하였다고 전한다.

10)김광수 목사/장로(1922.4.20~현재)

김광수 목사/장로는 1922년 4월 20일 출생하여 평양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남정리 장로교회를 주일학교 때부터 출석하였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사범대학교에 재학하던 중에 부친이 운영하던 포목점에 불이나 전소되는 불운을 겪었다. 김광수는 이때 소명을 받고, 복음을 위하여 생애를 바치겠다는 결심으로 사범대학을 포기하고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김광수는 처가인 평안북도 강계군 만포읍에 있었던 만포장로교회에 출석할 당시 23세의 나이로 시위원회의 파송으로 초등학교를 관리 감독하였으나 공산당으로부터 숙청대상으로 지목되어 1946년 6월에 서울로 남하하여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 산1번지에 재건교회를 세워 시무하던 중에 성낙소 목사를 알게 되었고, 1948년 11월 성낙소 목사에게 한강에서 침례를 받고 도화동 개척교회를 1949년 11월 6일에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시켰다. 환원 후부터 피난 때인 1950년 6월 25일까지 도화동 그리스도의 교회를 시무하였다.

성낙소 목사를 만난 1948년에 한국기독성서신학교에 입학하여 힐 요한과 성낙소 목사로부터 교육을 받았으며 1951년 졸업하였다. 입학 초기 한국기독성서신학교의 강좌는 연지동 힐 요한 선교사의 자택에 시작되었다. 학생 수가 늘면서 곧 필운동 교회로 옮겼고, 6.25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50년 11월에 서울 장충동의 임대건물에서 속개되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전쟁개입으로 다시 중단되었다가 1951년 후반기에 송월동에서 속개되었다. 이때 부강교회 김은석 목사, 김상호 목사, 광주의 강순명 목사도 별과 속성과정에 다녔다.

김광수는 6.25전쟁 때 부산으로 피신하였다가 제주도로 옮겨가 그리스도의 교회 출신 피난민들을 찾아 심방하고 천막을 얻어 정희건, 김진영 전도사와 함께 1951년 2월경 제주시 삼도리 해변가에 제주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여 1951년 10월 28일까지 담임하였다(수세자 12명). 이후 부산으로 나와서 부산시 동구 수정동 대지공원에 천막을 얻어 치고 1952년 2월 20일 수정동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여 시무하면서(수세자 72명) 1953년 9월 13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52년 봄에 일본 이바라키 국립대학의 캐논이 내한하여 부산에서 공중예배 중에 악기를 사용하지 말아야할 이유를 설명한 후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는 협의회(유악기)와 교역자회(무악기)로 분열되었다. 이때 동석기의 영향으로 이흥식, 김진영, 정희건, 김광수, 강순명이 교역자회 측에 섰고, 함태영이 세운 광주 교회가 1952년 후임자 강순명 때, 합송리 교회가 1954년 이신의 후임자 김광수 때 교역자회로 돌아섰다. 김광수가 세운 수정동 교회도 1954년 7월 20일 초량교회(동석기 목사의 직제자인 이흥식 장로시무)와 통합하여 부산 중앙 그리스도의 교회로 이름을 바꾸면서 교역자회로 넘어갔다.

통합 후 교회를 사임한 김광수는 1954년 8월 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 3구 마을 합송 그리스도의 교회에 이신의 후임으로 부임하였다. 부임 첫날 비가 내려 교회당이 무너져 내렸다. 돈을 모금하여 건축하고, 중등과정인 성실고등공민학교를 열어 불우한 학생들 교육에도 힘썼다. 이 학교 출신 가운데 5명이 목회자가 되었다. 김광수는 합송교회를 1956년 12월 30일까지 섬겼다.

김광수는 1957년 2월 14일 부산 중앙 그리스도의 교회에 재부임하여 1963년 10월 6일 사임할 때까지, 부산시 중구 영주동 621번지 여관이 있던 곳을 구입하여 교회를 이전시켰고, 전임자 박경동 전도자와 기독교 세계봉사회 합동판매점 총무였던 김춘희가 전쟁미망인들을 돌보기 위해서 세운 승리모자원의 이사장을 1958년부터 수년간 역임하였고(수세자 105명), 1959년 부산 진구 연지동 301번지에 대지 1,501평을 구입하고 원사를 신축하여 1960년 5월 5일 총 23세대 87명을 수용하였다(원장 김춘희). 이곳에서 자란 사람들 가운데 목사가 된 사람도 있고, 성공한 사람들도 많다. 또 모자원을 기초로 1962년 7월 22일 연지동 성지 그리스도를 개척하여 1966년 11월 27일까지 시무하였다.

