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이야기: 존 T. 채이스 선교사와 존 힐 선교사 그리고 김은석 목사
A Story of Korean Christian Churches: Missionaries John T. Chase and His Co-workers: John J. Hill and Eunsuk Kim

조동호(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들어가는 말

1. 힐 요한 선교사의 서울에서의 사역

1) 한국 선교사에 지원

<한국인 전령> 1938년 10월 5호에서 채이스 선교사는 힐 요한(John T. Hill)을 소개하였다. 채이스가 1936년 봄에 존슨대학교(전 존슨성서대학)에 방문하였을 때 선교사역에 관해서 대화를 나눈 훌륭한 학생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당시 그는 졸업을 앞두고 장래사역에 대해서 심사숙고하고 있던 중이었다. 학장 브라운(Brown)이 힐을 적극 추천하였다. 힐은 1936년 5월에 졸업 후 캐나다 온타리오 주 에일머(Aylmer, Ont. Canada)에서 교회를 섬기고 있었으나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은 캐나다나 미국보다는 한국이었다.

2) 한국 선교사로 입국

힐 요한 선교사 가족은 1939년 6월 1일 로스앤젤레스를 출발하여 6월 16일 금요일에 일본 요코하마 항에 도착하였다. 고쿠사이 항로(Kokusai Line)의 가노마루(Kano Maru)라 불리는 일본 화물수송선을 탔다. 12명의 승객 가운데 3명은 교파교단의 선교사들이었다. 빤함(Miss Grace Farnham) 선교사가 요코하마까지 마중 나와 도쿄로 안내하였다. 힐 선교사 가족은 도쿄에서 힛치 선교사의 딸 엘리스(Alice Hitch)와 한국으로 건너간 힛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요츠야선교부에 투입된 오웬 스틸(Owen and Shirley Still) 선교사 부부 그리고 존스(Miss Jones) 선교사를 만났다. 고향(Lowell, Indiana) 사람이자 감리교 선교사인 메이 베일리(Miss May Bailey)도 만났다. 이튿날 요코하마에서 출발하여 배로 오사카에 8월 18일 주일날 도착하였다. 선교사 매든(Madden)이 마중을 나와 이민국수속과 세관 검사에 많은 수고를 해주었다. 화요일까지 매든 가족과 콜(Cole) 선교사 가족 그리고 브랠리(Braley) 가족을 방문하였고, 오사카의 명소와 선교지를 둘러보았다.

오사카에서 화요일에 기차를 타고 밤에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였다. 밤새 배로 이동하여 수요일 아침 6시 가량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채이스 선교사가 박판조 형제를 부산에 보내 힐의 가족을 서울로 안내하게 하였다. 6월 21일 오후 3시에 서울(Keijo, 게이조)에 도착하였다. 채이스와 힛치 부부가 서울역으로 마중 나와 주었다. 채이스 부인은 중국에 가고 없었으므로 며칠 지난 후에 만날 수 있었다.

3) 강제 철수 후 목회활동

1940년 11월 8일경에 한국에서 미국인들이 모두 철수한 지 13개월만인 1941년 12월 7일 아침에 일본이 미국 하와이 주 오아후 섬 진주만에 있던 미군 기지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무렵 힐 선교사는 한국 상황을 주시하면서 목회에 매달렸다. 힐은 미시건 주 스터르기스(Sturgis)에서 1941년 1월부터 1943년 4월경까지 설교하였고, 웨스트버지니아 주 파이던 시티에서 1944년 9월까지 설교하였다.

 

 

 

 

 

 

 

 


 

4) 군목으로 미육군에 입대

그리고 1944년 10월 5일에 미육군 군목으로 입대하였다. 매사추세츠 주 포트 디번즈(Fort Devens)에 입대하여 5주간 훈련을 받고 나서 로스앤젤레스 크레이본 캠프(Camp Claiborne, LA)에 배치되었다. 이때쯤에 <한국인 전령> 1945년 2월호는 힐 요한이 군목으로 미육군에 복무한다는 보도를 실렸다.

