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이야기: 존 T. 채이스 선교사와 내국인 사역자들
A Story of Korean Christian Churches: Missionary John T. Chase and His Korean Preachers

조동호(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들어가는 말

신약성서기독교를 표방하는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초기 목회자들은 성서의 가르침에 철저하였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였다. 몇 분 되지 않은 목회자들 가운데 동석기, 최상현, 성낙소, 김문화, 오현팔, 최춘선과 같은 애국지사 또는 독립투사들이 있었고, 존 T. 채이스 선교사의 협력으로 1937-40년 사이에 세워진 다섯 개의 교회들<신당정교회(김요한 목사, 미국 에모리 대학교 목회학석사 출신), 돈암정교회(최상현 목사, 연희전문학교 제1회 졸업생), 내수정교회(성낙소 목사, 한의사), 산돈암정교회(김문화 목사) 및 청량리교회(박판조 목사)>은 모두 일본기독교회 조선교단에 가입하기를 거부하였고, 동시에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서 1940-45년 사이에 성낙소 목사를 필두로 이들 목회자들은 일경에 불려가 모진 매를 맞았고, 김요한 목사는 세 차례나 투옥되었으며, 김문화 목사는 옥고를 치렀다. 1941년 후반기에는 다섯 개의 교회가 모두 폐쇄조치를 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암정 그리스도의 교회의 최상현 목사와 내수정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낙소 목사는 비밀리에 주일을 성수하면서 주의 만찬예배를 빠트리지 않았다. 채이스 선교사는 이 사실을 1941년 초와 1947년 초에 단기간 입국하여 직접 확인한바가 있다.

한때 <신학세계>의 편집인이었던 최상현 목사는 해방 후 미군정 때 연락관으로 활동하면서 교회를 지켜냈고, 한의사였던 성낙소 목사는 일제의 핍박에 굴하지 않고 한약방을 열어 생계유지를 하면서 교회를 지켜냈다. 더불어 성낙소 목사의 필운동(46년에 개명)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군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독립투사 오현팔 목사의 후손들이 필운동 교회에 출석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오현팔 목사의 손자인 오수강 목사는 성낙소 목사의 손녀와 결혼하였다. 1919년에 장로교회로 개척했다가 1940년에 일제에 의해 폐쇄 당했던 자신의 교회를 해방 직후에 그리스도의 교회로 복원한 오현팔 목사는 사도 바울처럼 자신을 온전히 교회를 위해 바친 김은석 목사와 연락하고 지낸 사이였고, 미국 일리노이 주 소재 링컨기독대학교 출신과 재학생들이 합심하여 서울기독교대학교의 전신인 대한기독신학교를 설립할 당시 설립상임위원회의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김포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운 애국지사 최춘선 목사는 김포지역에 거대한 토지를 소유한 거부였으나 6.25동란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된 가난한 이웃들을 돕는데 전 재산을 사용하였다. 그는 소천 직전 30년간을 맨발로 다니며 전도하였고, 소천 직전 몇 년간 세상에 ‘맨발의 천사’로 알려졌다.

성낙소 목사의 <자서전> ‘제9장 대동아 전쟁과 교회 박해’에 따르면, 1940년 가을에 총독부가 ‘일본기독교회 조선교단’이라는 명칭으로 기독교의 모든 교파를 통합하기 위해서 각 교파의 대표들을 피어선 성경신학교내 장로교 총회장 사무실에 모이게 하였다.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도 김문화 목사, 최상현 목사, 성낙소 목사가 참석하였으나 가입에 반대하였고, 이로 인해서 성낙소 목사는 모진 매를 맞았으며, 한의사였던 성낙소로부터 병고침을 받았던 형사가 풀어주어 다행히 옥고는 면하였으나 김요한 목사와 김문화 목사는 나중에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 당시 각 교파는 일본기독교회 조선교단에 가입할 뿐 아니라, 신사참배와 동방요배에 면죄부를 주었으나 신약성서기독교를 표방한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조선교단에 가입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거부하였고, 끝까지 그리스도의 교회들로 남았다.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강제로 폐쇄당한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한편 일본 요츠야선교부에서는 1941년 1월 21일 일부 목회자들의 갑작스런 요구에 의해 회합을 가졌는데, 요구한 측에서 다른 3개 교회 목회자들에게는 고의로 통보를 누락한 모임이었다. 이 모임에서, 커닝햄 부인과 다른 선교사들이 강하게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사역자 4명과 조선인교회 사역자 이원균과 이성영이 일본기독교단에의 가입을 다수결로 밀어붙였다. 서울기독대학교 백종구 교수의 논문, ‘윌리엄 D. 커닝햄과 한국인 선교-동경 요시야선교회를 중심으로’에 의하면, 한국에 있는 17교회들도 이인범의 주도로 1945년 7월 19일 ‘일본기독교회 조선교단’에 가입하였다. 다만 일본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종전 후 ‘일본기독교단’으로부터 탈퇴하였고, 이 가운데 문을 닫은 몇 개의 교회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리스도의 교회들로 살아남았다고 한다. 반면에 ‘일본기독교회 조선교단’에 가입한 요츠야선교부 소속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해방 후 그리스도의 교회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채이스가 1948년 10월 17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1949년 2월 중순까지 한국에 체류할 당시에 요츠야선교부 소속이었던 이난기 목사와 그의 용산교회는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에 합류되어 있었다.