1967년 5월 8일 서울시 강서구 등촌동 강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맡아 1968년 12월 10일까지 2년간 담임(그리스도신학대학 교목)하였고, 성경통신대학도 시작하였다. 목회기간동안에 침례를 베푼 사람이 350여명이 된다. 그러나 4남3녀라는 대식구를 거느린 탓에 자녀들 교육문제로 목회를 그만두고 울산에서 현대기계설치공업주식회사를 차려 사업하던 차에 임낙훈 목사가 시무하던 서울 내수동 교회에서 1979년 6월 24일 장로로 임직하였고, 사업에도 성공을 거두었으며, 큰 아들은 서울대학교와 충남대학교를 거쳐 농학박사가 되었다. 말년에는 동대전 그리스도의 교회(교역자회)에 출석하면서 교회를 도왔다.

11)김정만 목사(1927.5.20- )

김정만 목사는 스스로를 정찬성과 김은석의 제자라고 말한다. 그의 이름은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1953-58)에 2회 나온다. 김정만은 1957년 11월 19일에 지철희의 결혼식을 위해서 전남 무안군 현경면 평산리까지 김은석, 지철희와 함께 갔다. 이듬해 1958년 5월 5일 김은석 목사는 집중강의 일정을 통보하였는데, 김정만은 통보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김정만은 부강 신화신학 성경연구회 초기에 공부하였고, 정찬성 목사로부터 침례를 받았다. 김정만은 충북 중원이 고향이다. 1945년 12월 하순경에 정찬성 목사가 시무하는 이웃마을 반능교회에 김은석 목사가 와서 말씀을 전하였는데, 말씀에 취해 큰 은혜를 받았다. 부흥회 때 침례식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침례를 주면서 자신에게만 주지 않자, 이를 방관치 않고 간청하였다. 이에 김은석과 정찬성은 김정만을 냇가로 데려가 김은석이 위해서 기도하고, 정찬성은 입은 옷 그대로 물속에 들어가 침례를 베풀어 주었다. 침례를 받고 나니 너무 기뻤고, 추운 겨울이었는데도 옷이 금세 말랐다고 한다.

1946년 반능교회를 섬기던 중에 담임 정찬성의 권유로 부강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공부하였다. 3개월 후 정찬성이 김정만에게 교회를 맡기고 사임하자, 교회를 맡아 일하면서 성경공부를 위해 반능과 부강을 오갔다. 반능에서 부강까지는 80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였지만, 월요일 새벽예배를 마친 다음 출발해서 저녁까지 걸어서 부강에 도착하곤 하였다.

김정만은 1946년 가을 정찬성, 김은석 두 목사들과 함께 서울 필운동교회를 방문하였을 때, 성낙소, 최상현이 교수로 있던 이곳 신학교에 성령론에 관한 논쟁이 있음을 직접 목격하였다.

어느 날 저녁은 너무 추었던지 다른 사람들은 오지 않고 김정만 혼자만 부강에 도착하였다. 부강에 도착하여 평상시처럼 저녁 예배를 드린 후 식사시간이 되었지만 먹을 것이 없자, 김은석은 소금물이라도 끓여오라고 했다. 그 날 저녁은 소금물을 놓고 감사기도를 드린 후 마시는 것으로 식사를 대신하였고, 그 다음날도 새벽예배를 드린 후 아침식사로 간밤에 마시다 남은 소금물로 대신하였다. 그런데 밖에서 배달부가 왔다는 소리가 났고, 나가보니 최춘성이 쌀 한 가마를 가지고 와서는 하나님이 형님네 갖다 드리라고 했다면서 놓고 갔다. 최춘성이 돌아가자마자 김은석은 쌀을 반 가마씩 나눈 후에 “반 가마는 내가 먹고 반 가마는 김형제가 가져가게.” 하면서 주었다. 그 때 김정만은 “도대체 세상에 이런 분이 또 어디 있을까?” 라고 생각하며, 스승을 더욱 잘 모셔야겠다고 결심하였다고 한다.

그 후 충주교회에 부임하여 열심히 전도했더니 얼마 되지 않아 4-5백 명이 모이는 교회로 발전하였다. 김정만은 그 교회를 스승인 정찬성에게 넘겨주고, 사모의 친정이 있던 (충북 청원군 북이면) 송정리로 가서 교회를 개척하여 1954년에 예배당을 짓고 헌당예배를 드렸다. 그때 김은석이 설교를 위해 참석했는데, 큰 딸 순명이 우니까 얼른 안아주었는데, 그만 어린 딸이 실례를 하여 예복이 적고 말았다. 그러나 김은석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그대로 입고 설교하시고 돌아갔다.

