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이야기: 존 T. 채이스 선교사와 한국 성서 훈련원
A Story of Korean Christian Churches: Missionary John T. Chase and His Korean Bible Training Institute

조동호(그리스도의 교회 연구소)

들어가는 말

이 글은 대부분 채이스 선교사가 1937년부터 1949년까지 발행한 격월간 선교지, <한국인 전령>(The Korean Messenger: Korea for Christ)을 기초하여 쓴 글로써 <한국인 전령> 발행분들을 최대한 수집하여 디지털화시켜 CD들을 보내준 스코트 씨에이 박사(Dr. Scott Seay, Christian Theological Seminary, Indianapolis, Indiana)와 이를 주선하고 별도의 자료까지 보내준 이상훈 박사(Dr. Timothy Lee, Brite Divinity School of Texas Christian University, Fort Worth, Texas)의 공로에 힘입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은 필자가 사용한 이들 자료들에 누락된 발행분들이 있기 때문에 이 글만으로는 한국 초기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든 조각 그림들이 제자리를 찾게 되는 것은 아니란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2012년에 작성된 서울기독대학교의 백종구 박사의 연구논문, ‘윌리엄 D. 커닝햄과 한국인 선교-동경 요시야선교회를 중심으로’와 2012년 7월에 제출된 서울기독대학교 대학원의 2011학년도 석사학위논문인 김경중의 ‘존. T. 채이스(John Trawrick Chase)의 한국선교: 한국기독교선교회(Korean Christian Mission)를 중심으로’ 그리고 필자가 연구하여 발표하게 될 ‘윌리엄 D. 커닝햄 선교사와 한국인 사역자들’ 및 ‘해롤드 테일러 선교사와 서울성서신학교’ 등은 이 글과 더불어 1924년부터 시작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초기 과반세기 역사를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펼쳐보이게 될 것이고 보다 분명한 그림, 곧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의 숲과 나무들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1. 은둔의 나라에 신약성서기독교 전파자가 되기까지(1905-36)

존 T. 채이스(John T. Chase)는 1905년 9월 17일 미국 켄터키 주 루이빌(Louisville)에서 출생하였고, 다섯 살에 고아가 되었으며, 채이스가 <도쿄 그리스도인> 1933년 3월호에 실은 글에 따르면, 만 6세부터 LA에 거주하는 이모(Mr. and Mrs. A. D. Shipp)의 집에서 양육되었다. 15세에 침례를 받고 교인이 되었고, 테네시 주 녹스빌(Knoxville)에 소재한 현재의 존슨대학교(Johnson University)에서 수학하던 중 켄터키 주 루이빌에 소재한 맥가비성서학교(McGarvey Bible Institute)로 옮겼으며, 이 학교가 1924년에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 소재한 신시내티성서학교(Cincinnati Bible Institute)로 통합되면서 지금의 신시내티기독대학교(Cincinnati Christian University)와 성서대학원(Bible Seminary)을 1926년에 졸업하였다. 그곳에서 래쿤 존 스미스(Racoon John Smith)의 후손이자 성서대학원생이던 와네타 스미스(Wahneta Smith) 양을 만났다. 스미스는 채이스보다 일 년 먼저 졸업하였다. [김찬영,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초기역사: William D. Cunningham의 생애(1864-1936)를 중심으로> (한성신학교, 1991), 119-124쪽; 김경중, ‘존. T. 채이스(John Trawrick Chase)의 한국선교: 한국기독교선교회(Korean Christian Mission)를 중심으로’(서울기독대학교 대학원, 2011학년도 석사학위논문, 2012년 7월), 8-10쪽]

<한국인 전령>(Christian Messenger) 1937년 8월 4월호에 따르면, 채이스의 부인은 테네시 주 출신으로서 밀리건대학을 나온 후 신시내티로 옮겨 성서대학원을 제1회로 졸업하였다. 채이스는 2016년 졸업 직후 루이지애나 주 배턴루지(Baton Rouge)로 내려가 목회를 시작하였고, 곧이어 7월에 스미스와 결혼하였다.

채이스 부부는 신시내티성서대학원 졸업생들로서는 부부 선교사 1호가 되었다. 1927년에 일본 도쿄로 건너가 1934년 11월까지 W. D. 커닝햄(Cunningham)의 요츠야선교부에서 월급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참고로 요츠야선교부에 소속된 모든 사역자들은 선교부에 고용된 직원들이었다.

커닝햄은 1923년을 시작으로 도쿄와 요코하마에 조선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웠고, 채이스의 감독아래 성낙소 목사가 1930년 5월부터 1931년 9월까지 요코하마 미야다마치에 소재한 조선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맡아 사역한 바가 있어서 일찍부터 조선인들과의 접촉이 있었다. 이뿐 아니라, 커닝햄이 이원균을 1924년부터, 도쿄 조선인 교회(제10교회) 담임자 이인범을 1932년 8월부터 두 달간, 1933년 2월 중순부터 한 달 이상 한국에 보내 예비답사를 하게한 결과와 이때 이인범이 거둔 놀라운 성과에 고무되어 요츠야선교부와 제10교회가 이인범을 한국에 보내 서울에 탄탄한 교회를 세우게 하고, 조선에 세워진 요츠야선교부의 교회들을 돌보는 순회전도자와 조력자가 되도록 결정하기 위해서 요츠야선교부가 1933년 6월 5일의 월례회에서 한국에 상주할 한 선교사 가족을 요청한다는 제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것과 그로 인해서 얻어진 성과에 대해 크게 만족하고 있었으므로 채이스는 이 모든 상황을 꿰고 있었다.

또 채이스는, <도쿄 그리스도인>(Tokyo Christian) 1931년 11월호와 1932년 2월호에 따르면, 1931년 9월 하순에 요츠야선교부의 한국에서의 선교사역을 확인하기 위해서 한국을 방문한 바가 있었다. 이 무렵 요츠야선교부는 한국을 “추수를 기다리는 지상 최고의 황금들판”(the ripest mission field on earth today)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채이스는 한국방문 후 소감을 말하기를, 한국은 반드시 신약성서기독교를 전파할 선교사가 필요한 곳이라고 하였다. 또 채이스는 재일본 조선인 교회들에서 자주 설교하였다. 이런 연유로 채이스는 일본 선교 7년만인 1934년에 커닝햄과 결별하고 본국으로 돌아가 한국 선교를 준비하였으며, 독립선교사로서 1936년 11월 7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가 한국에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로서 1935년 3월에 입국하여 건강문제와 커닝햄의 절대적 신뢰를 받고 파송된 조선인 포교 책임자 이인범에 대한 실망감으로, <도쿄 그리스도인> 1936년 1월에 따르면, 1935년 10월 28일에 귀국한 J. 마이클 쉘리(J. Michael Shelley)는 채이스 가족의 한국행을 적극 지지하였다.

커닝햄은 모든 사역자들을 고용하여 썼고, 그 대부분이 교파출신들이었다. 그러던 커닝햄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1930년대 초에 미국에 불어 닥친 대공황의 여파로 모금 액수가 3분의 2로 줄어든 때문이었다. 급여가 삭감되어 생활비가 빠듯했던 채이스는 커닝햄에게 급여 인상을 요구하였고, 커닝햄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채이스는 이 문제를 미국 교회들에 공론화시켰다. 그러자 커닝햄은, 일본 가고시마에서 사역했던 베테랑 선교사 마크 맥시(Mark Maxey, 동서대학교 설립자 장성만 목사의 멘토)가 쓴 ‘일본 선교 100년(1883-1983)’[Christians in Japan 100 Years (1883-1983)]이란 글을 보면, 채이스를 1934년 10월에 그의 집으로 불렀고, 찾아온 채이스를 문밖에 세워놓고 파면을 선언하였다. 이에 항의하여 커닝햄의 다른 고용 선교사들인 비비안 레몬(Vivian Lemmon), 그레이스(Grace), 빤함(Farnham), 루스 슈노버(Ruth Schoonover)도 사임하였으며, 이들 중 대부분은 일본에서 독립 선교사로 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이뿐 아니라, 10개 처의 일본인 교회들도 선교부와 단절을 선언하였다.