힐은 1945년 3월 6일부터 해외근무를 시작하였고, 힐이 탄 배는 몇 차례 잠수함을 잘 피한 끝에 4월 7일에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하였다. 필리핀에서는 각각 북부 전투지역과 남쪽 민다나오 잠보안가(Zamboanga, Mindanao)에 주둔하였다. 1945년 9월 말쯤에 필리핀을 떠나 3주쯤 후에 일본에 도착하였다. 도중에 역사적인 바탄(Bataan, 제2차 세계대전의 격전지), 코레히도르(Corregidor, Manila만 입구의 화산섬)와 오키나와를 보았다. 일본에서는 최초로 원자폭탄이 투하된 히로시마를 둘러보았는데, 재밖에는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일본에서 6개월간 주둔하는 동안 히로(Hiro)에 이어서 마츠(Matsue), 오노미치(Onomichi), 마츠야마(Matsuyama), 오카야마(Okayama)에 차례대로 주둔하였다. 1946년 4월 1일에 일본을 떠나서 미국 시애틀에 12일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19개월간의 군목 근무를 마치고 5월 14일에 제대하였다.

힐은 군복무 중에 민다나오 섬 해안 바다에서 6명의 군인들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17명에게는 재헌신을 이끌어냈다. 한 주일날에는 425명에 설교하였고, 10명이 신앙을 고백하였다. 두 개의 일본목욕탕에서 5명에게 침례를 베풀었고, 5명이 재헌신하였다.

5) 제대 후 버틀러대학교 신학대학원 입학

힐 선교사는 제대 후 미국정부로부터 한국에 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질 때를 기다리는 동안 1946년 7월부터 인디애나 주 월턴(Walton)과 온워드(Wonward)의 그리스도의 교회들에서 설교하였다. 9월 9일부터는 제대군인지원법(Army G. I Bill of Rights, 2차 대전 종전을 앞둔 1944년 루즈벨트 대통령이 제대군인지원법을 만들어 전역 군인에게 대학진학 등록금 전액지원, 주택, 의료, 직업훈련 등을 지원한 권리장전)에 따라 장학금을 받고 버틀러대학교의 신학대학원(School of Religion, Butler University)에 입학하였고, 이듬해인 1947년 8월에 과정을 마치고 M.A.학위를 받았다.

6) 한국에 재입국

힐은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기 때문에 길게 공부할 수 없었다. 1년 만에 마칠 수 있는 학위과정을 택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힐은 제대 후부터 섬겨왔던 인디애나 주 월톤(Walton)과 온워드(Wnward)의 그리스도의 교회들을 1948년에 사임하고 본격적으로 선교모금 여행에 돌입하였다. 이런 노력과 기도 끝에 힐 요한은 1940년 11월 8일경에 한국에서 강제로 철수한지 8년 3개월만인 1949년 2월 18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 무렵 브루스(Bruce)가 일곱 살, 버지니아(Virginia)가 다섯 살, 수잔(Susan)이 4살이었다.

채이스도 7년간 섬겼던 잉글우드 하이츠 그리스도의 교회를 1948년 8월말에 사임하고 10월에 단기 체류를 목적으로 한국에 입국하여 활동하다가 힐 가족이 서울에 도착한 그달, 곧 1949년 2월 중순에 50,000달러 모금활동을 그해, 곧 1949년 9월 1일까지 끝낸 후 전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올 목적으로 귀국하였다. <한국인 전령> 1949년 3월호에 실린 채이스 선교사 부인의 글에 의하면, 채이스는 1949년 3월 1일 이후에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할 것이고, 몇 개월 더 모금운동에 전념한 후에 두 딸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한국인 전령> 1949년 7월호에서 힐은 채이스 가족이 9월에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 시점, 곧 시한을 2개월 정도 남긴 6월경까지 모금액수는 대략 17,500달러 정도가 모금되고 있었다.

그러나 채이스 가족은 예정했던 기간에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김경중의 석사논문 41-42쪽에 따르면, 목표했던 모금액이 달성된 것은 6.25동란이 터진 직후인 1950년 7월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해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채이스는 캘리포니아 주 도우니(Downey)에서 목회를 다시 시작하였고, 모금된 돈은 은행에 예치하였다("Chase Called to California Church Will Return to Korea When Possible," Christian Standard, 17 February, 1951, p.101).

7) 힐 선교사의 서울에서의 사역

힐 요한 선교사의 서울에서의 사역은 1949년 2월 18일부터 1955년까지 이어졌다.