1940년 6월초에 채이스 선교사 가족이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들어가고, 힐 선교사 가족조차 미국정부의 철수 명령으로 그해 11월 8일경에 본국으로 돌아가 선교사들이 한 명도 없는 상황에서 그 해 가을에 채이스가 협력하여 세운 다섯 개의 교회들은 일본기독교회 조선교단에 가입하라는 압박을 받았고, 이를 거부한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불법집회를 연다는 명목으로 탄압을 받기 시작할 무렵 채이스 선교사는 선교부 재산을 보호하고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을 돕기 위해서 이듬해인 1941년 2월 24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3월 23일까지 한 달간 체류하였다. 그 기간에 형사들이 선교사를 따라 붙었고, 채이스와 만나는 사람들을 경찰서에 불러 조사하고 주고받은 모든 이야기를 써서 제출토록 하였다. 이에 채이스는 자신의 존재가 이들 목회자들과 교회들에게 고통을 가중시킨다는 사실을 깨닫고 귀국하였다. 채이스는 이때의 상황을 <한국인 전령> 1945년 2월호에서 한국인 목회자들이 선교사와 접촉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끌려가 매를 맞았다고 적었다. 성낙소 목사도 <자서전>에서 경찰서에 끌어가 심하게 매를 맞고 풀러난 사실을 기록하였다.

채이스가 떠난 이후 그 해 말에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거부한 이들 다섯 개의 모든 교회들이 폐쇄조치를 당하였고, 김요한 목사와 김문화 목사는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돈암정교회와 내수정교회만큼은 비밀리에 주일마다 집회를 열었다. 결국 이 두 개의 교회만이 끝까지 살아남았다. 채이스는 <한국인 전령> 1946년 5월호에서 이 사실을 전하며 신약성서기독교의 승리임을 밝혔다.

김요한 목사는 해방 전에 세 차례나 옥고를 치른 후에 교회를 쉬고 있었고, 김문화 목사는 해방 전에 치른 옥고의 후유증으로 1948년 말 또는 1949년 초에 사망하였으며, 박판조 목사는 소련군정이 들어선 이북에 넘어가 내려오지 않았고, 최상현 목사는 6.25동란 때 납북되었으며, 백낙중 목사는 피살됨으로써 채이스의 사역자들 가운데 끝까지 살아남은 목회자는 환갑을 갓 넘긴 성낙소 목사뿐이었다.

1. 김요한 목사

<한국인 전령> 1937년 4월 제2호에 따르면, 김요한(金約輪/與範) 목사는 미국 에모리 대학교(Emory University)에서 B.D.(오늘날의 M.Div)를 받고 돌아온 감리교 목사로서 채이스 선교사가 한국에 왔을 때 한국어 가정교사로 채용되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접하게 되었다. 채이스와 매일 만나 성경을 공부하던 중에 빌립이 에디오피아의 내시에게 침례를 베푸는 장면에 이르렀을 때, 김요한 목사는 채이스에게 자신도 내시처럼 침례를 받고 싶다고 피력하였고, 채이스는 김요한 목사 부부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1937년 2월에 서울시 안에 인구 3만여 명이 살지만 교회가 없는 곳에 가정집을 임대하였고, 김요한 목사 가족이 그곳으로 이사하여 살면서 그 집에서 3월 첫 주부터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채이스의 제1교회가 신당정 그리스도의 교회였다.

채이스 선교사는 선교부 건물 지하실에 한국성서훈련원(The Korean Bible Training Institute)을 개설하였는데, 김요한 목사는 이 학교의 제1호 학생이 되어 4년간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그리고 김요한 목사는 채이스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에 제1호 교재로 소개한 소책자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저명한 목사 P. H. 웰시머(Welshimer)가 저술한 20쪽짜리 전도용으로써 제목이 <신약성서교회에 관한 사실들>(Facts Concerning the New Testament Church)이었다.

채이스 선교사는 교회들이 폐쇄된 1941년 말부터 소식이 끊긴 사역자들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한국인 전령> 1947년 5월호 ‘예전 사역자들과의 접촉’(Workers Contacted)에 따르면, 채이스는 1947년 1-2월 중 어느 몹시 추운 날 서울거리를 걷고 있다가 우연히 김요한 목사를 만났다. 김요한 목사는 채이스에게 자신은 목회사역을 쉬고 있고, 해방 전에 세 차례나 옥고를 치렀다고 말했다.