<한국인 전령>(Christian Messenger) 1937년 8월 4월호에 따르면, 채이스는 1934년 말에 본국으로 돌아가 캘리포니아 주 잉글우드하이츠 그리스도의 교회(Inglewood Heights Church of Christ)에서 사역하였다. 이후 잉글우드하이츠 교회는 채이스의 한국 선교사역을 적극 도와주었고, 전쟁으로 인해서 그가 한국에 들어가지 못했을 때 담임 목회자로 청빙하였다. 이뿐 아니라 교회는 채이스가 한국에 단기 입국을 하거나 입국을 목적으로 모금 여행을 할 때마다 3개월 또는 6개월씩 긴 휴가를 주었다. 이런 후원에 힘입어 채이스는 1936년 3월에 교회를 사임하고 기금모금에 돌입하였고, 그해 10월 11일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온 가족이 한국행 배에 승선할 수 있었다. 그의 꿈은 인구 2천만이 사는 은둔의 왕국에 신약성서기독교(New Testament Christianity)가 뿌리 내리게 하는 것이었다. 이 무렵에 채이스는 세 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캐네스(Kenneth)는 10살, 로버트(Robert)는 7살로써 둘 다 일본에서 태어났으며, 네이딘(Nadine)은 4살로써 미국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나중에 로이스(Lois)가 한국에서 태어났다.

2. 입국 후 선교활동(1937-1940)

<한국인 전령> 1937년 2월 제1호에 따르면, 채이스는 1936년 11월 7일에 서울에 도착하였으나 12월말에 가서야 서울 송월동, 곧 게이조 쇼게추조 32-6번지에 위치한 큰 건물(영국 해외성서공회 소유)을 임대할 수 있었다.

존 채이스 가족은 한국에 오기 전에 일본 도쿄에서 1927년 3월부터 1934년 11월까지 7년 8개월간 사역하였다. 때라서 채이스는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한국인들의 상당수가 일본어를 알아듣는데 문제가 없었다. 이런 장점으로 채이스는 1937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선교 사역에 돌입하여 ‘기독교회 선교부’(The Korean Christian Mission), 격월간지 <한국인 전령>(The Korean Messenger: Korea for Christ) 및 ‘한국 성서 훈련원’(The Korean Bible Training Institute)을 설립하였다.

채이스 부부는 한국어를 익히기 위해서 한국어 교사를 채용하였는데, 그에게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르쳐 한국성서훈련원 제1호 학생과 제1호 개척교회 사역자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김요한 목사로서 미국 에모리 대학교에서 B.D.(오늘날의 M.Div)를 마친 감리교 목사였다. 그는 매일 채이스 가족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채이스는 그에게 신약성서기독교를 가르쳤다. 김요한 목사는 선교사의 가르침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자주 “전에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고 선교사에게 말하였다. 결국 그는 사도행전 8장을 공부하던 날 선교사에게 물었다. “선생님, 어째서죠? 저는 결코 침례를 받는 게 아니네요, 그렇죠?” 이 문답이 있고나서 김요한 목사 부부는 공중목욕탕을 세내어 침례를 받았고 채이스 선교사의 첫 번째 학생과 제1교회의 사역자가 되었다. 송월동 선교부 지하실에 설립한 한국성서훈련원에서 일주일에 4일씩 신약성서기독교에 대해서 학습하던 김요한목사는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제가 내 민족에게 이 복음을 전해야겠습니다. 그들은 이 같은 것을 전에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제1호 교회가 1937년 3월 7일에 첫 예배를 드린 신당정 그리스도의 교회였다.

그러고 나서 어느 날 또 다른 감리교회 목사가 자신이 저술한 계시록에 관한 소책자들을 팔려고 채이스를 찾아왔다. 그가 바로 연희전문학교(제1회)와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다년간 신학교에서 강사와 감리교 잡지 <신학세계>의 편집인을 지냈던 최상현 목사였다. 그 방문의 결과로 최상현 목사 역시 한국성서훈련원에서 학습하기 시작하였고, 머지않아 성서적인 침례를 받겠다고 자청하였으며, 1937년 9월 1일에 한강에서 침례를 받았다. <한국인 전령> 1937년 12월 제6호에 따르면, 어느 날 최상현 목사가 채이스에게 말하기를, 자신은 감리교회를 탈퇴하였고, 이제는 오직 그리스도인(Christian only)으로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교인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자 선교사가 말하기를, “아 그러세요. 자랑스럽겠군요?” 그러자 최상현 목사가 대답하기를, “예, 신약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최상현 목사는 채이스 선교사의 제2교회 사역자가 되어 1937년 10월 17일에 첫 예배를 드린 돈암정 그리스도의 교회를 창립하였다.

채이스의 제3교회는 1939년에 편입된 성낙소 목사의 내수정 그리스도의 교회였다. 성낙소 목사는 구세군신학교를 졸업한 사관으로서 1927년 1월 1일 충남 부여군 화수리 2구 290번지 소재 성낙소 목사의 처가 사랑채에서 이미 자생적인 기독지교회를 시작한 바가 있고, 이를 계기로 1930년 5월부터 1931년 9월까지 채이스의 감독을 받으며 일본 요코하마시 미야다마치 조선인 교회를 섬긴바가 있었으나 <한국인 전령> 1949년 3월호에 의하면, 성낙소 목사가 채이스로부터 침례를 받은 것은 1938년이며, 이때로부터 3년간 한국성서훈련원에서 학습하였다.

성낙소는 자서전에서 “1936년 4월경 어느 날에 김문화(金文和)군이 내방언급하기를 기독의 교회 선교사 채이스 씨가 성목사님을 월여전(月余前)부터 두루 찾고 있다”고 하여 채이스를 만난 것으로 적었으나 채이스가 한국에 도착한 것은 11월이었으므로 연도를 잘못 기억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성낙소 목사가 동석기 전도자가 시작한 내수정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임하고 자신의 내수정 교회를 개척한 것은 1937년으로 보이며, 채이스의 제3교회로 편입한 것은 1939년이었다.

체이스의 제4교회는 박판조 목사가 1939년에 개척만 하고, 담임은 김문화 목사가 맡았던 산 돈암정 그리스도의 교회였다. 김문화 목사는 장로교 출신의 목사로서 1937년 말에 촬영한 한국성서훈련원 제1회 2학기 단체 사진에 들어 있을 정도로 일찍부터 채이스 선교사와 관계를 맺었다. <목포 그리스도의 교회 50년사>(289쪽)는 김문화 목사를 김동열 목사의 부친으로 적고 있다.

채이스의 제5교회는 박판조 목사가 1939년에 개척한 청량리 그리스도의 교회였다. 채이스 선교사가 총애하고 아꼈던 젊은 전도자였다. (채이스의 글에는 ‘청량리’라는 말이 없으나 힐 요한 선교사의 증언에 따라 필자가 박판조 목사의 교회를 임으로 청량리교회로 적었음을 밝힌다.)

채이스 선교사 가족이 1940년 6월 1일 안식년과 모금을 위해서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가기까지 3년 7여개 월에 이룬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이들 다섯 명의 사역자들과 다섯 개의 그리스도의 교회들이었다. 나중에 채이스는 일본기독교회 조선교단 가입과 신사참배 및 동방요배를 거부한 것과 그로 인해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는 박해와 폐쇄조치에도 불구하고, 돈암동 그리스도의 교회와 내수동 그리스도의 교회가 끝까지 살아남아 있는 것을 소식으로 듣고, 눈으로 확인한 채이스는 자신이 한국성서훈련원에서 이들에게 신약성서기독교를 철저히 교육한 결실이라고 생각하였다. 이후의 선교는 살아남은 이 두 개의 교회를 기반으로 확장되어나갔다. 이밖에 업적으로는 기독교회선교부와 한국성서훈련원을 설립한 것과 송월동에 소재한 선교부 건물을 매입한 것 그리고 힐 요한 선교사를 발굴한 것 등이었다.

