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준(金相濬) 목사

<도쿄 그리스도인> 1933년 12월호에 요츠야선교부 제7교회(조선인)의 목회자요, ‘조선인성서훈련원’(Korean Bible Training School)의 원장이었던 김상준 목사가 한국에서 10월 12일 사망하였다는 부고가 실렸다.

김상준 목사의 사망 소식에 가장 마음 아파하였던 분들 가운데 성낙소 목사가 포함된다. 성낙소 목사는 자신이 일본 횡빈(橫浜) 조선인 기독교회(그리스도의 교회)의 교역자로 섬길 당시 동경 심천(深川) 조선인 기독교회의 교역자였던 이인범 목사와 함께 동경 삼하도(三河島) 조선인 기독교회의 새 교역자로 김상준 목사를 천거한 사람이었다. 김상준는 한국 성결교회의 제1대 목사였을 뿐 아니라, 교단창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나 일찍부터 비교파운동에 뜻을 품고 교단을 떠나 독립적으로 또는 초교파적으로 부흥회를 이끈 인물이었으므로 구세군 사관직을 버리고 신약교회기독교 운동에 뛰어든 성낙소가 존경해 마지않는 목사였고, <도쿄 그리스도인> 1931년 9월호에 따르면, 이인범이 그로부터 성경을 배운 적이 있었다.

 

성낙소는 <자서전>에서 김상준 목사가 삼하도 교회에 부임하자마자 김상준을 강사로 동경과 횡빈(橫浜)의 조선인 교회들이 삼하도 기독교회에서 2주간동안 연합부흥집회를 개최하였다고 하였다. <도쿄 그리스도인>에 따르면, 김상준은 1931년 7월 1일에 부임하였고, 7월 5일에 환영예배를 드렸으며, 7월 20-30일 기간에 재일조선기독교회관동연합하기수양회를 개최하였다. 집회는 새벽기도회(4:30), 성경공부(오전 9-12시, 오후 2-4시) 및 저녁집회(8-9시)로 진행되었다. 출석인원은 평균 40여명이었고 9명의 결신자가 있었다. <도쿄 그리스도인> 1931년 10월호에 따르면, 이 집회는 9일간 지속되었으며, 동일한 집회가 성낙소 목사가 시무하는 횡빈(요코하마)기독교회에서도 연이어 열렸다.

김상준 목사는 1931년에 자신이 부임하여 시무하는 동경 삼하도교회에서 9월 21일에 ‘조선인성서훈련원’(Korean Bible Training School)을 개교하여 1년 6개월간 원장으로 섬겼다. <도쿄 그리스도인> 1933년 5월호 기사에서 이(Lee) C. H 목사가 요츠야선교부의 제7교회인 동경 조선인삼하도기독교회의 교역자로 부임하여 4월 2일 오후에 환영회가 있었던 것으로 볼 때, 김상준 목사는 3월 중 즉 부임한지 1년 9개월여 만에 사임하고 귀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낙소는 1931년 9월 중순경에 조선기독교회(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포교책임자로 임명받고 귀국할 때에 경성부근에 신학교를 세우기로 김상준 목사님과 내약했었다고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성낙소 자신은 먼저 귀국하여 경성에서부터 각 지방까지 교회를 설립할 테니, 김 목사님은 추후로 귀국하시어 신의주로부터 부산까지 전 조선 각 교회 중 200명 이상 집회하는 곳에 교파를 막론하고 부흥사경회를 하도록 기독신보와 활천잡지(活泉雜誌)에 광고하여 김상준 목사를 강사로 초빙하자고한 후 전 조선을 통과하여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 매 1인당 1원씩을 헌금하도록 하여 경성부근에 야지(野地) 만평 가량을 매수(매 평당 가격 3전)하여 우리 손으로 신학교를 건축하고(왕하 6:14), 김 목사님이 교장이 되시고, 동지자들을 청하여 교수하고, 기타는 신학교 선생을 강사로 시간 교수하도록 하며, 양계, 양돈, 양봉, 양어, 야채농, 과수원, 화초재배, 우유목장 등을 신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실습하여 기숙, 식사하도록 하여 졸업 후에는 각지 농촌교회를 교역하되 농촌개량운동에 정말국(丁抹國)과 같이,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 토지를 사랑하고, 셋째 가정을 사랑하는 기독의 교회가 되어 영적 신앙과 육적 생활을 보존하여 삼천리강산을 복음화 합시다!”한즉, 김상준 목사님은 희색이 만면하면서 감사한 뜻과 감격한 어조로 “나의 평생소원과 포부의 복안을 발생하시니, 나는 그대로 순종하겠습니다. 성 목사님이 선차 귀국하시어 착수하시면 오역종차 거의(吾亦從此 去矣)하리라” 하시며 우수로 성의 우수를 견고한 약속의 표시로 유력(有力)하게 착수(着手)하시고 작별하였다.