 

 

 

 

 

 

 

 

 

 

 

2. 최상현 목사

<한국인 전령> 1937년 10월 제5호에 따르면, 어느 날 한 감리교회 목사가 자신이 저술한 계시록에 관한 소책자들을 팔려고 채이스를 찾아왔다. 그가 바로 연희전문학교(제1회 졸업), 중국 북경 연경대학교(수학)와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다년간 신학교에서 강사와 감리교잡지 <신학세계>의 편집인을 지낸 최상현 목사였다. 최상현이 채이스를 만난 시점은 1929년 본처사역자로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집사목사안수를 받고, 궁정교회에 부임하여 첫 목회를 하다가 1931년 체부동교회로 옮긴 후 1935년 목회를 사임하고 성서공회에 관련된 일을 보던 중이었다. 그 방문의 결과로 최상현 목사는 한국성서훈련원에서 학습하기 시작하였고, 머지않아 성서적인 침례를 받겠다고 자청하였으며, 1937년 9월 1일에 한강에서 침례를 받았다.

<한국인 전령> 1937년 12월 제6호에 따르면, 어느 날 최상현 목사가 채이스에게 말하기를, 자신은 감리교회를 탈퇴하였고, 이제는 오직 그리스도인(Christian only)으로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교인이되었다고 하였다. 그러자 선교사가 말하기를, “아 그러세요. 자랑스럽겠군요?” 그러자 최상현 목사가 대답하기를, “예, 신약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역시 임대건물에 입주하여 교회를 시작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1937년 10월 17일에 탄생한 채이스의 제2교회가 돈암정 그리스도의 교회였다.

<한국인 전령> 1946년 5월호에 따르면,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1941년 말에 일본기독교회 조선교단 가입 거부와 신사참배 및 동방요배를 거부한 그리스도의 교회들을 폐쇄시키자 최상현 목사의 돈암정교회는 성낙소 목사의 내수정교회와 마찬가지로 은밀히 모여 주일을 지켰다.

<한국인 전령> 1946년 5월호에 따르면, 최상현이 그해 봄에 채이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미군정에 소속되어 한국인과의 연락책으로 일하고 있다고 소식을 전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47년 1월 중순경에 채이스 선교사가 주일날 최상현 목사의 돈암동교회를 방문하여 설교하였는데, 당시 돈암동교회는 일본 적산가옥을 임대하여 살고 있는 한 성도의 가정에서 모이고 있었다. 난방도 되지 않는 집 2층에 있는 두 개의 방에 성인남녀와 학생들까지 40여명이 모였다. 참석한 다수의 성도는 채이스가 1936-41년 사이에 침례를 베푼 성도들이었다. 그날 채이스는 빌립보서 3장 13-14절을 본문으로 설교하였다. 채이스로서는 돈암정 그리스도의 교회가 일제의 압살정책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신약성서교회란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감명 깊은 순간이었다.

채이스는 1948년 12월 12일 돈암동교회의 집회소인 개인주택 2층이 너무 협소하여 70-80명이 앉을 수 있는 쾌 큰 널찍한 집을 임대하는 데 필요한 돈의 절반 정도를 협조하였다.

이뿐 아니라, 채이스는 그해 2월 9일 주일 낮 설교를 최상현 목사가 침례를 베푼 감리교의 채(D. W. Chai)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에 초청받아 행하였는데, 이날은 채이스에게 최상현 목사가 또 하나의 그리스도의 교회의 탄생의 가능성을 보여준 날이었다. 이 교회는 전에 일본인들이 모여 살던 대방동에 건물을 임대하여 쓰고 있었는데, 각종 교단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채이스 선교사가 1947년 1월 중순에 서울에 도착하여 2월말까지 머문 후에 3월 1일 미국으로 떠난 수개월 후에 일본 큐슈에서 복무하던 공군 군목 할 마틴(Hal Martin)이 김포 미항공기지로 전근을 오게 되어 1947-48년 사이에 채이스의 부재를 메웠는데 최상현 목사의 협력이 컸다.

최상현 목사와 성낙소 목사의 노력의 결과로 채이스 선교사가 단기방문으로 1948년 10월 17일에 서울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돈암동 교회(최상현 목사, 침례 14명)와 필운동교회(성낙소 목사, 침례 30명)뿐 아니라, 위동교회(성수경 목사, 침례 8명), 공덕교회(백낙중 목사, 침례 19명), 용산교회(이난기 목사, 침례 28명), 아현동교회(윤낙영 목사, 침례 17명)로 발전해 있었다.