3. 출국 후 선교활동(1940-1950)

채이스는 1939년 초에 영국해외성서공회로부터 송월동 선교부 건물을 매입하기로 계약하고, 모금활동을 시작하여 그해 말에 약정 금액의 절반인 5,000달러를 갚았다. 그리고 나머지 부족금액을 모금하기 위해서 안식년을 갖기로 하고 <한국인 전령> 1940년 12월 4호에 따르면, 1940년 6월 1일에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 결정이 가능했던 것은 힐 요한 선교사 가족이 1939년 6월 21일 오후 3시에 서울에 도착하여 사역을 시작하고 있었고, 선교부의 일을 그들에게 맡겨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해 10월에 미국정부는 한국에 체류하는 모든 자국민들에게 전쟁의 위협이 커지고 있으므로 한국을 떠날 것을 충고하였고 배를 보내 철수를 도왔다. 이에 힐 선교사 가족은, 김경중의 논문, ‘존. T. 채이스(John Trawrick Chase)의 한국선교: 한국기독교선교회(Korean Christian Mission)를 중심으로’ 32쪽에 따르면, 그해 11월 16일에 마리포사(Mariposa) 호를 타고 인천항을 떠나 미국으로 철수하였다. 영국해외성서공회에 갚아야할 나머지 5,000달러를 언제 다 갚았는지는 자료부족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1940년까지는 소유권을 넘겨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이 임박한 위기상황 때문에 미국 정부는 선교사들의 한국 입국을 엄격하게 제한하였고, 가족들의 입국은 불허하였다. 채이스로서는 애써 마련한 선교부 건물과 두고 온 가재도구들 그리고 5명의 목회자들의 생계와 그들의 교회들이 걱정이 되어 미국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채이스는 1941년 2월 24일 가족을 미국에 남겨둔 채 혼자서 서울로 돌아왔다. 교회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조치와 선교부의 재산을 보호할 어떤 조치를 취하기 위해서였다. 채이스가 돌아왔을 때 교회는 하나 더 늘어나 있었다. 채이스는 이들 교회들을 차례대로 방문하여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그러나 채이스가 한국에 머무는 동안 형사들이 붙어 다녔고, 목회자들이 경찰서에 불려가 일제가 스파이로 의심하는 선교사와 나눈 교제 때문에 매를 맞고 선교사와 만나 나눈 모든 내용을 써서 제출해야 했다. 채이스는 상황의 심각성 때문에 체류기간을 겨우 한 달만 채우고 3월 마지막 날 언제 다시 만날지도 모른 채 목회자들과 송별해야 했다. 그러나 힐 요한 선교사의 글, ‘힐 요한 선교사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 약사’(A Short History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Korea)[<쎄메론>(한국성서신학교, 1972년 4월 18일)]에 따르면, 채이스는 이 짧은 체류기간에 선교부 건물을 그 곳에 난로공장을 세운 전항섭에게 임대 놓았고, 임대료를 받아 목회자들의 활동비에 보태도록 하였으며, 두 선교사가 사용하던 가구와 은제식기류, 침대보, 재봉틀 등을 모두 팔아서 1941년 말까지 목회자들이 쓸 수 있는 활동비를 마련하였다. 채이스가 전쟁 전에 이들 목회자들로부터 마지막으로 연락을 받은 것은 1941년 10월이었다. 그리고 12월 7일 아침에 일본이 미국 하와이 주의 오아후 섬 진주만에 있는 미군 기지에 기습 공격을 가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1946년 5월호 <한국인 전령>이 발간되기 전까지 근 4년 반 동안 한국과의 연락은 두절되었다.

존 T. 채이스가 한국에 신약성서기독교를 도모하기 위해서 편집하고 발행한 <한국인 전령>(테네시 주 브리스톨) 1941년 5월호에는 한 달간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소감이 다음과 같이 실렸다<The Korean Messenger(Bristol, Tennessee, May 1941), Published in the Interest of New Testament Christianity in Korea, by J. T. Chase, Editor and Publisher>.

테네시 주 브리스톨, 1941년 4월 22일

사역에 함께 하는 분들께,

우리는 아래의 ‘한국의 상황’이란 글에서 우리가 한국에 가서 파악한 정황들을 간략하게 전달하고자 하였습니다. 그 글에 실린 사진들은 과거 몇 년간 우리가 교육한 신실한 한국인 전도자들에 의해서 사역이 수행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신실하고 역량 있는 설교가들이고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들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교회들의 장래에 대해서 확신합니다. 언젠가는 우리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사역할 수 없는 시기가 오겠지만,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계획들은 가능한 한 가장 빠른 시기에 마땅히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역이 잘 세워져왔고, 이들 전도자들도 잘 훈련되어서 사역이 우리 없이도 발전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성낙소 목사의 <자서전> “제7장 기독의 교회 선교사와 신학교 시작”에 따르면, 김요한(金約輪/與範), 최상현(崔相鉉), 김문화(金文和), 성낙소(成樂紹), 박판조(朴判祚) 등이 채이스가 1937년 4월에 개교한 한국 성서 훈련원에서 4년여 간 교육을 받고 1940년 3월 25일 졸업하였다. 이때 성낙소 목사의 나이가 51세였다.] 당분간 우리는 우리가 가진 역량을 다해서 이곳 미국의 교회들을 지속적으로 찾아다니며 그간 한국에서 이뤄진 사역들과 되어져가고 있는 사역들을 선교 보고하는 일로써 섬기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 방법으로 우리의 형제들에게 중요한 공헌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물론 그 사역은 여전히 지원되어져야 합니다. 아래의 글에서 언급된 사역에 대한 자금지원은 갚아야할 융자로써 반드시 고려되어져야 합니다. 그 후 또 선교사들을 위한 지원이 마련된 후에 여분의 돈은 한국에서의 사용을 위해 비축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지속적인 관심과 후원을 요청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한국에 있는 이들 우리의 형제들의 믿음에 있어서 우리와 함께 기뻐하고 이 박해의 시기에 그들이 믿음에 굳건히 서기를 위해서 우리와 함께 기도하기를 부탁드립니다. 복음은 한국에서 승리하였고, 승리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승리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난관의 시기에 마음이 약하여지지 맙시다. 우리가 한국인들의 비옥한 마음 밭에 좋은 씨를 뿌렸다는 사실을 아시고 남자든 여자든 용기 있는 사람들이 됩시다. 그 어느 때보다 한국의 희망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놓여있습니다. 예수님의 교회가 영원할 것이라는 그분의 약속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굳건합니다.

한국에서의 여러분의 동료
존 T. 채이스

한국의 상황

지난 6월에 우리는 잘 진행되던 사역을 뒤로하고 한국에서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최근 몇 달 동안 보았던 것과 같은 발전들과 긴박한 국제관계들에 대한 징후는 그 무렵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소 충격적인 소식, 곧 미국 정부가 극동에 나가 있는 자국민들에게 귀국할 것을 촉구하였다는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한국과 만주국에 머물던 다른 2백 명이 넘는 선교사들과 함께 힐 선교사 부부도 지난 11월에 돌아왔습니다. 이로써 그곳에서의 사역은 선교사의 감독을 받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불가피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한국에서 날아오는 소식들 중에는 상충되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엄중한 검열과 다른 이유들 때문에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에 대한 정확한 견해를 얻기가 가장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얻은 결론은 한국에 가서 우리가 작년 5월에 떠난 이후 한국에서 어떤 변화들이 일어났는지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이 최상의 일이었습니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우리는 미국정부로부터 가도 좋다는 허가를 받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2월 7일에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배를 탔습니다. 물론 가족이 함께 가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저는 일본에 2월 21일에 도착하여 도쿄와 오사카에서 며칠을 보냈습니다. 일본제국에 머무는 동안 면전에서 매우 정중한 대우를 관리들로부터 받았습니다.

한국 서울에 2월 24일에 도착하자마자, 상황이 크게 바꿨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우리의 설교가들이 나를 서울역으로 마중을 나왔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선교사 친구들은 말하기를 “그들은 그렇게 할 만큼 용감한 사람들이다”고 하였습니다. 한국인 그리스도인들은 나를 보자 기뻐하였고 매우 위험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기꺼이 집회들에 참석토록 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내가 그들과 함께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당혹스런 일이란 것을 나는 이내 알아챘습니다. 한국인이 외국인과 가깝게 지내면 그는 “외국인 스파이”와 연계되어 있다는 혐의를 받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설교가들과 몇 차례 회의를 가졌는데, 그 때마다 각각의 설교가들은 회의에서 나눴던 말과 일들을 각각의 관할 경찰서에 보고해야했습니다. 대개의 그 같은 모임들과는 달리 담당형사나 경찰이 이들 모임들에 단 한 번도 임석하지는 않았지만, 곧이어 나는 여러 증거로 볼 때, 당분간은 내가 그들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이 함께하는 것보다 교회들이 더 잘 꾸려갈 수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제 선교사의 도움 없이 지낸 수개월 후 그 사역이 어떻게 되었는가에 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지난 수년간 가르치고 훈련시킨 설교가들은 남녀무론하고 누구에게나 신실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었고, 침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나는 네 번의 주일들을 서울에서 지켰습니다. 네 주일들 중 두 주일에는 침례탕이 사용되었습니다. 첨부한 사진들은 3월 16일에 찍은 것들로써 각각 교회가 평균 출석률 또는 평균이하의 출석률을 보였지만, 이들 교회들이 살아 있고,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출석률이 조금 떨어진 것은 불신자들이 집회들에 참석하는 것을 종종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고 있고, 그들의 믿음 때문에 고난을 겪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점을 애석하게 여기는 한편, 우리는 선한 뜻이 이 진통의 시기에 온다는 것을 믿습니다. 많은 씨가 옥토에 떨어졌습니다. 이들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연단 받고 있고 엄격하게 연단 받을 것입니다.