그 후 (충북 청원군 남일면) 황청리(김광희 집사) 교회로 옮겨갔다가 다시 반능교회로 옮겼는데, 폐병을 얻어 생명을 부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자 월간 한길사(1959)는 김정만 형제가 죽었다고 부고하였다. 그러나 김정만은 기도로 고침 받고 열성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그 결과 원근 각처에서 교인들이 모여들어 격주로 충북 각지를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고, 교회들도 뜻을 같이 하였다.

김정만 목사가 폐병만기로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힐 요한 선교사가 병문안으로 찾아와 약을 가져다주기도 하였다. 김정만은 최후의 수단으로 항상 기도하던 음성 고사리봉을 찾아 하나님께 매달렸다. 일주일이 지나자, 당시 눈이 내려 쌓였었는데, 김정만이 있던 곳은 눈이 녹아있었고, 앉았던 자리의 소나무는 뽑혀 있었다. 그만큼 혼신을 다하여 기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몸이 가볍고 상쾌해져 집에 내려와 보니 씻은 듯이 병이 낳아있었다.

그 후 충북 중원군(현 충주시) 신이면 (화석리 방축골 교회)에 개척을 하고, 다시 반능교회로 왔다가 1968년에 (충북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 갓돈 교회(현 삼방교회)를 개척하였는데, 전 주민들이 믿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다. 그들 가운데 김정례 집사와 지재성 집사는 갓돈교회를 이루는 기둥이 되었다.

1971년에 강원도 원주교회를 개척하고, 1973년에 서울 상계동 희망촌 교회로 부임하였다가 1981년 12월 이신이 소천 하던 때에 다시 소생하기 어려운 중병을 얻어 연세대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도 하나님은 고쳐주었고 오늘의 상계 그리스도의 교회 자리를 매입하는 역사를 체험케 하셨다. 김정만은 12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1993년 이 상계동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은퇴하였다.

목회자로서 김정만은 김은석, 정찬성을 스승목사로 모셨고, 김재순, 최요한, 심영진, 이신, 김상호, 이원로(노), 조길재, 지철희, 이재석, 홍승만(이상 목사), 김교인, 이학재, 김길홍, 조춘식, 박오복(이상 장로), 박양순, 최돌연, 김광희, 박정희, 김옥수, 이희, 김정례, 지재성, 정현매, 권영신(이상 집사) 등을 잊을 수 없는 동료들로 기억하였다.

김정만 목사는 3남1여를 두었으나 가난하여 제대로 돌보지 못하였다. 한 때는 자녀들을 고아원에 맡기기도 하였다. 목회 중에 성령님의 역사도 많았다. 자만할까 봐 거둬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정도였다. 교회를 핍박하던 동네 깡패를 회개시키기도 하였다. 쌀이건 보리건 들어오면 신도들에게 나눠줬다. 새끼 돼지를 나눠주며 교인들이 살아갈 방편을 제공하기도 했다. 김정만 목사는 안락한 삶을 거부하고 십자가의 길을 걸었지만, 신약성서교회 회복에 힘썼다. 성서에 없는 것은 결코 따르지 않았다. 그 단적인 예가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서 권사를 세우지 아니한 것이었다.

11)장주열 목사(1923.5.4-1983.12.18)

장주열은 최요한 목사의 큰 동서로 불교가정에서 자랐으나, 결혼하기 위해서 선을 본 여자가 예수를 믿지 않으면 결혼을 할 수 없다기에 그 여자와 결혼할 욕심으로 예수를 믿겠다고 약속하였다. 장주열은 약속대로 전남 함평군 엄다면 영흥리 영흥교회에서 학습세례를 받고 김순례와 혼인을 하였다.

1946년 1월에 전남지방을 순회하며 부흥회를 인도하던 김은석에게 큰 은혜를 받고, 영흥교회 장로를 설득하여 1946년 2월에 영흥교회에서 김은석이 인도하는 부흥회를 갖도록 하였으며, 손아래 동서인 최요한과 처제 김정녀를 그 부흥회에 초청하였다. 그 부흥회에서 최요한과 사모 김정녀, 장주열과 사모 김순례는 교우들과 함께 큰 은혜를 받았다. 그로 인해 일주일 하려 했던 부흥회가 열흘로 연장되었다.

이후 장주열은 최요한이 전남 함평군 손불면 신흥리에서 신흥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할 때 직접 교회당을 지었고, 10여리 떨어진 곳에서 신흥교회를 걸어 다니며 봉사하였다.