힐 가족은 1949년 2월 18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연지동에 있는 건물, 곧 송월동 선교부 건물과 사이즈가 비슷한 건물을 남장로교회로부터 월 75달러의 임대료를 주고 사용하였다. 힐 가족은 그 건물에 들어가 살면서 그곳에서 3월 15일 한국성서훈련원을 개교하였다. <한국인 전령> 1949년 7월호에 따르면, 18명의 남학생들이 등록하였고, 야간학생들은 50여명이 넘었다. 강의는 오전에 3시간씩 일주일에 네 번, 야간에 2시간씩 일주일에 2번, 일주일에 20시간 정도 이뤄졌다. 과목은 성서과목들, 기본교리, 설교학, 영어성경 등이었다.

힐 선교사는 이 연지동 건물에 침례탕을 만들고 침례를 베풀었는데, 이 신학교의 학생이기도 했던 김포교회의 최춘선 목사의 부인이 힐이 구입한 천으로 5일간에 걸쳐 여섯 벌의 침례복을 꿰맸다고 소개하였다.

힐은 학생이 많아지자 신학교를 성낙소 목사의 필운동교회로 옮겨 본격적으로 목회자 양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또 다시 불행하게도 이듬해인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갑작스런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으로 피난해야 했다. 김경중의 석사논문에 42쪽에 따르면, 힐 가족은 26일 새벽 3시경에 인천에서 배로 출발하여 일본 후쿠오카(Fukuoka)의 군병원으로 피신하였다고 한다("Mr. and Mrs. John J. Hill Are Safe in Army Hospital in Japan,"Christian Standard, 15 July, 1950, p.43).

힐은 일본에 머무는 동안 한국어 공부에 주력하였다. 9월 28일 서울수복 후 11월에 한국에 돌아와 5주간 머무는 동안 서울 장충동의 임대건물에서 신학교를 개교하였으나 중공군의 전쟁개입으로 전쟁이 악화되어 그해 12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포기를 모르던 힐은 이듬해인 1951년 7월 3일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 송월동 선교부에서 8월 4일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그리스도의 교회 보육원(Christian Mission Orphanage)을 시작하였고, 이후 선교부에 제휴된 여러 고아원들(인천, 대전 판암동 및 대구)의 설립과 유지에 도움을 주었다.

1954년에 부인 에스더 비반즈가 신학생 2명과 부적절한 혼외관계에 빠졌다. 그 중 한 명은 결혼한 두 아이를 가진 아빠였다. 1955년에 에스더는 4명의 자녀를 가진 한국인 남자 친구와 살기 위해 둘 사이에서 난 아이를 데리고 가출함으로써 선교사역이 위태롭게 되는 중대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 결국 힐은 1955년에 일본에서 사역하고 있던 후임자 테일러 해롤드(Harold and Ada Taylor) 선교사 부부에게 새로 지은 신학교 건물을 포함한 송월동 선교부 재산을 모두 물려주고, 쫓기다시피 한국을 떠나야 했다.

8) 송월동 선교부 재산의 환원

채이스 선교사는 일제에 빼앗긴 선교부 재산을 되돌려 받기 위해서 무던히 애를 썼지만, 1949년까지도 좋은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힐 선교사는, <한국인 전령> 1949년 7월호에 따르면, 4월 22일에 재산관리인으로부터 5-6월경에 재산을 되돌려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재산은 힐 요한 선교사의 증언에 따르면, 1952년경에, 곧 몰수당한지 10여년 만에 비로소 환수가 이뤄졌다. 1955년에 힐 요한 선교사의 사역을 이어받은 테일러 선교사는 이 선교부 건물을 포함해서 1958년에 새로 지은 신학교 건물까지 모두 팔아서 북서울 역천동(현재 신사동)에 부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지어 서울성서신학교(현 서울기독대학교)를 건립하는데 사용함으로써 채이스가 눈물과 수고로 마련하고 지켜내려고 했던 이 건물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 채 남의 손에 넘어갔다.

2. 김은석 목사

채이스는 <한국인 전령> 1949년 7월호에서 당시의 현황을 선교사 4명(두 가족을 말함), 10개의 교회, 7명의 목회자와 성서훈련원이 존재한다고 하였고, 1948년에 116명이 침례를 받았다고 보고하였다. 그리고 추가로 타이프라이터로 쓴 편지를 한 장 첨부하였는데, 그 내용을 보면, 1949년 전반기에 150명 이상이 침례를 받았고, 전쟁 중에 2개만 남았던 교회가 지금은 19개로 늘었다고 보고하였다. 그리고 1949년 9월 1일까지 미국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주간지 <그리스도인 표준>(Christian Standard)과 함께 ‘한국에 예배당을’(Chapels for Korea)이란 캠페인으로 모금하는 50,000달러 가운데, 6-7월경까지 대략 17,500달러 정도가 모금된 것으로 보고 하였다.