힐 요한 선교사 가족이 1949년 2월 18일 서울에 도착하고, 채이스 선교사가 1948년 10월 17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1949년 2월 중순경에 떠날 무렵 최상현 목사는 만 56세였으며, 9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매우 불행하게도 이듬해 1950년 6.25사변이 터지고 그해 8월 최상현 목사는 공산군에 의해 납치된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

3. 성낙소 목사

성낙소 목사가 구세군 출신의 사관으로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쫓기던 중에 1927년 1월 1일 충남 부여군 세도면 화수리의 처가 사랑방에서 기독지교회(基督之敎會)를 개척하여 시무한 것과 이것을 계기로 W. D. 커닝햄 선교사의 초청을 받고 1930년 5월에 일본에 건너가 커닝햄이 안식년으로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채이스의 감독아래 요코하마 시 미야다마치 조선인교회(橫浜市 宮田町 朝鮮人 敎會)를 섬긴 것과, 1931년 9월 하순에 커닝햄 선교부로부터 조선지역 포교책임자로 임명받고 귀국하여 1932년 초에 조선총독부 종교과에 포교계를 제출하고 ‘사곡선교회 기독의 교회’를 등록하였는데, 조선총독부 종교과에서 이를 1932년 6월 11일에 승인하였다. <도쿄 그리스도인> 1937년 1월호는 미국의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Christian Churches/Churches of Christ)의 월간지, <환원 전령>(Restoration Herald)의 편집인 리온 마이어즈(Leon Myers)가 조선총독부에 편지를 보내 요츠야선교부의 한국에서의 사역에 대해서 문의하였고, 이에 조선총독부는 요츠야선교부의 한국에서의 사역이 정식으로 승인되었고, 1932년 6월 11일이후로 중단 없이 기독교 사역이 수행되고 있으며, 3개의 교회가 등록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는 기사가 <환원 전령> 지에 실렸다고 소개하였다. 이 정부 확인 교회숫자는 이듬해에 힛치 가족이 한국 상주 선교사로 들어가게 된 것을 소개한 <도쿄 그리스도인> 1938년 3월호 에서는 11개로 늘어났다.

성낙소 목사의 <자서전>에 “계동, 공덕동, 청엽동, 내수동, 인천 송현동 외 2곳과 평북 구성(平北 龜城)에 기독의 교회를 1년 반 동안 7개 교회를 설립하였고, 부여 지방에는 기성(旣成)한 교회였다.” 기록이 있다. <도쿄 그리스도인>(Tokyo Christian)에 실린 기사들을 볼 때, 성낙소가 조선지역 포교책임을 맡은 기간은 대략 1년 8개월 정도 되어 보인다. 또 성낙소가 이인범에게 포교 책임자 직책을 넘긴 직후 얼마 못되어 제물포에 3개, 서울에 3개, 평북 구성군에 5개, 마산에 1개, 총 12개의 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이 되고 있기 때문에 <자서전>에 언급된 7개의 교회들이 다수가 완전한 교회가 아닌 성경공부모임 형태였을지라도 존재했을 가능성이 충분해 보인다. 성낙소 목사가 일본에서의 사역을 마친 1931년 9월 하순에, <도쿄 그리스도인> 1931년 11월호에 따르면, 채이스 선교사가 서울을 순방하였다. 이때 채이스는 서울에 1개의 교회와 여러 개의 성경공부모임(Bible Schools)이 있다고 전하였다. <도쿄 그리스도인> 1931년 12월호는 성낙소 목사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그가 설교했던 요코하마 조선인교회를 류재헌(劉載獻, Chai Hun Ryu)이 맡게 된 것은 성낙소 가족의 병 때문이었다고 전하면서 한국에 이성록이 시무하는 서울교회가 있고, 난도교회가 있다고 하였다. 성낙소는 이 서울교회와 난도교회를 돌봤던 것으로 보인다. 난도교회는 신생교회로서 40여명이 가정에서 모였다. 그밖에도 요츠야선교부와 연관된 교회들이 총 15개가 있다고 하였다. 이어진 1932년 1월호는 성낙소 목사가 1931년 10월 난도교회(제15교회)에서 9명에게 침례를 베풀었고, 2개의 교회들을 섬기고 있으며, 다른 13개의 교회들은 각각의 목회자들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15개 혹은 13개로 언급된 교회들은 대부분 소규모의 성경공부 모임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더불어 1933년 6-7월호에서는 제물포교회(제16교회)가 4월 9일 1주년을 맞았다고 하였고, 38세로 소개된 이원균이 구성에 간지 채 일 년도 안돼서 인근에 6개 교회를 세웠다고 보도하였다. 중요한 것은 제물포교회가 설립된 시점이 이인범이 한국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1932년 8월 이전이란 점이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성낙소 목사가 일본에서 돌아온 직후 그의 증언대로 1년 반 정도 포교 책임자의 직책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 요츠야선교부를 조선총독부에 등록하여 1932년 6월 11일자로 승인을 받게 한 것도 성낙소 목사인 것으로 보인다. 필자의 이 확신은 이어지는 <도쿄 그리스도인>의 기사들에서 확인한 결과이다.

<도쿄 그리스도인> 1933년 8월호에 따르면, 커닝햄이 이인범을 한국에 보내 2차례에 걸쳐 예비답사를 하게한 결과에 고무되어 요츠야선교부와 제10교회는 이인범을 한국에 보내 서울에 튼튼한 교회를 세우게 하고, 조선에 세워진 요츠야선교부의 교회들을 돌보는 순회전도자와 조력자가 되도록 결정하였다. 이에 요츠야선교부는 6월 5일 월례회에서 한국에 상주할 한 선교사 가족을 요청한다는 제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인범이 섬기던 조선인교회(제10교회)는 이인범의 조력자였던 채호(Ho Cheh)가 맡게 되었다.