장주열은 동서 최요한, 함태영, 김재순과 함께 광주와 목포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공부하였고, 1951년 늦봄에 광주에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교역자회로부터 김은석의 주례로 최요한, 김재순, 함태영, 이신, 김동열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았다.

장주열이 충북 괴산군 소수면 수리교회에 부임하여 목회할 때 아들 장복남이 폭격을 맞아 위급한 상태였는데도, 기도하고 교회에 뉘어 놓고 전도를 나갔으며, 15일이 지나자 깨끗하게 치유되었고, 주일 날 성만찬을 하려고 잔에 물을 부으면 곧 예수님의 피같이 되었다고 김순례 사모는 회고하였다. 또 공산군에 잡혀 인민재판 중에도 몇 번이고 풀려났으며, 부산에서 성령 대부흥회를 인도할 때에는 조용기 목사까지도 장주열의 안수를 받았다고 김순례 사모는 회고하였다.

이후의 행적을 보면, 그는 1958년 5월 5일에 김은석 목사로부터 집중강의 일정을 통보받았고, 1961년 8월 17일 부강교회에서 ‘신약교회로의 환원’이란 주제로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가 개최되었을 때 참석하였으며, 60년대 중반에 한국성서신학교에서 개최된 그리스도의 교회 연합회에도 참석하였다. 1961년 3월 19일에는 힐 요한(통역 김찬영)을 초청하여 경기도 시흥군 안양읍 내천동 706번지에 소재한 안양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침례식을 거행하였고, 이듬해인 1962년에는 안양교회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장주열 목사는 청주교회, 수원교회, 안양교회 등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1983년 소천 하였다. 자녀로는 복남, 성순, 성례, 성님이 있다.

12)최요한(용환) 목사(1923.01.20-1998.03.28)

최요한은 전남 함평군 대동면 용성리에서 장로교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고종황제시절부터 친가와 외가 모두가 3대에 걸쳐 장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1944년 1월 20일 역시 장로교인인 김정녀와 목포장로교회에서 결혼하였다. 세례교인이었지만, 1947년 7월 중에 전남 영광지역을 순회하던 중에 침례가 성서적임을 깨닫고 김은석 목사에게 침수세례를 받았다.

(1)자생적 신약성서교회 활동

최요한은 재건파와 고려파 신앙과 맥이 같이 하였다. 최요한이 김은석을 처음 만난 것은 큰 동서인 전남 함평군 엄다면 영흥장로교회 장주열 집사가 우연히 김은석의 순회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큰 은혜를 받았고, 김은석을 초청하여 부흥회를 열자고 교회 장로를 설득하여, 그 날짜를 1946년 2월초로 잡았다. 장주열은 부인과 함께 은혜를 사모하는 손아래 동서 최요한 부부를 찾아가 부흥회 소식을 알리고 참석을 권유하였다.

부흥회 다섯째 날에 진리의 영이 최요한에게 임하였다.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 370쪽에 의하면, 최요한은 이날 자기 마음에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분쟁은 죄다.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이니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한 음성을 듣는 것 같았다고 한다. 참석한 100여명의 신도들에게도 큰 은혜가 임하였다. 그로 인해 일주일 하려 했던 부흥회가 열흘로 연장되었다. 이 부흥회 기간에 최요한, 김정녀 부부는 김은석을 집으로 초청하여 성경강의를 들었다.

그로부터 2개월 후 최요한은 전남 함평군 손불면 신흥리 자택에 ‘신흥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교회를 개척하였다.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는 최요한이 김은석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자택에서 ‘신흥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한 것은 김은석의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보다 7개월이나 앞서는 것이고, 충청이남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자생적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김은석이 김교인 장로의 초청으로 부강 오데골 장로교회에 부임한 것은 해방직후인 1945년 가을이었다는 전통적인 주장에 반해, 김규상 목사의 증언에 의존하여 그보다 일 년이 늦은 1946년 가을이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최요한은 1946년 2월 영흥장로교회 부흥회 때 혹은 자신의 집에 성경을 공부할 때에도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해서 듣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정만 목사는 1945년 12월 하순경에 정찬성과 김은석으로부터 침례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김정만은 1946년 반능교회를 섬기던 중에 담임 정찬성의 권유로 부강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공부하였고, 1946년 가을에는 정찬성, 김은석 두 목사들과 함께 서울 필운동교회를 방문하여 그곳에서 가르치는 성낙소, 최상현와 성령론에 관한 논쟁이 있음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하였다. 이 증언은 김은석이 1945년 가을에 부강장로교회에 부임하였다가 1946년 어느 때에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또 박점상 목사는 1946년에 김은석과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다고 진술하였고, 정찬성 목사는 1946년에 공부한 신화신학 성경연구회 제1기생으로 알려져 있다. 정찬성은 김은석에게 오데골 장로교회를 나온 후 새로 시작한 부강교회의 이름을 로마서 16장 16절을 들어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로 부를 것을 권하였다는 김정만 목사의 증언이 있으나 명확하지는 않다.