채이스 선교사가 부강교회의 김은석 목사와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 대해서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교회숫자가 갑자기 10개에서 19개로 늘어난 배경에는 부강교회의 김은석 목사가 있었다는 점이다. 힐은 남부의 세워진 교회들의 상당수가 김은석 목사의 공덕이라고 하였다.

채이스는 1947년 10월에 최상현 목사로부터 충청도에 교회가 하나 세워졌고, 40명이 침례를 받았으며, 인근에 두 개의 교회들이 더 세워졌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 보고를 받고나서 채이스 선교사는 이 사람이 최 목사로서 장로교 내과의사였으나 최상현 목사가 가르쳐 침례를 베푼 사람이라고 쓴 것을 보면, 채이스가 남부의 상황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최상현 목사가 보고한 인물이 김은석 목사였을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힐 요한 선교사는 1949년 상황에서 김은석의 공을 크게 인정하였다.

박점상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김은석 목사 가족이 서울 북아현동에 있을 때 박점상 목사는 이웃에 방을 얻어 살고 있었다. 김은석 목사가 아직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기 이전인지라 재건교회를 비롯한 몇몇 교회들을 탐색하였는데, 자신의 신앙과 맞지 않음을 깨닫고 1946년 박점상 목사와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하였다. 김은석 목사는 비록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령운동에서는 자신과 뜻이 맞지 않지만, 침례와 성만찬 등의 교리가 성서적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박점상 목사는 1947년 부강으로 내려와 신화신학 성경연구회에서 일하며 부강교회 건축에 힘을 쏟았다고 하였다. 최상현 목사의 보고와 박점상 목사의 증언으로 볼 때, 김은석 목사가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한 시점이 1946년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 무렵 곧 1947-48년은 미 공군 군목 할 마틴(Hal Martin)이 김포 항공기지에 근무하면서 한국 교회들을 돕고 있었던 때이다. 김찬영 목사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초기역사: William D. Cunningham의 생애(1864-1936)를 중심으로>(한성신학교, 1991) 122쪽에 따르면, 김은석 목사가 할 마틴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알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최상현 목사의 보고와 맞물려 있는 내용으로 보인다. 이 무렵의 <한국인 전령>에 실린 글을 볼 때, 채이스는 장소와 인물을 명확하게 알지 못했지만, 할 마틴, 최상현, 성낙소 등이 김은석 목사의 초청으로 부강을 왕래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948-49년 사이에 채이스 선교사가 알고 보고한 교회숫자는 6개에 불과하였다. 1947년 10월에 최상현 목사가 채이스에게 보고한 충청지역의 3개 교회를 더한다고 해도 9개에 불과하였다. 채이스는 <한국인 전령> 1949년 7월호에서 10개 교회라고 했다가 갑자기 19개 교회로 수정하여 보고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로부터 7년밖에 지나지 아니한 1956년에 해롤드 테일러 선교사는 <한국에 그리스도를!>(For Christ in Korea)이란 선교지 6월호에서 교회숫자를 75개로 보고하였다. 이렇게 갑자기 교회숫자가 많이 늘어난 배경에는 충청이남지역에서 헌신적으로 사역한 김은석 목사와 신화신학 성경연구회가 있었다. 이 때 테일러는 김은석 목사가 25개의 교회를 세웠다고 보고하였다.

나가는 말

크든 작든 오늘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존재와 발전은 신학교와 같은 목회자 양성소를 통해서 이뤄졌다. 그 출발이 존 T. 채이스 선교사가 1937년에 서울 송월동에서 시작한 한국성서훈련원(Korean Bible Training Institute)이었고, 이를 힐 요한 선교사와 테일러 선교사가 1950년대 말까지 이어갔다. 이어서 충청이남지역에서 활동했던 김은석 목사와 이신 목사의 이동 신학교였던 신화신학 성경연구회가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말까지 교단에 엄청난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충청이남지역에 산재한 70-80여개의 교회들이 김은석 목사의 직간접적인 지도력으로 세워진 교회들이었다.