신사참배를 해야 했던 한국 교회들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이 회자되었습니다. 나는 가능한 철저하게 조사하였고, 기독교회선교부와 관련된 교회들은 신사참배하려가지 않고 있다고 확신합니다.(The churches connected with The Korean Christian Mission ARE NOT GOING TO THE SHRINE.) 그들은 동방요배하지 않습니다.(They ARE NOT BOWING TO THE EAST.)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찬미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신 것을” 고백하면서 무릎을 굻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기뻐합니다.

교회연합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이전 진술들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들 교회들은 이 질문에 괴롭힘을 받지 않습니다. 실제로 종교들 법안(Religions Bill)은 한국에서 보급되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조사와 관찰에 의하면, 몇 가지 사실들이 두드러져 보입니다. 첫째, 교회들과 설교가들은 일종의 성서적 방식에서 수행해왔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둘째, 그들은 여전히 후원이 필요하고, 확실히 그 같은 혜택이 필요합니다. 셋째, 이 시점에서 선교사가 체류하는 것은, 설사 선교사가 체류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사역을 돕기보다는 오히려 방해가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선교사가 돕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반드시 닥칠 일제의 의심 때문입니다. 넷째, 후원이 필요하고 전적으로 그럴만한 가치가 있지만, 한국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매달 후원금을 보내는 것은, 설사 가능하다할지라도, 가까운 장래에는 그것이 회의적이므로, 매우 어리석은 짓일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그들에게 후원금을 마련해줘야 하는가였습니다. 힐 선교사 부부가 지난 11월에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올 때, 그들은 그들의 가구와 피아노 등을 놓고 나왔고 그것들을 팔아서 사역에 충당하라고 일러두었습니다. 이 지시는 실행에 옮겨졌고, 돈은 사역에 쓰였으며 조심스럽게 쓰였습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 이타적인 선교사를 결코 안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 힐 선교사 부부는 미시건 주 스터지스(Sturgis)에 있고, 처음부터 다시 살림을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기는 그들이 최소한으로라도 필요한 것이 채워졌으면 합니다.

우리의 확신은 우리가 한국에 기금을 남겨서 사역이 수행되어질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가였습니다. 정말 시급한 일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들 설교가들과 교회들, 믿음으로 낳은 우리의 자녀들, 그들 중 많은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인 이들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홀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의 손을 잡아줘야 합니다. 그들은 이제 겨우 기어 다닐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그들이 일어서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을 부양해야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팔았습니다. 침대들, 테이블들, 재봉틀, 침대보들, 은그릇들, 양탄자들, 기타 팔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팔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1941년 말까지 사역을 후원할 충분한 돈을 한국에 남길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는, 만약 우리가 여전히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우리가 바라기는 그들에게 지속해서 기금을 전달할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사역은 우리가 신뢰하는 김요한, 최상현, 박판조 세 사람의 위원회에 일임하였습니다. 김요한은 교회들의 법적 대표로서 저자(본인)를 대신합니다. 박판조는 협력자인 최상현과 더불어 회계를 맡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충성심과 진실성에 있어서 완벽한 확신을 갖습니다. 우리는 미국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이 가구와 집기들을 판 이 절차가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긴급조치들이었음을 지속적으로 지지해 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이 방법밖에 다른 방도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 같이 훌륭한 방법으로 성장해온 사역의 지속을 보장하고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지혜와 우리가 해낼 수 있는 지혜를 짜서 모든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전도자 박판조는 우리가 없는 동안 재산의 책임자로서 기독교회선교부 건물에 들어가 삽니다. 채플실과 침례탕은 교회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우리의 계획들은 가능한 빠른 시기에 마땅히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정확히 언제 우리가 돌아가게 될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사이에 우리는 계속해서 교회들을 방문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오늘날 형제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진정으로 싸우고 있는 신약성서 그리스도인들이 수백 명이나 됩니다. 박해가 그들에게 임박해 있고, 그들 앞에는 우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놓여 있습니다. 형제님들이여, 그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가 미국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3월 23일 주님의 날 저녁에 이들 형제들과 헤어질 때 우리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어서 행복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 남녀 그리스도인들이 홀로 전쟁에 나가 싸우게 두고 떠나야하는 우리의 마음은 무거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과 성령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가 그들 중에 계속 체류하는 것은 그들의 짐만 더욱 무겁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로 아래에 첨부한 몇 장의 사진들을 제시할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그분의 말씀은 그것이 전해진 곳에서 성취되었습니다.

J. T. 채이스
기독교회 선교부
테네시 주 브리스톨

채이스 선교사가 1941년 3월말 이후 한국에서 편지를 받은 것은 1946년 봄이었다. <한국인 전령> 5월호에 따르면, 채이스는 최상현 목사로부터 직접 연락을 받았고, 두 사람으로부터는 간접적으로 연락을 받았다. 최상현 목사는 편지에서 1941년 후반기에 일제의 명령으로 모든 교회들이 폐쇄 당하였다고 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3개의 교회들은 전쟁 중에도 매주일 비밀리에 모여서 말씀선포와 주의 만찬을 빠트리지 않았다고 전하였다.

믿을만한 정보에 따르면, 일본군정이 선교부 재산을 1942년에 적산으로 선포하였고, 몰수하여 1943년에 한국인에게 팔았다. 채이스 선교사는 선교부 재산을 되찾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1947년 1월 중순부터 2월말까지 서울에서 한 달 반가량 체류한 때와 1948년 10월 17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1949년 2월 중순경에 떠날 때까지 미군정과 대사관에 여러 차례 호소하였고 필자가 확보한 <한국인 전령> 가운데 가장 최근의 것인 1949년 7월호가 발간될 때까지도 기대했던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힐 요한 선교사의 글, ‘힐 요한 선교사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 약사’(A Short History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Korea)[<쎄메론>(한국성서신학교, 1972년 4월 18일)]에 따르면, 서대문구 송월동 32번지에 소재했던 선교부 건물을 완전히 되찾게 된 때는 1952년경이었다. 힐 선교사는 이 부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러나 1951년 7월 3일까지 남자 선교사들이 한국에 돌아오기 시작하였고, 필자도 바로 그 날 서울에 돌아왔습니다. 필자는 부산에서 고아원을 시작해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 영부인을 만나 뵈려고 갔었을 때, 그분은 필자더러 서울에서 시작하도록 권유를 하셨습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필자의 오랜 친구, 당시 젊은 청년이었던 성수경을 찾았으며, 서대문 근처 송월동 32번지에 있었던 구 선교부 재산을 되찾기 위해서 동행하였습니다. 전항섭은 탄환이 장전된 연발권총을 들고 우리를 쫓아왔으나 우리가 합법적인 재산 소유자임을 알고 물러갔습니다. 우리가 건물의 절반을 차지했고, 전항섭도 나머지 절반을 차지했습니다. 약 일 년 후에 미국 대사관과 영국 해외성서공회의 도움으로 우리는 마침내 전씨를 몰아냈습니다. 그 대신 전씨는 정부가 일본인 자산에서 지불한 정착금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필자는 끝내 재산을 되찾게 된 것을 무척 기뻐했으며, 전쟁 중 폭격으로 부분적으로 파손된 구 건물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많은 돈을 들여 수리를 마쳤습니다.

채이스는 미군정이 몰수당한 재산을 되찾아 줄 것이라고 확신하였고, 재산을 되찾기 위한 절차를 밟았다. <한국인 전령> 1946년 5월호에 따르면, 채이스 선교사가 해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들어오지 못한 것은 미국정부가 한국의 불안한 정세를 이유로 허락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한 미군 장교가 선교부 건물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갔고, 채이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한국인이 거주하는 동안 건물과 대지는 황폐해졌습니다. 그렇다고 건물이 심각하게 훼손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기준으로 볼 때, 조그만 고치면 그 집은 쓸 만할 집이 될 수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아마도 수도설비를 고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대지를 깨끗이 정리하는 것 또한 필요한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의 구조를 조금 손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인 전령> 1946년 5월호에 따르면, 이 무렵 채이스는 잉글우드하이츠 그리스도의 교회(Inglewood Heights Church of Christ, Inglewood, Calif.)에서 목회사역을 하였고, 퍼시픽성서신학교(Pacific Bible Seminary)에서 매주 하루씩 강의를 하면서 거의 매일 강연을 다녔으며, 모금과 선교사 모집까지 병행하였다. 그 결과 모금 잔액이 1402.07달러에 달했으며, 기독교회선교부 소속 선교사들로서 채이스 가족과 힐 가족 및 클라이드 아담스(Clyde Adams) 가족이 포함되었다.