이러한 자료들은 김은석이 부강장로교회에 부임한 것이 1945년 가을이었고,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가 1946년 어느 시점에 시작되었다는 점을 부정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만일 목포교회의 주장처럼, 1946년에 시작된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와 신흥 그리스도의 교회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존재여부를, 다만 몇 개월간이라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시작된 교회들이라면, 성낙소에 의해서 1927년 충남 부여군 세도면 화수리 2구 290번지 사랑채에 세워진 ‘기독지교회’(基督之敎會)에 이어 충청이남지역에 자생적으로 생긴 신약성서교회 운동이 될 것이다.

최요한은 1946년 4월에 시작한 전남 함평군 손불면 신흥 그리스도의 교회가 10월에 50여명에 이르자 김재순에게 위임하였다. 그리고 10월초에 전남 함평군 손불면 주포리 동네 창고를 대여 받아 두 번째 교회를 개척하였다가 석성리 청학동으로 이사하여 예배당을 짓고, 이름을 ‘석성리 그리스도의 교회’로 정하였다. 1950년대 중반에는 이 교회의 창립멤버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노의수 집사가 석성리 신생동 교회와 청학동 그리스도인 집회소를 인도하였으나 발전하지 못하다가 김재순이 석성리 청학동으로 옮겨와서 신앙촌을 만들어보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교회 터가 김재순의 부친 김교인 장로 앞으로 등기되어 있었는데, 이 무렵에 김교인은 전남 함평군 함평면 석성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석성리 그리스도의 교회를 순복음교회로 이적 시켰고, 700평 땅을 기증하여 50평 예배당을 짓게 하였다.

김교인은 1956-57년경에 순복음교회로 이적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김교인이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에서 1957년부터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김은석의 1954-56년 성서통독메모에 의하면, 전남 함평군 함평면 석성리 ‘청학동 그리스도인 집회소’와 ‘신생동 교회’가 여전히 노의수 집사(전도사)에 의해서 인도되고 있었고, 김은석이 내려와 이 두 교회에서 백일 성경연구회를 개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은석의 1954년 6월 14일(월) 성서통독메모에 의하면, 김은석이 전남 함평군 함평면 석성리 김교인의 집에 잠시 들리고 있고, 8월 8일(일)자 성서통독메모에 의하면, 김은석이 오전에 전남 함평군 함평면 석성리 김교인 장로댁에서 아가서 4장을 읽고, 오후에는 손불면 신흥교회 주택에서 아가서 4-6장을 읽고 있다. 1956년 7월 16일(월)자 언급에 의하면, 김은석이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산18번지 김교인 장로댁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1956년 12월 13일(목)에는 김은석이 김교인과 함께 전남 함평군 함평면 석성리 신생교회 노의수의 객실에 머물렀다.

김은석은 1955년 10월 15일부터 1956년 (2월까지 할 예정이었으나 실제로는) 1월까지 이 두 교회당에서 백일성경연구집회를 열어 노의수 집사 등을 헌신적으로 가르쳤다. 이 백일성경연구집회 때는 유난히 추웠는지, 10월 20일(목)에 일기가 차서 고생이라고 하였고, 12월 16일(금)은 크게 추웠다 (“今朝는 大寒이 되엿슴)고 적었다. 이날 아침 김은석은 대전에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간다고만 하면 섭섭해 하니 답답함.”이라고 적었다. 김은석의 이런 헌신에도 불구하고, 청학동 그리스도인 집회소에 대한 언급은 백일성경연구집회 중이었던 1955년 10월 21일(금) 이후에, 신생동 교회는 1956년 12월 13일 이후에 끊겼다. 김교인과 노의수에 관한 언급도 끊겼다.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김은석의 헌신적인 수고에도 불구하고, 순복음교회로 이적한 김교인의 뜻대로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다음은 김은석이 남긴 1956년 12월 13일자 성서통독메모이다.