1950년대 말에 시작된 최수열(Haskell Chesshir)의 한국기독학교(Korea Christian Institute, 현 KC대학교), 힐 요한의 한국성서신학교, 1960년대에 세워진 테일러와 배도은의 서울성서신학교, 최윤권, 최순국 등의 서울기독신학교, 김찬영의 한성신학교, 최윤권의 서울기독대학교가 존재했음으로써 오늘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생존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지난 2012년에 한민학교(전 한성신학교)가 폐교되었고, 신학과를 운영하는 남은 두 대학교들조차 교과부의 정책에 흔들리는 상황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발전에 큰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잘났든 못났든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존재와 발전은 철저한 신약성서기독교에 대한 교육에서 비롯되었다. 채이스 선교사나 맥시 선교사는 커닝햄의 요츠야선교부의 선교정책을 마뜩치 않게 생각하였다. 그 이유는 커닝햄이 신학교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고, 자기 사람들이 없다보니까 대부분 교파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고용해서 썼다는 점이었다. 커닝햄은 한국선교를 맡았던 이인범과 이원균에 대해서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고,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결과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와 다름없었다. 그들이 한국에 세운 최소 12개에서 많게는 17개까지 되던 교회들 가운데서 해방 후 그리스도의 교회로 돌아온 교회는 이난기 목사의 용산교회 하나뿐이었다.

따라서 채이스 선교사는 한국에 와서 가장 먼저 신학교부터 세웠고, 이미 모든 학업을 마치고 안수를 받은 목사들에게 4년간 꼬박 신약성서기독교에 대해서 배우도록 하였다. 물론 한국인 목회자들이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당시에 선교부의 후원이 절실하였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채이스는 달리 생각하였다. 그러한 철저한 교육의 결과가 최상현과 성낙소이고, 박해를 무릅쓰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지켜낸 영웅들이라고 믿었고, 그렇게 한 자기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구멍가게라도 파는 물건이 명확하고 믿을만해야 사람들이 찾게 된다. 역사도 없고 정체성도 없는 교단, 브랜드도 없고, 신념도 믿음도 없는 교단은 사람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신학대학들과 교회들이 또는 목회자들이 해내야할 일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역사를 밝혀보려는 사람으로서 필자가 늘 아쉽게 느낀 것은 1950-60년대까지만 해도 신약성서기독교에 대한 정체성이 명확했는데, 그 이후시대 곧 필자의 시대부터는 그 같은 것들이 사라지고 없었고 모두가 다 눈을 밖으로만 돌리고 살았다는 것이다. 이런 현 상황에 비춰볼 때, 소속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눈물과 기도와 헌신으로 학교를 일궈냈던 선배들의 믿음과 열정이 아닐까 생각된다. 부모가 일군 기업을 자식이 말아먹듯이 목회자들의 배출이 중단되거나 눈을 밖으로만 돌린 채 알맹이가 없는 교육으로 일관하는 불행이 더 이상은 없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참고도서

김경중. ‘존. T. 채이스(John Trawrick Chase)의 한국선교: 한국기독교선교회(Korean Christian Mission)를 중심으로.’ 서울기독대학교 대학원, 2011학년도 석사학위논문, 2012년 7월.

Maxey, Mark. “Christians in Japan 100 Years (1883-1983).” http://www.bible101.org/japanmissions/page05.htm

백종구. ‘윌리엄 D. 커닝햄과 한국인 선교-동경 요시야선교회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신학논총 83집>, 2012년 10월 15일, pp. 123-147.

힐, 존 J.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 약사”(A Short History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Korea). <쎄메론 제7호> 한국성서신학교, 1972. <인터넷자료: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kccs.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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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nningham, W. D. Tokyo Christian 1901-1997. Published by the Yotsuya (Cunningham) Mission, Christian Churches/Churches of Christ and Digitized by Dr. Scott Seay of the Christian Theological Seminary, Indianapolis, Indiana, 30 June, 2015.

Cunningham, W. D. Tokyo Christian. Published by the Yotsuya (Cunningham) Mission, Christian Churches/Churches of Christ and Digitized by Dr. Timothy Lee of the Brite Divinity School of Texas Christian University, Fort Worth, Texas, no date.

Taylor, Harold. For Christ in Korea. Digitized by Dr. Scott Seay of the Christian Theological Seminary, Indianapolis, Indiana, 2 July, 2015.

 

김찬영.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초기역사: William D. Cunningham의 생애(1864-1936)를 중심으로> 한성신학교, 1991.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1956-2006)> 2006.

성낙소. <기독의 교회와 성낙소와의 관계> 편집 및 부록: 김종기, 조동호.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2010. <인터넷자료: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http://kccs.info)>.

오수강. <기독의 교회와 성낙소와의 관계> 필운동 그리스도의 교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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