커닝햄은 이인범을 한국의 알렉산더 캠벨 또는 “추수를 기다리는 지상 최고의 황금들판”(the ripest mission field on earth today)을 접수할 여호수아라며 절대적으로 신뢰하였다. 이 무렵 한국에서는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들이 선교지역분할을 합의한 선교정책 을 이유로 들어 요츠야선교부의 한국선교를 박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교파를 버리고 순수한 신약성서교회로 환원하고자 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많이 있음을 누누이 소개하면서 그 증거로 이인범의 전도여행의 성과를 제시하였다.

<도쿄 그리스도인> 1932년 9-11월호에 따르면, 이인범은 8월 1일 선교탐방을 위해서 한국에 들어갔고, 그 기간에 8월 21일 하루에만 93명에게 침례를 베푼 것을 비롯해서 2개월 체류기간에 총 138명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이뿐 아니라, 이 탐방기간에 이인범은 여러 교파교회들로부터 청빙 제안을 받았다. 그리고 1933년 2-3월호에서는 한국에서 3개의 교회가 신약성서기독교에로 환원하였고, 그들 중 한 교회가 서울 창동교회인데, 이인범이 목회자가 되어주기를 바랐으나 이인범은 오히려 성 목사를 추천하였고, 성 목사도 이 제안을 수용하였으며, 창동교회는 몇 차례의 공동회의를 통해서 11월 20일에 성 목사를 목회자로 모시기로 결정하게 되었다고 전하였다. 또 <도쿄 그리스도인> 1933년 4-5월호는 이인범이 제2차 선교탐방을 위해서 한국에 들어갔고, 3월 24일까지 2월 19일에 27명, 3월 8일 서울에서 8명, 3월 12일 제물포에서 13명에게 침례를 베풀었다고 전하였다.

성낙소 목사와 관련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성낙소 목사가 내수정교회를 언제 시작했느냐이다. 성낙소는 <자서전>에서 1932년에 서울 종로구 내수정 106-1번지에 내수정 기독지교회를 개척한 것처럼 기술해 놓았지만, 이 기술은 구체적인 것이기보다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포괄적인 것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성낙소 목사가 채이스의 제3교회로 편입된 것은 1939년이었다. 성낙소는 자서전에서 병자년(1936년) 4월에 김문화(金文和) 목사의 전갈로 채이스 선교사와 상면한 것으로 언급하였으나 채이스가 한국에 도착한 것은 그해 11월이었으므로 성낙소 목사가 연도를 잘못 기억한 것이었다. <한국인 전령> 1949년 3월호에 의하면, 성낙소 목사는 1938년에 채이스로부터 침례를 받았고 그로부터 3년간 한국성서훈련원에서 학습한 것으로 되어 있다. 만일 채이스가 성낙소의 내수정교회를 1936년 말이나 1937년에 알고 있었다면, 1939년 6월호에 가서야 성낙소와 내수정교회를 소개했을 리가 만무하고, 1938년 2월호에 실린 한국성서훈련원 단체사진에서도 빠졌을 리가 만무하다. 문제는 채이스가 1930년 5월부터 1931년 9월까지 자신의 감독을 받으며 요코하마 시 미야다마치 조선인교회를 섬겼던 성낙소를 왜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찾지 않았는지, 혹은 찾고 있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성낙소 목사는 다른 이들보다 1년 이상 늦게 채이스와 연락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낙소 목사와 내수정(46년부터 필운동)교회는 교리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가장 확실하게 신약성서교회를 실천하였고, 끝까지 살아남았으며, 채이스와 힐이 미국의 형제들에게 크게 자랑할 만한 교회가 되었다. 또한 많은 수의 유능한 목회자들이 이 교회를 통해서 배출된 것은 성낙소 목사와 필운동교회가 내세울만한 업적이다.