<한국인 전령> 1946년 10월호에 따르면, 선교부 재산을 되찾기 위한 청구가 법무부 청구국(Claims Bureau of the Department of Justice)에 접수되었다는 편지가 ‘한국 주둔 미국군정 본부, 문민 통치자를 위한, 군무국장국’(Adjutant General's Department, For the Civil Administrator, Headquarters, United States Military Government in Korea)으로부터 왔다.

<한국인 전령> 1947년 5월호에 따르면, 채이스는 1946년 12월 23일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머린 팰컨’(Marine Falcon: 바다의 송골매)을 타고 심한 폭풍과 거친 파도와 뱃멀미에 시달리며(배 안에서 2명이 사망) 예정보다 많이 늦은 1월 7일 일본 요코하마 항에 도착하였다. 배를 탄 첫 주일날 설교를 맡았지만, 배가 요동을 치는 바람에 서 있기가 너무나 힘든 상태였다. 일본에서는 에롤 로호즈(Errol Rohodes) 대위와 할 마틴(Hal Martine) 군목이 마중을 나와 주었다. 할 마틴(Hal Martin) 군목은 일본 큐슈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할 마틴은 수개월 후에 김포 미항공기지로 전근을 하게 되어 1947-48년 사이에 선교사의 부재를 메우게 된다. 채이스는 일본에서 1주일을 머문 후에 1월 중순에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가 히로시마 상공을 날았지만, 두터운 구름층에 가려 볼 수는 없었다. 한국입국 수속은 미군이 장악하고 있어서 예전에 비해 너무나 쉬었지만, 비싼 경비를 지불하고 타고 온 비행기에 난방시설이 없어서 엄청난 추위에 떨면서 서울에 도착하여 군부대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1941년에 다녀간 지 꼭 6년 만에 다시 밟는 한국 땅이었다.

채이스는 서울에서 한 달 반가량 체류한 후 3월 1일에 인천항에서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미육군 수송선인 ‘캡스 제독’(Admiral W. L. Capps)호에 승선하여 3월 5일 배 안에서 ‘선교사의 발자취’(Missionary Footsteps)란 글을 썼다. 이 글에 보면, 채이스는 서울에서 머무는 동안 선교부 재산을 되찾기 위한 모든 가능한 일을 다 하였지만 최종 결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최종결과는 1952년에 가서야 나타났다. 서울에 도착한 첫 주에만 수차례 교회들을 방문하였고, 최상현 목사와 성낙소 목사와 수차례 회합을 갖고 앞으로의 사역을 계획하였다. 보충대(Replacement Depot)로 향하기 위해서 서울을 떠나기 전날 밤 채이스는 내수정 교회의 사택에서 최상현 목사와 성낙소 목사와 만나 기도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성낙소 목사는 사도행전 13장을 읽고 말하기를, “주님께서 최 형제와 나를 불러 한국에서 신약성서기독교에로 길을 인도하라는 분명한 사명을 주셨다고 느낀다”(I feel that the Lord has called Brother Choi and myself to a definite work, that of leading the way to New Testament Christianity in Korea.)고 하였다. 이어 최상현 목사도 말하기를 “나는 디모데후서 4장 1-2절의 말씀에 따라서 더욱 가치 있는 노력에 박차를 가하라는 압박을 항상 받는다”(I am constantly feel spurred on to more worthy endeavor by the words of II Tim. 4:1,2.)고 하였다. 이 두 목회자들은 고난과 시련도 많이 겪었지만, 경제적으로도 몹시 어려웠기 때문에 채이스는 서울에 머무는 동안 매주 힘닿는 대로 필수품을 공급해 주었다. 채이스는 3월 13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으나 한국에서부터 후두염에 걸려 상당기간 고생하였다.

<한국인 전령> 1947년 호에서는 기독교회선교부(the Korean Christian Mission) 소속 직원으로 채이스 선교사 가족와 힐 선교사 가족 그리고 최상현 목사와 성낙소 목사만 열거되었다. 일제의 모진 압제와 탄압이란 불같은 시험을 견디고 끝까지 살아남은 교회는 돈암동(1936년 4월 1일에 돈암리에서 돈암정으로 바꿨다가 1946년 10월 1일부로 돈암동으로 개칭)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낙소 목사의 내수동 그리스도의 교회뿐이었다. 채이스는 1947년 1월 중순경에 주일날 최상현 목사의 돈암동 교회를 방문하여 설교하였다. 당시 돈암동 교회는 일본 적산가옥을 임대하여 살고 있는 한 성도의 가정에서 모이고 있었다. 난방도 되지 않는 집 2층에 있는 두 개의 방에 성인남녀와 학생들까지 40여명이 모였다. 참석한 다수의 성도는 채이스가 1936-41년 사이에 침례를 베푼 성도들이었다. 그날 채이스는 빌립보서 3장 13-14절을 본문으로 설교하였다. 전쟁과 박해와 군 칙령과 심지어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믿음을 지켜낸 이들과 함께 드린 이 예배는 채이스에게 남다른 감회와 깊은 감명을 준 자신의 희생을 값지게 한 보람찬 경험이었다.

그 다음 주에는 성낙소 목사의 내수동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설교하였고 (채이스는 1948년 말에 가서야 비로소 내수동교회를 필운동교회로 고쳐 불렀다), 이어진 주일에는 미군부대에서 설교하였다. 주중에는 선교부 재산을 되찾기 위해서 동분서주하였다. 2월 9일 주일 낮 예배 때 교파교회에 초청을 받아 설교를 하였는데, 최상현 목사가 침례를 베푼 채(D. W. Chai)라는 이름의 감리교 목사가 일본인들이 모여 살던 대방동에 건물을 임대하여 개척한 교회였다. 이 교회에는 각종 교단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채이스는 이 교회가 머지않아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할 것으로 믿었다.

<한국인 전령> 1947년 5월호, ‘예전 사역자들과의 접촉’(Workers Contacted)이란 글에 따르면, 채이스는 1947년 1-2월 중 서울에 머무는 동안 예전의 사역자들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최상현 목사와 성낙소 목사는 사역을 지속해갔기 때문에 쉽게 만날 수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몹시 추운 날 채이스가 서울거리를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김요한 목사였다. 김요한 목사는 그 무렵 사역을 쉬고 있었다. 김요한 목사는 해방 전 세 차례나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났다고 했다. 김문화는 서울을 떠나 시골(김동열 목사의 부친이 맞는다면, 김문화 목사는 신사참배 거부로 장로교 목사들로부터 고발당하여 여러 해 동안 투옥되었다가 풀려나, 지철희 목사의 회고에 의하면, 부강교회에 머물렀으며, 그곳에서 소천하였다)에 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또 채이스는 박판조 목사를 찾아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지만,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가 소련군정이 통치하고 있는 북한에 머물며 한의 업에 종사한다는 것뿐이었다. 이 기간에 채이스는 동석기 전도자도 만났다. 동석기 전도자는 소련군정이 입북하기 이전에는 북한에 머물려 사역을 펼쳤으나 소련군이 입북하기 직전에 남하하였다. 그러나 사모와 자녀들 일부가 북한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동석기 전도자는 말하기를, 소련군이 자신의 전 재산을 몰수하여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에게 나눠줬다고 하였다.

1947년 12월호에 따르면, 1947년 초가을에 군목 할 마틴(Hal Martin)이 한국근무 명을 받고 부인 에버린(Evelyn)과 아들 게리(Gary)를 데리고 김포 항공기지에 근무하게 되었다. 할은 한국 근무기간 동안 최상현 목사를 비롯하여 그리스도의 교회 관련자들을 자주 만났고 그들을 찾아 도움을 주었다. 채이스 선교사는, 1947년 말까지도 미국정부가 한국에 선교사 가족들이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군목 할 마틴을 한국으로 보내 내국인 사역자들과 교회들을 돕게 하신 것으로 생각하였다.

최상현 목사가 1947년 10월에 채이스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충청도에 교회가 하나 세워졌고, 40명이 침례를 받았으며, 인근에 두 개의 교회들이 더 세워졌다고 보고하였다. 채이스는 이 사람이 최 목사로서 장로교인 내과 의사였으나 최상현 목사가 가르쳐 침례를 베풀었던 사람이라고 썼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채이스가 부강교회의 김은석 목사를 잘못 알았던 것 같다.

채이스 선교사는 미국에 머물며 목회를 하는 동안에도 손을 놓고 있을 수가 없어서 구호물자를 수집하여 한국에 보내는 일에 힘썼다. 구호물자들은 필운동 289번지의 성낙소 목사와 필동 2가 124번지의 최상현 목사에게 보내졌다.