    1956년 12월 13일 새벽(목) 2시부터 전남 함평군 함평면 석성리 신생교회 노의수 형제 객실에서 김교인 장로님과 임남규 형제와 동숙하던 중, 起坐禱하다가 나의 사명인 주님이 맥기신 일을 하는바 앞흐로 서울성경신학교로 간다고 한말을 대답한 후 또한 들이난 일리 있슴으로 그만 둘 것을 다시 思에 작뎡하고 김재순 목사게 편지하고서 지금 이 신생동서 1월시까지 공부한다고 광고하야 사람들리 오난 일과 여러 가지로 생각 중에 엇지할가 하다가 성경 빌서를 보난 중 1장 27-2:1-2,14을 생각하는 중에서 지금 갓치 하는 일은 마음을 갖치 하는 일리 되지 못하고 원망과 시기와 분쟁이 표현하는 것을 보아 아무리 생각하여보아도 나는 갓치하지 못하고 따로 떠러저서 내게 맥기신 주님 명령을 실행하여야 갯다는 생각이다. 내가 기도드리다가 성경 보면서 생각하야 이 일을 기록하는 시간은 3시 20분이엿다. 신생동 노의수 집사댁 객실에서 記함. 김은석 止.

(2)1946-50년 기간에 세워진 교회들

최요한은 1946년 4월 전남 함평군 손불면 신흥리에 그리스도의 교회, 동년 10월 전남 함평군 손불면 주포리(석성리 청학동으로 이전)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운 후, 이듬해인 1947년 1월초에 전남 무안군 현경면 평산리(박점상의 처가 마을, 1951년 음력 8월 13일부터 이곳에 거주한 박점상은 자신이 건축하여 개척하였다고 증언함) 김광음(정귀남의 모친) 집사 집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평산리 교회에 관한 언급은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1953-58)에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임춘봉, 박점상, 지철희 등이 목회하였고, 정귀남(지철희의 장인, 정일홍 목사의 부친) 집사(전도사)가 예배를 인도하던 중에 갈라져 오늘에는 무안 현경현화 그리스도님의 교회로 이어가고 있다.

참고로 성낙소 목사는 단기 4286(1953)년 7월 3일에 <신약교회 목회학>를 발행한바 있다. 이 귀한 책을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가 지철희 목사로부터 기증받아 매우 어렵게 편집한바가 있다. 지철희는 이 책을 정귀남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책 뒷장 겉표지에는 “평산 그리스도의 교회 1958년 2월 10일 구입 지철휘”라고 적혀 있다.

최요한은 1947년 7월에 영광 무영교회 임장로 가정과 김집사 가정을 환원시켜 영광 무영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여 김재순에게 위임하였다. 임장로의 딸은 그 후에 김재순의 제수가 되었고, 건축업자였던 임장로가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최요한은 1948년 3월초에 광주 사동에 김윤선 집사의 소를 팔아 2층집을 세내어 광주 사동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이 무렵 최요한, 장주열, 김재순, 김동열 등은 광주에서 노방전도에 전념하였다. 김은석의 성서통독메모에 광주 사동 교회는 1954년 9월 한 달 동안만 언급되었으며, 주소는 광주시 남구 사동 22번지였다. 이후 김동열이 광주 금동 그리스도님의 교회로 명칭을 바꿔 이어가고 있다.

1951년 늦봄에는 광주에서 최초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교역자회가 조직되었고, 초대회장에 김은석이 선출되었으며, 김은석의 주례로 최요한, 장주열, 김재순, 창현 함태영, 이신(이만수), 김동열이 목사안수를 받았다. 추측컨대 안수 장소는 사동교회가 아니라, 함태영이 1951년 5월에 광주 사직동공원 및 방송국 입구에 사재를 처분한 돈과 부친의 지원금과 영광 무영의 임장로의 헌금으로 구입한 일본 적산가옥 2층이었을 것이다. 이 건물은 광주 그리스도의 교회 겸 신화신학 성경연구회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에 강순명이 1952년 7월 13일에 천혜 경로원을 설립하였다.

최요한은 1950년에 전북 고창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김윤선 집사와 김남수 집사가 영광무영교회가 너무 멀어서 고향인 고창 김윤선 집사 집에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6.25전쟁 중에 8명의 순교자를 낸 곳이다.

이상 언급된 6곳의 교회들은 최요한이 1946년부터 1950년까지 세운 교회들이며, 오늘까지 남아 있는 곳은 김동열 계열의 무안 현경현화 그리스도님의 교회와 광주 금동(사동) 그리스도님의 교회뿐이다.