또 교역자 측에서는 “동석기 전도자는 1935년 도미하여 선교모금을 한 후 귀국하여 1936년 9월에 서울 내수동 106-1번지에 작은 가정집을 교회로 마련한다. 초대교역자로 성낙소 목사가 부임하여 7명의 교인으로 출발한다. 이것이 내수동 그리스도의 교회의 시작이다. 그러나 성낙소 목사는 다음 해인 1937년 동석기 전도자와 갈라 서 필운동 289번지의 대지 42평 초가를 매입하여 옮기고 필운동 그리스도의 교회 시대를 열었다.”고 주장한다. 여러 가지 정황과 드러난 기록들로 볼 때, 성낙소 목사는 1938년에 채이스 선교사와 연락이 닿았고, 1939년에 채이스의 제3교회로 내수동교회를 등록하였으며, 채이스가 1941년 2월 24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한 달간 머물면서 촬영한 3월 10일자 사진에는 내수정교회 제2주년으로 되어 있어서[참고, 오수강, <기독의 교회와 성낙소와의 관계>, 6쪽] 성낙소가 동석기 전도자의 내수정교회를 나와 별도의 내수정교회를 시작한 것은 1939년이 확실해 보인다. 만일 동석기 전도자가 내수정에 교회를 마련한 것이 1936년 9월이 맞는다면, 필운동교회의 창립을 1937년으로 본 것이 옳다고 추정된다. 성낙소 목사가 내수정교회를 시작한 것은 1939년이 맞지만, 동석기 전도자가 마련한 내수정 가정집 교회를 떠난 1937년부터 목회를 쉬지 않고 가정에서든 임대건물에서든 자신의 교회를 지속해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1968년 1월 7일자, 28일자, 2월 4일자 필운동 교회 주보(담임 최순국 목사)에 다음과 같은 글이 성낙소 목사의 사진과 함께 연속해서 실렸었던 이유도 이런 이 정황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 성낙소 목사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초대 목사 중의 한 분으로서 필운동 교회에서 1937년도부터 별세하신 해 1964년도까지 시무하신 제1대 목사님이십니다.”

성낙소 목사의 교회는 채이스 선교사가 단기 입국한 1947년 2월 이전까지는 채이스와 힐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내수정교회로 불렸다. 그리고 <한국인 전령>에 실린 1939년과 1941년 사진의 내수정교회 건물은 1947년에 실린 필운동 교회 건물과는 전혀 다른 건물이었다. 성낙소의 내수정교회는 일본기독교회 조선교단에 가입하기를 거부하고,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1941년 후반기에 폐쇄 당하였다. 이후 성낙소는 매주일 예배와 주의 만찬을 비밀리에 진행하던 중에 오수강 목사의 증언[<주간 기독교>, 제1285호, 1998년 3월 22일자]과 책에 의하면, 1943년 7월 7일 종로구 내수정교회를 필운동 289번지로 옮겨 1946년에 필운동교회로 개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로 보건데 성낙소 목사는 동석기 전도자가 1936년 9월에 설립한 내수정교회를 잠시 맡았다가 1937년부터 자신만의 또 다른 내수정교회를 시작했고, 1939년에 건물을 임대(또는 매입)하여 채이스의 제3교회로 편입되었으며, 힐 요한 선교사는 1940년에 이 내수정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영어성경공부를 개설한바가 있다. 1941년 후반기에 폐쇄당한 이후에는 비밀리에 교회를 유지해오다가 1943년에 종로구 필운동 289번지에 대지 42평 초가를 매입하여 7월 7일 옮겨간 후 해방 후 그곳에 내수정교회를 복원하였고, 이듬해 1946년에 개명하여 본격적으로 필운동 그리스도의 교회 시대를 연 것으로 추정된다. 1947년 2월에 채이스가 촬영한 사진은 필운동교회로 알려진 건물이었다. 그리고 이 필운동교회는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에서는 가장 확실하게 살아남은 자기 건물을 가진 유일한 교회였다. 따라서 힐 선교사는 1949년 2월 18일에 입국하여 자신이 거주하던 연지동의 임대저택에서 개교한 신학교를 이곳 필운동교회로 옮겨 이어갈 수 있었다.

채이스 선교사가 1948년 10월 17일에 단기 입국했을 때 성낙소 목사는 만 58세였다 (1890년 5월 16일생). 성낙소 목사의 필운동교회는 1948년 11월 21일 주일 오후에 채이스의 한국방문환영회를 성대하게 열어주었다. 또 이 무렵 필운동교회는 윤낙영 목사의 아현동 교회의 목사 생활비를 후원하고 있었다.

4. 김문화 목사

<도쿄 그리스도인> 1933년 10월과 11월호에 채이스가 쓴 김문화 목사의 영문이름 이니셜(M. W. Kim)과 동일한 인물이 언급되어 있다. 이 글에 따르면, 그는 일본 요츠야선교부 소속의 교회들로부터 후원을 받고 한국의 교회개척지에서 사역하고 있었으며, 그해 8월에 7명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만일 이 사람이 김문화 목사였다면, 그가 어떻게 채이스 선교사의 초기 사역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게 된다.

김문화 목사는 1938년에 촬영된 한국성서훈련원 학생들의 단체 사진에 포함되어 있고, 채이스 선교사가 찾는다는 소식을 성낙소 목사에게 전한 사람이기도 하다. 채이스는 1939년경에 박판조가 개척한 산 돈암동 교회를 김문화 목사가 맡게 하였으며, 1940년 가을에 총독부가 소집한 각 교단 대표들의 모임에 최상현 목사, 성낙소 목사와 함께 참여하여 일본기독교회 조선교단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로 인해서 1941년 후반기에 교회가 폐쇄 당하였다. 만일 김문화 목사가 김동열 목사의 부친인 것이 확실하다면[<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289쪽)], 그는 이 당시 치른 옥고의 후유증으로 김은석 목사가 시무하던 부강교회에서 소천하신 분과 동일인이 된다(지철휘 목사, ‘내가 보고 알고 들은 김동열 목사님,’ 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이 무렵 김은석 목사는 최상현 목사, 성낙소 목사, 할 마틴 군목 등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 다만 채이스 선교사는 서울에서 사역하였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김은석 목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고 최상현 목사를 통해서 지방에 교회들이 세워지고 있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이다.