<한국인 전령> 1949년 3월호의 내용은 대부분 채이스가 1948년 10월 17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1949년 2월 중순경에 떠날 때까지 한국에서 지낸 보고들로 채워졌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힐 요한 가족이 1949년 2월 18일에 한국에 도착하였다는 것이고, 김문화 목사가 1948년 말 또는 1949년 초에 사망하였다는 소식이다. 채이스는 힐 요한 선교사 가족이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한국에 머물러 있었다. 채이스는 또 <한국인 전령> 1949년 3월호에서 여순반란사건과 손양원 목사의 사랑과 용서의 실천에 대해서도 소개하였다.

채이스는 한국성서훈련원의 운영을 힐에게 맡기고 자신은 미국에 남아 1949년 9월 1일까지 주간지 <그리스도인 표준>(Christian Standard)과 함께 ‘한국에 예배당을’(Chapels for Korea)이란 캠페인을 펼치며 50,000달러 기금조성에 힘쓸 계획이었다. <한국인 전령> 1949년 3월호에 실린 채이스 선교사 부인의 글에 의하면, 채이스는 1949년 3월 1일 이후에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할 것이고, 몇 개월 더 모금운동에 전념한 후에 두 딸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다. 채이스는 1948년 10월에 한국으로 떠날 때 7년간 섬겼던 잉글우드 하이츠그리스도의 교회를 8월말에 사임하고 떠난 것으로 보아 1949년 중에는 가족이 반드시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인 전령> 1949년 7월호에서 힐은 채이스 가족이 9월에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채이스 가족은 예정했던 기간에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해 7월경까지 대략 17,500달러 정도에 모금이 그쳤고, 김경중의 석사논문 41쪽에 따르면, 목표했던 모금액이 달성된 것은 6.25동란이 터진 직후인 1950년 7월이었다. 모금된 돈은 총 5만 62달러 90센트였다("Proposed Goal Reached in 'Chapels for Korea' Campaign," Christian Standard, 8 July, 1950, p. 420). 이 기금은 전후 군대지원프로그램(Armed Services Aid Program)에 3천 달러가 사용되었고, 일본으로 피신한 힐 가족과 폴 잉그램 가족의 거주지를 구입하는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채이스는 자신의 뜻에 반하여 모금이 늦어져 6.25동란 이전에 이 기금이 쓰이지 않게 된 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었다. 만일 채이스가 그 돈을 자신이 계획했던 시기에 교회건축에 사용했더라면, 교회들이 전쟁 중에 피해를 입게 되었을 것이고, 그 돈은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4. 선교부 건물의 매입, 몰수, 환원까지(1939-49)

송월동 선교부 건물은 채이스 선교사 가족이 서울에 도착해서 처음 임대하여 1936년 연말부터 살면서 1937년에 ‘기독교회 선교부’(the Korean Christian Mission)를 설립하였고, 동년에 지하실에서 한국성서훈련원을 개교하였다. 이곳에 침례탕도 설치하였다.

1939년 초에 건물의 소유주였던 영국해외성서공회가 선교차원에서 싼값에 매도할 의향을 비치자 채이스는 이를 크게 반기며 매입을 추진하였다. 이 건물은 대지 225평 위에 세워진 2층 반 건물이었다. 화장실 2개와 방들이 있는 훌륭한 지하실(건물 바닥의 3분의 2크기)과 난방설비가 갖춰진 건물이었다. 채이스는 액면가격 17,000달러짜리 이 건물을 10,000달러에 넘겨받데, 매입자금 마련에 필요한 기간을 고려하여 1939년 말까지 갚기로 하였다.

채이스 선교사는 1939년 한 해 동안 이 건물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였고, 그 결과 1939년 말에는 약정 금액의 절반인 5,000달러를 갚을 수 있었다. <한국인 전령> 1940년 12월 4호에 따르면, 채이스 가족이 안식년을 갖기로 하고 1940년 6월 1일에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간 것은 갚지 못한 나머지 절반의 금액을 모금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채이스 가족이 안식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힐 요한 선교사 가족이 1939년 6월 21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선교사역을 시작하였으므로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떠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해 전운이 감돌면서 미국 정부가 한국에 배를 보내 자국민들을 철수시킴으로써, 김경중의 석사논문 32쪽에 따르면, 힐 선교사 가족도 11월 16일에 인천항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마리포사 호에 승선해야 했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체류할 수 없게 되고, 건물이 비게 되자, 채이스는 단신으로 1941년 2월 24일 서울에 입국하여 팔 수 있는 모든 기물을 팔고 선교부 건물을 난로공장 사장 전항섭에게 임대를 놓아 1941년 말까지 목회자들에게 지원금을 줄 수 있는 돈을 만들어 놓고 3월 마지막 날에 서울을 떠났다. 선교사가 머문 한 달간 목회자들이 박해에 너무나 시달렸기 때문에 채이스로서는 도저히 더 이상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포격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고, 이에 일본은 미국인들의 재산을 적산으로 취급하여 몰수한 후에 매도하였다. 이에 1943년에 선교부 재산도 몰수를 당하였고, 그곳에 세 들어 난로공장을 운영하던 전항섭에게 팔렸다. 이에 채이스는 이 재산을 되찾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힐 요한 선교사 가족이 한국에 돌아가 활동하던 1952년경에 몰수당한지 10여년 만에 환수가 이뤄졌다. 힐 요한 선교사가 가정문제로 1955년 귀국하자 테일러 선교사 가족이 일본에서 하던 선교를 그만두고 그 해 11월에 내한하였고, 테일러 선교사는 이 선교부 건물을 포함해서 1958년에 새로 지은 신학교 건물까지 모두 팔았으며, 북서울 역천동(현재 신사동)에 부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지어 서울성서신학교(현 서울기독대학교) 시대를 열었다.

5. 한국인 성서 훈련원

<한국인 전령> 1937년 4월 제2호에 따르면, 채이스는 선교부 지하실에 ‘한국성서훈련원’(The Korean Bible Training Institute)을 개설하고 14명의 학생으로 일주일에 4일씩 신약성서기독교를 강의하였다. 최초의 학생은 김요한 목사였고, 곧 이어서 최상현 목사, 김문화 목사, 백낙중 목사, 박판조 목사(당시 20대 중반의 청년)가 합류하였으며, 이듬해 1938년에는 성낙소 목사도 합류하여 이곳에서 공부하였다. 위에 거명된 여섯 명 가운데 백낙중 목사를 뺀 다섯 명은 한국성서훈련원을 1940년 3월 25일에 졸업하였다.

이 한국성서훈련원에서 사용한 최초의 교재는 그리스도인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저명한 목사 P. H. 웰시머(Welshimer)가 저술한 20쪽 짜리 전도책자 <신약성서교회에 관한 사실들>(Facts Concerning the New Testament Church)이었다. 미국 에모리 대학교에서 목회학석사(B.D.)를 마친 김요한 목사가 번역하여 교재로 사용하였다. 이후 훈련원에는 미국에서 보내온 영문서적들이 쌓여갔다.

채이스는 이들 목회자들에게 수년씩 재교육을 받게 함으로써 신약성서기독교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믿음을 심어주었다고 자부하였다. 그 열매가 바로 그들이 일본기독교회 조선교단에 가입하지 않고,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교회들이 폐쇄를 당한 후에도 2-3개의 교회들이 비밀리에 주일을 성수하고 주의 만찬을 빠뜨리지 아니하였으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유지한 이유라고 믿었다. 이것은 채이스 자신이 7년간이나 고용 선교사가 되어 일하다가 결별했던 W. D. 커닝햄이 교파배경을 가진 사역자들을 고용해서 쓰고 신학교를 세우지도 자기 일군을 키우지 아니한 결과와 비교가 되었다.

6. 격월간 <한국인 전령>

채이스 선교사는 선교지인 <한국인 전령>(The Korean Messenger: Korea for Christ)을 1937년 2월부터 격월간으로 서울에서 발간하였다. 그리고 1940년 6월에 미국에 들어가서 태평양 전쟁과 6.25동란으로 한국에 나오지 못한 근 10년간은 미국에서 계속해서 발간하였으나 격월간으로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7. 기독교회 선교부

채이스 선교사는 1937년에 서울 서대문구 송월동 32번지, 곧 게이조 쇼게추조 32-6번지에 ‘기독교회 선교부’(The Korean Christian Mission)를 설립하였다.

1930년대 초 미국에 불어 닥친 대공황의 격랑기에 급여문제로 커닝햄과 갈라섰던 채이스는 기독교회 선교부의 정체성을 독립(independent)과 협력(co-operative)의 원칙에 두었고,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의 상호의존성(dependent upon God and His people)에 두었다. 채이스는 또한 ‘그리스도를 위한 한국’(Korea for Christ)에 ‘신약성서기독교’(New Testament Christianity)를 세우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선교부의 사역을 세워나갔다.