(3)1951-55년에 세워진 교회들

최요한은 1951년 봄에 목사안수를 받고나서 장성기도원을 맡아 8개월간 시무하면서 침례와 성만찬예배를 드리며, 200여명이 함께 먹고 자며 기도하는 은혜의 동산을 만들었지만, 조순례 원장이 환생론을 주장하기 시작하자 1952년 1월초에 기도원을 박차고 나와 기도하던 중에 목포시 남교동 큰 시장 골목상가 2층을 전세 내어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러나 최요한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1953년 4월 8일 광주에서 개최된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창립총회 때 (추측컨대 정찬성, 김상호와 함께, 김교인은 그보다 3-4년 후에) 이적하여 1953년 초에 전남 목포시 죽교동 391번지에 목포 유달 교회(순복음)를 개척하였다. 이곳은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 진성구 장로가 구입한 건물의 2층이었다. 그러나 최요한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고 성찬예배에 대한 신념도 확고해서 그리스도의 교회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는 않았다. 김은석은 성서통독메모에서 1954년 6월 14일부터 전남 목포시 죽교동 39번지 2통 4반 해병대 앞 유달 교회당에 ‘그리스도의 교회 성경연구처’라는 간판을 붙이고 백일성경연구집회 등을 인도한 것으로 적고 있기 때문이다.

1955년 9월 25일에는 김사라 집사가 개척한 목포 복음교회를 시무하였다. 교회가 크게 성장하여 기공예배를 드리고 예배당 건축이 된 상황에서 교회명칭에 대해 고민하던 중 최요한은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로 정하기를 원했고, 제직자들의 투표에서도 그렇게 결정되었으나 창립자인 김사라 집사 측과 교회명칭으로 인해서 갈등이 커지자 1957년 10월 5일에 사임하였다. 그러나 이 교회는 지금도 침례와 주의 만찬을 소중히 여기는 대형 독립교회로 남아있다.

(4)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최요한은 1957년 8-9월의 집회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로 복귀하기로 마음을 확정하고 10월 5일 목포 복음교회를 사임하기 직전에 목포시 대안동 11번지에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포교회는 당회를 통해서 창립연월을 일 년 앞당겨 1956년 10월 1일로 확정하였는데, 그 이유는 최요한 목사가 장성기도원을 박차고 나온 후, 1953년 초 목포시 죽교동 391번지에 유달 교회(순복음)를 개척할 때까지, 1952년 1월초에 목포시 남교동 큰 시장 골목상가 2층을 전세 내어 1년 정도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한바가 있어서 이점을 감안한 결정이었다.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는 1957년 9월말부터 사택에서 20여 가정이 모여 기도에 전념하면서부터 잉태되었다. 진성구 장로가 큰 힘이 되어 오늘의 목포교회가 시작될 수 있었다. 그는 장로교회에서 장로안수를 받은 이로서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던 중에 최요한을 만나 1952년에 상월리 교회를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시켰고, 1953년에는 자신의 건물 2층을 유달 교회당으로 쓸 수 있도록 하였으며, 1957년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가 개척될 때에는 창립멤버로 전 가족이 헌신하였다. 그러나 그는 1968년에 목포 복음교회로 이적하였다.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듬해인 1958년에 적산가옥을 개조하여 예배당 16평, 사택 10평을 마련하였다. 이 가옥은 크기가 200평이나 되는 건물로써 교회가 차지한 공간은 왼쪽 가장자리 26평이었다. 1961년에 이 가옥 뒤편 24평을 구매하였다. 이에 최요한은 50평 크기의 석재건축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반대하여 1968년에 진성구 협동장로, 1969년에 세 명의 장로들이 목포복음교회로 이적하였다. 최요한은 이런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50평 석재 본관건축을 착공하였다.

1971년 말에 1층 50평, 이어서 이층 25평의 석재 예배당의 공사를 완료되었다. 1972년 4월에는 현관을 아치형으로 개조하였고, 1977년 3월부터 3층 25평 증축공사를 시작하여, 총 건평 100평이 완공되었다. 1984년 11월 11일에 26평 아파트 한 채를 목사관으로 구입하였다. 1989년 10월부터 시작하여 교육관 50평을 확장하였다. 1995년 2월 27일에는 산정동 1112-3 대지 1500평을 매입하였고, 1995년 11월 6일에 착공하여 4층 720평의 예배당 건축을 완료하였으며, 1997년 11월 27일에 헌당예배를 드렸다. 1967년에는 고하도 그리스도의 교회가 설립되었고, 고하도 교회 옆 자리에 1971년 감람산 기도원이 설립되었다.