<한국인 전령> 1947년 5월호 ‘예전 사역자들과의 접촉’(Workers Contacted)에 따르면, 채이스는 1947년 1-2월 중 서울에 머무는 동안 예전의 동역자들과 접촉하려고 애썼는데, 김문화는 서울을 떠나 시골에 있지만, 연락이 닿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1948년 10월 17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1949년 2월 중순경까지 한국에 체류하고 있을 때 채이스는 김문화 목사의 부고를 접하게 되었다. 김문화 목사의 장례는 그의 아들의 집(신탄진교회)에서 이뤄졌고, 성낙소 목사가 주관하고 최상현 목사와 채이스 선교사가 보조하였다. 김문화 목사는 사망하기 한 주전에도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설교하였고, 성서의 단순한 가르침으로 청중을 집중하게 만드는 훌륭한 설교가였다고 전한다.

5. 박판조 목사

<한국인 전령> 1937년 12월 제6호에 따르면, 박판조는 29살 때인 1937년 여름에 채이스로부터 침례를 받았으나 여전히 장로교회에 출석하던 중에 채이스를 찾아와 장로교회를 떠나기로 결심하였다는 것과 복음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 공부를 하겠다고 피력하였다. 박판조는 다년간 성서공회에서 여러 비서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일하였으며, 채이스에게 추천된 인물이었다. 박판조는 1937년 11월 1일부터 한국성서훈련원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채이스 선교사는 그를 디모데가 될 재목으로 꼽았고, 채이스가 마음을 준 젊고 능력 있는 일군이었다.

<한국인 전령> 1938년 6월 제3호에 따르면, 박판조는 전차 운전기사 양성소에 다니고 있었으며, 1938년 5월 3일에 결혼하였다. 채이스는 박판조 목사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들려오는 소식은 그가 소련군정이 통치하고 있는 북한에 머물며 한의 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무렵 북한을 장악한 소련군들은 주둔기간 내내 강간, 폭행, 약탈을 일삼았다. 그 상황이 일제치하보다 더 나빴다고 한다. <한국인 전령> 1947년 5월호, ‘예전 사역자들과의 접촉’(Workers Contacted)이란 글에서 채이스는 동석기 전도자가 전해준 이야기를 전하였다. 동석기는 북한에 체류하면서 사역을 펼치고 있다가 부인과 일부 자녀들을 북한에 남겨둔 채로 소련군이 입북하기 직전에 남하하였다면서 두고 온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였으며, 소련군들이 동석기 전도자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여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에게 나눠줬다고 하였다.

6. 백낙중 목사

백낙중 목사는 1938년에 촬영된 한국성서훈련원 학생들의 단체 사진에 포함되어 있고, 당시 최상현 목사가 개척한 돈암정교회에 출석하였다. 그는 외국어학교를 졸업한 후 오랜 기간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백낙중은 당시 두 자녀를 두고 있었는데, 이 무렵에 30년 지기 최상현 목사로부터 침례를 받았다. 그도 한국성서훈련원에서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폐쇄될 때까지 신약성서기독교에 대해서 학습하였다. 채이스는 1941년부터 48년까지 그에 대해서 소식을 듣지 못하다가 1948년에 만났을 때, 공덕교회를 개척하여 시무하고 있었다. 교인들은 그가 세운 중학교의 학생들이었고, 집회소는 그가 운영하는 학교의 교실이었다.

힐 요한 선교사는 1972년에 남긴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 약사’에서 초기 교회들 가운데 백낙중 목사가 시무한 왕십리 교회가 나중에 세워졌다고 하였는데, 이 교회가 언제 세워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백낙중 목사는 힐 요한이 1949년 2월 18일에 입국하여 연지동에서 개교했다가 학생이 많아져 필운동교회로 옮긴 ‘한국 성서 훈련원’ 또는 ‘한국 기독 성서 신학교’(Korean Christian Bible Seminary)의 교수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49년 12월 9일자 사진들에 의하면, 이 신학교의 교수들은 힐 요한, 성낙소, 최상현, 백낙중 네 사람이었고, 이때의 학생들 중에는 최춘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열거된 한국인 교수들이 모두 채이스가 한국성서훈련원에서 교육하고 협조하여 신약성서교회를 개척하게 한 사람들이고, 일제의 탄압을 이기고 살아남은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목회자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최상현 목사는 6.25동란 중에 납북되었고, 백낙중 목사는 피살되었다. 최상현은 미군정 때 연락관을 지낸 인물이었고, 백낙중은 미군이 들어왔을 때 그들의 통역관으로 일한 교육가이자 목회자였다. 그런 그들의 경력이 빨갱이들에게 납북되고 피살된 원인이었는지도 모른다.