채이스는 협력 선교사들을 모집하는 일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그가 존슨 대학교(당시 존슨성서대학)를 방문하여 졸업을 수개월 앞둔 우등생 힐 요한을 한국의 선교사로 모집한 것은 그가 남긴 여러 업적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것이었다. 그는 또 클라이드와 테사 아담스(Clyde and Tessa Adams) 부부를 선교사로 모집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한국에 들어 올 준비를 하면서 미국정부의 허락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던 중에 클라이드 아담스가 1946년 5월에 갑작스럽게 사망함으로써 아담스 가족은 결국 한국에 선교사로 가려던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끝내 한국에 돌아온 가족은 힐 요한 선교사 가족으로서 1949년 2월 18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김경중의 석사논문 39쪽에 따르면, 아담스가 한국에 나오기 위해서 모금한 금액은 3천 1백 2달러 97센트로써 전액 기독교회선교부 재건을 위해서 쓰였다고 한다.

채이스는 힐과의 관계를 바울과 바나바처럼 상하 또는 주종 관계가 아닌 철저히 독립적인 관계로 설정하였다. 1930년대 독립 교회들(그리스도인들의 교회들/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연합그리스도인선교회(United Christian Missionary Society)가 실시한 선교방법에 반대하여 취했던 직접후원선교방식을 택하였다. 따라서 힐 요한 선교사 가족은 채이스 선교사 가족과는 개별적인 선교후원을 받음으로써 급여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선교할 수가 있었다.

채이스는 한국을 다녀간 1947년경부터 한국에 예배당들을 건축하기 위해 ‘한국에 예배당을!’(Chapels for Korea)이라는 모금운동을 주간지 <그리스도인 표준>(Christian Standard)과 공동으로 펼쳤고, 1949년 9월 1일까지 이 50,000달러가 채워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김경중의 석사논문 41쪽에 따르면, 목표했던 모금액이 달성된 것은 6.25동란이 터진 직후인 1950년 7월이었다. 모금된 돈은 총 5만 62달러 90센트였다. 이 기금은 전후 군대지원프로그램에 3천 달러가 사용되었고, 일본으로 피신한 힐 가족과 폴 잉그램 가족의 거주지를 구입하는데도 사용되었다. 물론 이 돈은 주로 한국의 교회개척과 예배당 수리 및 건축비용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채이스는 이 돈을 다 사용하지 않고 남겨서 18,424달러 88센트를 테일러 선교사에게 인계하였다. 테일러 선교사의 선교지 <한국에 그리스도를!>(For Christ in Korea) 1957년 6월호에 따르면, 추가로 모금된 10,432달러 95센트를 더해서 총 28,857달러 83센트로 39개 교회에 도움을 주었고, 여전히 지원받지 못한 교회들을 위해서 부족분 5,000불을 채울 수 있도록 더 후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8. 요츠야 선교부 사역자들과의 관계

채이스는 커닝햄이 세운 요츠야선교부가 1924년 이후 펼친 한국에서의 사역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본인이 요츠야선교부에서 1927년부터 1934년까지 7년간이나 사역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채이스는 전부터 잘 알고 지냈던 한국에서 일하는 이인범이나 이원균과 같은 사역자들과 교회들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인정하지도 않았다. 이 무렵 한국에는 요츠야선교부가 파송한 이원균과 이인범 등이 세운 교회가 제물포 3개, 서울 3개, 평북 구성군에 5개, 마산 1개, 총 12개나 있었다. 이원균은 서울에서 먼 평북 구성군에 상주하였으므로 크게 관심을 끌 일이 없었겠으나 이인범은 조선지역 포교책임자일 뿐 아니라, 제물포와 서울 및 마산에 교회들을 세운 인물이었으므로 전혀 관심이 없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1932년 초에 성낙소 목사는 조선총독부 종교과에 포교계를 제출하고 ‘사곡선교회 기독의 교회’를 등록하였으나 이를 이인범 목사가 나중에 ‘조선선교회 기독의 교회’로 바꿔 등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종교과에서 이를 승인한 날짜는 1932년 6월 11일이며, 이는 성낙소 목사의 공으로 인정된다. 그리고 1937년 1월까지 요츠야 선교부에 보고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의 숫자는 앞서 열거한 대로 12개였으나 미국 신시내티에서 발행되는 월간지 <환원 전령>(Restoration Herald)의 편집인 리온 마이어즈(Leon Myers)에게 조선총독부가 확인해 준 숫자는 3개뿐이어서 요츠야선교부는 이를 거듭 확인해 보고하도록 촉구한바가 있다. 그리고 2개월 후 토마스 힛치가 요츠야선교부 한국 선교사로 부임한 1938년 3월에는 조선총독부가 11개의 교회를 확인해 주었다. 이런 분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전령> 1937년 10월 제 5호에서 채이스는 1936년 10월까지 “한국에는 선교사 가족도 없고, 설교 사역자 양성소도 없고, 내국인의 교회도 없고, 내국인 전도자도 없고, 선교소식지도 없었다”(No Missionary Family in Korea; No Preacher Training School; No Native Congregation; No Native Evangelist; No Missionary Paper)고 적었다. 그러나 1937년 10월 현재는 선교사 한 가족이 서울에 상주하고 있고, 한국성서훈련원(The Korean Bible Training Institute)이 제2학기 과정을 진행 중이며, 신당정 그리스도의 교회와 두 명의 전도자들과 다수가 훈련을 받고 있고, <한국인 전령>(The Korean Messenger)이 2,250부씩 격월간으로 발행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이 보도는 미국 그리스도인들이 요츠야선교부의 한국사역에 대해서 열광하던 현실에서 채이스 선교사가 미국에 거짓보고를 하고자 한 것이 아니고, 이인범이 포교책임자로 있는 12개나 되는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들을 신약성서기독교로 인정하지 않으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커닝햄은 이인범과 이원균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였다. 커닝햄은 그들을 한국의 캠벨과 스톤 또는 가나안땅을 정복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에 비교할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을 채이스 본인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크 맥시가 ‘일본 선교 100년(1883-1983)’에서 지적한 것처럼, 채이스를 파면한 1934년까지가 커닝햄 선교의 정점이었고, 커닝햄을 후원했고 또 그에게 영향을 받아, 수년 전 채이스가 선교사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대로, 한국 최초의 선교사가 되어 1935년에 한국에 왔던 J. 마이클 쉘리(J. Michael Shelley)와 1939년에 호주로 돌아간 토마스 힛치(Thomas G. Hitch) 등이 모두 채이스의 편에 섰다. 그들은 모두 이인범을 부정한 인물로 보고, 이를 요츠야선교부에 알렸으나 선교부는 이들 선교사들보다는 이인범을 더 신뢰하였다.

이런 여러 사실들 때문에 채이스는 이인범과 그가 세운 교회들을 신약성서기독교로 간주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인범 또한 커닝햄을 궁지로 몬 채이스 선교사를 멀리 했을 것이다. 그러나 1948년 말에 채이스는 요츠야선교부에서 지원을 받았던 이난기 목사와 그가 시무하는 용산교회가 기독교회선교부에 소속된 것을 기뻐하였고, 그를 기꺼이 도왔다.

채이스와 다른 선교사들과의 관계는 매우 좋았다. 채이스는 미국의 그리스도의 교회들(Churches of Christ, 아카펠라)로부터 후원을 받고 있는 동석기 전도자와 강명석 전도자 그리고 일본 요츠야선교부에 소속된 토마스 힛치 선교사와 이인범 목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할 때 그 누구도 비판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채이스는 쉘리나 힛치로부터 부정한 인물로 낙인이 찍힌 이인범하고만 교제하지 않았을 뿐, 다른 이들과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강명석 전도자를 신당정 그리스도의 교회 1주년 기념 예배에 초청하여 설교를 들었고 교제의 끈을 놓지 않았다. 성낙소 목사도 강명석 전도자와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 일본 커닝햄의 요츠야 선교부가 파송한 토마스 힛치(Thomas G. Hitch)와도 사이가 좋았고, 힛치가 한국에 올 때마다 교제의 시간을 가졌다. 힛치의 빈자리를 채운 오웬 스틸Owen Still)과는 존슨대학교 학부와 신시내티성서대학원의 동문이었으므로 더더욱 관계가 좋았다. 이뿐 아니라, 채이스는 커닝햄의 요츠야선교부에서 1934년에 함께 사임한 후 일본에 남아 독립 선교사로 사역하는 빤함(Farnham)과 루스 슈노버(Ruth Schoonover) 그리고 오사카성서대학에서 사역하는 해롤드 콜(Harold Cole) 가족 등과도 긴밀하게 교제하였다.