또 성낙소 목사는 김상준 목사가 소천할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성은 김상준 목사를 신앙의 동지로 신뢰하고 이상의 약속을 성취키 위하여 분투하던 중에 ... 뜻밖에 하루는 외출하였다가 해가 저물어 귀가 한 즉, 어떤 신학생이 명함을 주고 갔다 하여 실인이 명함을 주기로 취견(取見)하니, 동지 김상준 목사의 명함이라. 내용은 명일 9시에 성서학원으로 오시어 나의 신병이 위중하니 성형이 진찰 처방하여 귀가하는 대로 치료해 주시오 라 하였다.

    다음날 1시간 전 8시에 달려갔다. 명함을 전달한 학생 최 집사라는 형제를 찾아 김상준 목사님의 숙소를 물으니, 오계 동제(五階 東齊) 7호실이라 하여 올라가 본 즉 빈방이었다. 누구에게 묻고자 하나 그 시간은 성결교회 연회중이라 대 강당에 모여 있어 한 사람도 볼 수가 없었다. 아래층에 내려와서 누구에게 물은즉 “네. 김 목사님의 병증세가 야간에 악화 위급하시어 7시경에 경성역으로 갔는데, 8시 급행차로 귀가하신다고 하셨는데, 조금 전에 발차 기적성이 들렸으니, 이제는 멀리 가셨을 겁니다.”라고 한다. 성은 낙심천만으로 귀가하였다.

    김상준 목사님은 가자마자 본댁에서 별세하였다. 그 후 소식을 듣건대 동경에서 성과 결탁한 약속을 실현할 용기를 가지고 귀국하여 기독신보와 활천잡지에 부흥강사 초빙광고를 내고, 안동현(安東縣) 조선인 교회에서부터 신의주 선천, 정주까지 쉬지 않고 계속 부흥회를 하신 바, 노쇠한 몸으로서 하루도 쉬지 않고 노력하모로서 신체는 부지중에 극도로 쇠약하여 초기에는 소변색이 적황이더니, 얼마 후에는 소변 출혈이 되어 기력탈진으로 즉시 상경하여 성목사의 의학의 특수기술을 알고 진찰하려는 것과 적회(積懷)를 설화(說話) 하고자 한 것. 병세가 급전악화(急轉惡化)함으로 자기 생명이 시간문제임을 자각하고 이날 급행차로 귀가치 않으면 객사할 것 같아서 귀가한 것이다.

    얼마 후에 경성 무교동 성결교회당에서 고 김상준 목사 추도식을 갖는다는 소식을 듣고 정각에 참석하였다. 그 교회는 고 김상준 목사님이 창설한 것이요, 성결교회를 조선에 시작한 원로자 중 1인인 고로 이 단체에서 이 교회당에서 추도식을 하였다. 성군은 말석에서 무언의 추도와 추억을 하면서 부지중에 뜨거운 눈물이 쏟아짐을 금치 못하였다.

    동경 약속은 중대하지만, 그렇게 무리하게 노력한 것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기독의 교회 신학교 설립할 동지자를 상실한 것이 더욱 애달파서 낙망 중에 빠졌다. 얼마간은 무위적(無爲的) 상태로 지내다가 묵상과 기도 중에 하나님이 상사(喪事)라면 낙망할는지 모르거니와 김목사가 상사한 것으로 낙망하는 것은 생존하신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자각이 생겨 하나님이 동역하심을 견고히 신앙하고 용기를 회복하고 용전분투하였다.