7. 성수경 목사

성수경 목사는 성낙소 목사의 아들이다. 채이스는 성수경을 7-8세 무렵부터 보아왔는데, 채이스가 1948년 말경에 성수경을 만났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만 29살이 되어있었고, 결혼해서 두 자녀를 두고 있었다. 성수경은 다년간 중학교 교사로 교편을 잡았으나 당시 서울대학교에서 연장교육을 받고 있었다. 성수경은 아버지처럼 목회자가 될 계획을 갖고 있어서 아버지와 번갈아가며 필운동교회와 위동교회에서 설교하였다.

성낙소 목사는 한약방을 운영하여 생계를 유지하였고, 필운동교회는 80여명이 앉을 수 있는 허름한 건물이었다. 채이스가 1947년에 방문했을 때 필운동교회는 엷은 흙벽으로 빛이 새어 들어왔었으나 1948년 말과 1949년 초에 방문했을 때는 벽이 수리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제대로 된 예배처소가 필요했던 것은 다른 교회들과 다름이 없었다.

위동교회는 시골에 위치하였고 산과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무렵 위동교회는 개척된 지 6개월 정도 되었으며, 예배처소는 교회에 다니지 아니하는 친구가 소유한 집이었다. 채이스 선교사가 1947년에 한국에 왔을 때, 성수경은 날조된 살인 누명을 쓰고 서울 교도소에 수감된 상태였다. 성수경은 채이스에게 수감 중에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묵상할 시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하였다. 성수경은 아버지 성낙소와 교대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위동교회를 섬겼다.

8. 이난기 목사

채이스 선교사가 1948년 10월 17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1949년 2월 중순까지 한국에 체류할 당시에 요츠야선교부 소속이었던 이난기 목사와 그의 용산교회는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에 합류되어 있었다. 이난기는 당시 만 68세였다.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으나 신약성서교회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였다. 탄탄한 교회로서 불교사원으로 일본인이 건축한 건물에서 모였다. 정부로부터 임대하여 사용하였다. 채이스가 처음 방문해서 느낀 용산교회의 특징은 남녀가 구별된 자리에 앉았는데 한국의 다른 교회들과는 달리 여성신도 숫자보다도 남성 신도가 더 많다는 점이었다. 한 번 더 방문했을 때는 남녀의 숫자가 동일하였다.

<도쿄 그리스도인> 1941년 5월호에 이난기 목사가 요츠야선교부의 스틸 선교사에게 보낸 편지가 실렸다. 이 무렵 한국의 교회들은 일제의 간섭으로 외국으로부터 선교지원을 받을 수 없었던 데다가 요츠야선교부도 재정압박이 심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요츠야선교부는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한국의 장로교회들처럼 자립의 길을 택할 수 있기를 바랐다. 또 선교부는 이난기 목사가 그 본보기가 될 수 있다면서 그의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이 무렵 이난기 목사는 회갑을 갓 넘긴 목회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요츠야선교부에 보낸 편지는 매우 고무적인 본보기로 여겨졌던 것 같다. 내용인즉, 요츠야선교부는 이난기에게 190엔을 미리 보냈고, 교회가 700엔을 마련하여 예배당 매입가격으로 2월에 400엔을 그리고 3월 14일에 490엔을 이인범에게 지불함으로써 빚을 모두 다 갚고 예배당을 구입할 수 있었다는 것과 9개월 치 임대료를 한 몫에 보내줘서 고맙다는 인사였다. 또 교회는 자신에게 사례비로 매월 20엔을 주고, 생계비를 벌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하지만, 자신은 교회를 키우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썼다.

9. 윤낙영 목사

윤낙영 목사는 1920년에 침례를 받고 성결교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성낙소의 인도로 교단을 버리고 신약성서교회로 환원하였으며, 9명의 자녀를 두었다.

육낙영 목사의 아현동교회는 좁고 가파른 흙길 언덕에 있었다. 채이스는 1949년 1월 12일 수요일 밤에 설교하기 위하여 이 교회에 가야했다. 감기에 걸린 상태인데다가 눈까지 쌓인 밤이었다. 교회에 오가는 길이 너무 더럽고 미끄러웠다. 그러나 일행이 도착할 무렵에 80여명의 교인들이 2층의 천정이 낮은 두 개의 방을 메우고 있었고 힘차게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천정이 너무 낮아 채이스는 상체를 꼿꼿이 세우지 못한 상태에서 설교를 마쳐야했다.

윤낙영 목사는 건축을 하겠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선교부가 돕지 못한다면 자신들만의 힘으로 꼭 건축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예배 후 아래층에서 다과를 먹는 중에 채이스는 예배가 파했는데도 성도들이 흩어지지 않고 2층에 남아 여전히 힘차게 부르는 찬송소리를 들으면서 집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을 해야 했다. 필운동교회가 윤낙영 목사의 생활비를 후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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