9. 토마스 G. 힛치와 오엔 스틸 선교사 가족들

토마스 G. 힛치(Thomas G. Hitch)와 딸 애니가 일본에 요츠야선교부에서 일하기 위해서 일본에 도착한 것은 <도쿄 그리스도인> 1936년 4월호에 따르면, 1936년 3월 3일이었다. 힛치는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3월 말경부터 커닝햄과 함께 한국의 교회들을 순방하였다. 부인 E. 힛치와 딸 엘리스(Alice)가 일본에 합류한 것은 일 년 늦은 1937년 3월 2일이었다. 토마스와 부인 E. 그리고 딸 애니(Annie)가 한국에 상주 선교사로 파송된 것은 <도쿄 그리스도인> 1938년 5월호에 따르면, 1938년 2월과 3월이었다. 힛치는 2월 18일에 거주할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 한국으로 먼저 갔고, 부인과 두 딸은 한국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서 3월 24일 고베로 가는 기차를 탔다. <도쿄 그리스도인> 1938년 3월호 기사에 실린 힛치의 소개서를 보면, 그들은 한국에서 훈련원을 열어 일주일에 4일간 하루에 세 시간씩 가르치게 될 것이고, 한국정부가 확인해 준 11개 교회와 다른 작은 모임들을 순방하게 될 것이며, 영어성경공부반도 개설할 것이라고 하였다.

힛치는 영국인이며, 부인 E.는 독일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캐나다 침례교회의 선교사들로서 티베트 국경지대에서 다년간 사역하였다. 그들은 또한 일본에서 7년간 사역을 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도쿄 그리스도인> 1937년 1월호는 부인 E. 힛치가 일본과 중국에서 19년간 선교사 경험을 갖고 있다고 하였고, 호주 멜버른 에센돈(Essendon)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파송 받아 온다고 소개하였다.

1934년에 채이스를 비롯한 다수의 선교사들이 요츠야선교부를 떠났기 때문에 W. D. 커닝햄으로서는 협력자가 절실히 필요하였다. 이러한 때에 커닝햄은 다년간 알고 지낸 힛치 가족을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서 일본으로 불러들었다. 힛치 가족이 일본에 도착하여 요츠야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사역을 시작한 것은, <도쿄 그리스도인> 1937년 1월호에 따르면, 1937년 3월 2일부터였다. 커닝햄 가족은 힛치가 부임하자마자 선교부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한 달이 조금 지난 4월 24일에 안식년을 보내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고, 커닝햄은 그해 6월 24일 암으로 사망하였으므로 힛치 가족의 책무는 더욱 무거워졌다.

힛치는 일본에 부임하여 1937년까지 선교부 소식지 <도쿄 그리스도인>의 편집과 회계를 임시로 맡아보면서 한국 선교지를 감독하기 위하여 자주 순방하던 중 1938년 3월부터 한국에 상주하였다. <도쿄 그리스도인> 1938년 3월호는 그들이 한국으로 가게 된 것은 요츠야선교부에 속한 구성원들이 만장일치로 결정한 사안이라고 하였다.

힛치 가족은 힐 요한 선교사 가족이 한국에 도착한 1939년 7월말부터 8월초까지 여름을 화진포에서 채이스 가족, 힐 가족, 일본에 건너온 다수의 선교사들과 함께 보낸 후에 요츠야 선교부를 사임하고 호주로 떠났다.

토마스 G. 힛치(Thomas G. Hitch)에 이어서 요츠야선교부의 한국선교를 담당했던 오웬 스틸Owen Still)은 채이스와는 같은 대학과 대학원을 나온 동문이었다. 존슨대학교(전 존슨성서대학)는 각기 다른 시기에 다녔지만, 대학원(Cincinnati Bible Seminary)은 같은 시기에 다녔다. 요츠야선교부의 한국 선교지를 순방하는 동안 자주 채이스의 집에 머물렀다.

오웬 스틸은 부인의 병 치료를 위해서 안식년까지 가졌으나 의사가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만류함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1949년 5월경에 은퇴하였다. <도쿄 그리스도인>(Tokyo Christian) 1950년 5-6월호에 따르면, 스틸 가족은 1950년 5월 3일 하와이로 사역지를 옮겼다.

 

 

 

10. 은퇴 후 생활

채이스가 한국선교에서 완전히 손을 뗀 시점은 1956년 1월 3일이었다. 채이스는 1947년경에 시작한 ‘한국에 예배당을’(Chapels for Korea) 짓기 위한 캠페인으로 조성된 기금의 잔액 전부를, 김경중의 석사논문 47-48쪽에 따르면, 이날 오클라호마 주 마이애미의 제일 그리스도의 교회에 보냈다("Final Report on 'Chapels Fund'," Christian Standard, 28 January, 1956, p. 60). 그리고 이 기금은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해롤드 테일러에 의해서 한국교회들의 건축과 수리와 보수를 위해서 사용되었다.

채이스는 목회에도 성공적이어서 1951년부터 1968년까지 17년간 시무한 캘리포니아 주 도우니의 제일 그리스도의 교회를 대형교회로 성장시켰다. 김찬영 목사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초기역사> 119-124쪽에 의하면, 채이스는 은퇴 후 필리핀 체부(Cebu) 신학교에서 강의를 했고, 전미선교대회(National Missionary Convention)의 창립멤버와 대회장직을 역임하였다. 그는 또 교회연금제도(Church Development Fund)의 창립이사였고, 산호세 성서 대학(현 William Jessup University)의 이사였으며, 북미주 그리스도인 대회(NACC)의 유지회원이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82년 NACC로부터 ‘올해의 목회자’(Churchman of the Year) 상과 1984년 신시내티기독대학교 및 성서대학원에서 ‘저명한 동문’ 상(Distinguished Alumni)을 수상하였으며, 도우니(Downey)와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의 시의원직에도 당선되었다.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자, 신약성서기독교의 참 선교사였던 채이스는 1987년 12월 23일 캘리포니아 주 로디(Lodi)에서 82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소천 하였다.

11. 채이스 부부에 대한 추모

1) 존 T. 채이스(John Trawrick Chase)

  • 출생: 1905년 9월 17일. 미국 켄터키 주 루이빌
  • 사망: 1987년 12월 23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디(Lodi)
  • 부친: 로완 F. 채이스(Rowan F. Chase)
  • 모친: 헬렌 로버츠 채이스(Helen Roberts Chase)
  • 아내: 와네타 아이린 스미스 채이스(Wahneta Irene Smith Chase, 1901-2002)
  • 장지: 포플러 릿지 묘지공원(Poplar Ridge Cemetery), 미국 테네시 주 설리번 카운티 파이니 플래츠(Piney Flats Sullivan County Tennessee, USA)

2) 와네타 아이린 스미스 채이스(Wahneta Irene Smith Chase)

  • 출생: 1901년 10월 28일(미국 테네시 주 설리반 카운티 파이니 플래츠)
  • 사망: 2002년 7월 18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 카운티 레몬 그로브(Lemon Grove San Diego county California, USA)
  • 부친: 존 라이트 스미스(John Wright "Rite" Smith, 1842-1916)
  • 모친: 미니 조지 요스트 스미스(Minnie George Yost Smith, 1860-1937)
  • 남편: 존 T. 채이스(John Trawrick Chase, 1905-1987)
  • 장지: 포플러 릿지 묘지공원(Poplar Ridge Cemetery), 미국 테네시 주 설리번 카운티 파이니 플래츠(Piney Flats Sullivan County Tennessee, USA)

3) 2002년 7월 23일(화)자 Lodi News-Sentinel 8쪽에 실린 와네타 아이린 스미스-채이스에 관한 부고기사

  • 와네타 스미스-채이스가 만 100세로 2002년 7월 18일 잠자던 중에 조용히 사망하였다. 그녀는 1901년 10월 28일 테네시 주 포플러 릿지의 존과 미니 스미스의 14자녀들 가운데 12번째로 태어났다. 1899년에 태어난 그녀의 자매 릴리 버논 스미스는 아직 건강하게 살아 있으며 테네시 주 존슨시티에 거주하고 있다.
  • 스미스-채이스는 신시내티성서대학원에서 신학석사학위를 받고 졸업하였으며, 졸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존 T. 채이스와 결혼하였다. 그들은 캘리포니아 주에서 목회자로 일본과 한국 및 필리핀에서 선교사로 일생을 함께 보냈다. 은퇴 후 그들은 1987년에 남편 존이 사망한 로디로 이주하였다.
  • 와네타 채이스의 4명의 자녀들은 모두 생존해 있으며, 그들에게서 9명의 손자손녀, 12명의 증손자녀, 3명의 고손자녀를 두었다. 그녀는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으로서 동시대를 살면서 세상을 보다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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