최요한은 슬하에 6남 2녀를 두었다<목회자3, 장로2(교수1), 사모1, 집사2(안과의사1)>. 동생 최요열은 순복음신학교(현 한세대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서 서울 이태원 순복음 교회에서 시무하다가 1960년대 기간에 힐 요한 선교사가 막 시작한 한국성서신학교에서 교수로 섬겼다. 1965년 12월 5일부터 부천시에 위치한 새소망교회(순복음)를 맡아 크게 성장시켰다.

최요한은 1992년 12월 29일 은퇴 후 1998년 3월 28일(토)에 소천 하였다.

(5)최요한의 신학적 신념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 333-359쪽에 의하면, 최요한은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여 40여년을 섬기는 동안 줄곧 3생명, 즉 말씀의 생명, 성령의 생명, 성찬의 생명을 선포하였다. 이는 말씀 속에 성령님의 능력이 더해지고, 속죄와 구속을 상징하는 주의 만찬이 더해져야 비로소 생명의 완전성이 확보된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 믿음을 떠받치기 위해서 최요한은 1년에 몇 차례씩 주일 대예배 때 구약의 성막도를 강단 벽에 걸어놓고 지성소의 언약궤는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고, 그 속에 들어있던 돌비들은 말씀의 생명을,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성령의 생명을, 항아리에 담긴 만나는 성찬의 생명을 예표한다고 가르쳤다. 여기서 생명은 상징이나 기념 또는 형식 그 이상의 것, 즉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생명이며, 구원과 직결되는 생명이다. 따라서 신약성서교회처럼 기도에 전념하는 동시에 신령의 예배, 진리의 예배, 진정의 예배,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생명이 되게 하는 예배를 드릴 것을 강조하였다.

(6)최요한 목사와 전남지역 그리스도의 교회들

1950년대 충청이남지역에서 김은석 목사와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1960년대는 힐 요한 선교사와 대전에 세워진 한국성서신학교의 영향력이 상당하였다. 힐의 영향력은 충청권에서 김은석의 것에 못지않았지만, 전남에서는 김은석만큼 크지 못하였다. 반면에 목포교회 최요한 목사의 영향력이 전남에서 점차 커져갔다. 힐 선교사가 은퇴하고 30대 중반의 김찬영 목사가 한국성서신학교의 교장이 된 1970년대부터는 김찬영과 한국성서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전북을 포함한 충청권과 최요한과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중심으로 한 전남권의 영향력이 점차 양분되어졌다.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 548-550쪽에 의하면, 최요한 목사는 1946년 4월 전남 함평군 손불면 신흥리(궁산리)에 그리스도의 교회, 동년 10월 전남 함평군 손불면 주포리(석성리 청학동으로 이전)에 그리스도의 교회, 이듬해인 1947년 1월초 전남 무안군 현경면 평산리에 그리스도의 교회, 1947년 7월에 전남 영광군에 무영 그리스도의 교회, 1948년 3월초 광주 사동에 그리스도의 교회, 1950년에 전북 고창에 그리스도의 교회, 1952년 1월초에 전남 목포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여 총 7개 교회를 개척하였다.

5년 후인 1957년 10월 1일에 오늘의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이 무렵에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 교회를 환원시켰고, 이어서 진도 군내 그리스도의 교회, 신안 매화 그리스도의 교회, 여수 백초 그리스도의 교회도 환원시켜 총 4개 교회를 환원시켰다. 이후 1963년에 목포 고하도 그리스도의 교회, 1969년 해남 상공 그리스도의 교회, 1970년 목포 외달도 그리스도의 교회, 1973년 목포 달리 그리스도의 교회, 그밖에 여수 화정 중앙 그리스도의 교회, 충남 금화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여 총 6개 교회를 개척하였다. 1972년 최수신 전도사의 광주 발산 그리스도의 교회, 1981년 광주 무등산 그리스도의 교회, 1986년 광주 그리스도의 교회, 이상 3곳은 최요한 목사의 지원에 의해서 개척되었고, 새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목포 죽교동 그리스도의 교회, 목포 형제 그리스도의 교회, 이상 3곳은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가 모태가 되어 개척되었다.

이밖에도 전남 해남군 옥천면 영신 그리스도의 교회, 해남군 화산면 마명리(화산 중앙) 그리스도의 교회, 해남군 화산면 사포리(화산 반석) 그리스도의 교회, 해남읍 부호리 그리스도의 교회, 신안 압해면 고이 그리스도의 교회, 목포 서남 그리스도의 교회, 영암군 영암읍 평리 그리스도의 교회, 이상 7곳이 최요한 목사의 영향을 받아 환원한 교회 또는 개척된 교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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