최규명 목사(성결교회 역사자료연구소장)의 ‘김상준(金相濬) 목사의 생애와 신학’을 비롯한 <월간 조선>, <크리스천투데이>, <뉴스앤조이>, <크리스천데일리뉴스> 등에 실린 인터넷 기사들을 종합해 볼 때, 김상준은 1881년 11월 11일, 평안남도 용강군 오신면 구룡리에서 부친 의성 김씨와 모친 진주 강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1897년에 그는 연안 이씨의 이성녀와 결혼하여 1남 6녀를 두었다.

김상준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만20세 때인 1901년 평양에서였다. 부모의 심부름을 갔다가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였던 것이다. 부친은 외아들 김상준을 멍석말이할 정도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완강히 반대하였으나 오히려 김상준은 상투를 자르고 제사를 폐하였다.

190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1903년 봄에 동경성서학원에 입학하였다. 1905년 7월에 정빈, 1906년에 이장하, 김혁준, 강태온 등도 입학하였다. 그리고 그해 11월에 일본에서 동양선교회가 조직되었다.

1907년 5월 2일에 귀국한 김상준은 정빈과 함께 5월 30일부터 서울 종로 염곡에 정빈을 주임으로 한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The Oriental Missionary Society) 복음전도관’(현 중앙성결교회)을 세워 북을 들고 거리로 나가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기만 하오. 예수를 믿기만 하오”라고 외치면서 노방전도에 힘썼다.

1911년 3월에는 복음전도관 내에 경성성서학원이 개교되었고, 이듬해 3월에는 아현동으로 옮겼다. 김상준과 정빈은 복음전도관 활동은 물론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14년 4월 22일 김상준은 이장하, 강태온, 이명직, 이명헌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고 조직교회에로의 첫발을 내딛는데 동참하였으나 복음전도관이 교파로 발전하는 것에 반대한 정빈은 안수를 받지 않았다.

정빈은 황해도 해주 출생으로써 10세부터 고향에서 예수님을 믿었으며, 1908년 8월에 동양선교회 카우만(C. E. Cowman)의 내한 때 주례를 부탁하여 결혼식을 올렸다. 정빈은, 추정컨대 동양선교회의 교파화문제로, 1914년 9월 30일 김상준과 의견충돌을 일으켰고, 킬버른(E. A. Kilbourne)의 중재와 김상준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칠판에 12개 조문을 기록한 채 성결교회를 떠났다가 1917년 복귀해 안성복음전도관을 창립하였다. 1919년에는 인천복음전도관을 창립하였으나 복음전도관이 1921년 9월에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성결교회’라는 교파교회로 변질되자 다시 성결교회를 사직하고 북간도로 넘어가 자유 전도자가 되었다.

김상준은 목사안수를 받은 이후 1916년까지 경성성서학원의 교수와 원감직을 수행하면서 1914년 중앙(염곡)복음전도관 주임, 1915년 아현복음전도관 주임, 1916년 개성복음전도관 주임으로 있다가 1917년에 사직하고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떠나 비교파 또는 초교파적인 부흥목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에는 독립운동으로 인해서 평양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는 이장하도 목사직을 사임하고 해외로 유랑하였다.

호주성산성결교회 임운규 목사는 이들이 성결교회를 떠난 이유를 ‘동양선교회’의 비교파적 정신을 버리고 “기존 교단들과 같이 목사라는 성직제도와 교단조직을 가진 기존 교단, 즉 제도화된 전통교회의 성격을 지니게” 된 때문이라고 추정하였다. 김상준 목사가 일본의 ‘비교파’(non-denominational), ‘오직 그리스도인’(Christians only), ‘신약성서기독교’(New Testament Christianity)를 주창하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초빙을 받아드려 동경 삼하도 조선인기독교회를 1931년 7월 1일부터 1933년 3월까지 섬긴 것은 동일한 정신을 공유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상준 목사는 성결교회를 떠난 후 <묵시록강의>(1918), <사중교리>(1921) 및 <다니엘서 강의>(1932)를 저술하였다. 성결교회의 대표적 교리인 ‘4중 복음’(중생, 성결, 신유, 재림)은 김상준 목사가 쓴 <사중교리>에 힘입은 바가 크다.

김상준 목사는 당뇨병과 과로로 인해서 향년 52세로 1933년 10월 12일에 소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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